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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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은 과거 유럽 동북부와 중부(중앙유럽)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국호[8] 이기도 하다. 독일 역사상 두 번째 통일 국가[9] 인 독일 제국의 건국을 주도한 중심 지역·국가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오늘날 '''독일'''이라는 국가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졌기 때문에 흔히 프로이센을 '''(북부)독일의 전신'''이라고 평가한다.
프로이센을 지배했던 왕가에 대한 항목은 호엔촐레른 왕조로 따로 기재되어 있다.
라틴어 명칭인 보루시아, 영어 명칭인 프러시아 등으로 검색해도 모두 이 항목으로 들어올 수 있다. 한국에선 과거부터 프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원어인 독일어를 기준으로 프로이센이라 고쳐 부르는 추세. 프러시아는 러시아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실제로 관련은 없다.[10][11][12]
2. 역사
2.1. 독일 기사단국
프로이센 원주민인 프로이센인(Prussians)(프로이센족)은[13] 언어적으로 특수한 발트어족의 한 갈래이며[14] 13세기에도 기독교가 아닌 그들 고유의 신앙 로무바를 믿고 있었다. 13세기 초, 교황이 북유럽 십자군을 선포한 이래 폴란드의 가톨릭 세력이 이곳으로 진출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고, 역으로 폴란드 변경 지역이 프로이센인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다. 이 변경 지역의 영주 '마조비아 공작 콘라드'는 1226년 튜튼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한다.
튜튼 기사단은 마조비아 공작이 마련한 약간의 땅을 전초기지 삼아 프로이센 십자군을 시작하였다. 해를 거듭하며 이어진 십자군의 침략으로 프로이센인은 차례로 복속되었고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전역에 여러 도시와 성채를 건설한다. 튜튼 기사단이 정복한 땅은 십자군 원정 개시 이전에 기사단이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맺은 '리미니의 금인칙서(1230년)' 등의 조약을 명분으로 튜튼 기사단의 영지가 되었고, 도움을 청했던 마조비아 공작과는 조약을 체결, 십자군 전쟁을 통해 정복한 영토를 기사단령으로 삼아 독일 기사단국을 건국하였다.
독일 기사단국은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면서, 독일 본토에서 독일인 이주민을 유치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15] 그 결과 프로이센은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14세기, 전성기에 접어든 독일 기사단국은 그 영토가 남쪽으로는 폴란드 북부(단치히가 위치한 포메렐리아와 프로이센), 북쪽으로는 고틀란드 섬과 에스토니아, 동쪽으로는 페이푸스 호에 이르렀고, 이렇게 광활한 영토를 보유한 기사단국은 남쪽의 숙적,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대결은 1410년에 그룬발트 전투(1차 탄넨베르크 전투)라는 대참사를 불러왔고 이후 기사단국은 서서히 쇠퇴하다 1453년 ~ 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완전히 몰락, 무역의 황금알 단치히를 빼앗기고 기사단장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는 굴욕을 당한다. 이후 기사단국은 폴란드의 영향력에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고 폴란드는 기사단국을 복속시키기 위한 전쟁을 계속했다.
16세기 초, 튜튼 기사단의 제37대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폴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상황이 좋지 않았고, 휴전 기간 동안 전황 타개를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회의에 참석했으나 황제 카를 5세는 알브레히트와 기사단에 무관심했고 이에 알브레히트는 제국과 황제가 신봉하는 가톨릭에 회의감을 품는다.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던 알브레히트는 귀환 도중 우연히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던 신교도들의 회의에 참석하게 되는데 회의 도중 만난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16] 와의 대화를 통해 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신교의 창시자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신교의 중심지 비텐베르크로 가서 그 곳에서 루터와 만나게 된다. 루터에게 감명을 받은 알브레히트는 신교로 개종,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독일 기사단국의 세속화와 기사단의 해체를 선언한다. 알브레히트는 전쟁을 벌이던 폴란드에게 앞으로도 계속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남을 터이니 신교로의 개종 및 기사단국의 세속화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가톨릭에 반하는 신교계 공국의 설립임에도 기사단국의 종주국인 폴란드가 이에 찬성하면서[17] 프로이센 공국의 건국이 결정되었고 1525년 4월 8일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체결된 조약과 이틀 뒤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 공작의 임명을 받는 의식을 통해 알브레히트 자신은 가톨릭 수도자이자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신생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공작의 자리에 오른다.[18] 이로써 프로이센은 명목상 폴란드 왕국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2.2. 프로이센 공국
2.3. 프로이센 왕국
2.3.1. 독일 제국
2.4.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통일 과정 중에 있었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하노버 왕국 등을 병합하는 등 영토를 대대적으로 늘렸으므로 통일 이후에도 제국 전체의 2/3을 차지하며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하였다. 이와 같은 독일·프로이센의 이중 구조는 바이마르 공화국에도 존속하였다.
보수적이고 군국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 특성상 나치당 집권 전까지 나치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 바로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포메른, 브란덴부르크 등 프로이센 지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프로이센 주의회와 주 총리 직책은 독일 사민당(SPD)이 장악하고 있어 프로이센은 독일 사민당의 요새나 다름없었다.[19] 이 상황을 싫어하던 우익 정치인 프란츠 폰파펜은 자신을 임의로 프로이센주의 총독으로 임명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른다. 이를 '프로이센 쿠데타'라고 부르며 독일 사민당은 치명타를 입었다.
당시 독일의 경찰은 각 주 단위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나치당이 연립 내각을 구성하면서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총독이 된다. 이로서 독일의 2/3를 차지하는 광대한 프로이센의 경찰력이 나치당의 손에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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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시대에 이르러 연방제는 폐지되었으나 프로이센 정부는 존속하였다. 하지만 지방자치가 유명무실해져서 의미는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로이센은 민족주의 및 전쟁 분위기는 물론 '''배후중상설'''까지 앞장서서 지지해서 나치 성장의 토대를 만든 것에 대한 징벌[21] 로 해체되었다, 오데르강·나이세강 동쪽은 폴란드령이 되었고, 스탈린은 동프로이센 전체를 소련이 차지하거나 독일계땅 동프로이센 북부 3분의 2를 차지하려 했지만 관대하게(...) 동프로이센은 절반으로 갈려 북쪽은 소련령이 되고(칼리닌그라드 주) 남쪽은 폴란드령이 되었다. 원래 여기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고 여기를 비롯한 독일 주변의 독일어권은 깔끔하게 증발했다.
2.5. 프로이센 지역과 현재의 독일
-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 참조.
비록 현대에 이르러서 옛 프로이센의 대부분이 폴란드나 러시아에 예속되었다곤 해도, 프로이센이 독일에 미치는 직간접적인 영향은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크다. 30년전쟁 이후 수백개의 연방국으로 나뉘어지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태반이 정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국만 4개(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가 존재했던 독일이 지금의 통일된 독일로 있게 만든 나라인데다가 독일에 대한 대외 이미지 등 프로이센이 현대 독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심지어는 앞서 말한 대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 색상이 흑적금 삼색이 아닌 흑백으로 되어있는 것도 프로이센의 영향 때문이 짙다고.
독일 극우파들의 염원이 이 과거 프로이센의 영토 수복인데, 현재 독일의 방침 자체가 '''상실한 영토의 영유권을 영구히 포기한다'''라서 가능성은 제로. 그렇다고 해도 프로이센 지역 실향민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고, 이들 역시 고향을 되찾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나치 잔재를 과도하다 싶을 만큼 지워버리려는 독일 정부에 의해 도매금으로 이들의 보상 요구조차 처절할 만큼 묵살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폴란드는 이게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거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하여 유대인 90%를 포함한 폴란드 전체 인구의 무려 20%를 학살했다. 이 막심한 손해를 폴란드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가? 여기에 공산 폴란드가 들어선 후 독일로 강제이주된 이들 중에는 바로 이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학살하고 해당 도시에 대거 독일인들을 이민시킨 것도 있다. 전쟁기간 동안 250만에 이르는 폴란드 시민들이 독일의 강제이주로 쫓겨났고, 이 자리를 130만에 이르는 독일 정착민들이 차지했다. 한국의 일제강점기로 따지면 한국의 삼남지방이 일본과 가깝고 거주 조건이 더 낫다는 이유로 전체 인구의 6~7%를 한반도 북부로 강제이주시키고 그 자리를 그 절반 정도의 일본 정착민들이 차지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예를 들어 폴란드 공업도시 우치(Łodz)의 경우, 전쟁 전의 시민 중 독일계는 9%에 불과했지만 독일이 점령한 이후 25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5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쫓겨났고, 이들 대부분은 학살당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15만에 이르는 독일인들이 차지했다. 단순히 우치뿐만 아니라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서북부 영토에서도 이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의 자리를 차지한 독일인들 중 일부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 영토로 도망쳤고, 나머지 독일인들은 전후 폴란드 공산정권에서 독일로 강제이주시켰다. 이 경우는 단순한 압제자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 인구뿐만이 아니다. 폴란드는 독일의 침공으로 전체 재산의 40%를 잃어버렸다. 바르샤바, 그단스크, 그디니아, 포즈난 등 유수의 폴란드 도시들이 폐허가 되거나 반파되었다.[24] 특히 바르샤바의 경우는 독일에 의해 계획적으로 매우 철저히 파괴되었다. 또한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폴란드 동부 지역을 자신이 가져갔고 그 보상으로 독일 동부 지역을 떼어 폴란드에 주었다. 당시 소련 지도자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오히려 당시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쟁 전의 국경을 원했다. 독일 동부를 폴란드에 내준 것은 스탈린이다.[25]
이외에도 폴란드는 전후 독일에게 보상을 청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945년 당시 폴란드인들이 이 국경을 원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위에도 써놨지만 '''스탈린이 친히 그렇게 명령했다'''. 그리고 폴란드는 독일 동부를 얻은 대가로 자국의 동부 영토를 소련에게 빼앗겼다. 즉 폴란드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보상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26] , 남은 것은 독일이 남기고 간 폐허밖에 없다. 그리고 폴란드인들은 이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완전히 재건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이 폴란드에게 영토를 내놓으라 한다면(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날강도도 이런 날강도가 없다. 나치 독일에 의해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가 폴란드와 소련인데, 그 역사적 과정을 그냥 무시하고 내놓으란 법이 있는가?
무엇보다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폴란드로 넘어간 영토가 대대로 독일만의 영토인 것도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구실로 삼은 그단스크(단치히)만 하더라도 원래 폴란드인들이 건설한 도시를 독일 기사단이 강탈한 것이었다. 포즈난과 그 이동지역인 대폴란드(Wielkopolska, 비엘코폴스카) 또한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고[27] , 인구도 폴란드인이 대부분이었다. 근데 독일 극우파들의 주장은 이런 지역조차 모조리, 싸그리 폴란드가 토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현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 이상이 옛 프로이센(독일제국 기준) 땅이다.''' 폴란드가 이 영토를 가지게 된 계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스탈린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침공에 가담하여 집어삼켰던 영토를 내놓지 않으려고 폴란드에게 일련의 보상으로서 대규모 탄전 지대이자 공업 지대였던 슐레지엔, 발트해 요충지인 포메른, 근대 독일의 발상지인 프로이센 및 브란덴부르크 동부 등의 독일 영토를 대신 할양한 것인데, 이 때문에 본래 폴란드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던 수도 바르샤바가 상당히 동쪽에 쏠리게 되는 등 국토가 서쪽으로 많이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 해체는 1차대전 이후에도 프로이센이 지속적으로 민족주의와 전쟁을 찬양[28] 해서 나치가 성장할 분위기를 만든 것에 대한 징벌 및 이것이 반복될 여지를 영원히 차단한다는 의도도 있기 때문에 반환 가능성은 그냥 없다고 봐도 된다.
현대에도 이 지역은 폴란드의 알토란과 같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의 상실 영토 수복 발언이나 운동은 결국 폴란드를 집어삼키겠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이건 폴란드 보고 존재하지 말라는 뜻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구동독 지역을 구서독 지역과 균형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독일경제에 크게 무리를 줬고, 현재까지 그 부작용이 만만찮다. 그것도 모자라 구동독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낙후된 구 프로이센 영토까지 덜컥 떠맡게 된다면...? 1989년 동독의 1인당 명목 GDP는 $9,679였는데,[29] 폴란드는 1989년 당시 '''$4,565에 불과했다.'''(이 자료 역시 공산국가 특유의 과장된 통계이다. 실제로는 동독 3000, 폴란드 1000~1500. 물론 망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참고해야겠지만) 참고로 1989년 당시 서독은 $15,300. 거의 슬라브인으로 구성된 인구만 1,000만 명이 넘는 데다가 서독의 30% 수준의 안습한 경제력[30] 을 자랑했던 이 지역을 떠맡는다면 훨씬 문제가 심각해졌을 것이다.
거기다가 전쟁 중 있었던 대규모 학살이나 전후의 강제 이주로 인해 현재(21세기)는 슐레지엔이나 프로이센 지방에 독일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다. 체코에 있는 수데티 지방도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 시절처럼 현지의 독일인들의 민족 심리를 자극하여 민족 자결주의를 운운하며 영토를 병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다만 북부 오스트프로이센, 즉 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에서는 2001~2004년경 '''러시아계 주민들의 자발적인''' 독일로의 병합 운동 및 쾨니히스베르크 명칭 복귀 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소련 붕괴 이전 소련 영토였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하며 칼리닌그라드 주가 EU 안의 섬이 되어버렸기 때문. 같은 러시아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칼리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 등 러시아 본토에 육로로 이동하려면 비자가 필요한 해괴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31] 안 그래도 주변국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어있던 차에 차별 아닌 차별까지 받게 되자 소외감이 극에 이른 주민들이 이 참에 아예 칼리닌그라드 주를 독일로 환수하거나, 적어도 자치권을 받기 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서도 이 지역은 발트해 연안의 요충지로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중부 유럽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 해군의 발트 함대의 모항인 이유가 이때문이다. 또한 부동항이라는 것도 중요한 요소라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다. 우크라이나나 일본과의 영토분쟁에 불리해질 선례를 남길 수도 없는 처지인데다[32] 현재 러시아의 실권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푸짜르'''... 거기에다 독일에서도 종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칼리닌그라드 주는 엄연한 러시아 땅이라고 천명하며 독일 환수운동의 입을 막았다. 러시아가 나서서 돌려주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독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 다만 현재도 칼리닌그라드에 독일인들이 문화, 사회, 경제면으로 칼리닌그라드 내 지분을 착실히 늘려가고 있고, 프로이센 시대 문화유산 유지보수에 신경쓰는 것을 보면 아돌프 히틀러처럼 당장 무리수는 두지 않고 차근차근 순리적으로 병합할 걸 노리는건 아닌가 하는 소리도 간간히는 나온다.# 물론 현실적으로 독일이 통일 조건으로 오스트리아와의 통일 금지 및 옛 영토(수데텐/포메른 및 동프로이센) 수복 금지를 내건 만큼 이 역시 비현실적인 관측이다. 애초 독일의 국력 자체도 러시아에게 한참 밀려 러시아가 위협을 느끼면 주둔 병력을 늘려서 봉쇄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도시를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주요 개최도시 중 하나로 지정, 빼도박도 못하는 러시아 땅으로 못 박아 두는 강수까지 보였다! 정확히는 조별리그 3개 경기를 칼리닌그라드에서 치루었고, 당연히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뺏으며,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이 격돌했다.
사실 이제 유럽같은 안정된 사회에서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도 자폭행위이거니와, 이미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치른[33] 독일이 다시 영토수복 움직임을 보이는 것 자체가 주변국들에게는 굉장히 위협적인 일이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나 폴란드 등 주변국의 독일 영토수복에 대한 경계심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될 때에도 영국은 아예 통일 자체를 반대하고 나섰고, 프랑스와 폴란드는 더 이상의 영토수복이 없다는 걸 명시하라고 수차례나 압박하고 맹세를 강요했으니.
참고로 독일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에는 '마스(뮤즈강)에서 메멜[34] 까지, 에치(아디제 강)에서 벨트해[35] 까지'라며 독일 민족의 영토를 규정하는 구절이 있는데 지금 이 경계들은 벨트해를 빼고는 '''주변국 땅이다.''' 특히 네만강은 동프로이센 동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메멜까지'는 현재 폴란드의 전체 영토를 포함하는 영역이다.(...) 본래 비더마이어 시대(1815-1848)에 지어진 시로서, 독일 제국 때부터 부른 노래이긴 하지만 현재는 그 1절을 부르는 게 금기시되고 있고[36] 2절도 그닥 부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37] 3절만 부른다.(같은 이유로 네오 나치들은 1절만 부른다.)
1995년에 한때 브란덴부르크 주와 원래 브란덴부르크였던 베를린을 합쳐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실제로 두 주의 정부가 합의 하에 합병을 추진했다. 일부에선 새로 합병된 주를 아예 '''프로이센 주'''로 명명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합병은 이듬해 주민투표에서 부결되었고 이에 따라 프로이센의 '부활'도 무산되었다. 주민투표 때 구 서베를린 시민들은 합병에 찬성했는데 구 동베를린 시민들과 브란덴부르크 주민들은 반대했다고 한다.
사족으로 폴란드에서 카톨릭이 민족적 정체성과 동일시된다는 편견 때문에 2차대전 직후 개신교 교회들을 다 갈아버렸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며 폴란드 루터교단과 실롱스크 루터교단등으로 소속이 바뀌어 잘 남아있는 교회들도 많다. 물론 독일인들이 상당수 추방된 것과 공산정권 시절의 종교 탄압으로 인해 신자수가 과거보다 현저하게 감소한 것도 사실이지만 폴란드에서 개신교를 절대적으로 금기시했던 것도 아닌데다 개신교 신자들이 모두 독일계이기만 했던 건 아니고, 오히려 폴란드어나 실롱스크어 등으로 예배가 진행되기도 하는 등 생각보다 현지화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6. 프로이센의 수반 일람
2.6.1. 프로이센 공국 시대 공작
2.6.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선제후) 시대 공작
2.6.3. 프로이센 왕국 시대 국왕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통일(1871) 이후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고 독일 황제는 프로이센 국왕을 겸하게 된다.
2.6.4. 바이마르 공화국 및 나치 독일 시대[42] 주총리
Ministerpräsident는 주지사로도 번역되지만 주 총리가 좀 더 정확하다. 사실 왕국 시대에도 동일한 Ministerpräsident가 있었는데 이건 국가원수급이 아닌 정부수반급이었다.[43] 하지만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멸망 이후에는 왕이 사라지므로 아래에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시대의 주총리를 대신 정리한다.
참고로 1933년 나치 독일은 Ministerpräsident와 별도로 진짜 '주지사'나 총독과 유사한 Reichsstatthalter[46] 란 직책을 만들었는데[47] 1933~35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프로이센의 이 Reichsstatthalter를 맡았지만 1935년부터 1945년까지는 헤르만 괴링이 대행했다.
2.7. 행정구역 일람
2.7.1. 빈 회의-북독일연방 시대(1815~1871)
1815년 빈 회의 이후 회복지와 점령지를 합치며 체계적인 행정구획으로 재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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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의 지도
(러) = 러시아령, (폴) = 폴란드령
2.7.2. 독일 제국 시대(187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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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프로이센 12주(Provinz)"[61] 이다. 베를린과 남부에 따로 떨어진 호엔촐레른은 제외되었다. 2~7번은 동부주, 8~13은 서부주이다.
(폴) = 폴란드령
2.7.3.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2차대전 발발 전)(1918~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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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의 지도
(폴) = 폴란드령
2.7.4. 나치 독일(2차대전 발발 후)-종전 처리(1939~1947)
(소), (미), (영), (프)는 각각 점령되었던 국가를 말한다.(구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2.8. 현재 독일 행정구역과 프로이센 행정구역과의 관계
프로이센 발원지를 포함한 영토 상당부분을 현재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에 내어준 상태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에서도 프로이센 통치지역과 연관이 없는 곳은 바이에른, 브레멘의 두개 주 뿐이다. 그나마도 브레멘과 함부르크는 프로이센의 입김이 강하고 그저 주권만 독자적으로 유지한 자유'''시'''였던 것을 보면, 또한 러시아와 폴란드에 넘어간 땅의 실향민들이(물론 전부 프로이센계) 주로 정착한 곳이 '''브레멘''', '''함부르크''', 니더작센[78]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79]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인 것을 보면 현재의 독일에서도 프로이센과 연관 없는 곳은 바이에른 뿐이라고 봐도 될 정도. 괜히 '''독일연방공화국과 바이에른'''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양차대전을 거치며 상실한 지역은 '''오로지 프로이센의 지역만'''으로, 바이에른과 작센[80] 을 비롯한 기타 지역은 현재의 독일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잠시 눈물 좀 닦고...
2차대전 이후 연합국이 무리할 만큼 프로이센 본령을 할양시켜버리고 흔적을 지워버리려 한 것도 독일의 정체성을 희석시키려 한 것과 관련이 있다.
○ : 순수 구 프로이센 지역 (5개주)
□ : 구 프로이센 지역에서 다른 독일계 지역 흡수 (4개주)
△ : 다른 독일계 지역에서 구 프로이센 지역 흡수 (5개주)
× : 프로이센 통치 지역 불포함 (2개주)
2.9. 주요 도시
1939년 기준
- 1. 베를린 (4,338,756명)
- 2. 쾰른 (772,221명)
- 3. 에센 (666,743명)
- 4. 브레슬라우 (629,565명)
- 5.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553,464명)
- 6. 도르트문트 (542,261명)
- 7. 뒤셀도르프 (541,410명)
- 8. 하노버 (470,950명)
- 9. 뒤스부르크 (434,646명)
- 10. 부퍼탈 (401,672명)
- 11. 쾨니히스베르크 (372,164명)
2.10. 관련 문서
2.11. 기타
- 프로이시슈 올덴도르프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읍. 지금도 당당히 Preußisch라는 지명을 쓰고 있는데 1905년부터의 일이다. 구 프로이센 영토에서야 Preußisch Eylau(현 칼리닌그라드 주)나 Preußisch Holland, Preußisch Stargard(현 폴란드) 같은 사례가 많았지만 아시다시피...
3. 고중세 발트계 민족인 프루스족
'프로이센'이란 이름은 기사단의 정복 이전에 살았던 발트계 종족인 '프루스족(프루센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러시아에 인접해있는 발트 해 지역의 주민을 지칭하는 고대 프로이센어 '프루사(Prūsa)'에서 나왔다. 위에서 나온 프로이센 국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여기서 '루사(러시아)'가 중세 독일어로 러시아를 뜻하는 '로이센(Reußen)'으로 바뀐 것이다.
프루스족은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에 더 가까운 민족이었다. 프로이센 원주민은 보통 '고프로이센인(Old Prussians)', 그들의 언어는 '고프로이센어(Old Prussian)'라고 부른다. 프로이센어 자체는 튜튼 기사단의 정복 이후로도 상당기간 쓰여서 프로이센어로 성경이 번역되기도 했으나, 차츰 독일어와 폴란드어에 밀리면서 18세기에 사어가 됐다. 프루스족 후손들은 오랜기간 동안 튜튼기사단과 폴란드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독일과 폴란드에 각각 동화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독일인이나 폴란드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프루스인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진 못했으며, 군소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지도).[85]
이들은 원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인들이 갖고있던 로무바 신앙이라는 원시종교를 신봉하였으나, 독일 기사단의 동방식민운동으로 정복당해 독일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프루스족은 1260년대에 나탕 부족 출신인 헤르쿠스 몬트(만타스)[86] 를 지도자로 추대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20여년 동안 항전했지만 패배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독일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동화되었다.
기사단은 이후 세속화되어 프로이센 국가를 거쳐 독일제국으로 발전[87] 했고, 발트계 종족인 프루스란 이름은 국호 및 지명인 프로이센으로 흔적만 남았다.
프루스인이 동화되는 과정에서 프로이센 독일인 혈통에도 슬라브계 소수민족 소르브인, 켈트인과 함께 이 프로이센인도 섞였다.
[1] 이 색이 바로 물감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로, 당시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2] 어째서인지 파라과이의 영토변화와 유사하다. 프로이센과 파라과이는 국토의 동쪽을 날려버린 대신 다른 곳을 획득했는데 파라과이의 경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게 땅을 빼앗긴 뒤 볼리비아에게서 땅을 빼앗았다. [3] 독일 제국 해체 후에도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자유주로 남게 된다(정부수반의 명칭은 주총리 Ministerpräsidenten). 제국 내 여타 왕국이나 공국들도 군주제만 폐지되고 각 지역의 자유주로 변환. 단 튀링겐 지역의 군소국가들은 튀링겐 자유주로 묶인다.[4] 실제 발음은 ''''프로이슨'과 '프호이슨'의 중간''' 정도 된다. 독일어에서 r 발음은 '르'와 '흐'가 동시에 발음되는, 이른바 '가래 끓는 소리'처럼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단어 끝의 -en은 '은'에 가깝게 발음된다. 에스체트(ß)는 2005년부터 ss로 대체표기하고 있다.[5] 이 지역 일대에 원래 살던 프로이센인들이 쓰던 언어로, 서발트어파 계통의 언어이다. 현재는 사멸한 상태.[6] 독일의 축구단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차이가 있디면 묀헨글라트바흐의 보루시아는 이 문서에서 말하는 프로이센(보루시아)를 의미하는 것이 맞지만, 도르트문트의 보루시아는 초기 구단 설립 당시 도르트문트에 존재하던 한 양조장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양조장 이름 역시 이 문서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겠지만.[7] 전자는 한국과 일본, 후자는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에서 쓰는 표현으로 '보불 전쟁' 등의 용어에 나오는 '보(普)'가 '보로서'의 약자다.[8] 프로이센 공국~프로이센 왕국[9] 일명 '''제2제국'''이라 부른다. 1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3제국은(...)[10] 로이센(Reußen)은 중세 독일어 방언에서 러시아를 뜻하는 단어였다. 현대 독일어로 러시아는 루슬란트(Russland)이다.[11] 연관성을 찾자면, 과거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영토였던 오스트프로이센주의 북부 지역은 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의 영역이 되었다는 점 정도.[12] 간혹 이렇게 별 상관 없는 지역·국가 간 명칭이 유사한 경우가 있는데, 일례로 독일의 도시 뮌헨(München)의 이탈리아어 명칭은 모나코(Monaco)다. 하지만 뜬금없지는 않다. 수도사(monks)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출발해서 각각의 국가에 해당하는 단어로 바뀌었을뿐. 뮌헨이라는 도시명의 유래는 옛 고산 지대 독일어로 "수도승들의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무니헨(Munichen)에서 유래하였다. 프러시아로 번역되는 프로이센도 비슷한 사례.[13] 프로이센인이라는 이름이 훗날 이 지역에 사는 독일인들을 뜻하는 이름으로 굳어지면서 원주민들은 구 프로이센인(Old Prussians)으로 구별해서 부르게 된다. 한국에서는 프루스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14] 혈통적으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가까웠다.[15] 중세 시대의 평민들은 많은 제약과 차별을 받으며 살았는데, 독일 본토를 떠나 동쪽의 새로운 정착지로 향하면 여러 혜택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수의 농노, 도시민 등의 독일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를 동방식민운동이라 부른다. 동쪽의 새로운 정착지를 다스리는 지배자들은 이주민을 유치하기 위해 여러 혜택과 지원을 제공할 것을 열심히 광고하였다.[16]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의 출간에 관여하기도 했다.[17] 왜냐하면 당시 폴란드 국왕인 지그문트 1세가 알브레히트의 외숙부였기 때문이다.[18] 그랜드 마스터가 이단으로 개종하는 걸로 모자라 기사단의 영지를 자기 걸로 만들자 당연히 기사단 내부는 난리가 났고 격분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알브레히트를 당장 제국 재판소에 회부하지만 이미 세속화를 시전한 알브레히트는 좆까. 하지만 알브레히트는 제국의 동맹인 폴란드가 뒤를 봐주고 있었고 거기다 제국 내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크리까지 터지면서 제국은 알브레히트를 손볼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한편 알브레히트의 세속화 결정을 반대한 일부 기사들은 새로 기사단장을 추대한 뒤 프로이센을 떠나 일부 영지가 남아있는 독일 본토로 향했고 이들은 튜튼 기사단이란 이름 그대로 1809년까지 독일 내의 영지를 다스리다가 나폴레옹의 명으로 기사단을 해체하게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가 구호 단체로 기사단을 부활시켜 현재 기사단은 구호 단체로 존속하고 있다.[19] 이는 인구가 더 많으면서 진보 성향이 강한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등 서부 지역과 수도 베를린을 장악한 사민당이 인구가 더 적고 보수 성향을 띠는 동부 지역을 쪽수로 찍어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20] Gott mit uns! : 신의 가호와 함께![21] 이미 연합군은 두 번 다시 배후중상설의 ㅂ자도 못꺼내게 하겠다는 이유로 휴전 협정을 거부한 뒤 무조건 항복을 하든지 다 죽든지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고, 실제로 무조건 항복을 할 때까지 독일 영토를 무력으로 밀어버렸다.[22] 포젠과 서프로이센 일부 영토가 2차 세계대전 시기 이전까지 독일 영토로 존속하였다.[23] 아주아주 조금 남아서 작센 주에 흡수되긴 했다.[24]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수도, 그단스크와 그디니아는 폴란드의 무역의 '''77%'''를 담당하던 지역이었다.[25] 애초에 또 스탈린은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짝짜꿍하며 폴란드를 갈라먹은지라 폴란드 입장에선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다.[26] 물론 독일 동부 지역은 폴란드 동부 지역보다 경제적 가치가 더 높긴 했지만.[27] 심지어 대폴란드의 그니에즈노(Gniezno)는 960년 폴란드가 건국한 곳이다(...).[28]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교과서 등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29] 더 기가막히는 사실은 동독은 공산국가 중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다. 가장 잘사는데도 서독에게 밀린 것 물론 서독도 당시 자유국가 중에서 3위로 잘 살았지만[30] 현재도 독일의 30% 수준. 2013년 당시 독일 GDP는 $46,251, 폴란드는 $13,654.## PPP로 따지면 현재는 독일의 50~60% 수준이다.[31] 칼리닌그라드주의 특수상황을 감안해달라는 러시아와 난색을 보이는 EU의 협상 끝에 현재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로 육로이동할 때는 '''간이통행증'''을 발급받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런데 비자나 간이통행증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32]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는 크림 반도를, 일본과는 쿠릴열도 4개 도서(하보마이, 쿠나시르, 이투루프, 시코탄)를 놓고 영토분쟁 중이다.[33] 특히나 전간기에 독일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2차대전이 일어난 면도 있는 만큼 독일이 야심을 드러낸다면 전쟁으로 가기 전에 초장부터 압박할 수도 있다. 그것도 '''서유럽과 동유럽 모두 다'''[34] 현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남부 및 타우라게 주 남서부[35] 발트(Balt)해가 아닌 벨트(Belt), 즉 덴마크에 있는 소 벨트 해협(Little Belt)이다.[36] 단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처럼 완전 금지는 아니다. 어쨌건 이 지역들이 한때 독일 땅이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고, 프로이센 시절 영토라고 우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37] 독일의 여자, 신의, 와인, 노래를 지키자는 내용이다. 여자를 남성의 소유물로 봤던 인식이 녹아있다는 비판으로 인해 부르지 않는다.[38] 독일 기사단국의 군주인 튜튼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써는 1510년부터 재위했다.[39] 요아힘 프리드리히 브란덴부르크 공의 아들이자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의 맏 사위였다. 브란덴부르크 공으로는 1608년에 이미 즉위.[40] 1772년 폴란드 분할 직후 프로이센 왕(King 'in' Preußen)과 형식적이던 브란덴부르크 공과 기타 직위들을 모두 합쳐서 대 프로이센 왕국을 확립하고 칭호를 프로이센 대왕(King 'of' Preußen)으로 바꾼다.[41] 독일 황제로서는 1871~1888.[42] 독일 제국 해체 후에도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자유주로 남게 된다(정부수반의 명칭은 주총리 Ministerpräsidenten). 제국 내 여타 왕국이나 공국들도 군주제만 폐지되고 각 지역의 자유주로 변환. 단 튀링겐 지역의 군소국가들은 튀링겐 자유주로 묶인다.[43] 오토 폰비스마르크도 프로이센 왕국의 Ministerpräsident였다.[44] 제국 총리 프란츠 폰파펜이 중앙정부 직속으로 프로이센 주 총리를 겸임했다. 후임 총리 슐라이허도 프로이센 주 총리겸 프로이센 주 경찰청장까지 겸임함.[45] 히틀러 내각 때 부총리 겸 프로이센 주 총리를 지내다가 곧 해임된다.[46] 영어로 "Reich Lieutenant" 또는 "Reich Governor" 등으로 번역된다.[47] 본래 이 직위명 자체는 독일 제국 시절에 있었다가 바이마르 공화국 때 없어졌다. 그러다 나치 시기에 부활시킨 것.[48] 1224년 건국된 튜튼 기사단국이 전신이다. 프로이센의 발원지이며 베스트프로이센 지역의 마리엔부르크를 수도로 삼고 한때 에스토니아까지 세력을 뻗쳤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 패하면서 베스트프로이센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오스트프로이센 만으로 영토가 축소된다(1466년 2차 토른 평화조약). 이 와중에 수도를 쾨니히스베르크로 옮기고 숨죽여 지내다 1525년 기사단장 알브레히트의 개신교 전향 및 공국 선언과 함께 오스트프로이센 지역은 프로이센 공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1466년 2차 토른 평화조약으로 상실했던 베스트프로이센은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로 수복했다.[49] 프로이센 본가의 대가 끊기자 프로이센과 혼인으로 프로이센을 사실상 흡수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1157년 건국)이 전신이다. 주도권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쥐고 있었고 사실 통합명칭도 브란덴부르크가 되는 것이 순리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되어있었던 브란덴부르크와 영외 지역이었던 프로이센의 특성상,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폴란드의 봉신국이었던 프로이센의 폴란드에 대한 의무까지 감수하며(!) 오히려 프로이센을 대외 명칭으로 채택한다. 다만 브란덴부르크도 프로이센도 전부 호엔촐레른 가문이었고 상기한 정치적 문제도 겹쳐 프로이센은 단순한 세력확장 발판이 아닌 국가 핵심지역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50] 30년전쟁 후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및 1653년 슈테틴 조약에 의해 대가 끊긴 포메른 공국을 서부는 스웨덴, 동부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각각 분리점령한다. 이후 스웨덴과의 전쟁을 거치며 1722년 스웨덴령 서부 포메른을 일부 점령하고, 1815년 빈 회의에서 남아있던 부분까지 양도받게 된다. [51] 1742년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점령, 이후 1756–1763년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사수하며 프로이센 영토로 확정.[52]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에서 프로이센이 획득했던 쥐드프로이센을 나폴레옹전쟁에서 상실했다 종전 후 1815년 빈 회의에서 회복. 다만 포젠 대공국이라는 괴뢰국 형태로 운영하다 1848년에 정식 주로 변경한다.[53] 작센 '''왕국'''과는 별개인 프로이센의 작센 '''주'''[54]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승리 및 빈 회의 협상으로 마그데부르크 공국,알트마르크 지역,마인츠 대주교령,작센 왕국령 점령지 흡수합병.[55]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승리로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던 하노버 왕국 점령 및 흡수.[56]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승리로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던 헤센-카셀 영주국, 나사우 공국, 프랑크푸르트 자유시를 점령 및 흡수합병.[57]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프로이센이 소유하던 서부지역 영토.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다 빈 회의 이후 회복.[58]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프로이센이 소유하던 서부지역 영토.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다 빈 회의 이후 회복. 이때 비텔스바흐 가문의 윌리히 주가 윌리히, 베르크로 분리되었다. 그 당시 (1815) 3개주로 통합 설치했던 윌리히클레베베르크(Jülich-Kleve-Berg) 주, 괴뢰국 니더라인 대공국을 합병하며 라인란트 주가 된다.[59]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으로 슐레스비히 공국, 홀슈타인 공국에서의 덴마크의 지배권을 빼앗은 후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까지 도태시키며 프로이센 영토로 확정.[60]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백국, 호엔촐레른헤힝겐 백국 흡수합병. 프로이센 왕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선산으로 이미 프로이센과는 밀접한 관계였다.[61] 여기서는 편의상 Provinz를 '주'라고 번역하긴 했으나, 이는 1차대전 이후 프로이센 왕국을 대체한 프로이센 자유'주'(Freistaat Preußen, 영어 Free State of Prussia)를 번역할 때 문제가 된다. 프로이센 자유주(Freistaat) 안에 계속 Provinz가 존속했기 때문. 참고로 중국어에서는 프로이센 자유주 같은 staat는 방(邦)으로, 산하의 Provinz들은 성(省)으로 번역해서 혼동을 회피하고 있다.[62] 베를린 내 샤를로텐부르크[63] 1938년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슐레지엔으로 분리흡수.[64] 이후 미영프 3개국 점령지역을 합친 서독령 서베를린과 구소련 점령지역인 동독 수도 동베를린으로 분할되었다 독일 재통일과 함께 통합.[65] 북동부는 리투아니아에, 북부는 러시아에, 남부는 폴란드에 각각 할양.[66] 베를린 내 샤를로텐부르크을 말한다.[67] 서부 및 중부는 동독 체제에서 해체되었다 독일 재통일과 함께 브란덴부르크주로 부활.[68] 서부는 동독 체제에서 해체되었다 독일 재통일과 함께 메클렌부르크 지역과 합쳐지며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로 부활.[69] 극서부만 동독 체제에서 해체되었다 독일 재통일과 함께 작센주에 흡수.[70] 초기에 포젠이었다 개명.[71] 동독 체제에서 해체되었다 독일 재통일과 함께 작센-안할트주로 부활.[72] 동독 체제에서 해체되었다 독일 재통일과 함께 작센안할트주로 부활.[73] 단, 블랑켄부르크 지역은 동독으로 넘어가 통일 이후 작센안할트주로 편입.[74] 미국 점령지역인 브레멘은 재분리시키고 나머지 영국 점령지역은 서독 니더작센주로 통합.[75] 룩셈부르크 재분리독립 후 서독 라인란트팔츠주로 통합.[76] 로트링겐은 알자스-로렌으로 프랑스에 재복속, 팔츠는 라인란트-팔츠주로 통합, 라인란트 극남부는 프랑스 보호지구 형태로 분리되었다 1956년 서독으로 복귀하며 자를란트주 구성.[77] (프). 뷔르템베르크에 흡수되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구성원으로 존재하다 종전 후 이름만 같은 프랑스 점령지역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에 소속. 이후 1952년 미국 점령지역 뷔르템베르크-바덴과 합쳐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소속되며 명의 상실.[78] 뤼네부르크에 오스트프로이센 민속박물관이 있다. 민속박물관은 자연히 해당 지역 유민이 많이 이주해 있거나, 연관이 있는 곳에 세워진다.[79] 뮌스터에 베스트프로이센, 뒤셀도르프 인접 라팅엔에 오버슐레지엔 민속박물관이 있다. 여담으로 포메른과 니더슐레지엔의 민속박물관은 독일이 재통일되며 쪼가리라도 남아있는 지역-각각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 그라이프스발트(구 포메른), 작센 주의 괴를리츠(구 니더슐레지엔)-에 있다.[80] 다만, 동쪽 극히 일부분은 폴란드로 넘어갔다.[81] 2차 대전 직후에도 호엔촐레른뷔르템베르크 식으로 명의는 남아있었으나 이후 바덴과도 합쳐지며 사라짐.[82] 함부르크 시가 대확장을 거치며 인근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대거 흡수했다.[83] 그냥 하노버주가 이름만 바꾸며 중간중간에 있던 지역까지 흡수했다고 봐도 될 정도.[84] 현재 주도인 에어푸르트는 구 작센주.[85] 포메사니아, 포게사니아, 바르티아, 나탕, 바르미아, 삼비아, 루바비아, 사스나, 갈린디아, 나드루비아, 수도비아.[86] 리투아니아에서 영웅으로 밀어주며, 소련 시절에 https://en.wikipedia.org/wiki/Northern_Crusades_(film)영화를 만들기도 했다.[87] 1618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 성립 당시 동군연합의 군주는 프로이센 공작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으며(브란덴부르크의 수도는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닌 베를린이다),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가 프로이센을 흡수한 후 추가로 슐레지엔,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등을 얻어 독일 통일의 주체가 된다. 이 강역은 폴란드와 소련에게 2차대전 패전 후 할양할때까지 독일 땅이었고, 현대 독일에선 브란덴부르크 주와 베를린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