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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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Boas
(1858년 7월 9일 ~ 1942년 12월 21일)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
1. 개요
미국의 인류학자. 미국 인류학과 현대 인류학의 선구자이며,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20세기 전반 미국 인류학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미국 인류학자들이 추구하는 탐구의 주된 분야를 정의하였다.
미국 인류학이 사회인류학&문화인류학, 언어학, 형질인류학, 고고학 네 분야의 접근방식을 포함하게된 것은 그의 영향이 크다.
루이스 모건, 에드워드 타일러, 에밀 뒤르켐등 다른 인류학자와는 다르게 문화적 행위를 일반적인 진화단계와 관련 속에서 설명할 것이 아니라 특수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생애
독일 북서부 베스트팔렌에서 진보적인 교육과 정치에 헌신적이던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보아스는 지리학과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독일의 킬 대학교에서 물리학으로 1881년 23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3년 6월 독일의 북극탐사에 합류한 보아스는 캐나다 북서지역의 배핀 섬에서 이누이트족 조사에 착수하여 이누이트족의 전설을 수집하고, 의식과 의례를 관찰하였고, 1886년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 남부의 '캐나다 지질학 조사국'에서 일하면서, 밴쿠버 섬 근처에서 민족지 소사를 수행하였다.
이후 1887년 뉴욕에서 사이언스지의 편집 보조직을 맡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다. 1888년, 1889년에는 영국 학술진흥원의 지원으로 두 번에 걸친 북서 해안지대 답사에서 토착 언어 연구와 인체 측정, 콰키우들족과 침시아족의 사회조직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 1889년 메사추세츠 주 우스터에 신설된 클라크 대학교의 교수직을 얻었고, 1892년 그의 지도 아래 미국 최초의 인류학 박사학위가 수여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892년 대학의 재정 악화로 교직을 사직한다.
1895년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취임하면서 보아스는 뉴욕을 근거지로 미국 인류학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899년 컬럼비아 대학교 정교수로 임용 되었고, 1900년에 학술원에 추대되었으며, 이후 ‘미국 인류학회’ 설립을 돕고, 잡지 '미국 언어학지'를 창간하였고, 멕시코 고고학 조사단 설립을 도왔으며, 특히 북서부 해안에 대한 일련의 조사계획들을 감독하는 등 교육자, 관리자, 조사가, 수많은 모임의 발기인과 회장, 편집인, 강사, 여행가로써 일하면서도 1942년 사망할 때 까지 6권의 책과 700편이 넘는 논문을 저술하는 업적을 남긴다. 수 많은 문헌 중에서도 콰키우들족과 침시아족, 그리고 다른 북서부 연안 사회들에 대한 논문과 보고서들을 합하면 1만 페이지가 넘으며, 북아메리카 언어를 기록하는 조사강령을 확립하고 북아메리카 인디언 언어에 관한 논물을 저술하여 언어연구에도 큰 공을 남겼다.
3. 사상
3.1. 비교방법 비판
보아스가 일관되게 견지한 입장은 문화란 보편적인 진화단계의 반영이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과정에 의해 이룩되는 통합적 총체라는 것이였다. 보아스는 진화론적 설명의 틀과 비교방법을 비판했는데, 비교방법이란 유사한 현상들이 역사적인 연관을 갖는다는 직설적인 논리에 기반을 둔다. 예를 들어, 유인원과 영장류와 인간이 다섯 손가락을 가진 것은 이 동물들이 역사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루이스 모건과 에드워드 타일러의 비교론적 접근방법에는 세 가지 오류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단선적 진화의 가정, 둘째는 현존하는 원시사회 일부를 진화상에 잔재로 보는 관점, 셋째는 취약한 자료와 부적절한 기준에 바탕을 둔 사회 분류이며, 이러한 오류들이 공격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불이 있어야 하고, 자동소총이 발명되기 위해서는 부싯돌식 발화장치가 먼저 발명되어야 하듯이 어떤 기술발달 과정들이 내재적인 진화적 질서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모건이나 타일러에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계 친족체계가 부계 친족체계에 선행했다거나 애니미즘에 기초한 종교가 다신교보다 먼저 발달했다는 등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민족지 자료도 없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진화론적 도식은 민족지 자료로부터 산출된 이론이 아니라 자료 위에 덮어씌운 증명되지 않은 가정일 뿐이라고 주장 하였다.
진화론적 입장과 달리 보아스는 매우 유사한 문화행위들이 다른 원인에서 생길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인간 행위의 일반적 법칙은 특수한 역사적 과정의 이해를 통해서만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보아스는 잘 확립된 민족지 사례에 의해 입증될 경우에만 적응적, 심리적, 역사적 요인에 바탕을 둔 엄격한 일반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보아스는 특수한 사회의 상세한 연구는 문화행위의 전 범위를 참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인류학적 총체주의와 문화적 특수주의라는 개념은 미국 인류학의 두 신조가 되었다. 미국에서 보아스가 인류학에 미친 영향으로 20세기 초 인류학 연구는 사회간의 유사성 보다는 차별성에 중점을 두었다. 문화적 요소들이 공통점을 보일 때, 이는 단선적 진화[1] 가 아니라 역사적 접촉과 전파의 증거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반진화론적 입장은 1940년대 레슬리 화이트와 줄리언 스튜어드의 작업에서 진화론적 접근이 재구성되기 전까지 미국 인류학을 주도했다.
3.2. 인종차별 비판
그는 인종차별과 백인 우월주의에 반대하고 인종차별 퇴치를위해 연구하는 것을 과학자의 책임으로 생각했다. 보아스 시대에 인종은 특수한 신체적, 정신적, 문화적 속성을 갖는다고 여겨졌는데, 보아스는 1만 7천여 명의 이주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두개골 연구 결과로, 고정되어 있다고 믿어진 특징과 유전적으로 전해진 특징이 사실은 환경에 의해 바뀐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두개골의 형태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인종적 특징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면, 모든 인종적 분류와 특징은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1931년 보아스는 미국 학술진흥원에서 ‘인종과 진보’라는 제목의 기조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연설에서 생물학적으로 ‘순수한’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종의 ‘혼합’이 해로운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인종 내 개인간의 변이가 인종간의 차이보다 크다고 보고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좀더 똑똑하고 강한 의지력을 타고나거나 정서적으로 보다 차분하다고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생물학적인 인종개념 외에 사회적 개념도 비판하였다. 미국이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인종적 특징에 기초한 계층분화이며, 이것이 다양한 갈등을 유발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일생을 인종과 지성을 연결하는 인종차별적인 사이비 과학적 연구들을 공격하였다. 또한 '미국 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의 창립에 관여했으며, 학술지뿐 아니라 대중잡지에도 인종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다.
1933년 독일에 나치당이 집권하자 남보다 앞서 나치즘을 비판했다. 보아스는 그들의 인종정책을 비판하고 히틀러와 그의 지지 세력을 정신병동에 감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하 연합군이 독일에 몰래 반입한 반나치 격문을 썼다.
4. 여담
미국 인류학의 선구자이자 아버지답게 유명한 인류학자들을 제자로 두었다. 앨프리드 크로버, 루스 베니딕트, 에드워드 사피어, 마거릿 미드등이 모두 그의 제자이다.
[1] 후진사회는 선진사회가 지나간 길을 그대로 반복해서 지나간다는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