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1. 개요
독일의 근대 낭만주의적 신학자, 철학자. 신학적 측면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길을 연 인물로 평가받으며, 철학적 입장에서는 해석학의 길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768년,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1] 에서 프로이센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통 루터파가 우세한 독일 상황과는 달리 슐라이어마허의 아버지는 칼뱅파 개혁교회의 목사로 슐라이어마허도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성장해나갔다. 한편으로 슐라이어마허의 아버지는 모라비안 교회의 경건주의에도 큰 영향을 받았고 아들을 모라비안의 경건주의적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주의로서는 납득할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갈등이 생겼고 아버지에게 할레 대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결국 아버지는 슐라이어마허의 간청에 못이겨서 할레 대학교로 아들을 보내게 된다.
한때 경건주의가 풍미했던 할레대학교는 그 시점에 이르러서는 경건주의를 포기하고 합리주의에 물결에 휩싸여 있던 시점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이 곳 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게 된다. 에버하르트의 영향으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신약성경의 성서비평을 공부하면서 해석학의 기초를 놓게 된다. 슐라이어마허의 첫 학문적 성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으로 시작되었고 스승인 에버하르트의 영향을 받아 칸트 철학에는 부정적이었다.
1796년, 목사 안수를 받고 베를린으로 옮겨가 철학자 슐레겔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나가던중 소위 피히테의 무신론 논쟁이 터지자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1799년 "종교론"을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베를린 대학교의 설립에 관여하면서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당시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부 교수가 바로 헤겔이었다.
3. 사상
3.1. 절대 의존 감정으로서의 종교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에서 자신의 신학사상을 펼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종교에 대한 관점들을 비판하면서 출발한다. 당대 지식인들에게 종교는 제도, 관습, 교리, 법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감정 안에 그 본질이 있다고 했다. 헤겔은 종교를 지식이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나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헤겔의 관점을 비판한다. 또한 칸트와 같은 이성적 관점하에서의 종교관도 반대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는 바로 '''절대자에 대한 절대 의존적 감정'''으로 표현했다.[2] 종교론에 의하면 종교란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다. 여기서 우주는 '부단한 힘과 작용 속의 우주'를 일컫는 말로, 한계도 없고 멈추지도 않는 절대적인 힘위 흐름이며, 인간은 우주의 힘과 작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종교에서 자유의지는 당연히 무의미하며 도덕이나 형이상학과 같이 인간의 감각과 이성,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3.2. 범신론인가?
3.3. 해석학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의 아버지이다. 해석학(철학)#s-2 항목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4. 슐라이어마허 사상에 대한 비판과 영향
[1]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현재는 폴란드로 넘어간 상태이다. 폴란드식 이름은 브로츠와프.[2] 이를 듣고 헤겔은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하면서 "종교가 절대 의존적 감정이면 강아지가 주인에게 갖는 마음이 그러할것"이라고 맹비난했다. 헤겔은 오히려 종교에서 이성적인 역할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