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토 처리 과정에서 프로이센(오데르-나이세 강 이동의 구 독일제국 프로이센 왕국 영토)이 과연 독일과 폴란드 중 어느 나라의 정당한 영토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 또 스탈린이 폴란드의 영토를 집어삼키고 보상격으로 독일 영토인 프로이센 지역을 내주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2. 프로이센의 강탈 여부
프로이센 지역(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의 비스와 강 이동지역)에는 발트계 민족인 고(古)프로이센족이 살고 있었다. 11세기경 폴란드 왕국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폴란드인 자체의 대거 이주는 없었다), 폴란드 일부 영주의 요청을 이유로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지역에 대한 포교목적으로 점령하고 뿌리박기 시작했다.
2.1. 관련 자료와 지도
2.1.1. 독일계의 자료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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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폴란드계의 자료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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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프로이센은 원래 정당한 독일 영토라는 주장
프로이센의 전신이었던 튜튼 기사단의 영역이 어디였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동프로이센은 이 튜튼 기사단의 중심지였으며, 튜튼 기사단의 후기 수도 역시 쾨니히스베르크였다(전기 수도는 잠시 후에 설명). 자연히 이 일대는 11세기에도 독일 문화권이지 폴란드 문화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프로이센 역시 폴란드의 고유영토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폴란드의 튜튼 기사단 정벌 후 끝까지 폴란드에 맞서 주권을 지킨 곳이 동프로이센이고 폴란드에 굴복해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서프로이센이기 때문. 스페인의 지배에 대처한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관계와도 비슷한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벨기에를 스페인 문화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1]
한편 포메른의 경우에는 피아스트 왕조의 영향권이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이었던 슬라브계의 벤트인들의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그들은 1147년 시작된 벤트 십자군으로 덴마크와 작센인들에게 정복당했고, 13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령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폴란드의 주권은 20세기 중반까지 일부 국경도시를 제외하고는 미친 적도 없었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의 전기 수도는 마리엔부르크인데, 바로 그 서프로이센에 위치해 있다. 이 서프로이센의 명칭 역시 왕국령 프로이센(Royal Prussia/Preußen Königlichen Anteils/Prusy Królewskie)으로, 폴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은 계속 고수하고 있었다는 것.[2] 분명히 폴란드 왕국이 11세기 경에는 프로이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해도, 그 이전 고대까지 기원을 따지면 프로이센이든 포메른이든 슐레지엔이든 전부 게르만계 민족이 살고 있었지 슬라브계 민족이 처음부터 살지는 않았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에 정착한 계기가 마조비아 공작이 영토를 댓가로 프러시아인 토벌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당시 마조비아 공작이던 콘라트 1세가 이교도인 프루스인들의 영토를 십자군 명목으로 점령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패퇴하고 역으로 마조비아가 위험해지자. 튜튼 기사단을 불러서 프루스인 방어의뢰를 하고 거점으로 아직 통제하에 있는 프루스인의 영토인 쿨름 주변 지방(Kulmerland)를 양도한게 튜튼 기사단의 프로이센 정착의 시초다. 즉 비스와 강 동안 프로이센에 관해서 원래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증거이고 튜튼 기사단이 폴란드 분열기를 틈타 정착한 침략자가 아니라는 이유다. 그리고 비스와 강 서안의 현재 폴란드 영토인 슈체친부터 그단스크까지 이르는 포메라니아 지역의 경우도 폴란드가 한떄 전체를 점령하긴 했으나 그다지 길지 못하고 복잡하게 소유권이 오가던 지역이다. 애초에 당시 유럽에서 개종을 목표로 공공연히 공격할수 있는 이교도도 아니고 잘 기독교로 개종하고 살아오던 포메라니아 공작령을 단지 해안출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점령해서 전체를 병합시킨게 폴란드의 포메라니아 점유의 시작으로 얼마지나지 못해 몇십년만에 금방 영향력을 잃고 폴란드가 겨우 지켜내던 포메라니아 동부 그단스크 주변을 제외하곤 신성 로마 제국으로 복속했다가 덴마크로 넘어갔다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다시 오가는 등 소유권이 끊임없이 오가던 지역으로 원래 폴란드 영토라기에는 매우 근거가 빈약한 지역이다.
튜튼 기사단의 존재가 프로이센을 독일 영토로 규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면, 11세기의 폴란드 왕국 역시 프로이센 땅을 폴란드 영토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문제다. 게르만계 민족이 살았다고 해서 독일 영토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기원 자체가 다른 슬라브계 폴란드 영토로는 더더욱 주장할 수 없다. 즉 독일 영토로서의 근거도 아니지만 폴란드 영토로서의 근거라고는 더더욱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동프로이센의 폴란드 영주권도 폴란드의 대홍수 때 이미 상실된 상태였다. 1657년 폴란드가 동프로이센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브란덴부르크의 독자적 영역으로 인정을 한 것이다. 즉 동프로이센에서 폴란드가 우월한 위치로 영유권을 누린 시기는 1525년부터 1657년까지 사실상 150여년도 안되는 시기이다.
구 독일 제국에서 폴란드가 역사문화적인 배경으로 영토를 뜯어가더라도 폴란드인이 독일인보다 더 많았던 포젠 정도나 명분이 있지 서프로이센까지 내줘야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베르사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내건 폴란드의 해안 접근권 보장때문이다. 단치히 역시 단치히 자유시라는, 독일도 폴란드도 아닌 제3의 영토 형태로 뜯겨나가게 되는데, 이 단치히 역시 당시 독일인 인구가 95%에 육박하는 독일 문화권이었다.
히틀러조차 소련이든 폴란드든 프랑스든 죄다 점령하면서도 정작 독일 본토로 규정한 지역은 구 독일 제국 국경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크라쿠프나 바르샤바 등 기타 폴란드 지역은 정부직할령으로 구성하고 따로 총독을 세웠지 일반적인 독일 영토로 분류하지는 않았다는 것. 소련에도 메멜 이상 독일 본토 경계선을 끌어들이지 않았고 프랑스에도 알자스-로트링겐(알자스-로렌) 이상 본토 경계선을 확장하지 않았다.
특히 동프로이센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1차 대전 패전 이후 개막장이 된 독일에 주민 투표에 의해 자발적으로 남아있기로 결정한 곳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주민투표에 의해 프랑스에 속하기로 결정한 알자스-로렌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가 점유했던 것과 같은 성격의 독일 점유 폴란드 영토는 1차대전 이후 정산이 끝난 포젠뿐이다.
2차 대전 이후 폴란드에 추가로 뜯겨나간 프로이센 지역은 독일인이 절대 다수였고 거주민 스스로도 독일에 남아있길 원했던 독일 영토였다. 이제 와서 그 땅을 전부 독일로 반환하자는 것도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다만 실향민 중 원하는 사람을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조치하거나 국지적인 재산 피해 문제를 정산해주거나 하는 정도의 문제는 가능하다.
또한 폴란드인들조차 이러한 논의를 정신나간 것으로 봤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2차대전 이전에 폴란드에서 오데르 강이나, 더 나아가 엘베 강까지 자국의 영토로 해야한다는 주장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폴란드 내에서는 모두 무시당했고, 2차대전으로 망명정부를 만들면서도 폴란드 임시정보의 영토요구는 오데르-나이세 선과 한참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전략적인 문제로 동프로이센을 요구했고, 서부 국경은 고지 슐레지엔의 일부, 포메른의 국경도시 일부를 원했을 뿐이다. 즉 그들이 아무리 나치에 점령당했다고 할지라도 오데르-나이세 선은 상식 밖의 주장이라 그들이 먼저 나서서 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후 영국과 소련의 협조로 오데르 강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폴란드가 환영한 것은 당연했다. 영토를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전에 폴란드가 원한 영토선부터 오데르-나이세 선이 아니었고, 그나마도 논의 중이었던 오데르 선이 오데르-나이세로 바뀐 것도 스탈린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커즌 선 동쪽을 먹고 폴란드에게 달래기 위해서 그은 라인이 오데르-나이세 선이었던 것이다.
폴란드인이 꾸준히 인구 과반수를 차지하며 정체성을 지키던 포젠 정도나 폴란드에 정통성이 있다고 할까 프로이센은 튜튼기사단 이래 몇백년간 독일인이 살던 곳이었고, 포메른도 폴란드의 영향력이 사라진 지 오래이며 슐레지엔은 폴란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땅이다. 동부 브란덴부르크는 말할 것도 없다.
폴란드 분할을 근거로 폴란드의 프로이센 지역 영유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어도 건질 수 있는 것은 포젠과 서프로이센뿐이다. 그나마도 서프로이센 역시 애초에 폴란드인보다 독일인이 더 많은 독일 문화권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가 독일을 최대한 엿먹이고 신생 폴란드에게 연안 접근권을 주기 위해 강제로 뜯어간 것이다.
오히려 동프로이센이 뜯길 뻔 하다 국민투표로 부결되고 폴란드인과 카슈브인이 상대적으로 많던 서프로이센이 뜯겨간 만큼 사실 서프로이센의 할양 역시 어거지에 가깝지만, 이 둘 역시 폴란드에 넘어간 것은 1차대전 이후로, 지금 문제삼고 있는 프로이센 지역은 2차대전 이후에 넘어간 폴란드 분할 이전부터 독일 영역이던 지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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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프로이센 지역을 모두 가지고 있는 독일 제국대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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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분할 이전의 폴란드 및 주변국 영토 구분. 노란색이 폴란드의 영토고 붉은색이 리투아니아의 영토. 이 시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상태로 지금까지 거론된 폴란드 왕국은 사실상 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지칭한다. 그렇다고 해도 동프로이센은 자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포메른은 브란덴부르크의 영토였으며 슐레지엔은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포젠과 서프로이센 이상 폴란드가 영유권을 주장할 만한 땅은 이 시기에도 이미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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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이후의 독일 영토. 그나마 폴란드 분할 이전 폴란드 서부국경선과 비슷해진 상태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국경선이 된 오데르-나이세 선은 소련과 독일이 직접 국경을 맞닿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폴란드 동부 영토를 소련이 먹는 대신 보상 차원으로 독일 동부지역을 넘기기 위해 그은 것이다. 그나마 오데르-나이세 선을 따르면 포메른의 주도였던 슈테틴까지는 독일에 남아있어야 했으나, 소련은 그조차도 어거지로 폴란드에 넘겨버렸다. 항구도시로서의 효용가치가 있었기 때문. 슈테틴은 철의 장막 연설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하고 유서깊은 도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Morgenthau Plan에서는 동프로이센과 북슐레지엔은 폴란드에게 넘어가도 포메른이 독일에게 귀속될 예정이었다. #
모겐소 안건에서 하노버, 헤센 등의 라인란트는 국제공동관리로 귀속되며, 독일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자르가 프랑스에 할양된다.
2.3. 프로이센은 원래 폴란드 영토라는 주장
프로이센 전체는 11세기부터 30년 전쟁 시절까지도 여전히 폴란드의 영토였다. 30년 전쟁 전후에 폴란드와 스웨덴이 프로이센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설명에도 나오듯이 동프로이센 지역이 독일의 영토가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동프로이센을 제외한, 더 정확히는 비스와 강 동안을 제외한) 프로이센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훨씬 오랫동안 폴란드의 영토였던 지역이며, 남의 땅을 보상격으로 넘겨주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프로이센은 서프로이센 지역(이때까지는 '서프로이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을 병합하기 위해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폴란드를 멸망시켰다.
프로이센이 원래 독일 영토였다는 주장은 튜튼 기사단의 활동 영역을 근거로 하지만, 튜튼 기사단은 독일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집단이 아니라 독일인의 영토가 아닌 지역을 개척하기 위한 집단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심지어 러시아의 노브고로드까지 손을 뻗었다가 알렉산드르 넵스키에게 격파당한 역사가 있는데다 튜튼 기사단이 점령한 영역이었다고 해서 독일 영토라는 것은 십자군의 영토였으니 레반트 지역은 십자군이 정복했으니 아랍인의 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며, 튜튼 기사단의 활동은 실제로 십자군 운동으로 간주되었다(십자군 항목과 위키피디아의 Prussian Crusade 항목 참조). 이 지역이 독일 영토였다면 이들이 십자군을 자처하고 또 그렇게 인정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에 진출한 것은 14세기에 들어서이며, 주인없는 땅의 원주민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이미 폴란드 영토였던 지역에 대한 정복에 나선 것이다. 이들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의 지배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3] 폴란드 영토 일부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도시를 세웠는데,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세력을 회복한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을 격파함으로써 이들이 폴란드의 신하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커져버린 것은 독일 기사단이 폴란드 북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키울 당시 폴란드는 분할공국 시대를 맞이하여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계자 문제로 나라가 크고작은 공국으로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독일 기사단을 막을 힘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몽골의 대규모 침공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들의 견제와 폴란드 지도자 암살까지 겹치면서 폴란드는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Władysław I)가 폴란드를 통일하고 1331년 프워브체(Płowce)에서 독일 기사단을 격파할 때까지 극심한 내분에 시달렸다.[4]
그런데 이들 세력이 나중에 독일측에 붙고는 '이곳은 튜튼 기사단의 영토이므로' 정당한 독일의 영역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주장을 하면서 실제로 폴란드를 멸망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원래 프로이센의 주민은 고(古)프로이센인으로, 이들은 독일인이 아니었다. 고프로이센인들은 독일어와는 다른 고프로이센어를 사용했는데, 이 언어는 발트어족에 속하며 18세기무렵 독일어에 밀려 사라졌다. 발트어족에 속하는 고프로이센인들을 단지 '게르만계'라는 이유로 독일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폴란드 문화권이 아니었으니 독일 문화권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현존하는 유럽 민족들 중에서 고르자면 오히려 '''라트비아나 리투아니아에 더 가까운 민족이었다.'''
게다가 튜튼 기사단이 서프로이센을 상실한 과정도 단순히 폴란드가 전투에서 이긴 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프러시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의 지배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폴란드 왕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5]
폴란드의 지배하에서도 프로이센/프러시아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으니 독일 영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주장은 논쟁의 가치도 없다. 프러시아라는 이름은 고프로이센어 이름인 Prūsa에서 나온 것이지 독일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현재의 독일식 이름인 Preußen보다 폴란드식 이름인 Prusy나 영어식 이름인 Prussia 쪽이 오히려 원래의 이름에 가깝다고 하겠다.
폴란드인에 대한 차별이 강대국 시절 폴란드인이 독일인을 멸시하고 차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어폐가 있다. '강대국 시절의 폴란드'는 독일을 정복한 바가 없고, 독일과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폴란드의 주된 적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스웨덴 등이었지 독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30년전쟁 등에서도 신성 로마 제국의 동맹국이었다. 역사적으로 봐도 독일인들이 폴란드에 원한이 쌓였을 이유가 없다. 단지 폴란드 영토를 점거하던 튜튼 기사단이 격파당한 일이 있을 뿐인데, 그건 폴란드가 원한을 품으면 모를까 독일이 원한을 품을 이유가 없는 문제이다.
30년 전쟁에서도 종교적인 문제로 신교도들이 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이지 폴란드에서가 아니었다. 스웨덴과 폴란드의 전쟁 때문에 프로이센 지역이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는 차별이나 멸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건이며, 그 전쟁을 폴란드측에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프로이센 지역의 신교도들도 폴란드와 연합한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접근하기 전까지는 스웨덴측에 붙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프로이센공은 폴란드의 주요한 봉신 중 하나였으며, 폴란드 왕국의 왕이 유력한 봉신의 영토를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다.[6]
반대측의 주장과는 달리 포메른 지역도 브란덴부르크의 영토가 아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포메른 공작 등을 겸한 시기가 있었을 뿐이며,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포메른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토가 된 것은 30년 전쟁 이후이며, 이 때도 포메른 남부만을 차지했을 뿐 북부는 스웨덴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스웨덴령 포메른은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도 유지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포메른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은 1815년이 되어서였다.
중세에는 도시나 영주가 독립적인 권한을 누린 지역은 얼마든지 있었다. 동프로이센 지역도 어디까지나 폴란드 왕의 신하로서 자치를 누린 것이지, 독립국으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편 슐레지엔은 본래 폴란드의 핵심 영토였던것을 보헤미아 왕국이 집어먹은 것이고, 보헤미아의 왕위가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넘어가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것이지 슐레지엔의 소유주가 보헤미아 왕국에서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바뀐 적은 전혀 없다.
기본적으로 구 독일제국 국경선이라는 것은 폴란드를 멸망시킨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독일 제국 자체가 폴란드 멸망보다 76년 후에 성립했으며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가 멸망하는 시점은 폴란드가 온전한 전체 영토를 유지하고 있던 시절이 아니다.
프로이센 지역에서 쫓겨난 실향민 문제는 영토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폴란드에서 수십년간 살다가 쫓겨난 독일인들도 따지고 보면 피해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이는 폴란드 지역을 독일이 지배하는 것이 정당한가와는 관계없는 문제이다. 폴란드에 독일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있었다고 해서 그 지역이 폴란드에서 독립해서 독일의 영토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역으로 말해서 관계있는 문제라면, 실향민들도 아주 피해자라고만은 할 수 없는 셈이기도 하다. 실향민 문제를 영토 문제와 관련시켜서 논의하려고 한다면 이는 더이상 '건전한' 논의라고 부를 수 없다.
더군다나 맨위에 나치당 지역별 득표율 자료처럼 오데르 강-나이세 강 이동지방은 나치당의 표밭이었다.[7]
이 지방들은 특히 극우색이 강해서 유대인, 폴란드인에 대해 혐오감이 매우 깊던 지역이었고 나치당의 대외 침략정책, 군국주의, 인종주의에 깊게 동감하여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히틀러에게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략적 외교정책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독일 지방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폴란드, 소련내의 레벤스라움 정책에 참여해서 점령지의 인종학살, 재산몰수, 폭행, 고문 등 나치가 저지른 가장 악랄한 범죄에 깊숙히 부역하며 나치의 전위대 역할을 했다. 물론 나치의 전쟁범죄, 인종학살 등의 반인륜적 범죄를 이 지방 출신들만 저지른 것은 아니고 다른 지방 출신들도 만만찮게 부역했지만 개인이 아닌 지역 단위로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치당의 표밭으로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에 오르게 만들고 독재자까지 오르게 한 발판이자 독일을 침략적 외교정책으로 등떠밀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오데르-나이세 선 동부 지방은 단순히 무고한 피해자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더구나 주민 숫자만으로 영토를 나눈다면, 지금은 독일인들을 모두 쫓아냈으니 '정당한' 영토인 셈이 되고 실향민을 받아들여서 독일계 주민이 많아지면 다시 '정당한' 독일 영토가 되는 식이 되어버리며 독일인 실향민들 중에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폴란드인들을 내쫓은 이후 독일인들을 정착시킨 경우'''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치 독일은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갈라먹은 뒤 폴란드 서부 지역은 독일에 병합시켰고, 나머지 폴란드 중부지역은 총독부(Generalgouvernment)를 두어 따로 통치하였다. 독일에 병합된 서부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학살당하거나 폴란드 중부지역으로 강제이주되었으며, 그 자리는 독일인들이 차지했다.[8] 예를 들어 폴란드의 맨체스터라 불릴 정도로 섬유 공업이 번성했던 우치(Łódź) 시의 경우, 전쟁 전에는 독일인이 전체 시민의 9%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유대인 25만여 명과 폴란드인 15만여 명이 추방되어 그 대부분이 학살되었고, 그 자리를 15만여 명의 독일인이 차지했다.[9] 독일 내에 살고 있던 폴란드인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폴란드 침공 직전에 이미 독일 내에 살고 있던 2천여 명의 폴란드계 독일인 시민들이 탄넨베르크 작전으로 인해 학살되었다.[10] 폴란드 서부 지역뿐만 아니라 폴란드 전역에서 이러한 일이 행해졌으며, 독일의 이런 식민행위로부터 폴란드 시민들을 방어하기 위한 폴란드인들의 무장저항운동도 펼쳐졌다.
지금도 UN의 규칙에서 옛 추축국이 불온한 분위기를 보이면 선전포고없이 옛 연합국이나 주변국이 개전해도 무방하다는 항목이 남아있으며, 독일 또한 전범국으로 당당하게 지정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 자체가 다른 영토분쟁적 전쟁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게다가 폴란드는 국가가 망한 상황에서도 영국에 임시정부를 두고 연합국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이다.[11] 어느 정도냐면 유럽 전선 연합군 중에서는 폴란드가 소련, 미국, 영국 다음으로 규모가 거대했으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모두 합쳐 60만 명이 정규군으로, 국내에서는 100만여 명이 저항군에 참여했다. 막판에 연합국이라고 줄서기한 국가와는 달리 수십만명이 타국까지 가서 해당 국가의 군대로 당당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세계대전에 참여했으며, 그 형태도 격전의 연속이었다. 폴란드가 힘싸움에 밀려 패배한 국가라서 피해자가 될 수 없으므로 프로이센 또한 독일에게 반환되어야 한다면 2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의문이며 같은 논리로 폴란드에겐 패전한 독일영토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당장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패배한 측에는 막대한 배상금이 청구되었으므로 이 권리는 정당하다.
결정적으로 배상 문제에 관해서, 폴란드는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에게 배상금을 요구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스탈린이 동독에서 뜯어낸 배상금 중 15% 정도만을 폴란드가 받았을 뿐, 정식으로 폴란드가 배상을 요구해서 이를 받아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폴란드는 소련과 더불어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폴란드의 영토 변화를 결정한 것은 스탈린과 연합국이었다. 폴란드는 오히려 전쟁 전의 국경 회복을 원했다.
마지막으로 무엇 때문에 주변국들이 그렇게 독일의 영토문제와 실향민 문제에 민감한지도 생각해야 한다. 이는 바로 "게르만계 주민이 살고 있으니 우리땅"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침략해서 2차 세계대전 개막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민족을 없애고 우리가 더 많이 정착하면 우리땅"이라면서 인종청소를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러시아에서는 제대로 시도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몇몇 SS의 전쟁범죄 수준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2.4. 역사적 영토개념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관점
프로이센 지역이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에 속해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단, 고정적인 국경성과 배타적인 영토라는 개념 자체가 길게 잡아도 근대, 짧게 잡으면 현대 이후에나 성립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지리학적 기술과 행정력이 부족했던 근대 이전의 국경은 양국의 영향력이 대항하며 일진일퇴하거나,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거나, 양국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지역'''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더구나, 유럽 가톨릭 문화권의 경우 고정적인 국경과 배타적인 영토 개념을 따지는 것이 더욱 무의미해진다. 이 문화권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의 영향력과 로마 제국의 역사적 유산에 의한 높은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고, 왕권보다 영주권이 우선시되는 봉건제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영토 개념보다 지역 개념이 사람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 지역의 영주가 봉신 계약의 대상을 바꾸면 하루아침에 그 지역의 주권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12]
언어나 민족 구성원을 바탕으로 근대 이전 유럽의 영토 개념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며 그나마 유럽에서 가장 먼저 민족 국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는 프랑스조차 19~20세기에 이르러서야 영토 전체에 대해 '프랑스어'를 이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왕이 죽으면 혈통 따져보다가 그냥 이웃 나라 왕을 데려다가 왕으로 앉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조약이나 협상 등으로 이 나라 영토를 저 나라에 떼어다 붙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다시 말하지만, 근대 이전의 유럽에는 현대 한국인이 생각하는 국가라는 건 없다. 현재 국제정치학이나 국제법 등에서 다루는 소위 '주권 국가'란 1648년 베스트팔렌(웨스트팔리아) 조약을 계기로 태어나 나폴레옹 시대 등을 거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2차대전 이전의 영토 개념을 따져서 어느 땅이 어느 나라 영토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하물며 11세기~13세기의 영토 개념을 따지는 건 정말 무의미한 짓이다. 근대 국가 정도까진 바라지도 않고, 그나마 중세 말기 서방 교회 대분열이나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발전한 국제법이나 주권에 대한 담론이나 관행도 존재하지도 않던 시대의 영토 개념으로 근대 국가의 영토를 어떻게 따지는지도 문제이고 여긴 그나마 배타적인 영토 개념이 있던 동아시아도 아니다. 결혼 한방에 영토와 왕위가 왔다 갔다 하던 유럽이다. 당장 폴란드만 하더라도 국왕을 선거로 뽑았고, 이들 국왕은 주로 외국 출신이 많았다. 폴란드만 예외가 아니라, 에스파냐의 경우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의 발발 이유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그 후계자를 놓고 프랑스와 다른 나라들이 심하게 싸워댔다.
이 논의의 중심인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에 좀 더 집중해 보자면, 사실 양측 주장 모두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이 폴란드의 정당한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지는 본래 폴란드의 영향권이었던 프로이센 지역을 튜튼 기사단이 정복하였으나, 폴란드가 다시 정복하였으므로 폴란드의 정당한 영토라는 것인데 프로이센 지역 등 발트 연안 자체가 유럽 최후의 이교도 영역이었던 곳을 폴란드, 스웨덴, 튜튼 기사단 등 기독교 세력들이 성전이랍시고 정복했다가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던 곳이라 정복했던 적이 있으니 정당한 영토다라는 논지라면 삼국의 폴란드 분할도 정당하고, 나치의 폴란드 점령도 정당하다.
그리고 프로이센이 정당한 독일 영토라는 주장 역시 같은 이유로 말이 안 된다. 19세기 이전에는 독일이라는 나라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실존하지 않던 국가의 정당한 영토는 따질수도 없다. 보통 이런 주장은 독일 국가의 성립에 있어 중심 역할을 했던 프로이센의 영토 개념을 기반으로 이뤄지지만, 이는 일단 현재의 독일 연방공화국이 곧 프로이센의 후계국가라고 볼 수 있을지부터 의심스럽고, 더 나아가 현대 독일이 프로이센의 후계국가라고 한다면, 독일 국가에 합류한 다른 독일계 영방국가들의 주권과 영토권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도 애매한 문제가 된다. 현대 독일이 프로이센의 후계국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프로이센의 영토는 곧 독일 영토여야 한다는 주장의 당위성이 사라지고, 반대로 현대 독일이 곧 프로이센의 후계국가라고 한다면 반대로 현대 독일 국가에 합류한 프로이센 이외 국가들의 영토에 대한 독일의 영유권이 정당한지가 의심스럽게 된다. 더 나아가, 프로이센(과 그 전신인 튜튼 기사단) 자체가 일개 무장집단으로 시작해서 정복을 통해 성장한 국가라는 점을 생각하자. 애초부터 따지면, 튜튼 기사단은 영토가 없었고, 프로이센 역시 정복을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한 국가다. 이에 대하여 튜튼 기사단과 프로이센이 차지한 영토는 정당한 영토지만, 다른 나라가 이 영토를 차지하면 그것은 부당한 점거라는 극단적인 편향을 범하지 않는 한 이 역시 튜튼 기사단->프로이센->현대 독일의 계승성을 주장하여 프로이센에 대한 독일 영유권을 주장할 경우 독일의 영토 전체가 부당점거를 통해 획득된 것이니 독일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극단적인 자기 파괴적 논지에 이를 수도 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 국경선을 결정하는 데 전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던 조건들을 가지고 국경선을 어떻게 그어야 할지 판단하자고 하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3. 소련의 폴란드 영토 강탈여부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논란도 문제이지만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등 구소련권 주변국가들의 국경선 역시 폴란드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소련과 폴란드의 국경이 전쟁으로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폴란드 왕국 시절에도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국경은 유동적이었으며, 폴란드와 러시아 모두 여러 작은 왕국들을 합병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진다. 2차 대전 후 확정된 국경선으로 놓고 보면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가 있는데, 이 두 나라를 구성하는 주요 민족인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오랫동안 민족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러시아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모두 키예프 공국의 후계 국가이긴 하지만 갈라진 지도 수백 년이 넘어서 상당한 이질화를 겪었다. 특히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왕국 시절에는 폴란드와 연합했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소련의 영토였다는 점 때문에 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3.1. 스탈린이 폴란드의 영토를 강탈했다는 주장
폴란드 왕국의 경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폴란드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땅을 조금이라도 수복했는데, 그나마도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도로 빼앗겼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리투아니아는 강제로 소련에 병합된 곳이다. 강제병합은 해당 국가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점령한 국가의 옛 영토까지 노리는 국가가 있다면 그게 바로 나치 독일이 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1차 대전 이후의 상황을 보더라도 폴란드가 소련 땅을 점유했다고 하지만, 분쟁 이후 양국 간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진 선이 2차대전 발발 전의 폴란드-소련 국경이었다. 게다가 독일-폴란드 간 분쟁처럼 폴란드의 원 점유영역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1차대전 이후 폴란드 공화국보단 폴란드 왕국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삼아야 형평성이 맞는 법이다. 독일-폴란드간 프로이센 논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또한 폴란드가 자기주권 주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준을 1차 대전 이후보단 폴란드 왕국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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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스탈린은 일찍이 정해진 커즌 선 국경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 우크라이나의 리비우가 대표적.
3.2. 스탈린은 정당한 소련 영토를 수복했다는 주장
스탈린이 폴란드의 영토를 집어삼켰다고 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점이, 스탈린이 집어삼켰다고 하는 폴란드 영토라는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할 때는 러시아의 영토로 분류되었는데 그 후에 폴란드가 전쟁에서 소련군을 격파하고 점령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겨울전쟁과는 달리 소련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 아니라, 엄연히 내전 중의 러시아를 쳐서 영토 확장을 노린 폴란드 측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었다.[13]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국경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전의 국경이었던 커즌 선을 회복한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은 소련이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립 당시에 미처 회복하지 못한 영토를 전쟁을 통해서 정당하게 수복했던 것뿐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탈린에게 다시 빼앗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소련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이루었던 리투아니아는 1940년부터 소련의 일부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폴란드가 소련과의 경계를 정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전체 영토를 주장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물론 코사크 대반란으로 상실한 우크라이나는 원래부터 열외. 리투아니아 입장에서는 소련의 일부가 된 것에 대해서 이의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폴란드 측에서 영토를 요구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폴란드가 차지했던 영토의 주민은 리투아니아 지방에 살던 폴란드인을 제외하면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인으로서 폴란드계도 아니었는데, 실제로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내세운 명분은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폴란드 지역의 우크라이나인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미리 독일 측과 짜고 계획한 것이지만.
즉, 이런 영토 분쟁이 언제나 그렇듯이 폴란드 입장에서는 역사적 영토를 빼앗긴 것이지만 소련 입장에서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수복한 것이었다. 어쨌든 현재는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폴란드 정부는 영토 수복을 포기한 상태이고, 현재 저 땅은 폴란드도 러시아도 아닌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땅으로 남아있다. 단, 폴란드 정치권과 달리 민간에서는 해당 영토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해당 영토의 수복을 주장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역사적 영유권이 폴란드에 있다는 의견은 제법 많다.[14] 이는 한국의 '만주 회복' 주장과도 비교할 수 있다. 어쨌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에는 폴란드가 지배했었던 데다 폴란드의 역사와 매우 깊이 연관된 영토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4. 결론
유럽의 상황이 '''굉장히''' 크게 변하지 않는 한 독일이 이 지역들을 수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1990년 재통일의 조건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였을 정도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슐레지엔, 포메른, 동프로이센, 칼리닌그라드 등 구 독일령 프로이센 지역을 차지한 러시아나 폴란드가 이들 지역들을 독일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러시아에게 칼리닌그라드는 요충지 중 하나이며, 폴란드도 이제 와서 현 영토의 약 1/3에 달하는 구 프로이센 지역을 돌려준다는 것은 스스로 반병신이 되겠다는 소리다. 즉 해당 지역을 독일이 이제와서 영토를 돌려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독일도 상대 측에서 알아서 준다면 모를까, 자발적으로 받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동독 지역 처리만으로도 골치 아픈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미 폴란드가 EU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솅겐조약에 가입한 상태라 '''독일에서 폴란드 소속인 서프로이센, 슐레지엔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독일 시민들이 별도 비자나 폴란드 시민권 취득 없이도 이들 지역에서 영구히 눌러앉을 권리가 있기에''' 굳이 외교적으로 무리수를 두면서 수복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완전한 유럽통합으로 국경선이 없어지는게 더 쉬운셈
그나마 폴란드 입장에서 의미가 있는 지역은 리비우(폴란드어로 르부프) 정도. 이 도시에는 놀랍게도 폴란드인 축구팀이 있다. 소련에 넘어가며 사라진 팀이었지만 2009년에 재건한 것이다.
한편 스탈린은 아데나워에게 서독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독일에게 1937년 당시의 영토를 보장해준다고 했다. 아데나워는 당연히 거절했다.
[1] 단 벨기에와 서프로이센의 차이점은 벨기에는 프랑스계인 왈롱계와 네덜란드계인 플랑드르인들이 주민으로 애초부터 이베리아인들과는 상관이 없지만 서프로이센은 독일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단치히를 제외하고는 폴란드인 그리고 같은 슬라브계인 카슈브인이 다수라는점이 차이다.[2] 동프로이센은 Duchy of Prussia/Herzogtum Preußen, 즉 프로이센 공국.[3] 튜튼 기사단이 진출할 당시 폴란드는 분열 공국 시기로, 나라가 무슨 신성 로마 제국 마냥 여러 개의 공국으로 쪼개져서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다.[4] 단 당시 비스와 강 서안은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으며 슬라브계인 포메라니아인들이 살았고 동안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동일 계열인 발트계 제부족들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거주했다. 튜튼 기사단이 폴란드 영토를 차지했다는 것은 비스와 강 이서지역 한정이다. 비스와 강 이동은 프루스 이교도의 영토는 기독교도인 폴란드인들의 것이라는 명목상의 지배권만을 주장했지, 토룬-헤움노 사이의 쿨메를란트(Kulmerland)라는 아주 작은 땅을 제외하고는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 토룬-헤움노 지방도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1세가 능력도 안 되면서 프로이센 정복하겠다고 전 프로이센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가 역관광당하고 자기 영지인 마조비아마저 위험해지자 튜튼 기사단을 불러서 토룬-헤움노 지방을 의뢰금으로 양도하고 영지 방어를 의뢰했던거다. 당시 헝가리에서 쫒겨나고 망해가는 성지에 눌러붙을 수도 없는 튜튼 기사단은 옳거니 하고 정착해서 십자군으로 프루시 부족 영토를 점령했다.[5] 위에 주석에도 나왔듯이 당시엔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이라는 명칭이 없었고 서프로이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스와 강 이서지방은 폴란드 땅이였던 포메라니아고 비스와 강 이동지방은 프러시아인의 땅으로 그냥 프로이센이라고 불렸다. 당시엔 완전히 역사적, 민족적 배경이 완전히 별개인 땅이다. 포메라니아인이 폴란드에 귀속 요청을 했다고 프러시아인들이 폴란드인으로 정체성을 가진게 아니다.[6] 당시 폴란드의 국왕은 '''전 유럽의 국왕을 통틀어 그 권력이 가장 약한 군주'''였다. 폴란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슐라흐타(Szlachta)라 불리는 토착 귀족 세력으로서, 넓은 영지와 적지 않은 인구 비율(10%), 강력한 군사력을 권력 기반으로 삼고 있던 이들이 강력한 폴란드 국왕의 출현을 경계하였기에 폴란드 국왕은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느 1572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Zygmunt II August)가 사망하여 야기에우워(Jagiełło) 왕가가 끊긴 이후에는 폴란드가 선거왕제, 즉 왕을 투표로 뽑는 제도를 시행하면서 귀족들의 권력을 더 강해졌고 국왕의 세는 더 약해졌다. 물론 폴란드 귀족들을 능숙하게 통제하고 이반 4세가 이끈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같은 능력자도 있었지만 폴란드의 국왕의 권력은 귀족에 비하면 미미했다.[7] 최대한 핑계거리를 대자면 독일 전체적으로 보면 산업화 인구밀집 도시화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나치당 지지률이 낮고 사민당, 공산당 지지자들이 많지만 인구밀도가 낮고 도시화, 산업화률이 낮은 농촌지방은 나치당의 지지자들이 많기에 슐레지엔을 제외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독일 영토가 후자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상황이 비슷한 다른 농촌지방들과 비교했을 때 유달리 나치당 지지율이 높았고 특히 라인 강 루르 공업지대에 이어서 독일 제2의 공업지대인 산업화,도시화률이 매우 높던 슐레지엔은 오데르 강-나이세 강 이서의 농촌지방마저 능가할만큼 나치에 열광했다. 그나마 동쪽끝 색깔이 다른 오버슐레지엔의 경우는 과반에 근접하게 폴란드인들이 집중 거주해서 나치당 지지율이 낮아진거다.[8] http://en.wikipedia.org/wiki/Expulsion_of_Poles_by_Nazi_Germany[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0606&cid=40942&categoryId=34118[10] 위키피디아 참조.[11] 결국 이들은 공산국가가 성립된 후 레흐 바웬사 정부가 유지될 때까지 런던에서 그 이름을 유지하다가 동구권 붕괴 이후에야 다시 돌려주었다.[12] 동군연합 같은 걸 생각해보면 결혼 등의 이유로 금세 나라가 합쳐지기도 했다.[13] 다만 단순히 폴란드의 영토욕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기엔 전쟁의 배경이 상당히 복잡하다. 해당 항목 참고.[14] 폴란드가 대신 얻은 영토인 독일 제국 동부령은 산업 기반이 튼실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폴란드가 원했던 영토는 아니다. 폴란드는 마지막까지도 폴란드 제2공화국 국경선으로의 복귀를 원했다. 게다가 산업 기반이 튼실하다고는 해도 폴란드가 상실한 영토는 새로 얻은 영토의 2배에 육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