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바다가극단
북한의 종합예술단. 가극단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가극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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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 모체는 1946년에 창단된 북조선가극단이다. 이 가극단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김순남의 '인민유격대'와 이면상의 '춘향전' 같은 북한 초기 오페라의 공연을 맡았고, 전후에도 명칭 개명 없이 계속 가극 상연 위주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평양대극장이 완공되자 상주 단체로 들어가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김정일이 북한 문화예술계의 실권자로 등장하면서 가극단의 성격도 변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1971년에 초연된 혁명가극 '피바다'에서 이름을 따 피바다가극단으로 개칭되었다. 저 가극은 이후 연이어 발표된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와 함께 북한에서 5대 혁명가극으로 칭하고 있을 정도로 상징성이 강하며, 이후에도 계속 공연되어 2002년에는 총 공연 횟수가 1,500회를 돌파하는 등 가극단의 기본이자 최우선 공연 레퍼토리로 굳어져 있다.
명칭 변경과 동시에 국립가무단과 조선국립교향악단, 영화 및 방송음악단의 단원들이 대거 편입되면서 편제도 대규모화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피바다'의 창작과 상연에 대한 공로로 김일성훈장을 받았고, 중국을 비롯한 우방국에도 파견되어 해외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2008년 무렵부터는 가극 공연 비중이 더욱 확대되어, 각각 만수대예술단과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주로 상연하던 '꽃파는 처녀'와 '당의 참된 딸'을 넘겨받아 상연하고 있다. 2009년 3월에는 중국 문화부의 후원을 받아 1961년 상연된 후 묻혀있던 중국 경극을 소재로 한 북한 가극 '홍루몽'을 40여 년 만에 리바이벌해 화제가 되었고,[1] 이듬해 9월에는 중국 설화를 바탕으로 한 오리지널 중국 가극 '양산백과 축영대'를 문화어로 번안해 상연하는 등 외국 소재 혹은 외국 작품의 공연이 조금씩 늘고 있다.
북한의 여타 종합예술단들과 마찬가지로 이 가극단도 독창 가수들과 무용단, 합창단, 관현악단, 무대기술진 등 가극 공연에 필요한 모든 인원을 단원으로 보유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이 악단에 소속 혹은 부속되어 있던 조선국립교향악단을 비롯한 다른 단체가 독립한 뒤에도 큰 인원 변동 없이 활동하고 있는데, 국립교향악단을 부속 단체로 거느리고 있던 흔적은 가극단 소속 관현악단을 '교향악단'이라고 칭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다.[2]
가극 공연이 주가 되는 만큼 북한에서 창작된 수많은 오페라를 비롯한 무대 작품을 초연한 경력을 갖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도 혁명가극 계보를 이은 '사랑의 바다'를 초연하는 등 북한 혁명가극 창작과 상연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5대 혁명가극 외에 다른 신작 상연 소식이 북한 언론에 언급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비중이 약간 줄어든 듯 하다.
물론 가극 외에도 민속무용조곡 '계절의 노래' 같은 무용극 계통의 레퍼토리도 보유하고 있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노래들이나 합창곡, 무용 소품 등을 공연하고 있다. 본거지인 평양대극장 외에도 당창건 기념일이나 조선인민군 창군일 등의 특별 공연 때는 다른 예술단과 합동으로 공연하거나 인민문화궁전이나 동평양대극장 등 평양 시내의 여타 공연장을 이용해 출연하기도 한다. 이외에 평양이나 여타 지역에서 경제선동을 위한 지방 공연도 종종 하고 있다.
조선로동당 직속인 만수대예술단의 포스에는 약간 못미치지만, 이 가극단도 이런저런 칭호를 받은 유명 예술인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조선적 출신 예술인들도 종종 눈에 띄는데, 피바다에서 주인공인 어머니 역을 맡았던 여성중음(메조 소프라노) 가수 조청미나 안무가 김목룡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단장(북한에서는 총장이라고 함)은 김수조가 맡고 있었지만, 2010년 11월 말 병사한 뒤로 후임은 불명이다.
약력 란에 언급한 것처럼 2000년대 후반 들어 중국과의 접점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특히 2008년 4월 중순부터 5월 말 사이에 있었던 '꽃파는 처녀'의 중국 순회 공연은 꽤 흥했는지 5월 31일에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추가 공연을 열기도 했다. 이후에도 심지어 1960년대에 나가리시킨 작품이나 중국 작품 번안한 것까지 공연할 정도면 북한도 어지간히 중국의 도움이 급한 모양이다.
끔찍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 가극단이 1979년 중국에서 공연을 마치고 조선민항(현 고려항공) 항공기를 이용해 돌아오던 중, 순안국제공항에서 버드 스트라이크로 비행기가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숨져 피바다가 된 무시무시한 참사가 있었다. [3]
2014년에는 이 가극단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평양음악무용대학의 황상혁 교수가, 중국에서 열리는 교육연수에 다른 단원 30여 명과 참석했다가 실종되었다. 북한 당국에서는 이를 탈북으로 여기고 중국 정부에 체포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6년 뒤인 2020년 황 교수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하였다. 황 교수에 따르면 본인은 이 가극단 소속은 아니었고, 본인이 이끌던 팀의 구성원 중 절반이 피바다 출신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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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력
직계 모체는 1946년에 창단된 북조선가극단이다. 이 가극단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김순남의 '인민유격대'와 이면상의 '춘향전' 같은 북한 초기 오페라의 공연을 맡았고, 전후에도 명칭 개명 없이 계속 가극 상연 위주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평양대극장이 완공되자 상주 단체로 들어가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김정일이 북한 문화예술계의 실권자로 등장하면서 가극단의 성격도 변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1971년에 초연된 혁명가극 '피바다'에서 이름을 따 피바다가극단으로 개칭되었다. 저 가극은 이후 연이어 발표된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와 함께 북한에서 5대 혁명가극으로 칭하고 있을 정도로 상징성이 강하며, 이후에도 계속 공연되어 2002년에는 총 공연 횟수가 1,500회를 돌파하는 등 가극단의 기본이자 최우선 공연 레퍼토리로 굳어져 있다.
명칭 변경과 동시에 국립가무단과 조선국립교향악단, 영화 및 방송음악단의 단원들이 대거 편입되면서 편제도 대규모화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피바다'의 창작과 상연에 대한 공로로 김일성훈장을 받았고, 중국을 비롯한 우방국에도 파견되어 해외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2008년 무렵부터는 가극 공연 비중이 더욱 확대되어, 각각 만수대예술단과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주로 상연하던 '꽃파는 처녀'와 '당의 참된 딸'을 넘겨받아 상연하고 있다. 2009년 3월에는 중국 문화부의 후원을 받아 1961년 상연된 후 묻혀있던 중국 경극을 소재로 한 북한 가극 '홍루몽'을 40여 년 만에 리바이벌해 화제가 되었고,[1] 이듬해 9월에는 중국 설화를 바탕으로 한 오리지널 중국 가극 '양산백과 축영대'를 문화어로 번안해 상연하는 등 외국 소재 혹은 외국 작품의 공연이 조금씩 늘고 있다.
2. 편성과 활동 양상
북한의 여타 종합예술단들과 마찬가지로 이 가극단도 독창 가수들과 무용단, 합창단, 관현악단, 무대기술진 등 가극 공연에 필요한 모든 인원을 단원으로 보유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이 악단에 소속 혹은 부속되어 있던 조선국립교향악단을 비롯한 다른 단체가 독립한 뒤에도 큰 인원 변동 없이 활동하고 있는데, 국립교향악단을 부속 단체로 거느리고 있던 흔적은 가극단 소속 관현악단을 '교향악단'이라고 칭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다.[2]
가극 공연이 주가 되는 만큼 북한에서 창작된 수많은 오페라를 비롯한 무대 작품을 초연한 경력을 갖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도 혁명가극 계보를 이은 '사랑의 바다'를 초연하는 등 북한 혁명가극 창작과 상연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5대 혁명가극 외에 다른 신작 상연 소식이 북한 언론에 언급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비중이 약간 줄어든 듯 하다.
물론 가극 외에도 민속무용조곡 '계절의 노래' 같은 무용극 계통의 레퍼토리도 보유하고 있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노래들이나 합창곡, 무용 소품 등을 공연하고 있다. 본거지인 평양대극장 외에도 당창건 기념일이나 조선인민군 창군일 등의 특별 공연 때는 다른 예술단과 합동으로 공연하거나 인민문화궁전이나 동평양대극장 등 평양 시내의 여타 공연장을 이용해 출연하기도 한다. 이외에 평양이나 여타 지역에서 경제선동을 위한 지방 공연도 종종 하고 있다.
조선로동당 직속인 만수대예술단의 포스에는 약간 못미치지만, 이 가극단도 이런저런 칭호를 받은 유명 예술인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조선적 출신 예술인들도 종종 눈에 띄는데, 피바다에서 주인공인 어머니 역을 맡았던 여성중음(메조 소프라노) 가수 조청미나 안무가 김목룡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단장(북한에서는 총장이라고 함)은 김수조가 맡고 있었지만, 2010년 11월 말 병사한 뒤로 후임은 불명이다.
약력 란에 언급한 것처럼 2000년대 후반 들어 중국과의 접점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특히 2008년 4월 중순부터 5월 말 사이에 있었던 '꽃파는 처녀'의 중국 순회 공연은 꽤 흥했는지 5월 31일에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추가 공연을 열기도 했다. 이후에도 심지어 1960년대에 나가리시킨 작품이나 중국 작품 번안한 것까지 공연할 정도면 북한도 어지간히 중국의 도움이 급한 모양이다.
3. 여담
끔찍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 가극단이 1979년 중국에서 공연을 마치고 조선민항(현 고려항공) 항공기를 이용해 돌아오던 중, 순안국제공항에서 버드 스트라이크로 비행기가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숨져 피바다가 된 무시무시한 참사가 있었다. [3]
2014년에는 이 가극단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평양음악무용대학의 황상혁 교수가, 중국에서 열리는 교육연수에 다른 단원 30여 명과 참석했다가 실종되었다. 북한 당국에서는 이를 탈북으로 여기고 중국 정부에 체포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6년 뒤인 2020년 황 교수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하였다. 황 교수에 따르면 본인은 이 가극단 소속은 아니었고, 본인이 이끌던 팀의 구성원 중 절반이 피바다 출신이었다고.
[1]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과 중국 관계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이후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서로를 '극좌 깡패네' '쏘련 후빨러네' 하면서 신나게 물고 뜯었다. 특히 일부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관료주의'''라고 극딜하면서 관계가 막장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친선관계 속에서 나온 이 작품도 자동적으로 흑역사화 되었다.[2] 다만 서양악기가 중심인 국립교향악단과 달리, 피바다가극단 교향악단은 북한 개량악기와 서양악기가 동등한 비율로 편성된 '전면 배합관현악'편성을 취하고 있다.[3] 여담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 악단인 알렉산드르 합창단이 이 항공기와 똑같은 기종이 추락사고를 낸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