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립교향악단

 



한자: 朝鮮國立交響樂團
영어: State Symphony Orchestra of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평양을 본거지로 하는 북한의 대규모 관현악단. 이 항목의 호칭은 주로 대외 활동이나 홍보에 사용하고, 북한 내에서는 '평양국립교향악단' 또는 그냥 '국립교향악단'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 약력
2. 지휘자
2.1. 역대 수석 지휘자
3. 편성과 활동 양상
4. 남북/해외 예술 교류
5. 공연 동영상


1. 약력


[image]
북한의 음악공연 단체들 중 가장 먼저 창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46년 8월 8일에 작곡가 리면상을 단장으로 '중앙교향악단' 이라는 명칭으로 창단했고, 동시에 첫 공연을 개최했다. 다만 이 때의 편성은 실내 관현악단 수준으로 대단히 아담한 편이었는데, 이듬해 1월에 단원을 보강해 2관 편성[1]으로 확대했다.
1948년에는 국립예술극장 산하의 연주 단체로 편입되었고, 악단의 독자 공연 외에 예술극장에서 상연된 연극이나 오페라 등 무대 작품의 반주를 맡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활동이 위축되었지만, 휴전 후 월북 혹은 납북 음악인들이 단원으로 대거 편입되어 체제 정비가 이루어졌다.
1956년에 일단 독자적인 음악 단체로 독립했는데, 당시 잡지나 신문 등의 기사를 보면 관현악 연주회를 중점적으로 개최하면서 서양 명곡들과 북한 작곡가들의 관현악 작품들을 골고루 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중반에는 대중음악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한 시도였는지 빅 밴드 형태의 부속 경음악단을 조직해 북한 가요 뿐 아니라 외국 노래들까지 연주하기도 했고,[2] 1966년 4월에는 부속 음악학원까지 만들어 청소년 연주가 육성까지 시도한 바 있다.[3] 1967년에는 악단 명칭이 잠시 '천리마국립교향악단' 으로 바뀌었다가 얼마 안 가 환원되었고,[4] 1969년에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부속 관현악단과 통합되어 OST 녹음을 주요 활동으로 삼기도 했다.
뽀글이가 문화예술 부문에서 본격적으로 지도를 시작한 1971년에는 피바다가극단 산하 관현악단으로 다시 소속이 바뀌었고, 이 기간 동안에는 가극단의 공연 반주 외에 '아리랑',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내 고향의 정든 집', 교향곡 피바다, 바이올린 협주곡 '사향가', 피아노 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등 노래를 기반으로 창작된 관현악 작품들을 초연하고 보급하는데 주력했다.
1980년에 두 번째로 독립했고, 명칭도 현재의 것으로 바꾸었다. 1982년에는 방북한 재독 작곡가 윤이상을 위해 '광주여 영원히' 를 연주했는데, 북한에서 현대음악이 공연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윤이상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 되었고, 1986년 폴란드 순회 공연 중 현대음악제인 바르샤바의 가을 음악제에 참가해 윤이상의 클라리넷 협주곡과 교향곡 제1번 등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불가리아, 루마니아, 동독, 중국, 소련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순회 공연했고, 1992년에는 일본을 방문해 공연하기도 했다.[5]
2000년에는 김일성훈장을 수상했고, 동시에 북한 유일의 음반사인 광명음악사에서 악단 명의의 CD를 발매하기 시작해 2011년 현재까지 모두 23장이 발매되어 있다.[6] 초기에는 모두 북한 창작곡만이 수록되었지만, 2005년부터는 '외국음악집' 이라는 부제로 쇼스타코비치교향곡 7번차이콥스키의 이탈리아 기상곡, 중국 작곡가들의 집단창작 피아노 협주곡인 황하 협주곡,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 기타 유명한 소품들의 편곡이 담긴 세 종류의 CD가 나오기도 했다. CD 외에는 목란비데오에서 제작한 공연 실황 DVD가 두 종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이들 물품들은 2005년도부터 총 3회 발매가 된 외국음악을 100% 녹음한 외국음악집을 제외하고는 얄짤없이 모두 수입 금지 품목이지만, 정치적 문제의 소지가 거의 없는 민요 편곡 작품의 음원들은 신나라레코드에서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들인 '민요 삼천리' 와 '아리랑 환상곡' 에 실려 있어서 들어볼 수 있다. 바르샤바에서 공연한 윤이상의 교향곡 제1번과 평양에서 공연한 실내합주곡 '낙양',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와 '광주여 영원히' 의 녹음들을 담은 일본 음반사 카메라타(Camerata)의 CD들도 한국에 정발되어 있다.
최근 창립 70주년을 맞아 기념음악회를 진행했는데 전 창작 창조부장인 김병화가 간만에 출연해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지휘했다.

2. 지휘자



2.1. 역대 수석 지휘자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임기는 대부분 추정치로 잡았다.
  • 김기덕 (1946~1950년대 중반 또는 후반)
  • 허재복 (1950년대 중반 또는 후반~1969)
  • 김병화 (1969~2007)
  • 장룡식 (2007~현재) -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의 단장과 수석 지휘자로 겸직중이다.관련 기사. 다만 활동 비중은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의 활동 비중이 높은 편이다
이외에 부수석 지휘자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한 유학파 출신인 공훈예술가 채주혁이 있으며 차석 지휘자로는 방철진, 허문영(지휘자)이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에도 알려진 유명 타악기 연주자와 동명이인인 리진혁도 2020년 일자 미상으로 객원 지휘자로 활동중이다.

3. 편성과 활동 양상


기본적으로 3관 편성의 서양 관현악단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평양음악대학 같은 교육 기관이나 다른 관현악단, 예술단들의 협조를 얻어 4관 편성으로도 확대가 가능하다. 서양악기 위주의 편제이기는 하지만 저대단소, 장새납북한에서 개량한 민족관악기(죽관악기) 연주자들도 정식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북측의 설명에 의하면 부분 배합관현악 체제를 취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 들어 트럼펫트롬본 파트에 추가 인원이 배치되기 시작했는지, 곡에 따라 각각 대여섯 명 씩의 트럼페터와 트롬보니스트가 연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종합적이고 집약적인 공연을 위해 지휘자 외에도 작곡가, 독주자, 독창자, 무대 연출가, 녹음/녹화 기사, 응급 의료진, 극장 관리자 등 공연과 관련된 거의 모든 직책의 인물들을 정식 단원으로 기용하고 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거의 160명 이상이 단원으로 배속되어 있는 셈인데, 실제 관현악단 단원들은 대략 120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초기에 관현악단 단원들은 주로 남성들만으로 편성했는데, 2000년에 서울 공연을 했을 때도 여성 연주자는 하프 연주자 한 사람 뿐이었을 정도로 남성 연주자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소속 단원들 중 일부가 고령으로 은퇴하거나 은하수관현악단 등으로 재배치되어 결원이 생기게 되자, 여성 단원들도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현악 파트에서 몇 명씩 뽑고 있다.
2011년 입단한 바이올리니스트 김일향은 제2바이올린 수석을 역임하고 있는데, (하프 파트를 제외한) 이 악단 현악 파트 최초의 여성 수석 연주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외에도 2012년 공개된 연주 동영상에서 클라리넷 파트의 여성 연주자 한 사람이 또 확인되었다. 소속 지휘자들 중에도 제2대 수석 지휘자인 허재복의 딸 허문영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서울 공연 당시 수석 지휘자는 조선적 재일교포 출신인 김병화가 맡고 있었는데, 2010년 11월에 김정일이 공연을 보았다는 기사가 북한 언론에서 떴을 때는 악단 수석 지휘자로 김병화가 아닌 장룡식이 언급되어 이 시기를 전후해 직위 교체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전임 수석 지휘자였던 김병화는 1936년생으로 70대를 넘긴 고령이기 때문인지, 지휘 일선에서 물러나 행정직인 창작창조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워낙 고령인 때문인지 년로보장[7] 했다.
그리고 김병화의 후임이었던 장룡식도 2014년 5월 16~17일에 열린 제6차 전국예술인대회 토론회에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의 단장 겸 수석 지휘자 직함을 달고 등장해 이 악단의 직책은 퇴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알려졌으나 2018년에 삼지연관현악단이 한국에 방문해 공연하면서 한국의 인터넷 언론에서 확인 한 바로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의 단장 겸 수석 지휘자 겸 이 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겸직중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활동 비중은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의 비중이 높다. 2000년 후반 이후로는 오스트리아의 빈 음악대학 지휘과에서 유학하고 온 채주혁과 방철진이 특히 자주 출연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지휘자 및 이 악단 객원 지휘자 겸직중인 리일찬, 만수대예술단 단장 겸 지휘자 김일진을 비롯해 김정균, 조광, 최광성, 한영상, 조정림, 김용건, 김주혁, 리철웅 등 여타 북한 지휘자들이 이 악단과 공연한 기록이 있다.
악장(콘서트마스터)은 1990년대 후반까지 월북 음악인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리계성이 맡고 있었지만, 2000년 서울 공연때는 북한 출신인 최기혁이 직책을 인계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단장은 2000년 당시 허이복이 맡고 있었지만, 2007년 6월에 병으로 사망한 뒤 후임으로 악단 작곡실장이었던 작곡가 김연규가 2015년 현재까지 재직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연규의 후임으로는 김병화와 마찬가지로 조선적 재일교포 출신인 강수기가 작곡실장을 맡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악단 단독 연주회를 많이 하지만, 경우에 따라 만수대예술단이나 여타 단체의 기악 합주 쪽에 몇몇 단원들이 객원으로 참가하는 경우도 있다. 2008년에는 공훈국가합창단과 합동으로 재창작한 가요 '눈이 내린다' 의 남성합창과 관현악판 편곡을 당시 합창단 지휘자였던 리일찬의 지휘로 공연했는데, 북한 언론등을 통해 수시로 공연 보도와 논평이 나왔고 김일성상이 수여되기도 했다.
연주곡의 비율은 대략 조선 관현악곡(북한 창작곡)이 65%, 그 외 서양 명곡 및 관현악곡이나 현대음악이 35% 정도로 여겨진다. 북한 작품들도 대다수가 김정일이 음악 부문을 지도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의 곡들이 주로 연주된다.[8] 대부분의 자국 연주곡들은 질리도록 공연한 것들이라, 가끔 지휘자 뿐 아니라 모든 단원들이 아예 악보를 외워서 공연하는 진기명기풍 암보 연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이 남한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방북했을 때 축하 공연에서도 김병화 지휘로 관현악 '아리랑' 을 암보 연주하는 장면이 뉴스에 방영된 바 있다.
2000년대 들어 주로 러시아 같은 우방국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서양 곡들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주체사상의 영향력이 강대한 탓에 그 비율이 북한 창작곡을 잡아먹는 일은 없을 듯 보인다. 그래도 과거에는 정말 연주 안할 것 같았던 적성국의 작곡/편곡 작품[9]까지 레퍼토리에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래저래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주 공연장은 387석 규모의 모란봉극장인데, 1940년대에 국립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예전에는 객석 수가 800석 가까이인 중극장 규모였지만, 2000년대 중반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대대적으로 개보수 공사에 들어가면서 대규모 편성의 작품 연주가 용이하도록 무대 공간을 대폭 확장해 객석 수가 소극장 수준으로 절반 넘게 줄었다. 대규모 관현악단임에도 상당히 작은 크기의 공연장이 상주 공연장인 것을 보면, 북한 음악에서 성악과 기악의 심한 불균형 현상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모란봉극장 외에는 대규모 청중을 동원하는 이런저런 명절이나 기념일 특별 공연에 한해 동평양대극장이나 봉화예술극장, 인민문화궁전 같은 대규모 공연장에서 연주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경제 생산 독려 차원에서 가끔 노동자와 농민 계층을 위해 제철소나 공장, 협동농장 등을 방문해 공연하기도 한다.

4. 남북/해외 예술 교류


적어도 1960년대 후반까지 북한에서는 공산권 국가와 예술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고, 국립교향악단도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에서 창작된 작품들을 서양 고전 명곡이나 자국 작품만큼 자주 연주했다. 한창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있던 북베트남 작곡가의 교향곡을 연주한다거나, 소련이나 중국 등에서 성악가나 독주자, 지휘자를 초빙해 공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일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해외 교류는 1970년대 후반까지 정체 상태에 놓였고, 그 동안에는 거의 북한 창작곡-그것도 상술한 대로 기존 노래로 만든 2차 창작품들-만 연주하는 지경까지 갔다.
1970년대 후반에는 조선적 재일교포 사회에서 최초로 배출된 지휘자 김홍재가 도쿄 국제 지휘 콩쿠르 입상 후 방북해 이 악단과 공연한 기록이 있고, 1990년에는 매년 혹부리의 생일 축하를 위해 치러지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관현악 연주회에서 미국 교포 지휘자 곽승이 남한 출신으로는 최초로 지휘대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10] 1998년에는 '윤이상 통일 음악회' 무대에서 남한 국적 지휘자인 박범훈[11]이 사상 최초로 무대에 올라 관현악 '아리랑' 을 지휘하기도 했다.
2년 뒤인 2000년 8월에는 북한 음악 단체 중 최초로 한국을 방문해 서울 KBS홀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각각 두 차례씩의 단독 공연과 KBS 교향악단과의 합동 공연을 가졌다.[12] [13]사실 1980년대 중반에 남북 문화예술 교류 활동의 일환으로 남북 예술단이 각각 평양과 서울에서 교환 공연을 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양측 모두 이 공연을 위해 여러 예술 단체에서 가려 뽑아 편성한 임시 예술단을 보냈었다.
2002년 9월에는 KBS 교향악단이 남한 관현악단으로는 최초로 평양을 방문해 공연했을 때도 봉화예술극장에서 합동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남북 관계의 경색 때문에 교환 공연 등의 교류는 2012년 현재까지 완전 동결된 상태다. 2006년에는 창단 60주년 기념으로 재차 남한 방문과 더불어 미국과 영국을 순회 공연한다는 꽤 충공깽인 계획을 내놓기도 했지만, 핵실험 크리 등으로 인해 결국은 망했어요.
2008년에는 미국 관현악단으로서 최초로 북한 방문을 가진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 때 음악 감독으로 동행한 로린 마젤의 지휘로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제1막 전주곡과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두 곡을 공개 리허설 형식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연주회는 아니었지만, 미국 지휘자가 북한 관현악단을 지휘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었다. 또 이 자리에서는 두 악단의 수석/부수석급 현악기 주자들이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 등을 같이 연주하기도 했다.
2011년 9월 12~15일 동안 평양을 방문한 정명훈도 이 악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다만 지휘의 경우 공개 연주회 무대가 아닌, 리허설 때 잠깐 시연하는 형식으로 지휘했다고 한다. 이외에 북한 음악계 관계자들과 조선국향+서울시향의 연말 합동 공연을 논의하기도 했는데, 그 연말에 김정일이 죽는 바람에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다만 2011년 12월 말 서울시장 박원순이 남북 양측 정부에 서울-평양 축구대회(약칭 경평축구대회) 부활과 함께 재차 합동공연을 제의했는데, 아직 양측 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정명훈 방북 후 약 한 달 뒤인 2011년 10월에는 일본의 지휘자 이노우에 미치요시[14]가 방북해 이 악단과 베토벤의 서곡 '코리올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정현희 협연),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아리랑 환상곡으로 구성된 연주회를 개최했는데, 일본 지휘자가 조선국립교향악단의 단독 연주회를 지휘한 첫 무대여서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이노우에는 2013년 3월에 두 번째로 방북해 관현악 '아리랑(아리랑 환상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지휘했는데, 이노우에의 말에 따르면 이 공연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북한 초연 무대였다고 한다. 공연은 북일 교류 음악회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합창은 만수대예술단 합창단이, 독창은 북측에서 역시 만수대예술단 소속 성악가들인 김금주(소프라노)와 한옥희(메조소프라노)가, 일본 측에서 나가타 미네오(테너)와 마키노 마사토(베이스)가 섭외되어 출연했다.
동년 10월 중순에는 만수대예술극장에서 거의 매년 평양을 방문해 공연하고 있는 러시아의 21세기 관현악단과 합동 공연을 개최했는데, 저 러시아 악단이 방북할 때마다 북한 악단과 합동 공연을 개최하는 것도 연례 행사지만 그 동안 같이 출연했던 은하수관현악단이나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이 아닌 조선국향과 같이 공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같은 해 여름 이후로 북한 언론의 보도에서 갑자기 사라지면서 숙청설까지 나돌고 있는 은하수관현악단의 동정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5. 공연 동영상


북한/문화/공연 영상항목 참조.
[1] 목관악기가 종류별로 한 쌍씩 편성되는 관현악 편제[2] 잡지 '조선음악' 1966년 8월호 41페이지 하단에 연주 사진이 게재되어 당시 편성을 대충이나마 확인할 수 있고, 같은 해 9월호 12~13페이지에는 해당 잡지 기자가 이 경음악단 소속 여가수들이었던 김정일(!!), 김윤성, 김복영, 김련옥과 행한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3] 조선음악 1966년 6월호 40페이지 참조.[4] 조선음악 1967년 4월호 40페이지 참조.[5] 이 일본 공연 때 남한 예술 잡지 '객석' 의 일본 특파원이 인터뷰와 기사를 실었다가 코렁탕을 먹을 뻔하기도 했다.[6] 다만 대부분의 CD들이 옛날 LP 시대에나 있을 법한 30~40분 분량만 수록하고 있다고 한다. [7] 정년퇴직의 북한 문화어이다.[8] 참고로 김정일의 지도 방침은 자국 관현악곡 및 모든 기악 작품은 인민들에게 친숙한 노래들의 선율을 최대한 살려 편곡식 작곡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 기악곡 및 경음악 등의 절대 다수는 노래 선율에 종속되는 2차 창작 편곡물이라는 기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9] 2009년 공연 중 미국의 팝스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편곡자인 카멘 드래건(Carmen Dragon)이 스티븐 포스터의 가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작품들이 연주된 기록이 있다(!!!).[10] 이후 귀국해 서울시향부산시향, 대구시향에서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다.[11] 명성 높은 국악인으로서 모교인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예술가가 대학 총장을 지낸 것은 최초. 하지만 무분별한 정치적 행적이나 성차별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12] 당시 레퍼토리가 80%는 북한이 창작한 자국의 곡들로서 정치적 색이 가장 적게 묻어나도록 구성했다. 북한에서 창작 된 가곡으로 산으로 바다로 가자, 동해의 달밤, 압록강 2천리, 동백꽃이 공연되었고, 관현악 곡으로 뽀글이 지시에 따라 포함된 아리랑 환상곡과 악단이 자체적으로 선발한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내 고향의 정든 집, 모란봉, 그네 뛰는 처녀, 외국 클래식 작품으로는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 돈바질리오의 아리아,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중 하나, 협주곡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사향가가, 장한나의 협연으로 그리워 등이 공연되었다.[13] 이 공연 때문에 최성환 편곡의 아리랑 환상곡이 한국에서 유명해 지게 되었다.[14] 2015년 현재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재직 중이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5곡 전곡을 지휘한 최초의 일본 지휘자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