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 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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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9년부터 1980년까지 파나티나이코스 FC 감독을 맡았다.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면서 잉글랜드 대표팀 역대 감독 중 최고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조국 잉글랜드에 첫 우승컵을 안겼으며, 유로 1968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알프 램지의 고향은 런던 동부에 있는 다게넘이다. 어린 시절 램지는 축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식료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저 취미로만 축구를 조금 즐겼을 뿐이었다. 그러다 램지가 20세 되던 해,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램지 역시 콘월 공작의 경보병대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이 시기에 포츠머스에서 축구를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
사우스햄튼 FC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램지가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것은 24살이던 1944년, 팀의 1군 경기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46년이었다. 하지만 2부 리그[2] 에서 2년 연속으로 아깝게 승격을 못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삼사자 군단에도 선발이 된다. 데뷔전 상대는 스위스였고 6대 0 대승이었다고.
그리고 1949년 시즌을 끝으로 같은 2부 리그에 있던 토트넘 홋스퍼 FC로 이적했다. 그리고 램지의 선수 생활은 여기에서 꽃피었다. 토트넘의 주전 수비수로서 200경기 넘는 출전 수를 기록했던 것. 동시에 토트넘에서는 승격도 하고 다음 해에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1부 리그[3] 우승도 하는 쾌거를 이룩해냈다.
늦깎이로 국가대표가 되기는 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도 나름 입지를 굳혀서 주장 빌리 라이트가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면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페널티 킥 능력도 좋아서 웸블리 참사 당시 페널티 킥을 처리하여 성공하기도 하였다.
1950년 월드컵에서도 주전 라이트백으로 전 경기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팀은 2위에 머물러 결승 리그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2.3. 감독 생활
2.3.1. 입스위치 타운 FC
토트넘에서 은퇴하자마자 램지는 입스위치 타운 FC의 감독 자리에 취임하였다. 처음 감독 자리에 올랐을 때 입스위치 타운은 3부 리그[4] 남부 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2부 리그로 팀을 올려놓은 후, 3년 후에는 기어이 1부 리그에까지 승격시켰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1-62 시즌에는 승격팀을 이끌고 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5] 이 활약을 바탕으로 표류하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두 번째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3.2. 국가대표팀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안습 그 자체였다. 웸블리 참사와 잇단 월드컵에서의 광탈로 축구 종주국의 명예는 이미 옛날에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1966년 월드컵이 자국 잉글랜드에서 열리는 것을 생각하면 월드컵에서의 좋은 성적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떤 단체의 리더로서 가장 어려운 것은 과거의 영광에만 취한 몰락한 단체를 일으키는 것. 알프 램지는 이런 일을 떠맡았다. 램지의 취임사는 간단했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다!
2.3.2.1. 유로 1964
하지만 알프 램지의 잉글랜드는 첫 메이저 대회인 1964년 유로에서 프랑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1차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2.3.2.2. 1966년 월드컵
월드컵에서의 연이은 실패에 이어 유러피언 네이션스컵에서도 예선 탈락을 해 버렸으니, 축구종가의 자존심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젠 정말로 초비상이 걸렸다. 선수진은 찰튼 형제와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 등 자신의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를 다투는 선수들로 구성되었기에 객관적으로 봐도 유럽 무대에서 통할 수준이었지만 딱 한 포지션이 영 부실했다. 그게 바로 윙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전설의 윙어 스탠리 매튜스와 톰 피니를 이을 만한 재능들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뛰어난 선수가 존 코넬리 뿐이었다.
그래서 램지는 고민 끝에 자신이 입스위치에서 쏠쏠하게 써멀었던 '윙어가 없는' 포메이션을 대표팀에도 적용했다. 어느 포지션에 배치되더라도 필드의 전체를 누비는 바비 찰튼을 기존의 왼쪽 윙어 자리에서 중앙 미드필드로 옮겼고, 좌우 풀백인 레이 윌슨과 조지 코헨이 윙어처럼 공격에 가담하도록 전술을 짰다. 측면으로 향하는 롱패스보다는 중앙에서의 허리 싸움을 강조하는 전술이었다. 이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기존의 윙어 대신 마틴 피터스와 같은 중앙 미드필더를 중용하였다. 예선 우루과이전에서는 4-3-3을 사용하여 존 코넬리를 윙어로 쓰고 스트라이커 지미 그리브스와 로저 헌트를 동시에 기용하는 변칙적인 전술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상대적으로 빈 공간이 생기는 오른쪽 진영은 앨런 볼이 미드필더와 윙어의 역할을 겸하면서 훌륭하게 메웠다. 노비 스타일스와 바비 찰튼이 수비 가담을 열심히 해 주었고 그 덕에 바비 무어&잭 찰튼의 센터백 콤비는 엄청나게 공격가담을 자주 할 수 있었다. 우루과이전에서는 0:0으로 비기면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남은 두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조 1위로 예선전을 통과하였다.
8강전의 상대는 아르헨티나. 여기에서는 4-4-2로 윙어를 두지 않고 중앙 미드필더를 3명을 두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아르헨티나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고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4강에 진출하였다. 4강전의 상대는 이변의 주인공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에우제비우가 버티고 있었다. 그를 막기 위해 노비 스타일스를 보냈고, 이 결정은 성공을 거두었다. 에우제비우를 페널티 킥 골 하나로 막는데 성공하였고, 잉글랜드는 결승에 진출하였다.
종가의 심장에서 쥘 리메 트로피를 들어올리기 위해 남은 시합은 단 한 번. 그리고 그 상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앙금이 많이 남은 서독이었다. 이 시합에서 연장혈투 끝에 제프 허스트의 해트트릭으로 4-2 승리를 거두었다. 알프 램지는 이 우승으로 잉글랜드 전체에 명성을 드높였고, 1967년 월드컵 우승의 공로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에 서임되었다.[6]
2.3.2.3. 유로 1968
알프 램지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다음 유로에서 처음으로 잉글랜드를 본선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본선에 진출한 잉글랜드는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아쉽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3, 4위전에서 소련을 2대 0으로 꺾고 3위를 차지했다. 이것이 유로 대회 역사상 잉글랜드 최고의 성적이다.[7]
2.3.2.4. 1970년 월드컵 그리고 그 이후
1970년 월드컵에 잉글랜드는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런데 대표팀 주장 보비 무어가 귀금속을 훔쳤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불운의 전주곡이 시작되었다. 예선에서 펠레가 이끄는 역대 최강의 브라질을 만나 아쉽게 패배한 것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는 경기를 펼쳤고 8강에서는 서독과 리턴 매치를 펼쳤다. 게다가 시합을 앞두고는 주전 골키퍼 고든 뱅크스까지 식중독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잉글랜드는 서독을 상대로 후반 4분에 마틴 피터스의 골을 포함하여 2대 0으로 앞서 나갔다. 여기에서 알프 램지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4강을 대비하여 체력 안배를 위해 팀의 에이스 보비 찰튼을 뺀 것이다. 보비 찰튼을 따라다니던 서독의 수비형 미드필더 프란츠 베켄바워는 마크맨이 없어지면서 봉인이 풀렸고 서독의 공격력은 엄청나게 강력해졌다. 결국 잉글랜드는 서독의 공격을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 연장전에서 역전패를 당하며 서독에게 복수를 허용하고 말았다.
유로 1972와 1974년 월드컵에서 알프 램지는 잉글랜드의 예선 탈락을 막지 못했다. 월드컵 우승으로 콧대가 높아진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본선도 밟지 못한다는 그 결과를 용납지 못했다. 알프 램지의 해임 요구가 빗발쳤다. '''알프 램지라는 고인 물이 잉글랜드 대표팀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 알프 램지는 안된다!''' 알프 램지는 그렇게 해고당했다.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 팬들은 대표팀의 이러한 졸전이 알프 램지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프 램지는 고인물이 아니라 그나마 추락의 속도를 늦추고 있던 낙하산이었고 스스로 낙하산의 줄을 끊은 순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4. 사망
잠시 버밍엄 시티 FC에서는 감독으로, 파나티나이코스 FC에서 기술 고문을 맡기는 했지만 단기간으로 끝났다. 이후에는 축구 감독 자리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98년 6월 9일. 뇌졸중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했고 치매로 인해 고생했다. 그러다 1999년 4월 28일,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플레이 스타일&평가
선수 시절에는 다소 느리기는 했지만 수비적인 능력과 단단한 육체, 정확한 패싱 능력을 갖춘 수비수였다. 그리고 특유의 냉정함으로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감독으로서는 잉글랜드 출신으로는 역대 최고의 명장이다. 현재까지 잉글랜드 대표팀을 맡은 누구도 현재까지 알프 램지의 승률[8] 과 국제 대회 성적을 모두 비슷하게 거둔 사람이 없다.[9]
4. 어록
승리 팀을 바꾸지 말라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재능을 이런 식으로 쓰다니 유감이다. 다만 우리의 최고의 축구는 상대가 동물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축구를 할 때 펼쳐진다.[10]
너희들은 이미 한 번 이겼다. 이제 나가서 다시 이기고 와라!
(1966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연장에 들어가기 전 남긴 라커룸 대화)
5. 수상
5.1. 클럽
-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 1회: 1950-51(토트넘)
- 잉글랜드 2부 리그 우승 1회: 1949-50(토트넘)
-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1회: 1951(토트넘)
5.2. 감독
-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 1회: 1961-62(입스위치 타운 FC)
- 잉글랜드 2부 리그 우승 1회: 1960-61(입스위치 타운 FC)
- 잉글랜드 3부 리그 우승 1회: 1956-57(입스위치 타운 FC)
-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66(잉글랜드)
[1] 2018년 기준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런던주 런던시 대거넘.[2] 현재의 풋볼 리그 챔피언십[3] 현재의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4] 현재의 풋볼 리그 1[5] 잉글랜드 1부 리그에서 현재까지 승격팀을 이끌고 우승을 한 사례는 1905-06 시즌의 리버풀 FC, 1931-32 시즌의 에버튼 FC, 1950-51 시즌의 토트넘 홋스퍼 FC, 1977-78 시즌의 노팅엄 포레스트 FC 그리고 입스위치 타운의 5번에 불과하다. 그리고 선수와 감독으로 이것을 모두 달성한 축구인은 알프 램지가 유일하다[6] 이 우승 하나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 보다 높은 등급의 기사작위를 받았다.[7] 자국에서 열린 유로 1996에서 4강전까지 간 것이 또 있다[8] 61.1%. 113경기 69승 27무 17패[9] 승률 면에서는 파비오 카펠로가 유일하게 앞선다. 다만 경기 수에서 카펠로는 램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10] 1966년 월드컵 8강 대 아르헨티나 전 이후 승리 소감. 이 발언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동물로 비하했다고 여겨져 아르헨티나 인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