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밀리온 전투

 

'''필로밀리온 전투'''
영어: Battle of philomelion
'''시기'''
서기 1116년 가을
'''장소'''
이코니온 인근 필로밀리온 평야
(현 터키 코니아 주 악셰히르)
'''원인'''
동로마 제국아나톨리아 탈환 시도.
'''교전국'''
[image] 동로마 제국
[image] 룸 술탄국
'''지휘관'''
[image] '''알렉시오스 1세'''
[image]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image]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image] 말리크샤
[image] 마나렉
'''병력'''
8,000 ~ 12,000명
불명
'''결과'''
동로마 제국의 승리
'''영향'''
아나톨리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 확립
1. 배경
2. 준비
3. 전투
4. 우주 방어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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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동로마 제국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연이은 전쟁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까지 몰렸다. 그러나 1097년 이후, 알렉시오스 1세의 통치와 1차 십자군의 도움으로 국가를 재조직하고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가와 폰토스 일대에서 실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오스 1세 재위기의 아나톨리아 수복은 이전보다 허약해진 제국의 역량 때문에 어디까지나 해안지대에만 국한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당장 1차 십자군의 도움과 이어진 제국군의 원정으로 수복한 이코니온과 도릴레온(Dorylaion), 메안드로스 강(Meandros River) 상류 지역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내륙의 일부 지역을 몇 년만에 다시 룸 술탄국에 침탈당했을 정도였다.
다른 전선 때문에 아나톨리아 내륙에 대한 원정에 나설 여력이 없던 알렉시오스 1세는 부유한 해안지대를 지키기 위해 해안가를 요새화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비티니아의 중심 도시인 니코미디아니케아, 이오니아의 스미르니 등의 주요 도시들이 요새화 되었고, 튀르크에 의해 파괴된 미시아의 아드라미티온(Adramyttion) 같은 거점 도시를 재건하고 역시나 요새화하였다.
이 전략은 꽤나 성공적이어서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세력을 회복한 룸 술탄국이 1111년부터 다시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을 때 거점 도시들은 대부분 수성에 성공하였다. 1113년 5만 4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튀르크 군이 니케아를 공격했을 때도 니케아는 수성에 성공하였다.[1]
문제는 요새화 전략은 포로와 전리품을 털어가는 게 목적인 튀르크의 산발적인 기습 전술에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1111년 제국을 침략한 튀르크 군은 엘리스폰트 해협을 넘어 유럽으로 진출해 트라키아를 유린했고, 계속해서 비티니아와 미시아 지역에 대한 약탈을 계속했다. 그리고 1115년 룸 술탄 말리크 샤가 호라산에서 알레포에서까지 병력을 모아 다시 아나톨리아를 습격하려 하였다.[2]
막 유럽에서 쿠만인과 반군의 위협을 제거한 알렉시오스 1세는 말리크 샤의 침략 계획을 듣고는, 자신이 친정하여 이코니온으로 진군하는 응징원정을 치뤄 아나톨리아에서 튀르크의 위협을 경감시킬 것을 결심했다. 각지에서 병력이 소집되었고 용병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는 그 이듬해에야 전선에 나설 수 있었는데, 바로 날이 갈 수록 심해지고 있는 통풍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 병이 잠시 나아지자 알렉시오스는 드디어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2. 준비


비티니아의 로파디온(Lopadion)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규합한 알렉시오스 1세는 곧바로 튀르크인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곳곳을 약탈하고 수많은 로마인들을 학살하고 다녀 황제의 분노를 불러온 튀르크 군은 포이마니논(Poimanenon)에서 제국군에게 격파되었다.[3] 다시 로파디온으로 돌아와 최종적으로 병력을 규합해 군대를 말라기나(Malagina)와 올림포스 산맥(Olympos Mountains)[4]에 포진시킨 황제는 잠시 황후 이리니를 만난다.

3. 전투


황제는 그 해 중순에 복구한 중앙군(추산 8000명 ~ 12000명)을 중심으로 한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중부로 진군한다. 동로마 측 역사가들은 황제의 목표가 룸 술탄국의 수도이자, 옛 로마의 대도시였던 이코니온이였다고 주장하지만, 이코니온까지 진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4개의 큰 강과, 130km가 넘는 거리를 지나야 했다. 황제는 계획을 축소하여 남서부 아나톨리아의 실지 수복과 튀르크인들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로마 유민들의 구출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진군을 계획한다. 황제는 수비 가능한 지역으로 인구를 재배치했고, 수비가 어려운 외곽 지방의 촌락을 소개하여 최대한의 정교회 인구를 제국의 중심부로 탈출시키는데 주력했다.
로마군은 폴리보토스(현재의 터키 볼바딘 현)의 튀르크인들의 저항을 일소하는 도중에 룸군의 정찰대와 마주쳤다. 정찰대는 곧바로 룸 술탄 말리크 샤에게로 달려가 기독교도들을 대피시키고 주요 지역을 요새화하고 있는 대규모의 로마군에 대해서 알렸다.
술탄은 바로 병력을 동원하여 진격하였다.

4. 우주 방어


황제는 탁 트인 지형에서 궁기병과 맞서는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폴리보토스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동로마와 룸 술탄국의 경계, 필로밀리온의 구릉지대로 기동하고, 그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로마군은 중장 보병 스쿠타토스를 중심으로 내부가 빈 사각 방진으로 포진했다. 그 중심에는 보급품과 기병대를 배치했는데, 이는 후미에 배치된 보급대를 기습하는 식으로 전투를 벌이는 튀르크의 궁기병들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필로밀리온에 도착한 로마군은 방진을 짜자 마자 룸 술탄국의 장군 마나렉(Manalugh)이 이끄는 분견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마나렉은 공격에 소극적이였는데, 이는 마나렉의 분견대와 로마군의 병력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였다. 본격적인 전투는 술탄 말리크 샤의 본대가 마나렉의 병력과 합세한 후인 이틀째에 벌어졌다.
술탄은 그의 장기인 궁기병을 이용한 스웜 전술을 감행했는데, 중보병들의 방어가 워낙 두터워서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황제는 궁기병들이 화살을 다 쏟아내었다고 판단하고, 기병연대의 방어선을 풀고 반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알라가 도우셨는지 재보급용 화살이 제 때 도착하였고, 궁기병들이 로마군의 카타프락토이들에게 화살을 쏟아부었다. 기병대는 겨우 대오를 갖추어 후퇴하였으나, 혼전 속에서 제국군 좌익 지휘관이자 왕자였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유시에 맞아 부상당하여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5]
좌익이 다시 화살비를 갑주로 막아내고 있는 동안, 황제는 우익의 사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에게 재반격을 지시했다. 비교적 피해가 경미하던 우익의 카타프락토이들은 술탄의 근위대가 포진한 중군으로 돌진, 적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무슬림 역사가들은 술탄의 근위대가 전멸을 감수하고 말리크 샤를 엄호하지 않았더라면, 말리크 샤 본인도 로마군의 포로가 되었을 거라고 서술하였다.
술탄이 줄행랑치는 것을 본 룸 술탄국의 병사들은 병장기를 버리고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매복을 우려한 니키포로스는 기병대를 돌려 우익으로 복귀한다.
그의 결정은 현명한 것이였다. 패주한 셀주크군은 각지에서 재규합하여 전투가 끝난 그날 저녁에서부터 한밤 중까지 매복 공격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로마군의 우주 방어에 막혀 효과를 보지 못했고, 결국 술탄이 직접 이끈 야습도 대패로 끝나자 말리크 샤는 병력을 물리고 다음 날을 기약하였다.
전투 사흘째, 룸 술탄국의 병력은 또 다시 로마군 방진을 둥글게 포위하고 화살을 날려대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저번보다 더 얇아진 포위망은 로마군의 카타프락토이들에게 더 쉽게 붕괴되었고, 또 다시 큰 피해를 입은 튀르크군은 필로밀리온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말리크 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서한을 보내고, 평화 조약을 위한 알현을 허락해달라는 사실상의 항복 문서를 보내왔다.

5. 결과


필로밀리온 동부에서 말리크 샤는 알렉시오스를 알현했다. 노 황제는 술탄의 생명과 지위를 보전해준다는 뜻으로 황제의 보랏빛 망토와 옷의 보석을 하사하였으며, 말리크 샤는 아나톨리아 중남부에서의 제국의 패권과 영토를 인정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말리크 샤의 명성은 실추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리크 샤는 술탄위를 노리던 동생 마수드에게 암살당한다.
동로마 제국은 비옥한 아나톨리아 서부와 중남부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이후로 10년동안 아나톨리아 중부와 시리아 서부를 수복할 발판을 마련하면서 숨을 돌린다. 디라히온 전투의 패배로 주변국에게 무시당하기 시작했던 제국의 중앙군은 필로밀리온에서 화려하게 복귀전을 치른다.
하지만 알렉시오스의 치세하의 수복 전쟁은 필로밀리온 전투 이후 막을 내리게 된다. 예순이 다 된 황제의 사후, 동로마 강역 탈환의 대의는 장자 요안니스 2세에게 이어받게 된다.

[1] 전면전이나 도시 공략보다 기동력을 살린 약탈을 선호했던 튀르크를 상대하기 위한 고책이었다. 후임 황제들은 이러한 정책을 이어받아 마누일 1세 중후반기에 이르면 도시들은 모조리 요새화 되었고 주요한 길목은 요새와 관문이 들어서게 된다.[2] 룸 술탄이 어떻게 멀리 있는 이란의 호라산과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는 지는 의문이 들지만 일단 알렉시아스의 서술을 따른다.[3] "The Romans Desecended on them like a thunderbolt and soon killed most of them, while some were taken alive." - 알렉시아스 15권. 경보병만 보내서 격파했다고 한다.[4] 그리스 반도의 그 올림푸스와는 이름만 같다.[5] 일설의하면 안드로니코스가 전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후일에 안나 콤니니의 반정에도 참가했다는 기록을 보면 크게 부상당한 수준에서 끝이었던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