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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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진: 마누일 1세로 잘 알려진 초상화[image]
두번째 사진: 이탈리아 모데나 에스턴스 장서고에 그려진 마누일 1세그리스어 : 마누일 1세 메가스 콤니노스(Μανουὴλ Α' Μέγας Κομνηνὸς)
라틴어 : 마누엘 1세 마그누스 콤네누스(Manuel I Magnus Comnenus)
'''대제(Μέγας)'''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동로마 제국에서 대제 칭호를 받은 4명의 황제[1] 중 한 명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유일하게 칭호를 받은 황제이다. 그가 재위하던 12세기 중후반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 중의 하나이며, 마누일은 37년의 재위기 간에 걸쳐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진력했다. 이 시기는 중세에 들어와 역전되기 시작한 동방 제국(帝國)과 서방 제국(諸國)의 역학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는 시기이기도 하며,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의 국제 질서에서 마지막으로 강대국의 면모를 과시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마누일 대제의 친서방 정책으로 서방 세계와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로마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지만, 압도적이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들이 이 세상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아니라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꼈다.[2] 이전의 로마를 제외한 모든 세력을 야만인으로 보던 세계관은 대폭 수정되어야 했고,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된다.
2. 생애
2.1. 제위 계승
마누일 1세는 요안니스 2세와 헝가리 왕국의 왕녀 이리니 사이의 여덟째 자식으로, 넷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4남으로서 형이 셋이나 있던 상황이었으나, 1142년의 동방 원정 중 큰형과 작은 형이 연달아 죽자 제위를 가시권에 두게 되었다. 결국 1143년 원정 중에 킬리키아에서 아버지 요안니스 2세가 허무하게 죽자, 그는 진중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3]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마누일은 즉시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그의 계승이 확실히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장례식을 살펴야 했으며, 제위 계승권이 있는 셋째 형 이사키오스와 삼촌 이사키오스 등의 다른 친족들을 견제해야했다. 마누일은 제국군 총사령관 요안니스 악수흐를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수도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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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흐는 선황의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수도에 도착했다. 그는 신속하게 다른 제위 계승권자들의 신병을 확보했으며, 마누일의 지지자들을 포섭해놓았다. 덕분에 1143년 8월 마누일이 수도에 귀환했을 때, 그는 무난히 새로운 총대주교에게 제관을 받아 쓸 수 있었다. 그 후 자신의 제위가 확고해지자 다른 계승권자들을 석방했으며, 200파운드의 금을 교회에 보냈다.[4]
마누일이 요안니스 2세에게 물려받은 제국은 1세기 전에 중흥기를 누린 뒤로 많이 변했다. 노르만족은 남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지우고 있었으며. 룸 술탄국은 여전히 소아시아 중부를 잠식하고 있었다. 발칸에서는 헝가리 왕국이 아드리아 해와 세르비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레반트에서는 십자군 국가들이 제국에 도전하고 있었다. 황제의 과업은 실로 벅찼다.
2.2. 십자군의 도래
마누일 1세의 치세에서 첫 번째 시험은 1144년에 찾아왔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주 레몽이 킬리키아의 이양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말, 이웃의 에데사 백국은 이마드 앗딘 장기 1세 아래 다시 일어난 지하드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동쪽 역시 이 새로운 위협에 위험하게 노출되어 있었고, 레몽은 머나먼 서방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선택지가 없던 레몽은 자존심을 굽히고 동로마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여정을 떠났다. 황제에게 굴복한 레몽의 충성심은 보장되었으며, 그가 요청하면 지원을 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한편 룸 술탄국의 튀르크인들은 서부 아나톨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제국의 국경을 계속해서 침탈하고 있었다. 특히, 아나톨리아 서부 지방인 리디아(Lydia)와 프리기아(Phrygia)에 자리잡은 유목민들이 서진하여 제국의 주요한 요지인 트라키시온 테마까지 진출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황제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에 1146년, 마누일은 룸 술탄국을 향해 친정했다. 야전에서 세번에 걸쳐 룸군을 격파한 동로마군은 기세좋게 이코니온에 이르렀다. 아버지 요안니스 2세가 가꿔놓은 중앙군의 공성 능력은 지중해 세계 최고를 자랑했으나, 외벽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음에도 도시를 최종적으로 점령할 수는 없었다. 이 원정을 시작하기 위한 마누일의 동기 중에는 십자군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서방에 보여주기 위한 소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킨나모스는 이것을 마누일이 새 신부에게 전쟁 기량을 과시하기 위한 욕구로 보았다. 포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마누일은 프랑스 왕국의 루이 7세에게 서신을 받았다. 루이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십자군 국가의 구제를 위한 군대를 주도하겠다는 의도를 알리는 것이었다.
반백년 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겪은 제국은 십자군의 동기가 어떻든 간에 대규모의 십자군이 얼마나 제국에 위협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원정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누일은 술탄과 평화 조약에 이르렀고, 십자군에 대비하기 위해 서둘러 수도로 복귀했다.
이후는 제2차 십자군 원정 참조.
2.3. 이탈리아 원정
2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통과하던 1147년, 황제가 십자군에 집중하는 틈을 노려 시칠리아 왕국의 로지에르 2세는 코르푸 섬을 점령하고 테베와 코린토스를 약탈했다. 1148년에도 십자군은 물론 제국 북변을 침탈하는 유목민 등 여러 문제 때문에 황제는 섣불리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1148년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누일 1세는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제국의 동맹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1149년에 코르푸 섬을 탈환할 수 있었다.
십자군 문제가 대강 정리되자 황제의 관심은 서쪽으로 향했다. 남이탈리아는 제국의 고토이자 서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창구였으며, 동시에 제국의 적들에게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제국 서부를 공격하기 좋은 교두보였다. 당장 마누일의 조부인 알렉시오스 1세는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과 여러차례의 전면전을 벌인 바 있었고, 그들의 후손은 이제 왕국을 세워 서유럽의 국가들에게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자며 제국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을 하고있었다.
마침 1154년 2월에 로지에르 2세가 죽자, 원정전의 대대적인 '밑작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서방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삼촌 콘라트 3세와 맺었던 동맹을 상기시켰다.[5] 동시에 외교관과 요원들이 파견되어 현지의 귀족 및 도시와 접촉하여 엄청난 금을 뿌렸고, 충성을 맹세받음은 물론 미래의 협조까지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는 교황청에도 접근했다. 갈수록 통제하기 어려운 '야만적인' 시칠리아 왕국과, 막강한 권위를 갖추고 오랜 친교를 맺고 있었던 '문명화된' 제국을 대조시키며 교황과 그 신하들을 구워삶았다. 착수금으로 많은 금이 건네졌으며, 성공했을 때의 더 많은 금 역시 약속되었다.
1155년, 마침내 동로마군의 본격적인 원정이 개시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지원이 뒤를 따랐고, 노르만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제국을 그리워하던 토착 귀족들은 이에 호응했다. 오트빌 왕실을 싫어했던 노르만계 귀족들도 제국의 자금에 흔들려 협조적인 자세였다. 1만 ~ 2만으로 추산되는 동로마군은 옛 남이탈리아 총독부가 있던 바리(Bari)에 상륙했고, 미리 해놓은 밑작업 덕분에 손쉽게 동부 해안 일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155년 말에 이르면 시칠리아 섬을 제외한 남이탈리아 대부분이 동로마 제국 밑으로 들어왔고, 원정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반격은 이듬해 봄부터 시작됐다. 시칠리아의 1만 2천 보병과 5천의 기사대는 두 배가 넘는 수의 아풀리아의 동로마계 반란군들에 맞서 연승을 거둬 전황을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원정군 지휘부도 내분으로 갈팡질팡하며 실책을 연발했고, 거듭된 실패로 현지 세력도 점차 비협조적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브린디시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동로마군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로 퇴각했고, 로지에르는 반란의 씨앗을 자르기 위해 옛 동로마계 반란군 잔당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지워졌고,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협조적인 움직임도 없었다. 기록된 것만 216만 전의 금화를 소모한 이탈리아 원정은 이렇게 1년 만에 엉망진창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4. 동방 원정
르노 드 샤티용은 날치기 결혼을 통한 자신의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위 획득을 명목상의 상위 군주인 황제가 용인해 주는 대가로 제국령 킬리키아에 있는 아르메니아계 반란군을 응징하고 자금을 지원받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막장 공작은 돈을 받지 못하자 약속을 지키지 않음은 물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욕보여서 뜯어낸 돈을 밑천삼아 제국령 키프로스를 침공해 약탈하고 유린했다(1156년). 그렇지 않아도 르노를 맘에 들지 않아 하던[6] 마누일은 이 어처구니 없는 행위에 격분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레반트로 친정했다(1158년 겨울).
4만 ~ 5만에 달하는 동로마군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손쉽게 쳐부수고 차례차례 킬리키아의 모든 도시를 다시 제국의 수중으로 가져왔다. 황제는 응징의 의미로 일부러 병사들을 통제하지 않고 풀어놓았으며, 동로마군의 약탈에 의해 안티오키아 주변은 초토화 되었다. 막강한 동로마 해군도 바다를 휩쓸고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항로를 모두 차단했다. 궁지에 몰린 르노는 신민들과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설득했으나, 주민들은 '원주인이 돌아오나보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키프로스 공격도 내부 반대를 억눌러가며 저지른 패악질의 연속이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는 황제의 질녀 테오도라 콤니니와 결혼하는 등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추구하고 있었다. 결국 르노는 저항을 포기하고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1159년 4월, 마누일은 성대하게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안티오키아는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으며, 교회 역시 정교회 산하로 편입되었다. 또한 황제는 인척이 된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3세와 함께 마상 시합을 여는 등 우호 관계를 다졌으며 십자군 국가들의 종주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두앵 3세로서는 주변의 위협인 장기 왕조를 동맹인 제국의 힘을 빌어 공격하고 싶어했으나, 누르 앗 딘은 재빠르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안했다. 마누일은 이를 수용했고, 보두앵 3세와 예루살렘의 십자군 군주들은 불만스러워했으나 제국이 안전을 보장했으므로 결국 납득했다. 황제는 원정 결과에 만족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이후 르노가 무슬림들에게 포로로 잡히자(1160년), 그 지위가 위태로워진 공작비 콩스탕스는 후원자가 필요해졌다. 마침 황후 슐츠바흐의 베르타가 죽어(1159년) 홀아비가 된 마누일은 십자군 지역에 영향력을 더 굳히기 위해 십자군 국가 사이에서 새 신붓감을 물색했는데, 예루살렘 왕국 측에서는 트리폴리 백국의 백작 레몽 3세의 누이이자 보두앵 3세의 사촌인 멜리장드를 밀어주었다. 동로마 황실과 예루살렘 왕실을 더욱 가깝게 엮는 한편, 안티오키아 공국과 동로마 제국이 지나치게 가까워 지는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측에서는 마리아의 계부인 르노를 도의적으로 도우기 위해서나 공작비 콩스탕스의 지위를 위해서나 황제의 후원이 절실했으므로 더 적극적이었고, 이에 황제는 마리아를 황후로 택했다. 그녀가 알렉시오스 2세의 모후가 되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이다. 이렇게 1150년대 후반 동로마 제국의 동방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나 레반트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은 확고해졌다.
2.5. 對 헝가리 전쟁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동쪽의 전선이 크게 후퇴하고 그 종심을 차지하고 있는 룸 술탄국과의 전쟁이 1161년 튀르크 측의 굴복으로 끝남에 따라, 제국의 유럽 영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조와 후일의 니케아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기반으로 삼아 부흥한 반면 앙겔로스 왕조와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확고한 기반을 가지지 못하여 몰락한 것을 생각해보자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한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헝가리 왕국은 마누일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미 헝가리는 1155년에 황제가 이탈리아에 친정하려 할 때도 방해를 했고, 이후 세르비아인들에 의한 후방 교란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헝가리와의 1155년 평화 조약 이후 십자군 국가들과 룸 술탄국 등의 동방 문제에 집중하던 와중에도 여전히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는 상업이 발달한 달마티아 해안과 비옥한 도나우 분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헝가리 왕국 또한 동로마 제국을 위협적인 상대로 보았다. 서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동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접하던 헝가리는 신성 로마 제국 측과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으나 가톨릭계가 아닌 데다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발칸 서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던 동로마 제국과는 갈등의 여지가 많았다. 때문에 자연히 신성 로마 제국과 연대하였고, 이미 1128년에는 마누일의 부황인 요안니스 2세와 하람 전투를 치렀으며 이후에는 세르비아를 사이에 두고 물밑으로 동로마 측과 힘겨루기를 벌였다. 다만, 전면전으로 격화할 뚜렷한 명분이 없었기에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던 1162년, 20여 년을 통치하던 게자 2세가 죽자 마누일은 헝가리의 왕위 계승에 개입했다. 당시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게자 2세의 아들인 이스트반 3세와 벨라 3세, 그리고 게자 2세의 형제인 라즐로 2세와 이스트반 4세가 있었는데 게자 2세의 동생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누일 황제의 모후 이리니는 게자 2세의 증조부인 게자 1세의 동생 라즐로 1세의 딸이었다. 즉, 마누일 1세에게는 아르파드 왕조의 친척이자 왕위 계승권자들의 보호자로서 나름대로 개입 명분이 있었다.
일단 헝가리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이권을 주고 조카인 이슈트반 3세의 대립 왕이 된 라즐로 2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채 1년을 못 가서 죽자, 마누일의 질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한 이슈트반 4세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결국 왕위를 유지하지 못한 이슈트반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이슈트반 3세에게 1163년에 쫓겨나자 마누일은 대신 이슈트반 3세의 동생 벨라 3세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달마티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이 있던 그에게 황제는 헝가리 왕국을 압박하여 맺은 조약으로 시르미움 지역을 얹어 주었으며 수도로 데려와 교육시켰고, 자신의 맏딸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시켜 친왕(Despotes) 칭호까지 부여했다. 아직 마누일의 적장자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의 후계자가 된 셈이었다.
이를 지켜본 헝가리인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렇잖아도 사이가 안 좋던 나라의, 이미 왕위 계승에 개입했었으며 망명한 이슈트반 4세를 보호하고 있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황제가 1순위 왕위 계승권자를 사위이자 제위 계승권자로 삼고는 그의 영지에 보호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결국 전쟁을 위한 조건들이 하나하나 쌓인 끝에 이슈트반 3세는 벨라 3세의 영지인 달마티아와 이슈트반 4세가 머무르던 시르미움을 향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후 시르미움 전투 참조.
2.6.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마누일의 치세에 들어 동로마 제국이 통상권을 베네치아 외의 국가들에게 차례로 부여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를 불편해했다. 황제의 조부인 알렉시오스 1세에게 해군력을 지원한 대가로 통상 특혜를 부여받은 이후, 한 때 마누일의 부황인 요안니스 2세가 조약의 연장을 거부하자 무력 시위로 의지를 관철한 바 있을 정도로 베네치아는 이를 중시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1162년에 피사 공화국이 제노바 공화국과의 경쟁 끝에 무력으로 제노바인들을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서 축출한 이후 더 이상의 분쟁을 바라지 않고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의 대전략 속에서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하나로 뭉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맞서야 했으므로 11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명선에 더 이상 경쟁자를 늘리고 싶어하지 않던 베네치아인들은 1170년 8월, 다시 신설한 제노바인들의 구역에 공격을 가했다. 사태를 파악한 동로마 제국은 더 이상 일을 키우지 않는 대신, 파괴한 건물 및 시설을 재건하고 손실된 재화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베네치아 측에 명령했다. 베네치아 측은 동로마 제국의 외교 전략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고, 해군력에도 자신이 있었으므로 오히려 요안니스 2세 시절의 이야기까지 꺼내가며 고압적인 태도로 제국 측의 명령을 무시했다. 황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철저한 정보 통제와 준비 끝에, 동로마 제국은 수도 인근의 조계지는 물론 전국의 모든 베네치아인들의 신병을 일거에 구속하고 그 재산을 압류했다(1171년 3월). 이에 대응하여 베네치아 공화국 측에서는 비탈레 미카엘 원수가 이끄는 120여척의 대함대가 조직되어 원정에 나섰다(1171년 9월). 베네치아 함대는 에게 해로 큰 무리없이 진입하여 에우보이아 섬을 포위했으나 점령에 실패하였고, 성과가 없자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직접 타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150여척에 달하는 동로마 해군의 함대에 의해 헬레스폰트 해협에서 저지당하자 차선책으로 황제와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결국 히오스 섬으로 물러났다. 그 히오스 섬 역시 에우보이아 섬 처럼 방비가 잘 갖춰져있었고, 황제는 여전히 협상을 불허하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에게 해의 주요한 섬과 해안 도시들은 잘 방어되고 있었고, 마르마라 해는 동로마 해군에 의해 봉쇄되어 베네치아 함대는 사실상 적지에 고립된 꼴이었다. 믿고있던 해군력마저 예상과는 달리 열세이다보니 강제력이 없는 협상은 먹혀들지 않았고, 물자만이 하릴없이 소모되는 상황에서 겨울을 지내는 동안 전염병까지 돌았다. 파나기아(Panagia), 레스보스(Lesbos), 스키로스(Skyros) 등 다른 섬으로 옮겨 다녔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7] 1172년의 봄 즈음 마르마라 해에서 동로마 해군의 주력 함대가 뛰쳐나와 본격적인 추격을 시작하자 베네치아 함대는 견디지 못하고 본국을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스키로스 섬에서 말레아 곶까지 수백여km의 도주 끝에 디라히온을 지나 아드리아 해에 달해서야 베네치아 함대는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완패였다.
베네치아 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격분했다. 패장으로 돌아온 원수를 때려죽임은 물론이요, 동로마 제국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적대 행위를 지속했다. 동로마 제국은 위신도 세우고 나쁜 선례를 막는 등 성과를 내었으나, 아드리아 해에서 에게 해에 이르는 해역이 1년 넘게 전장이 되어 나름의 피해를 입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는 대전략에 금이 가고, 베네치아라는 중요한 교역 상대이자 강력한 해군 동맹이 성가신 적으로 돌변하는 등 씁쓸한 결과를 맛봤다.
2.7. 동방 십자군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었을 때, 유럽의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2차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친분을 쌓은 콘라트 3세와 마누일 1세의 협력 관계가 종식되자, 야심 많은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하여 두 제국 간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1155년 ~ 1156년간 동로마의 이탈리아 원정을 지켜본 프리드리히는 곧 남하할 의향을 드러내었고, 이를 감지한 마누일은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멈췄다. 1158년 프리드리히가 남하하여 이탈리아의 반항적인 도시들을 공격하자 동방 원정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마누일은 돈을 뿌려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지원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북이탈리아의 도시 연합과 이를 후원하는 동로마 제국, 교황청,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1160년대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동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왕국을 끌어들이고 마지막으로 1167년 헝가리 왕국을 시르미움 전투를 통해 복속하자 좌절되는 듯 했다.
그러나 1169년 예루살렘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연합한 다미에타 원정이 실패하고 1171년 동로마 - 베네치아 전쟁이 발발하자 서서히 남하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로마를 공통의 적으로 두는 나라들 -베네치아, 장기 왕조 등- 과 연대를 꾀한 프리드리히는 1173년 동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안코나를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공격하였고 동년 장기 왕조와 협조하여 당시 동로마의 통제를 벗어나는 중이던 룸 술탄국을 장기 왕조와 연대시켜주려 하였다. 비록 두 시도 모두 동로마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1174년 아모리 1세가 사망하고 어린 보두앵 4세가 즉위하여 섭정단이 통치하기 시작한 예루살렘 왕국이 동로마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한편 몬페라토 후작인 굴리엘모 5세를 통해 신성 로마와 비교적 가까워지자 프리드리히 1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남하한다는 명분을 쥐게되었다.
이를 지켜본 마누일은 불안했다. 재위 초반 2차 십자군을 겪은 그는 제국령을 대규모의 십자군이 지나가는 것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 측이 남하할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싫었고 이를 위한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마침 1161년 제국에 복속 되었던 룸 술탄국이 1170년대 들어 다니슈멘드를 공격하며 세를 불리고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이를 징벌한다는 외교적 이유가 생겼으며, 제국의 고토를 수복한다는 역사적 이유와 아나톨리아 반도라는 긴 종심을 확보하는 군사적 이유 및 기독교 국가의 황제로서 이슬람 국가를 공격한다는 종교적 이유까지 확보한다는 계산까지 생기게 되었다. 애초에 도중에 중지했던 1146년의 이코니온 공성도 군사적인 목적 이외에도 서방에 대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던가?
프리드리히가 남하할 조짐을 보이던 1175년, 마누일은 '성전'을 선포하였고 원정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룸 술탄국령인 니오 케사리아(Neo Kaisareia)와 아마시아(Amasya)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 성전을 선포했으니 이에 걸맞게 '성지'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기 위한 해군도 소집했다. 그리고 황제 본인은 룸 술탄국을 공격하기 위해 중앙군은 물론 봉신국, 동맹국 등의 주변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모조리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 연합 원정군의 목표는 룸 술탄국의 수도 이코니온이었다.
이후 미리오케팔론 전투 참조.
2.8. 말년
미리오케팔론 전투로 인해 '성전'이 싱겁게 종료되자, 지중해 세계는 크게 흔들렸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동년 저지되었지만, 교황령은 동로마 측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의 평가도 떨어지게 되었다. 교황령이 그렇게 신성 로마 제국 측에 조금 더 기울자 1177년 프리드리히 1세는 재차 남하해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최후의 교두보인 안코나를 점령해버렸다. 룸 술탄국은 통제를 벗어나 응징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제는 언제 서쪽으로부터 새로운 십자군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서서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황제는 여전히 분주해야만 했다.
먼저 룸 술탄국과의 전쟁이 이어졌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직후 원정군이 회군할 당시, 룸군 일부는 평화 조약에도 불구하고 회군하는 동로마군의 일부를 공격했다. 군을 물리는 것이 더 중요했으므로 황제는 적극적인 반격을 지시하지 않았으나, 대신 조약에 파괴하기로 명시한 도릴레온(Dorylaion)과 수블레온(Sublaion)의 두 전진 요새 중 중요한 도릴레온은 남겨두고 수블레온만을 파괴했다. 술탄은 마침 응징 원정의 구실이 필요했으므로 이를 꼬투리잡아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개시했다.
1177년, 작년엔 1만의 병사조차 모으지 못했던 술탄은 2만 4천의 병력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결과를 보고 술탄에게 달려온 병력이 늘어난 것인지, 정규군을 제외한 약탈을 위한 유목민들까지 포함한 수치인지는 모른다[8] . 어쨌든 룸군은 메안데르강을 따라 서진하여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짓밟았다. 마누일은 섣불리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규모 원정 직후 다시 대군을 일으키기 곤란한 상황이었고, 십자군 혹은 서방의 추가적인 움직임을 주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비교적 소규모의 정예 병력만을 편성한 황제는 이를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치스에게 붙여 급파했다. 에게 해까지 이른 룸군은 왔던 길을 따라 회군하고 있었는데, 동로마군은 이를 노려 매복으로 급습하여 대승을 거둔다. 이것이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이다.
이 전투 이후 룸 술탄국의 공세는 현저히 약해졌다. 1178년 파나시온(Panasion)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179년에는 클라우디오폴리(Claudiopolis)를 포위했으나 황제가 소규모의 기병만을 이끌고 친정하자 퇴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년간 공방이 이어졌지만 국력차는 확연했다. 1177년부터 응징을 위해 전쟁을 지속했던 룸 술탄국은 수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하고 거꾸로 압박당하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179년 겨울, 술탄은 평화 조약에 동의했다. 미리오케팔론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없는 여전히 불리한 조약이었다.
한편, '성전'에 맞춰서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기 위해 아크레로 집결했던 동로마 해군의 150여척의 대함대는 1177년에 소득없이 귀환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연합 원정에 회의적이었다고 전해지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와 인연을 맺는데 성공한 제국은 그를 이용해 프랑스 왕국의 루이 7세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루이는 2차 십자군 때의 일로 마누일에게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황제가 보낸 외교단을 대동한 플랑드르백의 중매 끝에 9살난 공주 아녜스를 10살난 동로마 제국의 황자 알렉시오스 2세에게 시집 보내는데 동의했다. 27살임에도 아직 미혼이던[9] 장녀 마리아를 이용한 외교도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몬페라토 후작의 5남인 17살난 레니에와 혼인시킨 것이다. 그의 죽은 큰형과 시빌라 사이의 아이가 예루살렘의 왕이 될 것이고, 후작위를 이을 둘째 형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주요한 인사가 되며, 이후 셋째 형이 몬페라토 후작위를 이어 받을 것을 생각해보자면 황가와 후작가의 격이 맞지 않는 결합이었음에도 매우 의미 있는 혼인이었다.
나이차 많은 이복 남매의 혼례를 치르던 1180년 3월, 미리오케팔론의 실패로 혼돈에 빠져드는 듯 했던 지중해는 다시 안정되었다. 각각 전쟁으로 굴복시킨 헝가리 왕국과 룸 술탄국은 제국에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교황령과의 관계를 1179년 ~ 1180년간 다시 개선하면서 프랑스 왕국, 몬페라토 후국 등 과의 혼인 동맹이 이어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탈로 막을 수 없어 보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재차 좌절되었다. 킬리키아에서는 동로마군이 아르메니아인들을 격파하고 있었으며, 안티오키아 공국은 차기 황제의 외가로서 존재할 터였다. 영향권을 벗어나는 듯 했던 예루살렘 왕국도 안티오키아와 몬페라토와의 동맹이 굳건히 유지된다면 살라딘의 위협 때문에 마누일이 구축한 혼인 관계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대전략 속으로 복귀할 것이었다.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60에 가까운 나이에 지나치게 기력을 소모한 탓일까? 1180년 9월이 되자 황제는 더 이상 제위에서 버틸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수도원으로 퇴위했다. 한달도 못 지나 황제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3. 평가
3.1. 외정
마누일 재위기의 동로마 제국은 후기 동로마 역사에서 정점으로 평가 받는다. 헝가리 왕국, 예루살렘 왕국, 조지아 왕국 등은 물론 이슬람 국가인 룸 술탄국마저 외교력 혹은 군사력으로 제국의 영향권 밑에 두고 프리드리히 1세의 신성 로마 제국과 유럽의 패권을 다투었다. 또한 경제력으로는 수배의 영토를 가졌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의 제국과 비교할 정도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해군, 상인, 화폐 등은 해외의 이집트, 이탈리아, 러시아 지역 너머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평가는 다소 교차되는 편이다. 외교에 치중한게 저평가되지만, 오히려 서방 세력과 되도록 힘의 균형을 이루려했던 그의 정책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지나치게 권모술수를 부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고립적인 성향이 심했던 그의 조부 알렉시오스 1세보다는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이탈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두차례의 군사적인 실패가 지적받지만, 모두 당시 제국의 국력으로 감당할 만한 것이었다.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을 달성하지 못할 때 이를 더 끌지않고 미련없이 원정을 중지하는 결단력은 로마노스 4세 등의 황제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점이다. 알렉시오스 1세보다는 훨씬 여유있는 상황에서 치세를 시작했기에 저평가 받기도 하지만, 조부나 부친보다 복잡하고 다변화 된 국제 정세를 잘 넘긴 정치 감각은 그의 최대 장점이었다. 그의 큰 실수는 오히려 후계자 안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일한 적자인 알렉시오스 2세가 지나치게 늦게 태어난 반면, 마누일 자신은 아들이 장성하기 전에 죽음으로써 지지 기반이 부족한 섭정단과 야심 많은 친족들 사이에 후계자를 노출시키고 말았다. 결국 이는 권력 다툼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선동과 왜곡을 장기로 삼은 안드로니코스 1세가 집권하여 그의 외교 정책까지 모조리 파탄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3.2. 내치
4. 가족
종증조부: 이사키오스 1세
증조부: 요안니스 콤니노스
종조부: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조부: 알렉시오스 1세
조모: 이리니 두카이나
아버지: 요안니스 2세
어머니: 헝가리의 이리니
숙부: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숙부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버지)
고모 안나 콤니니
고모: 테오도라 콤니니
큰형: 알렉시오스 콤니노스#s-3 (요안니스 2세와 공동황제)
작은형: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셋째형: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사촌: 안드로니코스 1세
아내: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5. 여담
5.1. 인간 흉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인간흉기에 가까운 싸움 실력을 지닌 용맹 무쌍한 황제이기도 하였다. 일생동안 전장에 몸소 뛰어들어 실로 놀라운 무력을 수차례 발휘했다. 황자 시절에도 전장에서 날뛰다 아버지에게 주의를 듣기도 하고, 패색이 짙던 네오카이사레아 공략전 중에는 갑자기 튀어나온 적의 추격군을 박살내어 다시 성 안으로 몰아넣기도 했었다. 제위 이후 1146년의 원정 때는 룸 술탄국의 군대와 대치하던 중에 황제의 깃발을 들고 '''홀로 적진으로 돌격'''하는 용기를 발휘해 전세를 역전시켰을 뿐 아니라 가브라스라는 룸 술탄국에 투항해 배신한 귀족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 500여명의 투르크멘 기병들에게 요안니스 악수흐와 형 이사키오스 둘만 데리고 뛰어들어 승리했다거나, 40명의 룸 술탄국 병사들과 혼자 싸워서 상처 하나없이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다.[10]
위명이 대단하다보니 황제가 친정한다는 소문을 듣기만 해도 항복하거나 퇴각할 지경이었다고…
5.2. 여성 편력과 기행
평생 한 여성만 사랑하고 가족에게 지고지순했던 선황 요안니스 2세와 달리 그는 많은 여성들과 추문을 일으키고 살아왔다. 첫 황후 슐츠바흐의 베르타는 외교적 역할은 톡톡히 해왔지만, 실제 가족 관계는 방치 수준이었다. 훗날 베르타의 사후에 새 장가를 들고 나서도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테오도라 바타체스와 마리아 타로니테스 등의 당대의 미녀들과 관계를 가졌고, 이러한 정부들은 황궁에서 거의 황후와 같은 의전을 누렸고, 심지어 몇몇 사생아 아들들은 아들로 인정받아 부제 직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마상창시합의 팬이었다. 콘스탄티노플뿐 아니라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에 있었던 시합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으며 승수도 몇 번 딴듯. [11]
또한 점성술과 의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콘라드 3세가 2차 십자군 중 열병으로 낙오되었을 때 이를 직접 치료하기도 했고, 점성술적인 민간 요법과 사도를 따르기도 했다. 점술가들은 그가 장수할 것이라 했지만, 이 예언이 맞지 않자 지진, 가뭄 등의 이상한 예언으로 눈을 돌리게 해 자신들의 야매 점괘를 숨겼다고 한다.
동로마인들에게 있어 이러한 기행은 눈살이 찌뿌려지기 충분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제국민들은 (결국 마지막이 된) 중흥을 가져온 성군의 일탈 정도로 치부했다.
5.3. 투르크를 몰아낼 수 있었는가?
만지케르트 이래 투르크는 아나톨리아로 조금씩 들어왔고 로마의 정쟁이 불안해지면서 밀물처럼 밀려오게 된다. 여기서 보통 제기되는 떡밥이 마누일 1세급 후계자가 메가스를 이어 즉위했다면, 투르크족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는 가정이 가끔 터져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에 단언은 없으니 0%라 할 순 없지만, 마누일은 커녕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바실리오스급의 군주라도 힘들다. 마누일의 체제는 그 자체로 고도의 외교적 안배를 바탕으로 한 정권이고, 룸 술탄국 정벌에 마누일이 전지중해권에 프로파간다를 뿌린 것도 그런 일환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나톨리아 방면에만 로마군을 집중시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미 마누일 말기부터 헝가리는 다시금 제국의 질서에서 이탈하려 간을 보고 있었고, 베네치아 역시 당장은 마누일에 굴복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복잡다변화된 다전선 관리를 위한 외교적 노력은 황제의 막대한 심력을 요하는 일었고, 신황제가 설령 유능했다 하더라도 과연 마누일과 같은 효과를 거둘지 장담하는 것은 어렵다.
이 모든 면을 다 무시해도, 애초 무력으로 투르크를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환상에 가까웠다. 투르크는 아나톨리아에 들어온지 벌써 이 시점에서 100년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소아시아 중동부는 이제 로마의 땅이 아닌 투르크의 땅에 가깝고 그들의 체제가 깊숙하게 자리잡았다. 즉, 로마 입장에서 아나톨리아를 '수복'한다는 것은, '수복'이 아닌 새로운 땅의 '정복'과 같았으며, 새로운 '정복'을 위해선 최소 수만에 이르는 대군을 끊임없이 투사할 국력을 요했다. 당장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로마 제국이 여러 황제에 걸쳐 1차 불가리아 제국과 전쟁을 치룬 일을 복기해보자. 당시 로마는 수만의 대군을 그대로 꼴아박고 증발시켜도, 추가병력을 저글링처럼 뽑을 국력이 있었고, 해상에서도 수천 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수륙양면 공격을 가할 정도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본인도 출중했지만 전대 황제들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막타를 날릴 수 있었다. 허나 마누일 그리고 후계자 시대의 로마는 마케도니아 시대와는 달랐다. 당시 로마는 분명 지중해권의 초강대국이지만, '압도적'이진 않았다. 동아시아의 중화 제국과 서유럽의 프랑스간 차이를 생각하면 된다. 로마는 중국이 아니라 외려 프랑스에 가까웠으며, 아주 적을 뭉개버릴 정도의 압도적 전력투사는 구조상 무리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로마는 5만 이상의 대군을 매년 원정을 보낼 수 있는 국력을 가진게 절대 아니다!
투르크족이 각자 분열된 형태로 아나톨리아에 고향처럼 적응한 것도 문제였다. 정주 제국이었다면 대규모 회전을 벌여 일단 승리하면, 그 지역 자체가 손에 들어오기에 이긴다는 가정 하에 난이도가 쉬워진다. 로마가 소아시아를 침공할 당시 상대했던 미트리다테스의 폰투스 왕국이나, 알렉산더가 상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그렇다. 이들은 정주국가였고 그렇기에 몇 번의 회전에서 이기면 일단 항복을 받고 그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투르크는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유목민이었으며 서로 통합이 안되고 각 무리가 따로 놀거나 자신들끼리도 싸울 정도였다. 사분오열되니 잡기 쉽지 않았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투르크 한 무리를 토벌해도 또 다른 무리는 별개로 로마령을 약탈하고, 또 이들을 토벌하려면 그만큼 전력이 차출당한 방어선에 구멍이 뚫린다. 그럼 그 구멍으로 다른 투르크 무리가 약탈을... 무한반복. 애초 콤니노스조 현제들이 우주방어전략을 택하고 요새 알박기로 교통로를 통제한 것에서 로마의 한계를 알 수 있다. 뭉갤 수 있었다면 진작 뭉갰을 것이다[12] . 룸 셀주크는 아나톨리아 투르크를 다 통제하는 국가가 아니었고, 룸의 말을 안 들어먹는 무리가 태반이었다. 외려 룸 셀주크가 있었기에 '그나마' 통제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훗날 룸 셀주크가 로마보다 먼저 망하자, 동쪽에서 추가 투르크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왔고, 끝내 로마는 아나톨리아 전체를 빼앗기게 된다.
투르크가 소수인데 왜 못 막냐는 반론이 있지만, 투르크는 당연히 로마인보다는 적었어도 소수는 아니었고, 의외로 그 수가 많았다. 덧붙여 만지케르트에서 한방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100년에 걸쳐 꾸준히 동쪽에서 계속 유입되었다. 이는 앞으로 300년은 더 이어질 터다. 유능한 황제, 암군이 묘하게 반복되는 로마의 정권도 효율적인 정책의 일관된 추진을 막았다. 작정하고 전 국력을 끌어모아 10년 이상 아나톨리아에만 병력을 박을 상태가 조성되었다면 모를까, 로마는 다른 전선에도 적이 많았고 내부적으로도 정쟁이 불안한 경우가 많았다. 인구수와 국력에서 전근대 최고레벨인 중화제국조차 청 제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유목민에 대한 걱정을 종결지을 수 있었다[13] . 하물며 중국보다 압도적 국력 열세에, 전선은 많아 병력은 분산되며, 심지어 오합지졸도 아니고 강적이었던 투르크를 이 모든 한계를 노오오력으로 극복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 마누일 시기에 공세를 취할 수 있던 것은, 당시 로마의 공세국면이 정교한 외교정책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이며, 이 축적된 역량으로 룸 투르크에 우위적 상황을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아시아 내륙까지 깊숙히 진격했음에도, 정작 중심도시인 콘야(이코니움)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끝내 로마군은 투르크의 핵심영토는 하나도 빼앗지 못했다[14] . 딱 당시 로마의 현실적 한계였다.
마누일 1세는 메가스이자 문무겸비 용장이었고, 단명한 것도 아니며 중세 기준으로 오래 살았다. 내치에서도 병원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능력을 발위했다. 그럼에도 대제는 투르크족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를 수복하는데에 실패했다. 원인에는 외교에 우선순위를 둔 중앙의 정책도 물론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로마의 국력이었다.
굳이 아나톨리아 내륙 전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자면 몇십년간 느긋하게 전력을 가해 튀르크 세력을 일소할 수 있도록 주변 세력들이 아무도 로마를 건드리지 않고 가만하 놔둬주던가, 그게 힘들다면 주변 국경이 안정되고 국력이 축적된 상황에서 한번식 총력을 다해 룸 술탄국에 일격을 가하여 일부분씩이라도 해당 지역 내에서 튀르크 세력을 일단 한번 일소하고, 그렇게 재수복한 영역에 주변의 튀르크족이 재침투하지 못하도록 일부 병력을 주둔시키고 그 지역을 요새화함으로써 다시 로마의 지배력이 정착될 때까지 영토를 유지하다가 또 다시 주변 국경이 안정되고 국력이 축적되면 다음 지역에서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아나톨리아 전체를 수복할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수복 과정에서 군사적 실패는 '수복 영역을 넓히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기존 영역을 잃지는 않았다' 수준으로 억제되어야 하며(물론 이정도의 군사적 실패라도 수복 성공까지 걸리는 총 기간을 계속 길어지게 만들 것이다.) 만치케르트 전투 같은 대패가 한번이라도 있으면 그 이전 수십년에 걸친 성과가 한번에 날아가버릴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다른 국경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탈환한 영역의 유지-안정화를 위해 주둔시켜준 병력은 절대 빼서는 안 될 것이고(빼면 당연히 튀르크족이 재침투한다) 동시에 그나마 적은 자원으로 현지를 안정화하려면 이전 시대의 테마와 같은 현지 밀착형 군사조직이 필요할 것인데, 이 군사조직의 지도자는 튀르크의 공세를 장기간 막아낼 정도로 유능해야 하지만 동시에 (아나톨리아 수복 대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앙정부에 항상 충성을 다하여 정국을 혼란시켜서는 안 된다. 결국 요약하면 우주의 기운이 로마를 도와주든지, 마누일 수준, 또는 그정도는 아니라도 군사적으로든 내정적으로든 외교적으로든 명군 소리를 들을만한 황제가 최소 두세번은 연달아 나와서 백여년 정도는 안정적인 치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로마는 알렉시오스 1세부터 마누일까지의 시기에 이미 그런 희망적인 일이 일어나 회생된 것이고, 또 다시 그러한 희망적인 상황을 바란다는 것은 역사적 if 놀이라기보다는 게임 플레이 계획에 더 가까울 것이다.
정리하자면, 적어도 마누일 1세 메가스의 시절에서 투르크의 축출은 한없이 불가능한 일이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유능하고 정력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을 대마왕 안드로니코스 1세의 집권이 예정되면서, 로마의 소아시아 영구상실은 거스르기 어려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동기적으로도 소아시나 내륙 정복은 제국에게 꼭 최선은 아니었다. 바실리오스 이래 로마의 내부를 말아먹은 것은 고질적인 관료집단 vs 군사귀족의 대립인데, 애초 군사귀족의 본거지는 소아시아였고 이를 되찾는 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군사귀족의 힘을 회복시킨다는 것이었다. 한참 황제권을 강화시키며 국가안정을 추구하던 콤니노스 왕조에게 군사귀족의 부활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전대 요안니스 2세조차도 아나톨리아 내륙보다는 시리아로 향하는 길과 안티오크 탈환에 중점을 맞췄다. 여기 더해 복속시킨 유목민을 정주화하고 완전히 박살난지 몇십년도 지난 행정문서와 토지대장을 다시 작성하는 등, 실로 엄청난 행정적 과업들이 제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험적인 황제라면 이 모든 리스크를 감안할 수야 있겠지만, 콤니노스 왕조는 안정을 택했다. 이 같은 콤니노스 왕조의 타협은 안정성은 끌어올렸지만, 결과적으로 그 체제에 안주함으로서 고토회복의 의지를 일정부분 포기하는 트레이드를 실시했다[15] . 미래를 바라보지 못한 어리석은 정책이라 비난할 수야 있겠지만, 이들은 중세 사람들이다. 정보가 발달한 현대를 사는 현대인조차 앞길을 모르는데, 하물며 중세인이야 오죽하겠는가? 당시 로마정권에게 그것은 최선의 방책이었고 국가최고의 엘리트집단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인 셈이다.
- 또한, 역사적 if 놀이의 영역이기는 하나 소아시아의 회복과 군사귀족의 부활이 오히려 동로마의 국력 회복에 독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콤니노스 3대의 중흥과 번영이란 결국 '국내의 정치적 안정성'을 기반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소아시아 내륙을 회복하려면 본거지를 잃고 쫒겨났던 군사귀족이든 서유럽계 용병(십자군)이나 귀순한 튀르크인이든 어쨌건 군사력을 가진 집단을 그 자리에 정착시켜야 하는데, 중기 이후 동로마제국의 역사가 증명하듯 군벌(군사귀족)은 언제든 최대 황제의 자리까지 노리는 심각한 정국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자면 아나톨리아 수복을 위해 정착시킨 군사귀족들이 딱 외부의 적이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서 그 군사력을 도리어 황제와 중앙정부를 향해 돌린다거나, 더 심하게는 자신이 제위에 오르기 쉽도록 튀르크등 외부의 적을 끌어들일수도 있었던 것[16] . 결국 콤니노스 황제들이 아나톨리아 수복을 시도했다면 그 결과는 '실제 역사에서 동로마가 누린 3대 딱 100년의 마지막 중흥기'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최후의 쇠락기로 빠져드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며 이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군사 귀족들로 인한 정국 혼란으로 콤니노스의 중흥기가 실제 역사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가능성은 이보다 더 높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관련 문서에서 자세히 설명하듯 콤니노스 왕조의 군사정책은 기본적으로 '유능한 황제에 의해 통제받는 중앙군' 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고 이 기조는 '황제가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군사력 자체가 유명무실' 해지는 단점이 있지만 반대로 '황제가 제대로 통제할 수만 있다면 높은 효율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정책, 콤미노스가 선택하지 않은 '지방 군사귀족을 중심으로 한 군사제도'는 '황제가 통제력을 상실해도 군사력은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안정성이 떨어져 정국 혼란의 위험성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선택지에서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이 고른 것이 전자였고, 콤니노스 왕조 시대 동로마의 중흥은 이러한 선택지들의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아나톨리아 수복 포기는 콤니노스 왕조의 실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는, 콤니노스 왕조가 거둔 '성과'들은 상수로 두고 이루지 못한 목표들만 변수로 보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의 성과들 자체가 그에 상응하는 선택과 대가를 요구했음을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얻을 수 있는' 상수로 두니 '다른 선택을 했으면 손해 없이 추가적인 성과만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 물론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공짜도 없다. 뭔가를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그 대가로 치를 기회와 자원을 다른 데 투자하면 그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마누일 1세가 아나톨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회복 시도를 '방기' 했다는 해석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콤니노스 왕조와 룸 술탄국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자주 제기되듯, 륨 술탄국은 기본적으로 '로마 영향권 내의' 국가였던 것이다. 양자의 세력 균형에 따라 거의 봉신에 가까운 관계에서 거의 독립적인 관계 사이를 오가는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콤니노스 왕조 시대 내내 룸 술탄국은 로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자유로워지지는 못했다. 물론 복속도가 높아진 상태에서도 <반쯤은 봉신, 반쯤은 적> 인 관계는 여전했지만... 달리 보면, 전근대적 봉건체제에서 대군주에 대한 봉신의 관계란 현대나 중앙집권체제 하의 지방관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위협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룸 술탄국처럼 종주국이 약해지면 언제든 털어주겠다고 노리고 있는 관계는 봉건시대치고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반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춘 봉신은 언제든 대군주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 맥락에서 보면, 마누일 1세는 아나톨리아의 회복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고 볼 개연성도 있다. 단지 전적으로 군사력에 의존하여 룸 술탄국을 '''박살내서''' 쫒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군사력 투사는 꼭 필요한 순간으로 한정하고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세력을 '''복속시키고 포용'''하는 형태로 아나톨리아를 수복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개연성이 있는 것. 실제로 마누일 1세는 룸 셀주크에 대해 후한 선물을 자주 베푼 것으로 유명한데, 만약 룸 셀주크와 동로마의 관계를 단지 '지금은 여력이 없어 치지 못하지만, 여유가 생기면 때려줘야 할 적'이라고 본다면 이건 적에게 도움을 주는 미친짓이다. 하지만 복속과 포용을 목표로 한다면 이는 충분히 미래지향적인 투자가 될 수 있다. 가능한 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의 우위를 각인시키는데는 '선물'이 가장 유용한 법이다[17] .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허황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중세 로마 국가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조건이란 결국 1)제국에 대한 충성 2)종교(정교회) 였을 뿐인데 적지 않은 튀르크인들이 이미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로마에 합류한 상태였다. 물론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튀르크의 주류는 이슬람교도였다는 점이 이 복속 계획의 걸림돌이긴 하지만... 원래 유목민들은 대체로 종교적으로 개방적인 경우가 많았고, 애초에 셀주크 계열 튀르크들이 이슬람화 된 것도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유목민 특유의 분열상까지 감안하면 아나톨리아 튀르크 중 일부라도 기독교(정교회)로 개종할 경우 이들을 통해 다른 튀르크 세력을 이이제이하거나, 장기적으로 제국에 완전히 복속시키는 것도 가능해보이는 대안 중 하나였을만 하다.
이렇게 볼 경우, 정치외교적인 '복속'과 군사적인 '정복' 중 과연 어느쪽이 더 효과적인 아나톨리아 수복 방법이었느냐가 문제일 것인데, 물론 정치외교적 복속이 실패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마누일의 재위기간 당대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에도 과연 정치외교적 해법보다 군사적 해법이 더 좋은 해결책이라고 여겨질지는 별개의 문제인 것. 위에도 상세히 설명된 것처럼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 역량은 막강하기는 했으나 상존하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빠듯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튀르크의 장점이 '군사적 역량' 이라면 비잔티움의 강점은 '정치외교경제문화사회적 역량' 이었던 것 역시 현실이다. 따라서 무리한 군사적 위력 행사보다는 정치외교적 해법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할 만한 상황이었던 것. 문제는 마누일 사후 어린 알렉시오스 2세의 즉위와 안드로니코스 1세의 찬탈, 그 뒤를 이은 앙겔로스 왕조의 무능으로 제국이 정국 장악력을 상실한 것이지만, 그렇다면 군사적 해법으로 접근한다고 한들 콤니노스-앙겔로스 교체기의 혼란을 무사히 넘겼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
[1] 나머지 3명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설자 콘스탄티누스 1세, 통일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 1세,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등의 고토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개 망명 정권의 황제들은 제외한다.[2] 이는 마누일 대제 사후 반라틴 감정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단초가 된다.[3] 수도에 있던 삼남 이사키오스 대신 막내 마누일이 계승자로 선택된 이유로는 성정이 사나운 이사키오스보다는 마누일이 인격적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주력군의 회군을 안정적으로 이끌 제위 계승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이있다.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음모론이 자주 제기된다.[4] 제위 계승의 정황을 보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즉, 제위 계승권이 뒤쳐지던 다른 황자가 2년여 동안 장자 알렉시오스와 차남 안드로니코스를 죽도록 하고, 모종의 방법으로 황제를 죽인 다음, 진중에서 유력 인사를 포섭해 군대에 의해 황제가 된 것이라는 것. 후보는 요안니스 2세의 삼남 이사키오스와 사남 마누일 그리고 요안니스 2세의 동생 이사키오스(마누일의 사촌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버지)이다.[5] 다만, 당시 프리드리히 1세는 1153년에 교황청과 비밀 조약을 맺어 노르만 왕조와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원정 당시 약속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6] 르노 드 샤티용 항목 참조. 결혼 반대자 중엔 마누일도 있었다(...).[7] 단, 이 전염병과 함대의 기동에 대한 서술은 베네치아 측의 과장일 수 있다. 장시간의 항해에 의한 전염병은 쉽게 납득 할 수 있으나, 수천명 단위의 전염병은 쉽게 발생하지도 않을 뿐더러 잦은 기동은 동로마 해군의 반격에 의한 피해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서에서 이러한 식으로 적국의 공격에 의한 피해를 자연재해나 전염병 등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매우 흔하다.[8] 다만, 수세에 몰린 상황보다 공세-우세 상황에서 병력 동원력이 높아지는 것은 유목민의 중요한 군사적 특징 중 하나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는 군사활동(약탈) 자체가 중요한 산업 중 하나이기에 약탈 성공 가능성이 높은 우세-공세 상황에서는 군사활동에 참여하려는 동력이 높아지지만 반대로 약탈을 기대할 수 없는 방어전, 특히 상대가 우세할 경우라면 반대로 참여 동력이 크게 약화되어 동원력이 격감하는 것. 이 때문에 수 많은 유목제국들이 전성기에는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정주제국을 말 그대로 밟아버리지만, 반대로 정주제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역습해 올 경우에는 그 잠재적 동원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털려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점에서는 사실 <술탄에게 달려온 병력이 늘어난 것인지, 정규군을 제외한 약탈을 위한 유목민까지 포함한 수치인지> 굳이 구별할 필요 자체가 없다. 원래 그게 잘 구별이 안 되는게 유목민이고, 이걸 굳이 구별하지 않고 성인 남성의 다수가 상시적으로 병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 유목민이 가진 폭발적인 군사적 위력의 핵심요소이기 때문. 결국 요약하자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강대국이 25000~40000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상황에서는 "맞서 싸우러 나가봤자 이득볼것도 없는데 뭐하러 나감?" 하던 유목민 전사들이 비잔티움의 공세가 실패하고 룸 술탄국이 역습하는 상황이 되자 "비잔티움령을 털면 많이 벌 수 있겠네!" 하고 모여든 것이다. 이는 결국 유목민 사회가 가지는 특징으로부터 기인한 현상이다.[9] 마리아는 헝가리의 왕이 되는 벨라 3세와 결혼하여 공동으로 제위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면서 없던 일이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엘모 2세와 결혼이 논의 되었으나 마누일의 반대로 역시 결혼하지 않았다.[10] 그의 아버지도 중과부적의 싸움에 참가한적이 있지만, 상처를 입거나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1] 위의 편력과 무쌍은 그의 시기에 로맨스나 서구 기사도적 문화가 동로마(정확히는 궁정)에 영향을 준 덕택으로 볼 수 있다. 단지 12사도와의 동격인 동로마의 수호자인 바실레우스로써가 아닌 서구의 낭만적 경향도 받아들여야 외교가 편했을 테니...[12] 역으로 생각해보면,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가 이렇게 사분오열된 상태였기에 마누일 1세의 치세동안 로마 제국은 대체로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에 대해 우세한 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아나톨리아 튀르크가 회전 한방에 굴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통합된" 상태였다면 동로마의 입장에서는 아나톨리아의 전선을 '''유지'''하기 훨씬 버거웠을 것이다.[13] 그리고 당연한 배경사실이지만 청제국이 드디어 유목 세력의 위협을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도 일단 화약 무기의 발전 같은 인류 전체의 변화한 기술적 환경과 '''무엇보다 본인들도 그 유목 세력이 국체의 기원이었다는 사실'''이 핵심적이다. 만주족과 여진족 자체야 사실 유목이 아니라 반유목 수렵 민족에 가까웠지만 산해관 입성 이전 전통적으로 중국을 가장 크게 위협한 내몽골 일대의 몽골 세력을 먼저 평정, 포섭하고 나서야 중원 장악이 가능했다[14] 이 역시, 세력과 영역이 유동적인 유목민인 튀르크의 특성상 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내륙을 튀르크 세력이 뒤덮어 버린 상태에서도 요새화된 주요 도시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로마가 공세에 나설 때는 역시 세력과 영역이 유동적인 유목민의 특성상 일정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튀르크 세력을 일소한다 해도 거기서 병력을 빼고 나면 다시 주변으로 밀려나갔던 튀르크 세력들이 되돌아오는 것이다.[15] 그리고, 위에서 여러번 강조된 것처럼 리스크를 감수하고 고토 수복의 모험에 뛰어든다고 해서 그 결과가 반드시 좋을 거라는 보장도 전혀 없다. 오히려 모험적인 고토 회복 드라이브는 단 한순간의 실수로 이전 수십년에 걸쳐 쌓아올린 성과를 한번에 날릴 위험까지 감수해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16] 동로마 내 제위다툼에서 튀르크 세력을 끌어들이는 사례 역시 이후의 동로마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17] 중국의 통일 왕조들이 조공무역 체제를 통해 주변국에 대한 우위를 입증해 온 것을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