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크라이페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의 장군이다. 1차대전부터 복무하여 2차대전기에는 소장까지 진급하였으며 육군 22강하사단의 사령관으로 재직하였다. 그보다는 22강하사단이 그리스 크레타 섬의 주둔군으로 있던 시절에 영국군 SOE와 크레타섬 레지스탕스에 의해서 납치되었던 것으로 더 유명하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대전·전간기
제 1차 세계대전 참전, 베르됭 전투에서 참여하였으며 1등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았다.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서 정규군이 아닌 자유군단이라는 이름의 무장단체가 설립되면서 크라이페는 이곳에 참여한다. 이후 자유군단이 국가방위군으로 전환되면서 국가방위군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독일국방군이 창설되면서 크라이페는 국가방위군에서의 계급을 인정받아 소령의 계급으로 군생활을 이어간다.
2.2. 제2차 세계대전
2.2.1. 프랑스 침공
1939년 58보병사단의 209보병연대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는데, 58사단은 프랑스 침공의 주공이었던 A집단군의 16군 23군단에 배속되어 룩셈부르크 지역을 돌파하는 작전을 부여받았다. 프랑스 침공 기간 동안 크라이페가 속했던 58사단은 룩셈부르크를 통과한 후 남하하여 베르됭과 툴(Toul)까지 이르렀다.
2.2.2. 독소전쟁
1941년 5월, 58사단은 다시 북부집단군 18군 38군단으로 배치되어 동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와 쿠반 등지의 공격을 담당하였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초기, 크라이페가 있었던 58사단은 크라스노예 셀로라는 작은 도시를 점령하였고, 레닌그라드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우리츠스크까지 진격하였다. 이 때의 공훈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고 그 해 9월에는 대령(Orbest)으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여기서 더 진격하는 계획이 아니라 도시를 포위하고 유지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한동안 별다른 진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1941년 11월에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되면서 독일군은 벨코프강까지 후퇴하게되는데, 이때 소련군 2충격군의 진격으로 형성된 벨코프 돌출부에 대하여 58사단이 반격을 했다. 하지만 반격 이후 크라이페가 이끄는 209연대는 다시 재반격해온 소련군에 의해서 퇴각해야만 했다.
큰 타격을 입은 209연대는 1942년 5월에 재편성되어야 했고, 크라이페 본인도 1942년부터 1943년 동안 독일로 돌아와서 교육훈련 담당 감찰직, 인사부 감찰직 등의 행정직으로 빠져있어야 했다.
크라이페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58보병사단 사단장 프리드리히 알프리히터 소장과 그 상급부대였던 38군단 군단장 지그프리트 하이네케 보병대장으로부터 "예리한 전략적 판단 및 안목, 충성심, 휘하 병력들로부터 존경받는 점" 등을 치하하며 지휘부에 사단장으로 추천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덕분에 1943년 6월에는 다시 동부전선에 79보병사단장으로 재배치되었다.
17군 예하에 있었던 76보병사단은 쿠반(Kuban)에서 활약하였으며 당시 동부전선이 슬슬 방어적 태세로에 전환했던바 많은 방어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무수한 방어전끝에 전선을 물리던 크라이페의 79보병사단은 1943년 9월에 쿠반을 포기하였고 우크라이나 전반에 주둔하였던 6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2.2.1. 크레타 섬 주둔군 시절 및 납치
재편성 이후 고급지휘관 예비역으로 지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가 1944년 3월 크라이페는 크레타 섬 주둔군이었던 22강하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크레타 섬은 크레타 섬 전투의 막심한 피해 끝에 점령에 성공하였으나 크레타 섬의 험난한 산악지형상 완전히 통제권을 얻은 상태는 아니였다. 그만큼 파르티잔 활동이 격렬했는데 전임 22강하사단장이었던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는 주둔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파르티잔 토벌을 위해서 무자비한 살육을 벌여 "크레타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은 상태였다.
당시 영국군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을 어느 정도 제압한 상태였고 다음 계획으로 상륙작전을 입안중이었다. 당연히 목표는 프랑스 서부 해안이었으나 기만책의 차원에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가까운 크레타 섬을 노리고 있다는 의도를 보여만 주고 싶어 했다. 당시 영국군 특수 작전국(SOE)는 롬멜을 비롯한 독일 국방군의 유능한 장군들을 납치하는 작전을 여러차례 수행한 바 있었고 크레타에서 학살을 벌인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 또한 그 목표 중에 있었다.
기만책이 필요했던 윈스턴 처칠에게 SOE의 크레타 주둔군 사령관 납치 작전은 효과적인 기만책이었고 결국 이를 작전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정작 뮐러는 1944년 2월에 고급지휘관 예비역으로 독일로 돌아간 상태였고 이미 하인리히 크라이페가 부임한 상태였다.
SOE 요원 2명과 크레타인 2명으로 구성된 납치팀은 먼저 항공기를 통해 몰래 강하하는 방법으로 침투하였으나 SOE요원 1명만 성공하였고 나머지는 기상악화로 인해서 실패하였다. 결국 리비아 동부연안에서 잠수정을 통해 크레타 남부의 절벽해안에 상륙하여 SOE 납치팀과 크레타 레지스탕스가 접선할 수 있었다.
크라이페의 동선 및 습관 등의 정보를 크레타 레지스탕스로부터 획득한 SOE 납치팀은 크라이페가 예하 부대 지휘부를 이동하는 지점을 골라서 독일군 헌병으로 위장한 채 매복하였다. 4월 26일, 늦은 저녁시간 이라클리온으로 향하는 삼거리에서 매복해있던 SOE 납치팀은 멀리서 장군 전용차량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급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차량 안에는 운전병[1] 과 크라이페 2명이 전부였으며 장군 차량이었던 덕에 쉽게 크라이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맨날 다니는 길이었던 탓에 크라이페는 경계를 늦추고 있었던 터라 6명[2] 의 무장병력에 무방비로 체포되었다.
크라이페의 이름이 떡하니 씌여진 장군 관용차를 이용하였기에 20여개소의 초소를 검문검색없이 무사히 지나칠 수 있었다. 일정한 지점에 이르러 크레타 섬의 남부에서 접선하기로 했기 때문에 크레타섬 남부의 거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한 했다. 차를 폐기한 납치팀과 크라이페는 거친 산악지대를 돌파하여 장장 20여일에 동안 이동하였다. 도중에 당시 49살의 크라이페는 바위산 지대를 통과하면서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납치팀의 회고에서는 크라이페가 일부러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밍기적거린다라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결국에 납치팀은 크라이페를 잘 보살펴가면서 접선지점에 도착하여 고속정을 타고 이집트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다소 황당하게 포로가된 크라이페는 이집트에서 영국군에 포로로 넘어갔으며 이후 종전이 끝날때까지 캐나다의 고위 포로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영국군은 크라이페를 심문하였는데 성격은 비교적 활발하고 강건하며, 나치즘에 딱히 경도된 경향은 없다라는 결과를 쓰기도 하였다.
크라이페 납치작전은 SOE가 성공한 유일한 장군 납치 작전이었다. 하지만 다소 함정인 것은 정작 크레타 섬에는 뮐러가 돌아와서 또 학살을 벌였다는 점이다.
2.3. 그 후
영국으로 다시 이관하여 포로생활을 하던중 1947년에 크라이페는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별다른 활동없이 지냈으나 1971년에 그리스의 TV쇼에 출연하여 자신을 납치했던 영국군 SOE팀과 재회하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1976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