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작전

 

영어: Operation Barbarossa
독일어: Unternehmen Barbarossa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
'''바르바로사 작전'''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의 일부
[image]
▲ 바르바로사 작전 지도
[image]
소련을 침공하는 독일 국방군
[image]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초토화된 소련의 마을
'''날짜'''
1941년 6월 22일 ~ 1941년 12월 5일
'''장소'''
소련 국경 전역
'''교전국'''
<^|1>[image] 소비에트 연방
<^|1>[image] 독일국
[image] 헝가리 왕국
[image] 이탈리아 왕국
[image] 루마니아 왕국
'''지휘관'''
<^|1> [image] 이오시프 스탈린
[image] 세묜 티모셴코
[image] 게오르기 주코프
[image] 마르키안 포포프
[image] 표도르 쿠즈네초프
[image] 드미트리 파블로프
[image] 미하일 키르포노스
[image] 미하일 툴레예프
[image] 로디온 말리놉스키
<^|1> [image] 아돌프 히틀러
[image] 발터 폰 브라우히치
[image] 프란츠 할더
[image] 빌헬름 리터 폰 레프
[image] 페도어 폰 보크
[image]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결과'''
추축군의 압도적인 승리, 전략적 목표 달성은 실패 [1]
'''영향'''
동부 전선 개전
'''병력'''
약 290만 명
- 소련 북부전선군
- 소련 북서전선군
- 소련 서부전선군
- 소련 남서전선군
- 소련 남부전선군
- 소련 예비전선군
약 380만 명
- 독일 북부집단군
- 독일 중부집단군
- 독일 남부집단군
- 기타 동맹국군
'''피해규모'''
- 전사 566,852명
- 부상 1,336,147명
- 실종 2,335,482명
- 전차 20,500대
- 항공기 21,200대
- 전사 167,347명
- 부상 600,584명
- 실종 34,527명
- 전차 2,400대 이상
- 항공기 2,827대
1. 개요
2. 배경
2.1. 소련군
2.1.1. 편제
3. 작전 준비
3.1. 독일 국방군
3.1.1. 편제
4. 전개
5. 결과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의 개전을 알린 작전이다. 단일 작전으로는 역사상 가장 많은 부대를 동원한 군사 작전이었다.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red beard)''라는 뜻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세 가지 설명이 있는데, 프리드리히 1세가 동방으로 원정을 갔듯이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2] 또 하나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 공산주의의 주도국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을 연상하게 한다는 데서 착안했다는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작전 암호명 중 색상이 사용된 사례 - "녹색 작전"(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 "백색 작전"(폴란드 침공), "청색 작전"(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일으킨 작전), "황색 상황, 적색 상황"(프랑스 침공) - 의 연장선상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이 존재한다.

2. 배경


소련과 나치 독일은 대전 초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나중에는 폴란드서로 같이 침공하여 사이 좋게 나눠 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관계는 결국 언젠가 무너질 운명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이 살아 있으면 독일 제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여겼고 슬라브족을 유라시아에서 몰아내고 그곳을 레벤스라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결국 비스마르크가 금기시하던 2개의 전선을 만들고 말았다.
독일은 프랑스 침공이 끝나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면서 다음 목표를 소련으로 돌렸다. 프랑스가 무너지고 비록 항공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독일은 자신감이 넘쳐있었고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기로 한다. 비록 대부분의 장성들이 굳이 전선을 늘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기는 했으나 소련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예외적으로 외무장관 요아힘 폰리벤트로프는 이전에 소련의 인력과 미국의 물자가 합해지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모른다며 경고했다.[3][4]
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 이유는 그 무엇보다 그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맺어진 소련과의 평화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에 분명 소련과의 전쟁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수많은 천연 자원과 인력을 가진 소련이 힘을 키운 뒤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가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많은 혼란으로 인해 비교적 약해진 소련이, 국력을 회복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훗날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울전쟁에서의 붉은 군대의 부진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처형되는 등 뛰어난 지휘관이 부재했던 것 또한 그의 결정을 도왔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국가로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데 히틀러는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봄으로써 한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활 공간과 자원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는데 이에 따라 게르만 민족(나치 독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당시 소련 영토)의 곡창지대(식량 필요), 코카서스의 유전(전차, 장갑차 연료 필요), 우랄 산맥의 광물, 시베리아의 목재 등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들을 결국 소련에게서 빼앗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는 당시에는 중립국인 미국이 영국에 대한 지원정책을 지속하는 것을 보며 언젠간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가진 미국을 상대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전에 소련의 자원과 인력을 미리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다.
사상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어차피 양쪽 다 알고는 있었지만 휴전 정도일 뿐인 독소 불가침조약일 뿐인 데다가 나치즘이란 사상과 견원지간공산주의를 말살하겠다는 사상적 목표도 덤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나치 독일에게 유럽에서 큰 위협이 되는 소련군(붉은 군대)을 조기에 제거하고 동부전선을 조기 종료시켜놓은 다음 육군 예산을 조금 절감하고 그 절감한 비용으로 영국 상륙에 더 중요한 해군(섬나라기 때문)과 공군(영국 폭격)을 증강시켜서 다시 한번 완전히 성공시키지 못한 대영 작전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즉, 경제, 사상, 군사적 여러 목적들로 소련을 침공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히틀러의 생각은 대강 이렇다.
  1.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도 군수 시설에 큰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 유럽 본토에는 신경쓰지 못할 것.[5]
  2. 피해를 복구하는 동안 영국은 미국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 [6]
  3. 일단 피해 복구로 바쁜 영국에 의한 본토 위협이 없는 동안 독일은 소련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4. 동맹국 일본이 우릴 도와서 소련을 공격[7]
  5. 그러면 소련군 병력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은 없을 것
  6. 적당한 시점에 조약 맺고 미국의 귀를 막아 버리면[8]
  7. 미국이라는 지원국을 잃게 되버린 영국을 휴전 협상장에 끌어내거나, 아니면 영국 본토 침공을 다시 계획해볼 수도 있다.
물론 소련도 히틀러가 공격할지 모르고 당한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에서도 암호 해독으로[9] 알아내서 알려줬으며 전 세계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은 독일이 언젠가 거하게 소련을 공격할 거니 대비해야 한다는 정보를 계속 보냈다. 심지어 영국에서도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이 대거 동부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소련에게 제공했다. 독일 내에는 히틀러 집권 전부터 수백만명의 공산당원이 존재했고 그 위성국들과 동맹국 내에도 상당수의 동조자들이 있었다. 독일 정부 내에도 신분을 위장한 간첩망이 엄연히 존재했다. 이들은 1년 전부터 계속 소련에 독일의 전쟁 준비 징후를 알려왔다. 특히 일본 제국에서 신문 기자로 위장하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무관으로부터 들은 침공 몇 개월 전에 6월 22일이 개전일이라는 것까지 알려왔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만 세묜 티모셴코 국방장관이나 주코프 총참모장은 계속 스탈린에게 경계령을 내려줄 것을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이것이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계속해서 막았다. 스웨덴 건은 출처 부족으로 무시당했고 소련은 영국이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독일에게 항의했으나 독일은 "영국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이동배치하는 것이다"며 변명했고 그럴 듯한 변명에 스탈린은 이를 믿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때 나치 독일은 베니토 무솔리니 가 벌려놓은 그리스 침공 때문에 히틀러가 그리스랑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이동한 독일 군대에 대해 독일이 말하기를 영국 공군의 폭격을 피하고 이탈리아 때문에 벌어진 그리스 침공을 이유로 들먹이자 스탈린도 히틀러한테 그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
물론 스탈린이 마지막까지 독일이 침공하지 않을것이라 생각한것은 맞지만 스탈린도 나름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 아직 대영제국이 무너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국과 그 식민지간의 항로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소련과 양면전을 벌이는것은 천년에 한번나올 바보나 할 생각이였기 때문이다. 단지 스탈린은 히틀러가 측근들의 만류에도 대단히 무모한 도박을 행하는 벼랑 끝 전술에 이골이 난 인간이라는 사실만 몰랐을 뿐이였다.
여기서 주의해야될것은 아직 세계 대전이라고는 하지만 각각의 전역이 유기적으로 모두 연결되어있는 단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유럽 본토에서의 전투는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끝났었고, 영국 본국과의 전투는 바다사자 작전이 발동되지 않은 시점에서 공중전만 진행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영국, 영연방과 식민지들 대 이탈리아, 독일 지원군들의 전투였으며, 아시아에서는 소련이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막 채결한 와중에 중.일 전쟁은 계속되었다. 남방 작전과 진주만 공습은 아직 시작조차 안되었다.
지금까지는 연합국으로 들어온 국가들중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국가는 영국밖에 남지 않았고[10][11], 추축국[12]에 가입한 국가들중 대표적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중 독일과 이탈리아는 공동 전선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을 치루고 있었고, 일본은 독자적인 중일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그동안 소련은 이 세계 정세에 중국, 미국과 함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로 남아있게 되었고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나름대로 독소 폴란드 점령, 겨울전쟁, 발트 3국 점령과 같은 영토 확장도 꾀했었다. 1941년에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게 전쟁을 걸면서 각각의 전역이 하나의 복합적인 전쟁으로써 합쳐지게 된다.

2.1. 소련군


소련군은 1938년에 벌어진 대숙청에서 사단급 이상의 단위 부대에서 반이 넘는 군 지휘관들이 처형되는 큰 혼란을 겪었다.
대숙청이 적어도 겨울전쟁과 동부전선 초반까지 큰 혼란을 야기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출세한 무능한 사람들 또는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사라진 후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유능한 40대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해서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반론을 감안해도 그렇다.
초반의 대패 때문에 소련군이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20년대부터 강력한 국방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1930년대 성공한 공업화 때문에 '''전투기 수, 잠수함 수, 전차 수는 1940년 당시 세계 1위'''였다. 이렇게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운용 교리 또한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군부에 대한 대숙청의 결과 이런 교리를 발달시킨 장성들도 쓸려나가면서 교리들이 부정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이론가들이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운용 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다. 보유한 전차와 항공기들은 스펙상 독일군 장비들을 상대로 우위를 가질 수 있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전간기 시대에 맞춰 발전된 장비들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적시에 활용되지 못하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침략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군은 병력을 2배로 늘렸으나, 갑자기 몸집이 커지자 대숙청에서 기인한 부작용과 함께 장교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상급 장교도 부족했지만, 하급 장교는 절망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속성으로 몇 주 교육을 시킨 다음에 바로 소위 계급을 달아주는 식으로 장교를 양성하였다.
1938년에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전훈[13]으로 전차 부대들을 모두 여단급 이하로 축소재편했다가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의 대성공을 보고 다시 군단급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다. 공군에도 숙청의 올가미가 덮쳐서 유능한 지휘관 상당수가 "항공사고가 너무 잦은데[14] 이거 사보타지 아냐?" 라는 NKVD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군도 몇 년간 발전이 지체되었다.
예외적으로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졸전을 벌이다 겨우 승리한 1939-40년의 겨울전쟁 때의 교훈은 헛되지 않아서, 무능한 보로실로프가 물러나는 것 외에도 소련군의 이후 월동 장비나 동계 작전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후에 겨울에 발생한 모스크바 전투 때 겨울전쟁에서 붉은군대 병사의 피값으로 체득한 전훈들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소련군은 겨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던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승진한 키릴 메레츠코프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후에 소련군의 중추가 되었고 보로실로프를 대신해 국방장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는 군 개혁을 조용히 이끌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러시아 내전 이후 겨울전쟁 때까지 대규모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전경험의 부재는 1차 대전 이후 다른 나라도 유사했지만, 소련군이 독일군에 비해 이런 점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했던 점은 1차 대전에 대대장 이상급으로 참전한 고급 지휘관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러시아 고급장교 대부분은 귀족이나 반혁명세력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붉은 군대에 가담한 고급장교 수는 극히 적었고, 기본적으로 붉은 군대 장성급 고급장교들은 부사관이나 사병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서의 지휘 경험이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15]
작정하고 대규모로 전면전을 벌이는 데는 교리, 즉 종심 작전 이론이라는 선진적인 교리가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의 선구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으나 이 이론을 개발한 이는 물론이고 스페인에서 그나마 실전 경험을 쌓았던 인물들도 대숙청으로 상당수가 저승으로 갔다. 특히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본 공군 참전자들이 숙청된 결과 소련 공군은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같이 기동전의 개념을 제안한 유능한 장성들까지 처형되었던 데다가 이론까지 폐기되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숙청될까 봐 투하쳅스키의 '투'자도 못 꺼냈다. 투하쳅스키가 제시한 기동전은 독소전쟁 도중 소련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대숙청이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납득이 안 된다면 독소전쟁의 영웅인 '''게오르기 주코프조차도 대숙청 와중에 저승 갈 뻔했다.''' 다행히 전공을 세워서 칼날을 피했지만.
지시 없이 훈련했다고 장교나 장성이 저승 가는 이런 미친 피바람 속에서 안 그래도 훈련 부족인 소련군은 더욱 더 경직되어 갔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군사 교리 또한 답보 상태였고 그 대가로 2900만 명[16] 이상의 사망자를 감수하게 되었다. 이 수치는 민간인 사망자를 포함한 것으로 나치의 인종 청소로 인해서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군인 총 사망자는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360만 명 정도의 포로 사망자를 포함한 수치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전사자는 400만 명이 넘어가며 전차전투기의 손실은 각각 20,500대와 21,200대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방어전 당시에는 쓸 전차조차 없어서 NI 전차라는 민간 트랙터를 되는 대로 엉망진창으로 개조한 테크니컬 경전차를 주력 기갑으로 내세워 쓸 지경이었다. 첨언하자면 이때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수는 독소전 전 기간 동안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40% 정도 된다고 한다. 현재 한국군의 10배 병력을 6개월 만에 날려먹고도 소련이 결국 승리를 했으니 대륙의 기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후로도 40년 이상 미국과 대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이겨내는 데 활약을 한 소위 40대 지휘관들도 전쟁 초기엔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주코프마저도 독소전쟁 초기엔 수십만 명의 병력을 날려먹는 등. 소련군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독일군 교리를 학습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훗날 소련군의 명장에 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 안드레이 예료멘코 등도 개전 초기에는 실전 경험 부족 때문에 계속 참패했고, 후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연대장이나 여단장급 인물들이 군단장이나 사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다만 이 당시의 독일군은 2년간 계속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 유고, 그리스군 등을 상대로 실전을 치뤄 봐서 수준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졸전을 벌였다기보다는 독일군이 잘 싸웠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군은 규모, 전술에 있어서 최강이었던 것이다.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을 꼽자면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갑작스럽게 파기하고 기습을 감행한 공격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독소전 초기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에서는 산업 시설 등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건 산업 시설과 곡창지대까지 날려버렸다. 갑작스런 기습이 아니었다면 독소전쟁 초기 교환비가 20대 1에 달하는 참패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와중에 소련에서 스탈린을 대신할 지도자는 없었다. 스탈린은 서구 국가들과 협상을 잘 이끌어 냈으며, 소련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지휘와 통제를 받도록 했다.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거의 있을 필요가 없었던 인물로 표현되는데, 독소전쟁에 대한 공로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선에서의 싸움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소련 인민의 통제하며 무기를 생산하고 및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소련 인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중앙의 효율적 통제 아래 수행되지 않았다면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1942년부터 스탈린의 스타프카는 소련 전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했다. 전선에 관여하면서 스탈린이 벌인 실책은 커다란 것이지만, 그래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17][18] 스탈린은 초기의 실책이 있었지만 그의 잘못을 깨닫고 후방에서의 지원에 힘썼고 소련의 지휘관들은 그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을 격퇴했다. 물론 스탈린이 모든 것을 총괄했고, 스탈린이 2차 대전을 혼자서 이끌었다하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말이다.
독소 불가침조약 때문에 방어선 구축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원래 국경에서 10년 동안 준비해 놓은 방어선을 버리고 새로운 국경선에 맞춰서 방어선 구축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독일이 영국을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으로 보았으므로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독일군이 국경을 넘나들며 정찰하는 것마저 무시하도록 명령했는데, 가뜩이나 어설픈 방어선이 독일군에게 완전히 분석당하면서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2.1.1. 편제


  • 국방장관 세묜 티모셴코 원수[19]
  •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 북부전선군(핀란드 접경 주둔), 총사령관 마르키안 포포프 중장
    • 14군(무르만스크에 사령부)
      • 제14 소총병 사단[20]
      • 제42 소총병 군단
        • 제104 소총병 사단
        • 제122 소총병 사단
      • 제52 소총병 사단
      • 제1 기갑 사단
      • 104 직속 포병연대
      • 제23 무르만스크 요새화 군단
      • 제1 혼합 공군 사단
      • 기타 소부대
    • 7군(수오야르비에 사령부)
      • 제54 소총병 사단
      • 제71 소총병 사단
      • 제168 소총병 사단
      • 제237 소총병 사단
      • 541 직속 곡사포병 연대
      • 제26 소르타발라 요새화 군단
      • 제55 혼합 공군 사단(페트로자봇스크 주둔)
        • 제153 전투기 연대
        • 제72 폭격기 연대
      • 기타 소부대
    • 23군(쿠사에 사령부)
      • 제19 소총병 군단
        • 제142 소총병 사단
        • 제115 소총병 사단
      • 제50 소총병 군단
        • 제43 소총병 사단
        • 제123 소총병 사단
      • 제10 기갑 군단
        • 제21 전차 사단
        • 제24 전차 사단
        • 제198 차량화소총병 사단
      • 101, 108, 519 직속 곡사포병 여단
      • 573 직속포병 여단
      • 제27 븨보르크 요새화 군단
      • 제28 켁스골름 요새화 군단
      • 제5 혼합 공군사단
      • 기타 소부대
    • 제1 기계화부대
    • 북부 방공군
    • 그리고 여러 독립 소부대들
  • 북서전선군(발트해 연안 주둔) 34개 사단, 총사령관 표도르 쿠즈네초프 중장
    • 8군
      • 제10 소총병 군단
        • 제10 소총병 사단
        • 제48 소총병 사단
      • 제90 소총병 사단
      • 제11 소총병 군단
        • 제11 소총병 사단
        • 제125 소총병 사단
      • 제12 기갑 군단
        • 제23 전차 사단
        • 제28 전차 사단
        • 제202 기계화 사단
      • 제47 군단 포병 연대
      • 제51 군단 포병 연대
      • 제74 군단 포병 연대
      • 제9 대전차포 여단
    • 11군
      • 제16 소총병 군단
        • 제5 소총병 사단
        • 제33 소총병 사단
        • 제188 소총병 사단
      • 제29 소총병 군단
        • 제179 소총병 사단
        • 제184 소총병 사단
      • 제3 기계화 군단
        • 제2 전차 사단
        • 제5 전차 사단
        • 제84 차량화 사단
        • 제15 오토바이 여단
        • 포병 여단
        • 공병 대대
    • 27군
      • 제22 소총병 군단
      • 제24 소총병 군단
      • 제16 소총병 사단
      • 제67 소총병 사단
      • 제3 독립 소총병 여단
      • 2개 포병 연대
      • 2개 대전차 연대
    • 해군 북방함대, 발트함대 포함
  • 서부전선군(벨라루스 주둔) 45개 사단, 총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21]
    • 3군
      • 제4 소총병 군단
        • 제27 소총병 사단
        • 제56 소총병 사단
        • 제85 소총병 사단
      • 제21 소총병 군단
        • 제24 소총병 사단
      • 제11 기계화 군단
        • 제21 전차 사단
        • 제33 전차 사단
        • 제204 기계화 사단
    • 4군
      • 제28 소총병 군단
        • 제6 소총병 사단
        • 제42 소총병 사단
      • 제14 기계화 군단
      • 제49 소총병 사단
      • 제75 소총병 사단
      • 제62 요새화 군단
    • 10군
      • 제1 소총병 군단
        • 제2 소총병 사단
        • 제8 소총병 사단
      • 제5 소총병 군단
        • 제13 소총병 사단
        • 제86 소총병 사단
        • 제113 소총병 사단
      • 제6 기병 군단
        • 제6 기병 사단
        • 제36 기병 사단
      • 제6 기계화 군단
        • 제4 전차 사단
        • 제7 전차 사단
        • 제29 기계화 사단
      • 제13 기계화 사단
  • 남서전선군(우크라이나 주둔) 45개 사단, 총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중장[22]
    • 5군
      • 제15 소총병 군단
        • 제45 소총병 사단
        • 제62 소총병 사단
      • 제27 소총병 군단
        • 제87 소총병 사단
        • 제125 소총병 사단
      • 제22 기계화 군단
        • 제19 전차 사단
        • 제41 전차 사단
        • 제215 기계화 사단
      • 2개 요새화 군단
      • 7개 포병 연대
      • 2개 NKVD 연대
      • 1개 공병 연대
    • 6군
    • 12군
    • 26군
    • 그외 여러 부대들
  • 남부전선군(흑해 연안 주둔) 26개사단, 총사령관 이반 툴레예프 중장
    • 9군
    • 18군
    • 해군 흑해함대 포함
  • 예비전선군(중앙방면)[23]
    • 16군
    • 19군
    • 20군
    • 21군
    • 22군
    • 24군
전쟁이 시작되자 7월에 이 조직은 개편되어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3개 집단군으로 재편된다.

3. 작전 준비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동부전선

독일
소련
비율
사단수
166
190
1:1.1
총병력
4,306,800
3,289,851
1.3:1
각종포
42,601
59,787
1:1.4
전차 및 자주포
4,171
15,687
1:3.8
전투기
4,389
11,537
1:2.6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독일군은 2년 간의 실전 경험[24]으로 장비 수는 부족했지만 그 운용법은 이미 베테랑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으나[25] 기습을 당한 데다가 실전 경험이 없었고 경험 많은 장교들이 숙청을 당한 것 때문에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소련 공군 같은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되는 날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소련군 비행장을 향해 기습을 하러 왔는데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멀뚱멀뚱 보다가 기습당해서 전투기들이 이륙도 못해 본 채 상당수 파괴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동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1943년에 재건될 때까지 해군 항공대가 이를 채워야 했다.

3.1. 독일 국방군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룬트슈테트 등등은 후일 회고록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양면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이 침공에 회의적이었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그런데 이건 전후에 그들이 패전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덮어 씌우기 위해 한 증언들 중 하나에 불과한 얘기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졌던 독일 군부는 히틀러의 이 결정에 열광했고, 심지어 독일군 정보부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완패시킬 수 있다"라고 보고하며 이 결정을 확신시켰다. 허나 당시 독일의 정보능력은 소련에 완전히 밀리고 있었는데 주소 대사 역시 "소련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어찌할 수가 없다"할 정도였다. 독일은 자신이 가진 정보에서 50%를 뻥튀기 했는데도 "220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완전히 무너진다"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1941년에만 400개가 넘는 사단을 동원했다(...) 하물며 작전계획도 비현실성이 넘쳤는데, 최초에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패배시킨다"였던 것이 보급 문제가 불거지자 그것을 해결하니 "10주에 끝낼 수 있다"라고 줄였고, 또한 프리퍄트 습지 돌파 문제에 대해 "8주에 가능하다"고 수정하는 등 작전 계획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지엽적으로 해결하면서 근거도 없는 자신감만 넘쳤다. 이 문제는 7월 중순 프란츠 할더의 "14일에 이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이 되어 간다." 라고 쓴 것을 '''겨우 한 달 후'''에 "우린 현재 350개 사단을 확인했다. 그들의 무장은 빈약하나 그들은 존재한다. 우리가 4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그 자리에 4개 사단을 투입한다."라는 일기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작전 목표를 둘러싸고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할더 총참모장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정치적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히틀러는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석유가 풍부한 캅카스 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군부와 히틀러는 타협하여 침공군을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 세 갈래로 구성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구성되었다. 작전의 목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 이른바 "A-A선(Arkhangelsk-Astrakhan line)"이었다. 독일군과 함께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군, 핀란드군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총 병력은 390만 명, 4600여 대의 전차, 4389여 대의 항공기, 4만 6000여 문의 각종 포가 동원되었다.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Keil und Kessel'(카일 운트 케셀)[26]이라고 불리는 양익 포위였다. 소련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일단 적의 주력을 패퇴시키더라도 후방으로 도주하면 섬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은 소련군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고정시킨 후, 기갑 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히틀러는 정치장교는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체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병사들의 독전 임무를 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자극하여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3.1.1. 편제


  • 북부집단군(동프로이센 주둔), 29개 사단, 총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 16군 (에른스트 부슈)
    • 4 전차군 (에리히 회프너)[27]
    • 18군 (게오르크 폰 퀴힐러)
    • 1 항공함대 (알프레드 켈러)
  • 남부집단군(남폴란드, 루마니아 주둔), 41개 사단,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 17군 (카를하인리히 폰슈튈프나겔)
    • 슬로바키아 의용군 (페르디난트 차틀로시)
    • 헝가리 군단 (벨라 미클로시)
    • 1 전차군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11군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28])
    • 이탈리아 군단 (조반니 메세)
    • 6군 (발터 폰 라이헤나우)
    • 루마니아 3군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 루마니아 4군 (콘스탄틴 콘스탄티네스쿠)
    • 4 항공함대 (알렉산더 뢰어)

4. 전개



(1941년 6월 22일 소련 라디오 방송. 목소리는 당시 소련의 유명한 아나운서인 유리 레비탄(Юрий Борисович Левитан, 1914. 10. 2. – 1983. 8. 4.)이다.)

"22 июня 1941 года"

"1941년 6월 22일"

Внимание, внимание.

주목, 주목.

Говорит Москва.

모스크바에서 말합니다.

Передаё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 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정부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이여.

Сегодня в 4 часа утра

오늘, 6월 22일 새벽 4시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선전포고도 없이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е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독일 군대가 소련의 국경을 넘어 공격해왔습니다.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소련 인민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우리의 대의는 옳으며,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적은 패배할 것이고,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독일군은 동맹군까지 합쳐 3개 집단군, 총 30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만일을 대비해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지만, 그런 조치는 오히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이 독일군에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기술의 발전으로 전장 환경이 바뀌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전부 쓸려나간 게 특히 한 몫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이었다면 국경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갑군을 최초로 창설한 독일이었다. 소련군의 전차는 우수한 성능과 기동성에도 불구하고 보병 지원 이상의 역할을 배정받지 못했다. 단일한 탱크 군단은 당연히 없었고, 탱크들은 드넓은 러시아 국경에 흩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기동성과 충격 효과가 발휘될리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경직된 지휘 체계로 인해 각 부대들의 자체적인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황의 불리함을 알고 상급 부대로 집결한다던지 하는 임기응변적 대책은 물론 없었고, 소련군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다가 포위되어 죽어나갔다. 독일 기갑군이 뚫은 구멍으로 대량의 독일군이 유입되면서 전방의 소련군은 그대로 갇히고 만다. 또한 독일군의 주공인 중부집단군 쪽에 소련군 사단은 얼마 없었고, 우크라이나에만 100개 사단이 투입되어, 거대한 소련군이 양분되는 일도 발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여름에 히틀러의 공격이 없을거라고 예상한 나머지 별다른 경계태세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전투기들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육군이 공중 엄호, 무기, 첩보, 통신체계도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궤멸되는 일도 잦았다.
6월 27일에 스탈린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유린되었으며, 국경에 있던 기존 병력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독일군은 민스크에 도착했다. 이때 스탈린은 통치를 그만 두고 자기의 다차(러시아식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추측밖에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스탈린은 정치적 천재였고, 권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실패를 덮고,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수 있다.[29] 소련 정부의 수뇌부는 스탈린을 찾아가 그의 복귀를 호소하였고, 그를 공산당의 최고 직위와 정부 최고 직위에 오를 것을 호소했다.[30] 스탈린은 몇 번 거절하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7월 3일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재등장에 안심했다.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북부집단군은 시가전을 피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도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소련의 반격이 거세지자 독일은 중부집단군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게 했고 이것 때문에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진격이 늦춰지는 동안 가 내리면서 러시아 전역이 악명높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군마들은 진흙탕에 빠져 죽었고 턱없이 부족한 보급 차량들도 진흙밭에 빠져 망실당하기 일수였다. 애초 독일군은 단기 결전을 계획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군한 상태였고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징집을 시작해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해 반격을 시작하면서[31] 안 그래도 느린 진격은 더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이에 일본에게 소련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당연히''' 가만히 있었다[32],독일군은 마지막으로 태풍 작전으로 모스크바 점령을 시도했지만 때마침 소련 측에서 '''일본이 참전하지 않을 거란''' 첩보를 받았고 바로 일본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 중 25개 보병사단과 9개의 기갑여단[33]들을 모스크바로 재배치, 이후 독일은 소련군의 반격을 받았고 겨울이 되어 러시아의 강추위가 몰아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약 30km의 거리를 남겨두고 공격을 포기했다.
한편 소련은 독일이 침공하면서 서쪽에 있던 공업 지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음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한 끝에 공장의 설비들을 동부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공장 지대는 이후 대전 내내 소련군이 싸우는 무기를 공급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과정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이 흘러간다. 당연히 중앙은 전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공장의 소개와 대피가 중앙의 조율 아래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어떤 기차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했으며, 소개하여 피난을 갔다가, 피난처로 독일군이 진격하는 바람에 또다시 피난 가야 했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다행히 서쪽에 있던 대부분의 공장들은 우랄 산맥 부근으로 안전하게 이송되었고, 1500개의 주요 공장 중에 1942년 말까지 단 55개 만이 가동에 들어가지 못했다. 1941년 후반기까지 2600개의 기업체가 옮겨졌으며, 2,50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공장을 따라 이동하였다. 옮기지 못하는 생산 시설은 독일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파괴를 했다.
이러한 결정은 독일군에게 있어서 두 가지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다. 먼저 독일군은 소련의 군수 공장들을 점거해 소련의 생산력을 완전히 말소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예상을 깨고 소련은 서부의 공업시설들을 그야말로 대이동시키는데 성공했고 온전히 물자와 장비가 생산되어 소련군의 전투력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광활한 거리의 보급을 원할히 하기 위해서 '''소련 기관차들을 노획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었다.[34] 그러나 정작 소련의 기관차들은 '''산업 시설들을 이전시키느라 전부 우랄로 도망간 상태였고''' 독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소련의 철도 규격에 맞춰 자국 기관차들을 보냈는데...문제는 독일의 기관차들은 '''소련의 추위를 버티지 못해 출력이 크게 저하되었고''' 독일군의 보급에도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독일군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에 병력을 올인하지 않고 키예프,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나눠 투입하였다. 당시 모스크바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 도시라 점령당하면 유라시아 일대는 철도망이 마비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의 탄압을 받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많아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이하기도 하였다.[35] 처음 점령지에 진주한 독일 전투 부대 중에는 점령지 주민들과 사이가 괜찮은 부대도 존재했으나, 기본적으로 나치의 인종 차별 사상에 찌든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점령지 주민들이 소련 시절처럼 차별 대우를 받는 것에 변함이 없었다. 그나마도 전투 부대가 떠나고 아인자츠그루펜 등 인종 말살 부대가 진주하면서 지옥도가 펼쳐졌다.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시체로 이루어진 지층이 형성될 정도였으며''' 수백만의 소련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수많은 소련의 대도시들도 독일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5. 결과


우리가 소련을 과소 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파하면 순식간에 12개 사단을 만든다.

프란츠 할더, 독일 육군 총참모장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전략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영토는 독일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광활했고[36]자연 환경도 혹독했다. 독일은 최초의 공세 때 소련군 주력이 소련 서부의 공업지대 방어에 매달려 후퇴하지 못하니 그것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면 소련은 무너져 내리리라[37] 예상(혹은 희망)했지만 그 예상은 전제조건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련군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에 인명피해를 강요했고 41년 12월 5일 기준으로 8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2만 2000명에 달하는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38] 이 시점에서도 소련은 소모, 섬멸은 커녕 계속해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한 번의 결정적인 공격으로 소련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풍 작전을 실시해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도리어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에 수십km를 후퇴하였다.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과 독일 장병들의 필사적인 분투, 소련군의 미숙한 군사운용에 의해 12월 17일에 소련의 공세가 사그라들면서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독일군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독일군은 인종주의를 철석같이 믿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게릴라에 시달리게 된다.[39][40] 일련의 작전에서 독일은 가용한 보급품 및 장비 상당량을 소모해버렸고 이로 인해 전쟁의 결말은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독일군이 얼마나 남은 것들을 긁어모아 공세를 펼쳐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비해 축소된 규모일 것만은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반전 속에서 독일군의 일부는 이미 독일이 패전할 것을 예감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수는 이 전쟁이 뼈를 깎는 장기전으로 변할 것임을 예상했다.
소련의 가혹한 추위와 라스푸티차로 인해 수 많은 독일군과 장비들이 손실되었으며 독일군 야전부대들도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수 없게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40만 명의 인명 피해라는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을 기세였다. 그래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미처 병력 재편도 끝내지 않고 무리하게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했다. 그래서 1942년 1월, 독일군의 돌출부 르제프에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가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이 것이 바로 르제프 전투다. 그러나 발터 모델이 소련군의 번개 같은 공세를 모조리 패퇴시켜버렸고 소련군 야전부대들은 수십만의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르제프 전투는 지금도 소련군의 수치로 기억되고 있다.
독일 측의 바람으론 이 작전에 일본도 참전했어야 했다. 당장 소련군은 품질 좋은 보급품을 독일 쪽 전선으로 보내기 바빴기에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딱히 소련군에게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그저 숙청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유능한 지휘관의 발만 묶어두기만 해도 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련은 공격 안 하고 미국진주만 공습을 하여 태평양전선을 개전했고 독일이 망하는 데에 지대한 원인이 되었다. 소련은 일본이 대소련전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극동의 소련군 정예부대 다수를 모스크바에 재배치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독일만의 입장이고 일본 측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일본은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만으로도 이미 경악하여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당혹감을 느꼈었고, 향후 소련과의 충돌이 벌어져도 독일이 전혀 돕지 않아 국제적 왕따가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때문에 바로바로사 작전 2달 전에 일본 역시 소련에 접근하여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기껏 독일 따라서 불가침조약을 맺었더니 그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총공격하니 일본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상황. 전력면에서도 중일전쟁에 일본 육군도 이미 수 년째 갈려들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돌발행동을 한 독일을 도와줄 여력도 부족했다. 물론 일본은 더 큰 돌발행동을 선사하여 추축국 전체에 파멸을 몰고오지만...추축국이 끼리끼리도 얼마나 손발이 안 맞았는지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소련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첩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경계하였다. 독소전이 가장 치열하게 돌아가던 와중에도 항상 극동에 최소 30개 이상의 사단을 배치해뒀다.
독일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소련이 받은 피해는 굉장했다. 4백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로 모스크바 서쪽에 배치되어있던 사단의 거의 전부가 증발했다. 소련의 절반을 먹여살리던 우크라이나와 막대한 가치를 지닌 돈바스 공업 지대의 상실은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거대한 패배만으로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저지한 소련군은 가능한 모든 예비 병력을 끌어모으며 저항하여 도리어 독일군에 반격을 가했고, 이 와중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였다. 히틀러는 12월 7일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알아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12월 4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 육군은 이 결정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결정이 소련을 극한의 상황에서 소생[41]시키고 나치 독일을 결정적으로 파멸시킨다.

[1] 군인이나 항공기, 전차 등 인적/물적 피해는 소련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추축군 역시 목표 지점이었던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다.[2] 프리드리히 1세는 3차 십자군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했다. 독소전쟁이 나치 독일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3] 이는 미국이 소련에 증여한 비전투 물자가 썩어나기 시작하자 비전투 물자의 직접 생산을 축소시키고 군수 공장에 인력을 집중시켜 만들어낸 모신나강, PPSh-41, T-34를 쓰는 끝이 없이 밀려오는 군대로 실현되었다.[4] 사실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소련의 발을 묶어두고 유럽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나치독일에게는 이득이니까[5] 거기다 영국은 이미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 싸우고 있었다.[6] 당시에는 영국이 소련에게 의존할 이유가 없다. 영국이 자신들과 선전포고한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국가를 우호적으로 보기는 어렵다.[7] 그러나 독일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은 1941년 4월에 소-일 불가침 조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는데, 이를 체결하기 전에 일본의 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가 베를린을 방문해 이를 알린 바 있다. 그러나 독일은 이에 대해 딱히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않았고, 오히려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본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일본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지자 크게 당황했다. 기밀 유지를 명목으로 아무런 사전합의도 안 했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걸 막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전쟁이 벌어지면 도와주겠지? 라는 식으로 상당히 엉성했던 외교관계였던 것. 그래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건 1941년 6월 일본 군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에도 이 불가침 조약을 깨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은 소련이 아닌 미국을 공격했다.[8]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주변인들이 상기시켜 줬지만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자 좋다고 같이 선전포고를 했다. 재미있는 건 히틀러도 초반에는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었고 오히려 해군이 미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고 히틀러 뿐 아니라 다른 장성들도 미국이 참전한다는 의미를 몰랐던 건 마찬가지라 히틀러만 바보라고 비판하기도 뭣하다.[9] 출처는 노르웨이로 들어가는 스웨덴 케이블이다.[10] 중국중일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알렉산더 폰팔켄하우젠과 같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 상주해 있었고 트라우트만 공작이 결렬된 뒤에 독일은 이를 불러들였다. 당장은 중국이 어디의 일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과의 독립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낫다.[11] 미국은 랜드리스를 발동한 상태이지만 아직까지의 국내 여론이 전쟁 참가를 지지하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지원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12] 이 시기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강철 조약과 독일과 일본의 방공협정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하지만[13] 스페인의 산악 지형에서 전차는 무용지물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의 보고, 기갑을 중요시했던 투하쳅스키의 숙청으로 이렇게 멍청한 병크를 저질렀다.[14] 이건 소련의 항공 산업의 신뢰도가 낮아서 추락 사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15]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던 장성들은 있었으나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 성격을 띠었던 데다가 산악 지형에서 치뤄진 보병간의 회전이었던 만큼 여기서 쌓은 군사 지식, 병법이 대평원이었던 소련에 적용될 수 없었다. 독일군의 원수-상급대장들이 제1차 세계 대전시 대위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풍부한 지휘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16] 4,000만 명 이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7] 헨리 키신저는 저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 중대한 판단 실수를 저질렀으나 스탈린은 그것을 만회할 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아니었다." 라고 평했다.[18] 흐루쇼프는 우상과 신격화에 반대하며 스탈린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스탈린을 비난한 것이다. 이건 사학적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고 정치적 공격이다.[19] 이하 모든 소련군 계급은 한국식으로 환산했다.[20] 소련군에서 소총병은 보병을 뜻한다.[21] 7월에 있었던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대패한 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7월 22일 처형. 1956년 복권[22] 키예프 전투 때 포위된 부대들을 지휘하다 전사.[23] 스탈린의 직접명령을 받는 부대[24]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등 숱한 실전을 겪은 독일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엄청난 강군이었다.[25] 오히려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KV-1T-34는 초기에 독일군의 3호 전차를 대학살하면서 독일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26] 독일어로 카일은 쐐기, 케셀은 솥이라는 의미. 즉 쐐기와 솥[27] 휘하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제56차량화보병군단장으로 참전했다.[28] 크림 반도 공략 당시 정찰 도중 지뢰를 밟아 전사. 후임으로 에리히 폰만슈타인이 11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제11군은 이후 게오르크 폰퀴힐러가 공략 중이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증원군으로 가게 되었다.[29] 이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절대권력자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일원화된 체계 하에 통제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스탈린의 부재가 더 심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등비등한 약자끼리 하는 주도권 싸움이 소련을 붕괴시킬 가능성도 있었다.[30] 당시 스탈린은 당 총간사 직위 외에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31] 전쟁 초에 독일은 소련군이 180여 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추정했고, 작전 초에 이 병력들이 모두 궤멸당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독일군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소련군 '''360여 개 사단'''과 마주쳐야 했다.[32] 당시 일본과 소련은 서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애초에 독일측은 일본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알리지조차 않았다. 단지 독일 군부 혼자서"우리가 공격하면 일본군도 같이 가세하겠지?"라고 안일하게 망상했을 뿐이다.[33] 소련은 모스크바가 넘어갈까 말까하는 이때도 일본을 염려하여 30여 사단은 극동에 남겨놨었다.[34] 소련의 철도와 독일의 철도 규격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35] 동유럽 나치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뉴스가 나오면 동유럽 전선에 나치 독일 편을 들어 싸웠던 사람들, 특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주민들의 이야기가 꼭 나온다. 볼셰비키 군대에 대항한 독립 투사들로 평가받기도 하고, 인종청소(유대인) 독일 파시스트들의 앞잡이였나로 평가받기도 한다.[36] 독일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독일이 구상한 레벤스라움에서 그 반은 러시아의 유럽쪽 영토였다. 독일군은 현재 점령한 곳보다 더 많은 땅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점령지가 늘면 늘수록 병력배치가 어려워진다.[37] 프랑스와 같이 적국의 국토와 병력을 완전히 소모시키지 않아도 항복하게끔 해오던 것처럼[38] 게다가 이는 지원부대를 제외한 전투부대에서 난 피해인지라 더욱 뼈아픈 손실이었다. 1940년 시점에서 120개 사단 수준이었던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위해 180개 사단으로 팽창하면서 이전에도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각한 손실이었다.[39] 많은 지역들은 소련 치하에서 고통받기도 했던 지역들이었다. 그러니 현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악랄한 짓으로 날려버린 셈. 그나마 나았던 곳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였는데, 이 나라들은 슬라브가 아닌 발트였기 때문이다.[40] 전쟁이 장기화되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전투 부대에서도 인종청소부대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광기를 드러냈다. 나중에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소련군의 가혹한 부역자 색출과 보복까지 더해져 동부전선 기간동안 동유럽은 생지옥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41] 겨우겨우 중공업을 키워내어 어찌 군 장비들을 생산하고 드넓은 국토에서 징집한 수많은 인구를 모아 독일군을 막아낼 군대를 만들었지만 이를 유지시키고 사기를 올릴 수 있으며 전세를 역전시킬 절대적인 식량과 탄탄한 경공업에서 나오는 기본적 보급품은 매우 부족했다. 미국의 참전은 랜드리스로 일컬어지는 물자 보급으로 소련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주었고 독일을 막아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반격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