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전역
1. 개요
#
사막의 전쟁은 해전과 흡사하다. 모래밭은 바다이며 전차는 배다. 육상의 전투에서는 한치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해전에서 배는 바다 그 자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적함을 찾아 해멘다. '''사막의 전투는 바로 그 해전과 똑같은 것이다.''' - '''에르빈 롬멜'''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선 중 하나로 1940년 6월 10일 ~ 1943년 5월 16일까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벌어진 연합군과 추축군 사이의 전투.나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 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과 이글거리는 태양이 보였다. 주위에는 거의 다 익은 대추야자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오아시스를 가로질렀다. 남쪽의 야자나무숲 끝자락에 새하얗고 드넓은 모래 언덕이 파도치는 바다 같았다. 북쪽에는 높이 50m의 절벽이 수직으로 솟아 있고, 동쪽에는 바싹 마른 소금 호수 인 카타라 분지가 있었다. 이 분지는 동쪽으로 300km 가량 펼쳐져 있는데, 그 끝부터 북동 방향으로 100km 가량 이동하면 알라메인이었다.(중략) 우리의 집결지는 마르사 마트룩에서 남쪽 약 300km 지점에 있었다. 알라메인 남쪽 50~70km 지대는 영국군이 통제중이었다. 마르사 마트룩으로부터 알라메인 사이는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진공상태 여서 양측 모두 자유로이 군사작전을 구사했다. -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한스 폰 루크.
이 전투가 남긴 것은 동맹국 사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북아프리카 전역을 말아먹은 이탈리아 왕국의 병신인증(…)과 독일 국방군의 명장으로 추앙받게 되는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장군, 그리고 그를 쫓아낸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있다. 두 지휘관의 네임밸류가 워낙 높다 보니 일반인들 사이에는 두 숙명의 라이벌이 맞붙은 전투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후반부에 해당하며 대부분의 기간은 클로드 오킨렉이 지휘했다.
뭔가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동부=겨울, 서부=유럽, 북아프리카=사막, 태평양=여름) 전역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런 인식과는 별개로 지중해 전역과 더불어 세부적인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1]
2. 배경
나치 독일이 전 유럽을 휩쓸고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마저 빈사상태로 보내버리려던 시점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 유럽의 전쟁에서 독일에 붙는게 이득이 될거라고 판단하여 추축군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당당하게 프랑스에 살짝 발을 들이밀었는데 소수의 프랑스 국경경비대에게 역관광당하는 바람에 잠시 체면이 구겨지기도 했으나 프랑스의 항복으로 서유럽 대륙에서의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이탈리아도 별로 한 건 없지만 추축군 자격으로 은근슬쩍 인접한 프랑스 영토와 식민지 일부를 득템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어쨌든 유럽의 주요 지역은 독일이 정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본토 침공을 목표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탈리아는 그 틈새시장을 노리기로 결정하였다.[2] 이에 주목한 곳이 북아프리카 지역의 영국 식민지[3] 들과 발칸 반도였다. 일단 독일이 이쪽을 노릴 생각은 없어보였고 당시 관점에서 독일이 영국을 정복하는 것은 자명한 상황이나 다름없었기에 무솔리니는 이집트를 공격해도 영국은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무솔리니는 이집트 원정을 천명하고 이탈리아군에 준비를 지시하였다. 뭐, 이때까지는 이탈리아가 틀린건 아니었다. 영국 역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건 '''맞았다.'''
2.1. 이탈리아군의 문제점
사실 무솔리니가 큰 소리를 뻥뻥치긴 했으나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의 장비 상황을 봐서는 아무리 2선급 전선이라고 해도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군과 지중해 함대와 맞짱을 떠서 일방적으로 관광태울 가능성이 희박했다. 실제 이탈리아군의 전차, 대포, 제식소총, 기관총 등은 대부분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및 전간기에 생산된 고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름대로 군의 현대화에 노력을 퍼붓고 있었으나 애초에 경제력이 딸렸으며, 그나마 온갖 삽질을 터뜨리며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고 있었고 특정 분야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애초에 이탈리아의 국력은 '''일본 제국'''에게도 밀렸다. 병사들의 충성도는 물론 기술력도 그다지 일본에게 우월하지 못했고[4] 국사무쌍의 명장들과 전무후무할 영웅[5] 들이 전장을 누비던 2차대전기 치고는 전황을 뒤집을 만한 인재도 매우 없었다. 하다못해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인적, 물적 자원을 쥐락펴락 통제할 수 있었고 야마토급 전함을 3척이나 찍어내고, 제로센이나 하야부사도 전투수행이 가능한 수준으로는 생산해냈다. 독일이야 말할 것도 안 되고, 일본도 '''그''' 미국이 몰락 작전 정도는 계획해 줘야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될 정도로 분투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는 커녕 체코, 루마니아 같은 동유럽 영세국가들에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는 자신의 이탈리아가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과 맞먹는 힘을 가진 국가로 착각하고 있었으며, 온갖 망상에 빠져서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 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덤으로 이탈리아가 1930년대에 로마 제국 부활을 내세우며 아프리카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쳐들어가면서 벌인 학살과 현지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상당히 고전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이탈리아군이 불리함을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 때의 원한을 잊지 못하던 현지인들은 이탈리아군의 적인 연합군을 더 돕게 되었으니까.
그나마 이탈리아군 지휘관들은 나름대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기에 무솔리니의 무리한 원정계획에 반대표를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곧 양산되는 최신예 병기의 보급과 정예병력 지원을 약속하며 지휘관들을 독려하였고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를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약속한 최신예 병기는 어디로 갔는지 배송되지도 않았고 그라치아니 원수는 "그거 주기 전까진 전쟁 못함"이라 주장하며 형식적인 훈련에만 매진하면서 대놓고 사보타주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주옥과도 같은 광활한 사막 지역에 파견된 이탈리아 병사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고 하루 빨리 본토나 좀 더 편한 전선으로 배치되기를 바라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이탈리아 공군을 책임지던 이탈로 발보 공군원수가 정찰나갔다가 팀킬 되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만다. 결국 영국이 독일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이탈리아군이 이런저런 핑계로 뭉그적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 주둔 영국군은 충분히 이탈리아군의 공세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게다가 같은 추축국 동맹인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돌출행동에 골머리를 썩고 있으며 확실히 선을 그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프랑스 전역에서도 남부 쪽에서 깔짝거리긴 했는데 별 도움도 안됐고 애초에 이탈리아를 전쟁에 꼭 필요한 동지가 아닌 그냥 남유럽쪽에서 연합군이 맘대로 활개치지 못하게 해주면 선방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탈리아가 지원군을 파견했을 때도 이를 오히려 불편하게 여겼다. 나중에 워낙 북아프리카쪽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어쩔 수 없이 병력을 파견했을 정도였다.
2.2. 지역의 특성
북아프리카 지역은 아래와 같은 공통적인 특성을 가진다.
- 제대로 된 육상교통로가 1개 뿐이다. 북쪽에는 지중해가 있고, 지중해 연안지역에 도시와 촌락이 듬성듬성 존재하며, 이들을 잇는 해안교통로가 유일하게 제대로 된 육상교통로다. 그리고 나머지 사막 지역은 그냥 길이 없다고 보면 된다. 철도의 경우에는 일부 지역에 한해서 제한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육상수송, 해상수송, 공중수송이 병행되어야 그나마 수송을 원할하게 할 수 있는데, 지중해는 항상 제해권 다툼이 있고, 공중에서는 제공권을 잡기 위한 공중전이 벌어지는데다가 수송량 자체가 적으므로 대다수의 물자는 해상수송을 통해 북아프리카 소재의 항구에서 하역된 다음에 트럭에 옮겨싣고 수백에서 수천 km의 거리를 적군의 해군과 공군의 공격을 받아가면서 운송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수송의 난이도가 높다.
- 방어선을 구축할 지역이 크게 한정된다. 남쪽에 사하라 사막이 있고, 사막을 통해 적군의 기동부대가 충분히 우회할 수 있으며, 사막지형의 특성상 조금만 해안가에서 멀어져도 식수등의 물자를 확보하기 힘들어서 방어선을 내륙으로 길게 연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어선이 붕괴되면 다음 방어선을 구축할 요지까지 긴 거리를 후퇴해야 하므로 수백km 정도의 후퇴와 전진은 기본사항이 된다.
- 현지조달 가능한 물자가 별로 없다. 사막지역은 말 그대로 모든 물자를 외부에서 가지고 들어와야 하며, 다른 지역도 공업이 발전한 지역이 아니므로 식수와 일부 식량을 제외하고는 역시 조달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양측 모두 물자는 본국에서 수송선단을 통해 들여와야 한다.
이 때문에 양측 군대 모두 이미 퇴물이 되거나 되가는 2선급 화기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6] 노획품도 알뜰하게 이용했으며, 전투중에 물자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 환경이 참으로 가혹하다. 사막 한가운데는 낮이건 밤이건 생지옥같은 환경이고, 바닷가라도 기본적으로 기온이 워낙 높아 무더위가 심했다. 온도부터 최악인데 허구헌날 모래폭풍과 대량의 먼지가 마구 밀려들었고 하늘이 조금이라도 흐려져 태양빛이 약간이라도 약해지면 행복할 정도로 태양빛이 강렬하게 쏟아져내렸다. 당연히 사막에서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은 거의 없었고 현지인도 무턱대고 움직이기 어려운 환경에서 머나먼 유럽에서 건너온 군인들이 장기간 주둔하는 것도 어려운데 전쟁까지 벌어지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 그나마 영국군과 연합군은 상황이 좋았다. 당장 이집트가 영국의 (사실상)식민지[7] 인지라 나일강을 끼고 식수, 식량 등 물자조달이 그나마 가능한 거점들이 갖춰져 있었고 오래 전부터 주둔해 있어 환경 적응력도 괜찮았다. 주둔군의 훈련 상태도 양호했고 공군, 해군에서 우위를 가져가 추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자, 병력 충원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8] 근데 사실 지형적 요인은 개전 당시 이탈리아군이라면 영국군보다 나쁠 것도 없었다. 리비아는 이탈리아가 30년간 식민지배한 곳이라 리비아 주둔군이 있던 건 마찬가지고, 트리폴리나 벵가지는 이집트 못지않은 대도시들로 유럽에서 보급물자 나르기는 이집트보다 훨씬 가까웠으며 실제 북아프리카 전쟁의 주전장도 이쪽이 가까웠다. 나일강은 이집트 동부에 위치하고 남에서 북으로 길게 뻗은 강인데 추축군이 가장 성공적으로 진격한 것은 이집트 중부인 엘 알라메인이라서 나일강은 전쟁에 별 영향이 없었다.
3. 북아프리카 전역의 시작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절정에 달아올라 영국의 패배가 눈앞에 있는것 처럼 보이는 시점이었고 이대로 가다간 지리적 요충지인[9] 이집트마저 독일군에 넘겨주게 될 상황에 처하자 무솔리니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결국 무솔리니는 그라치아니 원수에게... "야 이 자식아 불명예 전역하고 싶어? 빨랑 공격 안해!?"라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제서야 깨갱한 그라치아니 원수가 투덜대며 이탈리아 왕국 육군을 움직여 이집트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당시 리비아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의 규모는 25만 전후였고, 이집트 주둔 영국군은 3만 전후에 불과하여 장비의 질에서 영국이 우수했음에도 병력은 이탈리이가 8배 이상 많았기에 영국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공세를 시작한다고 하긴 했는데, 준비기간중에 이탈리아 공군을 책임지던 이탈로 발보[10] 공군 원수가 항공정찰 중에 팀킬 당해 사망한데다 내부사정과 뻘짓으로 인해 폭격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폭격도 없었고 기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부대의 움직임도 없어 이탈리아 육군은 '진격'이라기보단 그냥 밍기적거리며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포병 수송용 트럭이 부족해서 직접 화포를 끌거나 노새에 의존해서 수송하거나 병력수송용으로 가져온 트럭들은 숫자가 태부족인 상태인데다가 사막의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퍼지기 일쑤였고, 그나마 상태좋은 트럭들은 전승 기념비를 세워야 된다는 명목 하에 대리석이나 수송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정보원들을 통해 이탈리아군의 어처구니없는 행보를 속속 보고받고 있었고, 영국군 지휘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일단은 이탈리아군을 최대한 끌어들여 병력이 길게 늘어진 시점에 공세를 펼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나름대로 열심히 공세를 펼치고 있는 이탈리아군에게 정면승부를 걸지 않고 멀리서 포격을 가하거나, 기동성이 뛰어난 부대를 투입하여 찌르고 빠지는 형태로 응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9월 16일 국경에서 약 130km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영국군은 이 지점을 최일선 교두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실해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군이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이는 무솔리니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보니 발생한 보급의 문제였고, 그라치아니 원수는 시디 바라니 지역에 참호를 파고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땅을 빼앗았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측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이 무렵 영국 본토 사정은 매우 급박하여 영국 본토의 방공군이 거의 괴멸직전처럼 보였고, 독일은 런던대공습을 가하여 영국의 패배가 목전까지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요컨데 기다리면 누워서도 떡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고 이탈리아군은 그대로 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한 셈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영국이 항복을 한다는 조건에서나 가능한 소리였고, 실제로 영국은 항복을 안하고 독일군의 공세를 버텼다(...). 게다가 실제로 영국이 패배 직전인 것도 아니었다는 게 함정인 게 하디스트 데이가 8월 18일로 거의 한달 전이고 영국이 승기를 굳힌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가 9월 15일이었다. 이탈리아군이 진격을 멈춘 시점에서 영국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전세는 오히려 영국 쪽으로 기울었던 셈.
어쨌든 영국군 지휘관 웨이벌 장군은 이탈리아의 행동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본토 사정이 어렵다 보니 제대로 된 군수물자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전쟁준비가 어려웠고, 어느 지점까지 이탈리아군을 끌어들이고 어느 시점에 반격할 것인기 고민하던 차에 딱 멈춰주었으니 귀중한 시간도 벌어주었고, 반격작전의 구상도 한층 쉬워진 셈이었다. 게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도 런던 폭격이 독일군의 자충수로 작용하게 되자 히틀러도 슬슬 영국 침공은 물 건너갔다고 판단하여 단념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탈리아가 기대하던 상황은 물 건너가게 되었고 영국 이집트 주둔군은 사정이 조금 나아진 영국 본토에서 배송된 전차나 병력, 무기 등을 지원받으면서 착착 반격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니….
4. 영국의 반격
웨이벌 장군은 이탈리아군이 퍼져있던 3개월 동안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3만 6천명에 달하는 영국군과 충분한 양의 물자를 비축하였으며 본토에서 새로 마틸다 전차까지 보급받은 현재 준비상황은 충분하다고 판단하였고, 12월 콤파스 작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다. 당시 이탈리아군의 방어기지는 10 ~ 20km 간격을 두고 7개소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정보에 따르면 이탈리아군의 근무 및 경계태세도 개판이었고 방어진지도 허접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덤으로 사막전의 특성상 얼마든지 방어진지를 우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대한 대비도 제로상태였다.
그래도 이탈리아군을 기만하기 위해 일상적인 기동훈련이라 병사들에게 말하고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국군 일부의 움직임은 이탈리아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뭐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나중에 서류로 보고해'''"란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12월 9일 배치가 끝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 방어거점 중에서 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틸다 전차를 앞세운 영국군의 공세는 한참 게으르게 늘어져있던 이탈리아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고 그나마 보유한 이탈리아군의 M11/39 같은 중형전차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허접전차들은 쌩철갑탄 2파운더 대전차포에 밥솥마냥 터져나갔고 반대로 대전차소총 따위로 아무리 갈겨봤자 영국군의 기갑은 우습게 튕겨냈다. 생각보다 쉽게 방어기지를 점령하자 웨이벌 장군은 나머지 기지에 대한 공격도 지시하였고 이탈리아군은 이렇다할 저항없이 개발살났다.
당초 웨이벌 장군은 시디 바라니 지역에서 5일간의 제한적인 반격작전을 구상하였는데 이탈리아군이 알아서 무너지는 바람에 불과 2일만에 시디 바라니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에 웨이벌 장군은 시디 바라니 전투 이후 어디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결심하고 리비아를 향해 폭주기관차마냥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상대라는 이탈리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맞상대하기는 커녕 그냥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이탈리아군 장군이 직접 부하들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와 함께 항복하기도 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패주에 당황한 무솔리니는 그라치아니 원수에게... "야 이 무능한 바보 새꺄! 수비 제대로 못해?!"라 쌍욕을 퍼부으면서 수비를 지시하였다. 어쨌든 리비아 국경선에 가까우며 개전전부터 이탈리아가 보유한 관계로 요새화된 바르디아 항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우리의 영국군님하들은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요새에 닥돌하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을 경우에만 눈물을 머금고 하는 행위였고, 당시의 영국군은 해당 지역의 이탈리아 공군보다는 공군력에서 우세했고, 해군력에서는 더한 우세를 보였기 때문에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서 집중폭격을 시작했다. 그래서 해상에서는 영국 지중해 함대가, 공중에서는 웰링턴 폭격기와 블렌헤임 폭격기들이 몰려와 바르디아를 콩가루로 만들었고, 결국 1월 4일 바르디아를 점령한 영국군은 "다음 목표는 토브룩이다!"를 선언하고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월 5일 이탈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토브룩마저 점령했다.
'''토브룩'''까지 함락당하자 이탈리아 패잔병은 해안도로를 따라서 트리폴리로 도주하는 긴 여정에 올랐으며, 사막을 강행돌파한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서 그나마 있던 기갑전력을 몽땅 날려먹고 엄청난 물자를 방기한 채 사람만 간신히 호구를 빠져나갔다. 게다가 이렇게 빠져나간 사람보다는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한 사람이 많다는 대패배를 당했다.
결과적으로 반격작전이 진행된 10주 동안 영국군은 무려 800km나 진격하는 기염을 토했고, 13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군 포로와 수많은 이탈리아군의 전차나 화포, 수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 영국군 전체 병력이 약 3만명이었다! 반격작전을 지휘한 웨이벌 장군이나 오코너 장군 모두 영국군이 올린 기대 이상의 성과에 오히려 당황했을 정도였다.
5. 사막의 여우 롬멜
앞서 언급했듯이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선과 그리스 침공에서 보여준 이탈리아군의 추태를 비웃으며 '''"지중해는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 입장에서는 소련 침공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탈리아가 다른데서 뭔짓을 하건 신경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독일의 입장을 번복할만한 사건이 하나 터졌으니 영국의 타란토 공습이었다. 당시 독일 해군이 지중해까지 가서 작전을 펼칠 수 없는 이상 지중해에서 믿을만한 건 이탈리아 해군이었는데 그나마도 타란토 공습으로 거하게 말아먹었으니 지중해에 대한 제해권이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 상황이었다. 이는 영연방군이 남부유럽지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히틀러 입장에서는 지중해 지역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지중해 지역을 방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장고 끝에 소련 침공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대기병력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헤르만 괴링에게 지시하여 제10항공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영국의 해상보급선을 봉쇄하게 하였고, 에르빈 롬멜 중장을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군을 돕게 하였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협력하는게 아닌 독일 지휘관이 이탈리아군을 지휘하는 편이 독일한테 이득이었는데[11] 문제는 이탈리아군이 가진건 차량과 기본적인 무기로 무장된 보병뿐이었고 결정적으로 영국기갑을 상대할 대전차 수단도 '''없었다''' (...)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군단이 새로 편성됐고 당초 롬멜은 이탈리아군과 협력하여 '''방어선 사수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지만, 계속되는 패전으로 이탈리아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다 초기 이탈리아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역시 적응 안되는 무더위와 사막 특유의 가혹한 환경에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방어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쳐 최대한 빨리 영국군을 최대한 밖으로 격퇴시키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고, 정찰 및 정보수집을 통해 영국군 역시 패주하는 이탈리아군을 따라 깊숙히 추격해오면서 보급면에서 빈약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였다. 게다가 이 무렵 그리스에서 전투가 격화되는 바람에 영국군 일부 병력이 그리스로 차출 되면서 전력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에 롬멜은 방어가 아니라 영국군을 공격하여 최대한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수립하였다.
당시 롬멜은 충분한 양의 전차를 보급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부하들에게 굴러다니는 차량을 총동원해서 수백대의 가짜 전차[12] 를 만들게 하였고 일부러 전차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대도시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영국 첩자들을 상대로 잔뜩 허세를 부렸다. 그리고 첩보원들을 제대로 낚았고 3월 24일 '''사막의 여우의 전설이 시작됐다.'''
엄청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진격을 시작하자 영국군은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빨리 공세를 취할거라곤 생각조차 못한 상황이었는데 대규모 전차부대가 몰려오니 그야말로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내빼기 시작했다. 이에 롬멜은 영국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거세게 몰아붙여 '''불과 1주일만'''에 영국군을 800km 밖으로 몰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 과정에서 오코너 중장[13] 을 비롯한 영국군 장군 3명이 포로로 잡혔고 낙오한 병력 상당수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군은 토브룩에서 멈췄다. 영국 수비대는 토브룩만큼은 절대 내줄 수 없다면서 완강하게 저항했고, 롬멜은 4월 말까지 공세를 퍼부었으나 번번이 좌절되는 바람에 발목이 잡혔다. 특히 토브룩 수비대는 수비지역이 항구라는 특성상 영국 지중해 함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고 있었기에 쉽게 점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전이 있다면 '''이게 전부 제자리 걸음'''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토브룩은 처음부터 이탈리아 영토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시작부터 심각한 병력 손실이다.
어쨌든 고립된 토브룩만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주력부대는 토브룩을 공격하게 하고, 그 사이 일부 부대를 차출하여 카푸초, 바르디아 요새를 탈환하였다. 그리고 요충지였던 할파야 고개를 탈환하여 이 지점에 수비 거점을 세웠다. 어차피 방어선이 이탈리아 영토인 건 변함없었던 것
한편 영국군은 롬멜의 공세가 정체된 덕분에 간신히 병력을 재정비할 수 있게 되었고 전열을 가다듬어 토브룩에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
6. 롬멜의 분전
영국 본토에서 전차와 물자를 보급받은 웨이벌 장군은 브레비티 작전을 수립하고 5월 15일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초기 3일간 영국군은 할파야 고개와 카푸초 요새 인근까지 진군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롬멜이 이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공세는 좌절됐고 새로 투입된 전차들은 88mm 대공포(대공뿐만 아니라 대전차, 야포도 되는 사실상의 만능포)에게 관광탔다. 그리고 롬멜이 역반격을 가하자 결국 패주하여 5월 27일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6월 14일 훨씬 규모를 확대시킨 배틀액스 작전을 수립하고 다시 한 번 리비아 땅에 들어가 역시 카푸초 요새와 할파야 고개까지 넘봤으나 이번에도 롬멜의 기민한 대처에 그대로 역관광 당하고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마틸다, 크루세이더, 발렌타인 등의 전차를 대규모로 투입하였으나 그 망할 놈의 88mm가(…). 실제 할파야 고개 전투에서 1개 대전차포병 대대에게 영국군 전차부대가 완전히 개발살나면서 88mm의 명성만 드높여줬다.[14] 결국 롬멜의 명성 역시 높아져갔고 영국군 사령관 웨이벌 장군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당하고 클로드 오킨렉 대장이 신임 사령관으로 발령되었다.
한편 배틀액스 작전이 끝난 직후 영국군은 공군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공군 전력을 2배로 증강하기로 하고 서부사막공군을 창설하였다. 다만 아직 영국 본토 사정이 좋지 않아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는 보급받지 못했고 호커 허리케인과 미국에서 수입한 토마호크와 키티호크 위주로 병력을 편성하였다. 한편 독일군은 Bf109를 가지고 온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전투력 면에서 열세였지만 독일군의 물량이 적다는 점을 노려 서부사막공군은 순전히 '''물량으로''' 승부를 걸었다. 롬멜이 공군 책임자에게 '''"왜 하늘에는 영국 전투기만 보여? "'''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 시점도 이 때 부터이다.
이 무렵 영국은 이집트의 상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점이었는데 때마침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영국에게 행운으로 작용하였다.
애초에 히틀러가 노리고 있던 제1의 목표는 소련이었고, 그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북아프리카 전선에 병력과 물자 보급의 우선순위가 뒤로 쳐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선의 특성상 '''소련 침공보다 더 긴 거리를 영국 해군과 공군의 놀이터인 지중해를[15] 건너 단 1개의 해안도로로 운송해야 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물자를 더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사실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14,000대 밖에 없는 트럭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8,000대나 주는 등 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는 물자를 주려고 노력했다.
롬멜 역시 자신의 탁월한 전술적 능력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는 있었지만 언제나 충분하지 못한 병력과 물자를 걱정하며 싸우는 실정이었는데 독소전의 시작은 큰 부담이 되었다.[16] 결국 롬멜은 토브룩 점령을 시점으로 더 이상의 공세는 펼치지 않기로 하고 수비태세로 전환하였다.'''원래''' 이탈리아 점령지라는점을 감안하면 겨우 원상복귀로 돌려놓은것이다. 영국 역시 롬멜을 확실하게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영국군은 또다시 대병력을 동원하여 크루세이더 작전을 실행하였다. 이 전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12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롬멜이 대체적으로 전력면에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용병술을 발휘하여 공세를 취하는 영국군 제8군을 매번 격퇴시키면서 오히려 이집트 지역 국경선까지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수적 우위를 이용한 공격에 물자가 부족한 롬멜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가잘라 방어선과 아게다비아를 포기하고 엘 아게일라까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1월, 몰타가 말라죽어가면서 영국군의 방해가 없어진데다가 전선이 후방으로 후퇴하면서 '''운송거리가 극적으로 줄어들어 ''' 잠시 보급이 원할하게 진행이 되자 롬멜은 도박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더 이상 전투를 끌어봤자 독일-이탈리아군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다시 한 번 공세를 펼쳐서 영국군을 리비아에서 몰아내기로 하고 작전을 수립하였다. 부하나 참모는 물론 당사자인 이탈리아군도 모두 이 작전이 무리수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철회를 요청하였으나 롬멜은 고집을 부려 작전을 추진하였다.
롬멜의 기습적인 공세는 영국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또 다시 전군이 붕괴되어 후퇴를 시작하였다. 1월에 아게다비아와 벵가지를 탈환하였고, 2월에는 가잘라 방어선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여기서 영국군이 세운 방어선 때문에 한동안 고전했다. 그러나 5월에 가잘라 방어선을 돌파하였으며, 돌파한 병력이 역포위당하는 상황에서도 분전해서 영국군의 주력을 일시적으로 소멸시키는 바람에 6월에는 눈에 가시나 다름없었던 토브룩을 탈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록 독일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17] 중요한 보급선과 더불어 막대한 포로들[18] 과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미처 파괴시키지 못했던 영국군의 보급물자들[19][20] 을 대량으로 획득하게 됨으로서 군세를 다시 강화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리비아- 이집트 국경을 넘어 이집트 영내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오킨렉 대장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엘 알라메인에서 완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무렵 몰타가 다시 살아난데다가 '''북아프리카 전선 사상 최장의 보급거리'''로 인해 운송되는 물자의 태반이 2,000km나 떨어진 트리폴리에서 정체되는 등 독일-이탈리아군의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보급선을 영국군이 추가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연료와 탄약을 걱정하며 싸우는 지경이 되자 공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 윈스턴 처칠은 "그놈의 롬멜! 우리 영국군은 그 놈 하나 못때려잡고 뭐하는 거야!?"라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는데 우연한 인사가 대박이 될 줄은 처칠조차도 몰랐으니…
게다가 영국군 역시 '''그놈의 롬멜의 지휘차량[21] 을 반드시 전리품으로 취하고 말겠다'''며 지휘차량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7. 몽고메리의 등장과 롬멜의 퇴각
엘 알라메인을 사수하고 있던 오킨렉 대장은 결국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당했고[22] 그 후임으로 해롤드 알렉산더 대장이 부임하였다. 더불어 주력부대였던 영국육군 제8군의 지휘관으로 고트 중장이 내정되어 있었는데 부임지로 이동중에 독일공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바람에 급히 몽고메리 중장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23]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은 워낙 롬멜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장군들이 모두 기피하던 자리였는데, 몽고메리는 롬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임한 몽고메리의 선택은 간단했다. '''"내가 충분한 물량이 확보됐다고 할 때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할 것"'''. 그나마 나은 점은 훈련이 잘 된 정규군 전력을 사용하며, 대규모 화력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처칠이 그만하면 충분하니 제발 공격 좀 해서 롬멜을 몰아내라고 애원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몽고메리는 상큼하게 씹으면서 10월까지 영국과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참전한 미국에서 배송되어오는 병력과 물자만을 열심히 받아먹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다급해지는 것은 롬멜이었다. 결국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알람 알 할파 지구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카이로로 점령한다는 작전안을 수립하고 8월 30일 공세를 시작하였으나, 몽고메리가 먼저 공세가 해당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트릭까지 쓴데다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 구축한 방어망에 걸리는 바람에 4일만에 작전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10월에 이르자 영국군은 20만의 병력와 1,0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하여 전력비를 2:1까지 벌였다. 그러자 몽고메리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10월 23일 독일군에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 폭격기의 폭격과 대포의 포격과 함께 영국 보병과 전차들이 총공세에 나섰다. 이는 야간에 이루어져 완벽한 기습효과를 달성하였으며 독일-이탈리아군을 혼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혼란에서 벗어난 아프리카 군단은 무사한 방어진지를 거점 삼아 영국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영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몽고메리의 기본적인 작전방침은 1:1로 맞교환해도 아군이 이득이니 '''닥치고 물량으로 어택땅'''이었고 6,000여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끝에 방어선을 돌파해냈다. 이후 연쇄적으로 방어진지가 돌파당했고 독일-이탈리아군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당시에 롬멜은 가혹한 야전생활 + 현지의 끔찍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쳐서 병을 얻어 독일본토에서 요양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아프리카전선으로 날아왔다. 롬멜이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며 영국군의 공세를 막으려 하였으나 이미 전황은 아무리 롬멜이 전투의 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려있었다. 히틀러는 "후퇴는 불가하며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롬멜은 상큼하게 씹고 퇴각을 지시하였고 결국 비관적인 보고가 계속 들어오자 히틀러도 퇴각에 동의하였다. 결국 엘 알라메인에서 퇴각한 독일군은 끝없는 패주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군 역시 이 전투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긴게 맞는 건가"란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였다.(엘 알라메인 전투)
한편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군의 패주가 시작된 시점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횃불 작전을 펼쳐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모로코와 알제리 해안에 10만 7천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륙하였다. 이 무렵 독일-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지를 향해 철수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반대쪽 방향에서도 연합군이 진격하는 셈이라 추축군에게 쐐기를 박은 격이었다.
하지만 후퇴로 인해 보급거리가 다시 줄어든데다가, 이탈리아에서 더 가까운 프랑스 식민지인 튀니지를 독일군이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순간적이지만 다시 보급이 대량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축군은 튀니지의 한 귀퉁이에서 상당기간 저항할 수 있었고, 전쟁경험이 없는 미군을 대차게 바르긴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판...
결국 롬멜이 포로로 잡히는 사태를 원치 않았던 수뇌부는 롬멜을 본토로 소환하였고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육군 상급대장이 지휘를 계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운 상태였고, 결국 야금야금 방어선이 축소된 끝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군은 완전히 소멸되었다.(튀니지 전투)
이로 인해 몽고메리는 높은 평을 받았지만 그의 지휘 아래 싸운 영국군은 그토록 노리고 노리던 롬멜의 지휘차량은 끝내 얻지 못했다. 폰 아르님 장군이 롬멜 장군이 귀국하며 인계해 준 맘모스를 항복 직전 소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8. 의의 및 평가
무솔리니의 과대망상이 결국 독일을 껴안고 함께 자폭한 전선으로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24] 이탈리아와 독일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허투루 날려먹은 물자나 병력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게다가 무솔리니는 그리스까지 공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리스는 지속적으로 회유했으면 추축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를 국가였다.
사실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전역에서 독일군 못지 않게 영연방군에 맞서 선전한 이탈리아군도 제법 많았고, 롬멜이 등한시한 '''보급과 진지구축'''은 이탈리아군이 전담하다시피 한 것에서 보이듯 실제의 이탈리아군은 부대에 따라서는 꽤 분전하여 잘싸우기도 했었다..[25] 롬멜이 공세를 취할때 수적인 면은 이탈리아군이 전원 담당했으며 롬멜과 자국군의 후퇴를 위해서 전차의 연료들이 떨어지자 스스로 고기방패가 되어 영국군을 맞아 전멸한 아리에테 기갑사단 등 이탈리아군의 전과는 상당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건 소수의 몇몇 예이지 이탈리아군이 위에 서술한대로 그럭저럭 괜찮은 군이었다면 애초에 독일이 아프리카 군단 따윌 만들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레벨에서 워낙 삽질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결국 무능한 이탈리아군이란 타이틀을 달게 됐다. 애초에 토브룩이 이탈리아 영토였다는 점만 생각봐도 독일-이탈리아군은 결국 이탈리아 영토 회복하겠다고 분전한 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충분히 까여도 할말 없다(...)
1941년 독일은 독소전쟁을 치르면서 서유럽에서 영국과 티격태격하고 있었고, 여기에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초 히틀러가 절대 2개의 전선에서 싸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한 맹세따위 진작에 엿바꿔먹었다. 당시 독일의 역량으로는 3개의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북아프리카 군단은 보급순위에서 항상 후순위였고 애초에 독일의 물자가 부족한데다가 '''바다를 건너는 최장의 보급거리''' 덕분에 그나마도 물자보급을 제대로 받은 적이 드물다.
사실 이탈리아 해군들이 지중해를 장악하거나 영국 해군 견제만 잘해줬어도 하다 못해 몰타만 제대로 조졌어도 사정이 조금은 나았겠지만 추축군이 크레타에서 공수부대가 받은 타격이 공수작전 금지로 만들 만큼 타격을 받아서 사실상 몰타를 점령할 능력이 없었던 점부터가 문제였다. 애초에 크레타 섬 전투도 이탈리아의 뻘짓으로 탄생한 비극이다! 하다못해 이탈리아라도 제대로 보급을 해줬으면 해볼만 했다면서 이탈리아를 까는 경우도 있는데 '''이탈리아의 공업생산력과 수송력은 독일의 예상보다 더 안습했다.''' [26] 하지만 지중해의 제해권을 잠깐이나마 이탈리아 해군이 우세하게 가져간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보급만큼은 최선을 다했다.''' 몰타 방공전때 2304척의 이탈리아 상선이 격침 되었는데 이 수치는 이탈리아 수송전단의 '''72%'''에 해당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제 10 강습 부대(Decima Flottiglia MAS)가 1941년 7월 1일 몰타의 성 엘모 다리를 사보타주 하고 독일 잠수함대와 이탈리아 공군이 연계하여 몰타로 가는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등 이탈리아라고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27]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탈리아 군의 활약에 비해서 무솔리니의 과대망상이 자국군을 포함한 추축군에 몰고온 결과가 파멸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전역에서 보여준 롬멜의 탁월한 작전지도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에게 여러차례 승리를 거둔 덕분에 명장이란 평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롬멜을 까는 주장도 있다. 롬멜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쓸데없이 롬멜이 '''사령부 명령을 어기고 독일군 역량 이상으로''' 나대는 바람에 오히려 독일군의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논리가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은 있다. 독일군 사령부가 애초에 의도했던 건 남부유럽을 보호하기위해서 였다. 만약 일정 방어선을 고수[28] 해서 지켰다면 초기에 투입된 고작 2개 사단 증원으로는 제대로 힘준 연합군의 한방을 막아냈을리가 없다. 영국군 지상부대는 유럽전역에선 거의 놀고 있었는데 그건 단일 표적에 대해 집중 할 수 있단 뜻이었다. 그를 입증하듯이 독일군이 초기에 득세하자 처칠은 곧바로 신형 전차인 크루세이더 전차를 투입하고 배틀액스 작전으로 롬멜을 압박했다. 만약 독일군이 수세적인 포지션에서 방어했다면. 이미 1941년에 영국군의 물량에 격파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29]
롬멜이 천성적으로 공격전에 우월한 능력을 보이며, 지리하게 연합군과 소모전을 벌이느니 '''한방에 박살내서 후환을 없애고 전선을 종결'''하려는 욕구가 강했으며, 실제로 그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전술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때문에 위대한 도전에 따른 장렬한 실패였다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이미 사령관 하나의 성향으로 전역의 방향성 자체가 뒤틀린 것부터가 훌륭한 문제다[30] .
게다가 만약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가만히 놔두고 북아프리카 전역에만 신경 썼다면, 크레타 건으로 공수작전이 금지될 일도 없었고, 몰타는 독일 공수부대에게 점령당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 지역을 장악한 연합군은 히틀러의 우려대로 지중해를 장악하여 남부 유럽에서 추축군 세력으로의 압박이 가능한 거점을 확보했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이 마무리되고 병력이 재편되자 바로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시작했다.
9. 그 외 이야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여러 독일군 에이스들이 이름을 날렸지만 그중에서 가장 빛난 인물로는 '아프리카의 별'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가 있다.
영국군은 본토 사정이 어렵다보니 영연방에 의지를 많이 했다. 캐나다, 호주를 비롯하여 남아프리카 연방 등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파견하여 영국을 지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역 중에선 그나마 전쟁 범죄의 빈도가 적은 곳 중 하나이다. 양측의 감정적인 적대감도 상대적으로 떨어진 편이었고, 민간인이 드문 사막지대에서 싸우다보니 대민범죄를 저지를 기회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전쟁범죄를 저지르던 나치군도 롬멜의 지시 때문에 민간인 살상을 자제했다.[31] 롬멜의 초반 대성공에 한몫 한 것은 나무판자로 만든 가짜 전차였는데, 민간인은 몰라도 정규군에게 가짜 전차를 들이대면 들통날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민간인들을 살려보내서 탱크를 봤다고 증언을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 또한 동부전선에 비해서 이는 서부전선과 유사하다.
[1] 취소선을 그어두긴 했지만 2차 대전에서 영국, 이탈리아는 그 역할에 비해서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건 사실이다. 심지어 영국은 한게 뭐냐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인데 영국이 연합군에서 유일한 개근멤버라는걸 생각하면...[2] 북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획득한 로마의 영토였고 이 지역을 획득하기 위한 이탈리아의 노력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이후 '''꾸준히''' 계속 되었다. 물론 신난다고 또 쳐들어간건 뭐든 행패부리고 총칼 들이밀면 된다는 국제정세를 보고 자뻑에 빠진 무솔리니의 독단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와 리비아의 관계는 좋건 싫건 장난아니게 밀접하다.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축출에 이탈리아는 반대했던 사실을 상기해 보자.[3] 수단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 통치하에 있었고, 이집트 왕국은 1922년 독립했지만, 아직도 영국이 절대적인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다.[4] 당시 일본의 기술력 수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보다 우수하지 못한 게 얼마나 처참한 건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5] 존 바실론이나 미하엘 비트만, 바실리 자이체프, 더글라스 베이더 같은 유명한 영웅들 외에도 이름자 기록되지는 못했지만 주목할만한 전공을 세운 전사들도 무척 많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홀로 Ppsh-41과 모신나강을 들고 시가지에 침투해 소련군 저격수 12명을 사살하고 적 전차부대를 대전차포 사선으로 유인해 격퇴한 뒤 유유히 빠져나온 국방군 상병이라던가, 부상병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m1919 기관총으로 몰려오는 일본군에 저항하다 전사한 미군 군의관이나, 일본군에게 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어찌어찌 기사회생해 수십 km를 쉬지않고 달려 일본군의 상륙을 알린 호주군 병사의 사례가 있다.[6] 단, 이 시기 영국군은 마틸다를 2선급 장비가 아니라 1선에서도 다수 운용했다. 마틸다 전차 -엄밀히는 Matilda II 보병전차 - 자체도 1938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한 것이었고, 대전 초기에는 마틸다의 장갑을 관통할 만한 화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장 8,8센티미터 대공포나 오드넌스 QF 3.7파운더 대공포가 왜 대전차용으로도 사용되어야 했는지를 떠올려 보자.[7] 앞서 말했듯 명목상으로는 이집트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다.[8] 추축군은 주된 전력인 이탈리아군이 여러모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고,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숫자도 몇 없었다. 일본 제국을 제외한 몇 안되는 나머지 추축세력의 식민지들은 연합국 식민지들과 달리 딱히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물자조달도 시원찮았다.[9]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에 있었다.[10] 무솔리니의 정치적 동지였지만 이 시점에선 독일과의 관계 문제를 두고 무솔리니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팀킬을 가장한 무솔리니의 암살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현대에는 단순한 아군 오사가 정설.[11] 병사들은 놔두고 지휘관을 바꿨을 뿐인데 전황이 180도 바뀐 사례는 은근히 많다.(...)[12] 차 위에 나무판자(...)를 덧대서 전차처럼 위장했다.[13] 나중에 탈출하여 서유럽에서 7군단을 지휘한다.[14] 당시 영국군 전차들은 대전차용 철갑탄만 있을뿐 이런 대전차포같은 걸 잡을수 있는 고폭탄이 없어서 더욱 일방적으로 털려나갔다.[15] 물론 중간에 영국이 한번 재해권을 상실할뻔한 상황이 있기는 했는데 항공모함들이 격침/대파로 전열에서 이탈한 상황에서 전함들마저 손상 및 격침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전함도 항공모함도 없는 상황이 된 적이 있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루프트바페가 가세한 상황이었으니 지중해 함대에게는 최대의 위기였던 셈.[16] 애초에 소련침공이 우선이라 롬멜을 보낼때 소련침공이 가장 중요하니 북아프리카에서 판 크게 벌이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롬멜이 무시하고 판을 키웠다. 롬멜이 도착하자마자 공세를 시작해 허세로 영국군을 밀어낼때 독일본국에서 분노한건 공세가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딸랑 2개사단도 다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발대의 미약한 전력으로 시작한 공세라서 만약 영국군이 제대로 반격하면 그대로 분쇄되고 트리폴리까지 영국군이 진격하면 그대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그리고 토브룩까지 밀어낸 시점에서 토브룩에 맹공을 퍼부어 피해를 늘리자 더욱 분노했다. 애초에 롬멜을 보내기 전에 현장답사를 한 독일장교들은 트리폴리와 토브룩을 오가는 기동방어를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롬멜은 몇번이나 수백킬로미터를 왕복해야 했다.[17] 롬멜이 지휘하던 부대의 13%에 해당하는 3,040명의 병사들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심각한 것은 300여명의 장교들을 잃었는데 이는 전체 장교수의 7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18] 영국군 1만 9,000여명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백인 9,000여명 및 9,000여명 정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원주민과 인도인 병사등.[19] 식량 5,000t과 연료 2,000t과 2,000여대의 차량등.[20] 추가로 독일의 승전보고서에는 45,000명의 포로와 장갑차량 1,000여대 및 화포 400여대를 획득했다고 하였다. 물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21] 롬멜은 당시 노획한 영국제 도체스터 트럭에 '맘모스'란 이름을 붙여 지휘차량으로 쓰고 있었다[22] 사실 엘 알라메인은 성공적으로 방어 했으나 빨리 반격하라는 처칠의 요구를 참모들과 함께 비현실적인 작전이라며 거부했고 처칠은 신뢰를 잃었다며 그를 해임했다. 참고:ROMMEL's PANZERS p 236-237 [23] 당시 고트 중장은 휴 제임스가 조종하는 브리스톨 봄베이에 탑승한 상태로 이동하던 도중 JG 27 소속의 에이스 에밀 클라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조종사는 엔진 2개가 전부 맛이 간 상태로 어찌 불시착시켰으나 bf109 두대가 불시착한 기체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고트 중장을 포함한 탑승자 대다수가 사망했다. 조종사인 제임스는 이때 살아남아서 1965년에 공군 소령으로 퇴역한 다음 2015년까지 살았다.[24] 물론 무솔리니의 과대망상이 아니었더라도 지중해가 영국의 손에 있는 이상 독일이 이탈리아 방면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기는 했을것이다.[25] 대표적으로 3500명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병력을 막은 폴고레 공수 사단도 있다. 특히 이 부대의 사령관은 독일군의 지리멸렬함을 보고 '''"평상시에는 상관처럼 거들먹 거리다가 전투만 시작하면 겁쟁이처럼 사라진다"'''고 디스하기도 했다.[26] 사실 일본군은 생산력 자체는 안습하지 않았다. 특히 전투기 면에서는 단기간에 수천대를 상회하는 전투기를 찍어낼 정도로 괜찮았다. '''상대방이 그 물량과 품질의 국가인데다가 제 손으로 격파속도가 생산속도를 추월하게 만들어서 문제였지.'''[27]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의외로 북아프리카 전역과 같이 생긴지중해 전역에서 이탈리아 해군과 영국해군의 세력도는 거의 팽팽했다. 물론 케이프 마타판 해전처럼 이탈리아가 탈탈 털린적도 있지만 하푼 작전처럼 영국이 전함을 포함한 함대를 끌고 왔는데 반대로 이탈리아 구축함이 보급선만 털어먹고 튀어버리기도했다.[28] 롬멜에게 준 2개 사단은 보병사단이 아니라 자동차화, 기계화사단이다. 이걸로 무슨 일정방어선을 고수할까? 애초에 독일본국도 기동방어를 염두에 둔거고 보급이 어려운걸 사전에 파악했기에 롬멜에게 2개 기계화사단을 준것도 트리폴리에서 보급이 받쳐주는 한도내에서 기동방어로 리비아의 완전상실을 막으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롬멜이 공세를 시작하자 본국의 브라우히치 원수가 노발대발한건 그 2개 사단이 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선발대의 미약한 전력만으로 공세를 시작해서 였고 당시 그리스 전선에 전력을 차출당해 약체화된 영국군이 롬멜의 허세에 속아 패주했는데 토브룩까지 도달한 롬멜은 토브룩의 방어상태를 한번 건드려 보는 정도가 아닌, 작정하고 공격을 가해 불필요한 전력손실을 초래해서 브라우히치 원수가 폭발(불응하면 해임하겠다며 토브룩 공격중단을 명령)했다. 롬멜이 자신이 북아프리카에 온 이유를 충실히 수행하려 했다면 토브룩은 위력정찰정도만 해보고 영국군의 반격에 대비해 철수준비를 했다가 영국군이 반격하면 트리폴리쪽으로 후퇴하면서 영국군의 공세종말점에서 역습, 다시 토브룩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전력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시일을 끌어야 했다. 실제로 롬멜은 트리폴리와 토브룩을 몇차례 왕복했지만 독일본국에서 원한 기동방어의 형태가 아닌 롬멜의 무리한 공세때문에 그 과정에서 전력손실과 보급부담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29] 물론 증원을 온 이유가 롬멜이 설쳤기 때문이니 롬멜이 안설쳤으면 대치상태를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다.[30] 이건 독일 제국군, 국방군, 일본군 일선 사령관들에서도 잇달아 발견되는 현상이다[31] 사실 롬멜은 학살행위에 대해 별로 좋게 보고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정의로운 인물이었다는 소리는 아니고 왜 굳이 그런 쓸모없는 일에 괜히 돈과 자원을 낭비하느냐는 의견. 당장 북아프리카에서 전차 굴릴 기름도 없는데 본토에서 유대인 잡아 족치느라 석유와 석탄을 펑펑 써대는 모습을 보면 롬멜은 뒤집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