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안정법 파동

 


1. 개요
2. 시대적 배경
3. 전개
4. 출처


1. 개요


1985년 여름에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 자체를 말살시키고자 시도했다 불발에 그친 법안. 허문도의 아이디어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시대적 배경


1983년 12월 16일 유화조치를 틈타 제적 학생들이 복교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점점 더 열기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과 그 과정에서 생긴 삼민투위 사건,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동맹파업, 그리고 민중교육지 사건 등 노동쟁의와 학생운동이 연이어 일어나자 궁지에 몰린 전두환 대통령은 초강수를 두게 되는데...

3. 전개


1985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 1판은 민주정의당이 학원안정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하였다. 이 법은 운동권 학생들을 영장 없이 바로 체포/구금하고 '선도'할 수 있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특별법으로서 삼청교육대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그러나 안기부는 1판 신문의 발행을 저지하고 경향신문 사회부장 강신구와 기자 김지영을 남산 청사로 끌고 가 무시무시한 고문을 가했다.
8월 5일에는 학원안정법안이 민정당 고위당정회합에서 결정되었고, 3일 뒤에 문교부(현 교육부)가 시안을 공개하였다. 이 시안에 따르면 좌경 의식화된 학생들은 형사처벌이 아닌 선도교육을 받도록 하고 그 기간과 대상자 선정을 위해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을 띤 기구 '학생 선도 교육위원회'를 설치토록 했으며 학원 소요사태에 대한 벌칙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들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들끓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민정당 원내총무인 이세기는 "학원안정법이 '괴물'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며 "이 법은 순진한 양떼를 지키는 목동으로 보아 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재야세력과 학생들은 격렬히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15일에 전두환과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가 학원안정법을 논의하는 영수회담을 했지만 의견 조율에 실패했고, 국민들의 반대에 지친 전두환은 17일에 열린 긴급 당정회의에서 '일단 보류'로 결정되어 사실상 철회되었다.
그러나 그 전날 전국대학총학장 회의에 참석한 134명의 총학장들이 학원안정법에 대한 지지 결의를 보여 이는 학원안정법에 반대한 5공 온건파들만도 못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이에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이를 비교육적 망동이라 주장했다.

4.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p293~29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학원안정법 파동'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