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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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뿌리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노태우 정부 초기의 집권 여당이다.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창당했으며,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존속했다. 창당 당시부터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으로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 민주자유당으로 개편되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여당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2. 역사
1981년 1월 15일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창당하여 대한민국 제5공화국, 대한민국 제6공화국 시기의 집권여당으로, 약칭은 민정당. 국내정치 역사로 볼때 군사정권의 집권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위치를 사실상 이어받았다. 후술하겠지만 포지션뿐 아니라 TK와 육사 출신 직업군인을 베이스로 한 점은 같고 자산 등을 강탈하였다.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삼당합당을 단행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면서 해산되었다. 민주자유당이 김영삼 정부 시기에 신한국당 이후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그리고 현재의 국민의힘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과 더불어 현재 국민의힘의 선배격인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1980년 공화당, 신민당 등 기존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구 정치인들(특히 야당인사의 거의 대부분)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가운데 1981년 1월 15일 창당하였다. 사실상 전두환의 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다. 기존 정당들을 강제해산하면서, 민주공화당의 재산은 “당해 정당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정당이나 단체에 기부하거나 기타 다른 처분 등을 할 수 있다.”는 정당법의 규정에 따라 사실상 민정당으로 "기부"되었다. 당의 체제는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하고 그 밑으로 당 의장(총재를 대신해 당무를 집행)-사무총장(집권당의 자금과 인사를 비롯한 모든 실권을 쥔 실세), 원내총무, 정책위의장 3역으로 이어지는 체제를 그대로 따라했다. 대신 직책의 이름들은 새롭게 바꿨다. '당 의장'을 민정당에서는 '대표위원'으로 명칭을 고쳤고,[6] 당무위원회와 당무위원도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집행위원'으로 고쳤다.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은 대체로 박정희 정권 때의 집권당이었던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인사(김윤환[7] , 박준규[8] )였고, 여기에 전두환을 비롯해서 노태우, 정호용, 권정달, 권익현, 이춘구 등등의 신군부 인사들이 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외에 신군부가 새인물 발탁을 명분으로 검찰 출신들(이한동 등)과 신군부에 협조적인 관료(고건 등), 대학교수(김종인 등[9] )들을 상당수 영입하였다. 소수지만 유신시절에 야당을 하던 인사들이 민정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재형[10] , 채문식, 윤길중, 오세응이나 김정례, 나석호 같은 경우)[11]
1980년 9월 유신헌법하에서 치러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의 득표율은 99.9%였다. 간선제를 유지했지만 7년 단임으로 제한한 대한민국 제5공화국헌법으로 개헌해서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지난번에 99.9%는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낮춰 이번에는 90.1 %의 지지율. -.[12]
그 해 3월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곧이어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76석 중 151석(지역구 90석 / 전국구 61석)을 차지하며 과반수에서 12석이 넘는 안정의석을 확보하며 제5공화국의 집권여당이 되었다. 당시 초법적인 국보위에서 만든 정치규제법 때문에 대부분의 야당인사들은 출마조차 할 수 없었으며, 국군보안사령부가 신군부에 협조적인 야당인사들을 대상으로 공작하여 만든 관제야당만이 있을 뿐이었다. 제 1야당인 민주한국당은 2중대, 제 2 야당인 한국국민당은 3소대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여기서 '''1대대가 민정당'''이었다. 민정당에 공천신청한 인사를 보안사가 조정하여 야당 후보로 출마시킬 정도였으니, 이 때의 야당이 얼마나 있으나마나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13]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시 망명중이었던 김대중, 정치규제 상태였던 김영삼의 직계세력이 만든 신한민주당 돌풍에도 불구하고 276석 중 148석(지역구 87석 / 전국구 61석)을 얻으며 과반수에서 9석 많은 의석을 획득하였다. 사실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노골적인 금권, 관권 부정선거와 중선거구제 그리고 '''지역구 의석 제1당의 전국구의석 2/3 확보 규정'''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게 막장인 제도인지를 보면,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이 1석이라도 더 많으면 전국구의석 2/3(12대의 경우 61석)를 무조건 가져가고 나머지를 지역구 의석수에 비례해서 배분하는 제도였다. 당시 전국구의석은 국회 총의석의 1/3이었으니 전국구 의석 2/3면 전체 의석의 2/9, 즉 지역구 의석을 가장 많이 따면 전국구로만 전체 의석의 20% 넘게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13대 총선 수준으로 전국구 의석의 절반 정도를 1당이 차지할수있게끔 조정만해도 민정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여(143석 VS 133석) '''여소야대'''가 된다.
한편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 당시 김대중-김영삼 계가 만든 신한민주당에 철저히 패했음에도 한 지역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의 특성에 따라 2등으로 당선된 경우가 많았다.[14] 덕분에 관제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은 철저히 망해서 대부분 신한민주당에 흡수되었다가 남은 사람들도 결국 13대 총선에서 전멸하여 사라졌다.[15]
신한민주당은 선명투쟁의 기치를 내걸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운동을 벌였고, 여기에 학생운동세력들이 가세하여 가열찬 투쟁을 벌였다. 이들의 활약때문에 국민들은 제5공화국의 반민주성을 깨닫게 되었고, 헌법 개정의 여론이 높아졌다. 민정당은 직선제 개헌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내걸고 대통령 직선제 개정운동을 회피했다. 이렇게 개헌 논의가 지지부진한데, 국민들의 저항은 거세지자, 전두환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명분으로 내걸고 1987년 4월 13일 소위 4.13 호헌조치를 꺼냈다. 이는 헌법 개정 논의를 중단한다는 것. 이는 전 국민적인 저항을 받았고, 5월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폭로되어 전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창당 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이때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경찰력에 의한 치안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투입을 검토했으나, - 결국 국민의 압력에 항복[16] , 대표위원 노태우를 내세워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양김씨의 정치규제를 푼다는 6 ·29선언으로 위기를 수습했다. 이때 양김 세력은 5년 먼저 해보겠다고 분열하는 삽질을 하여 민정당에 어부지리를 던저주었다. 거기에다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라는 초대형 호재도 겹쳐졌고 TK지역에서 노태우에게 대대적으로 몰표를 준 현상까지 겹쳐져서 노태우는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36.6%의 저조한 득표율로도 대통령에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초 야권분열이 지속되며 투표율 저조로 여유있게 압승할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선거 막판 삽질을 거하게 한 덕택에 서울과 제주에서 참패하며 총 299석 중 125석을 차지하는데 그치는 바람에 여소야대라는 불안정한 정국을 맞이하였다.
2.1. 3당 합당
1990년, 민주정의당은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추진한다. 합당 추진 배경에 대해선 3당 합당 문서 참조.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 이후 1990년 2월 15일 민주자유당이 공식 출범하면서 해체되었다.
3. 상징
3.1.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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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로고에서 원을 붙인 사각형은 민정당의 이념인 민주, 정의, 복지, 민족, 통일의 5대 이념을 이어붙여 형성시켰으며 정점의 원은 민주, 아래쪽 원은 통일, 왼쪽 원은 정의, 오른쪽은 복지, 그리고 중앙의 사각형은 민족을 상징한다. 마치 매킨토시 키보드에 나오는 커맨드 키와 흡사하게 생겼다.
3.2. 정당 이미지
대표적인 색깔은 파란색으로 창당 당시부터 당기 바탕색으로 사용하여 방송사 선거방송 때도 파란색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1990년 민주자유당으로 계승이 되어서 신한국당, 한나라당까지로 이어졌다가 새누리당에 들어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새누리당의 색깔은 신민당과 87년 대선 시절 때 통일민주당의 색깔이고 2013년 민주당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이 파란색을 사용하고 있다.
정당 슬로건은 '''안정, 평화, 그리고 번영을!'''이었다.
3.3. 당가
작사는 시인 권일송이, 작곡은 김동진(1913~2009)이 맡았다.
4. 광주특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5.18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을 주장한 당이 바로 민주정의당이다.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생각하기 힘든 명칭이고 보통은 광주민중항쟁, 광주학살, 광주민주화항쟁/투쟁, 같은 단어로 표현했다. 그러나 민정당이 내놓아서 지금까지 일반화 된 게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이었다. 통일민주당은 이 명칭을 3일 동안 반대했고 평화민주당은 6일 동안 반대했던 명칭이며, 통일민주당이 이 명칭을 받아들이려하자 평화민주당은 '''배신자'''라고 까지 비판했을정도였다. 그래서 1990년대만 해도 광주민중항쟁 이란 표현도 많이 쓰였는데 계속 정부가 밀자 지금은 가장 많이 쓴 게 민주화운동이란 단어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자 "민주화운동은 진보세력이 만든 명칭이다"는 유언비어가 떠도는 황당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말에 정말 선동당해서 광주사태가 중립명칭이라는 오해까지 할 정도다.
일부에선 신군부 세력이 오히려 폄훼할 목적으로 만든 게 광주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한다. 광주민중항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영택 박사만 해도 자신의 학술도서에 그런 주장을 실었다. 실제로 노태우는 광주사태라 하면서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한다. 김영택 박사 같은 사람들이 하는 주장은 설득력 있는 주장인 것. 이 주장이 맞다면 지금 상황은 오히려 신군부 세력의 계획대로 된 것이다.
자세한 건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문서 참고바람
5. 역대 총재
6. 역대 선거결과
- 1981년 제12대 대통령 선거 전두환 4755/5277 당선
-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 151/276 35.6%
-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 148/276 35.2%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36.6% 당선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125/299 34.0%
7. 민주정의당 출신 정치인
8. 여담
- 이 당과 성향이 정반대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을 한꺼번에 깔 때 민주정의당으로 합당(...)하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이라는 공동교섭단체를 결성함으로써 실현(?)되었다가 노회찬 의원의 사망으로 교섭단체 최소 인원(20명)을 채우지 못하게 되어 해체되었다.[26]
9. 같이보기
10. 둘러보기
[1]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 정치를 점차 탈피해가며 국민보수주의적으로 변해갔다.[2] 박정희 정권의 국가자본주의에서 탈피하는 시장경제적인 개혁이 일부 이뤄졌었다.[3] 민주당계 보수정당에서는 신민당 때부터 냉전적 반공주의가 사라져갔다면 민정당 후반기인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방정책을 펼치면서 점차적으로 완화되어갔다.[4] 민족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는 풍조는 자유당, 민주공화당에 이어서 계속해서 이어졌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교련 과목이 사라졌지만 완전 노골적이진 않게 정치인들이 민족감정과 애국심을 이용해서 대중의 분노로 정치적 지지를 얻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5]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이 여의도에 당사를 꾸린 후 이 건물은 대성산업의 본사 사옥으로 활용되다가 2012년 말 철거됐다. 현재는 이 자리에 나인트리 호텔이 들어섰다.[6]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단일지도체제에서 총재 밑에 위치하는 대표위원이다. 나무위키에서 민주정의당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 기술할 때 자주 틀리는 부분. 총재가 있는데 왜 대표위원이 따로 있냐?고 하겠지만 당시는 전두환이 집권당 총재를 겸직했기에 당무에까지 일일이 개입할 수가 없어 권한대행 격으로 대표위원을 둔 것이다. 그랬으니 여당 대표위원이라고 해도 오늘날 국무총리의 위상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고;; 물론 이 자리를 누가 맡는지에 따라 실세 대표위원과 허수아비 대표위원으로 위상이 크게 달라진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공인된 2인자, 후계자였다. 그리고 김종필이 민주자유당 대표위원을 역임할 때도 3당 합당의 대주주였으니만큼 그 위상이 남달랐다.[7] 사적으로는 전두환, 노태우와는 친구사이었다.[8] 단, 제5공화국 때는 정치규제를 당하였고 1987년 입당하였다.[9]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시절 비난을 받았던 원인중 하나가 바로, 민정당 출신이라는 것이다.[10] 대림산업 오너 일가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신민당 부총재까지 지낸 야당 거물이었다. [11] 민정당 창당 당시 군사정권의 여당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재야 및 야당계 인사들의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그 중엔 의열단에 가담했던 유석현은 창당발기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재야인사 및 야당거물들의 영입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이 주도하였다.[12] 사실 관제야당에서 후보를 내게 하여 지지율을 분산시켰다.[13] 당시 민한당 참여를 권유받은 신상우는 아무리 구색맞추기용 이라고 해도 그래도 야당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고 훗날 이야기했다.[14] 이런 현상을 지켜본 야당의 이의제기에 따라 6월 항쟁 이후 한 지역구에서 무조건 한명만 뽑는 소선거구제로 바꾸는데, 이번에는 이 제도가 특정정당의 특정지역 싹쓸이라는 폐해를 가져오면서 지역대결 구도가 고착화되는 결과를 되었다.[15] 3소대 한국국민당은 6월 항쟁으로 세가 위축되면서 대다수는 김종필이 새로 창당한 신민주공화당으로 넘어갔고, 끝까지 당을 지킨 이만섭을 비롯한 잔류파는 민주한국당과 함께 13대 총선에서 전멸하면서 사라졌다. 또한 신한민주당도 이민우 구상과 그로 인한 통일민주당의 분당 이후 크게 몰락하였다.[16] 당시 미국이 유혈참사를 우려해서 군병력 투입을 반대했다는 설이 이후 시중에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 계엄령을 선포했다면 5.18 민주화운동 같은 상황이 서울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반공,민주주의의 보루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선전해왔는데 서울 한복판에서 유혈참사가 벌어진다면, 미국에도 크나큰 타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전세계의 관심이 대한민국에 쏠려있던 시점이라, 국제적인 압력도 대단했다.[17]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D%9D%AC%ED%83%9C[18]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195363[1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을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으로 우리가 가장 잘 알고있는 '그 김태원'하고는 동명이인이기만 할뿐 전혀 아무관련이 없다.[20] 출처:박순자[21] http://ko.wikipedia.org/wiki/%EC%9C%A4%EA%B8%B8%EC%A4%91[22] http://ko.wikipedia.org/wiki/%EB%82%A8%EC%9E%AC%ED%9D%AC[23] http://ko.wikipedia.org/wiki/%EC%A0%95%EB%9E%98%ED%98%81[24] http://ko.pokr.kr/person/19401160[25] 이태섭[26] 여담으로 민주공화당도 미국의 민주당, 공화당과 엮이며, 민주자유당도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과 엮였다.[27] 김영삼 대통령에게 숙청되어서 지금은 사라진 신군부 세력인 하나회의 주도 아래에 창당되었다. 민주공화당과 달리 재건당같은 민정이양하기 전의 사전조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