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자동차

 

'''대우자동차'''
'''DAEWOO MOTORS'''
[image]
'''정식 명칭'''
대우자동차주식회사
'''영문 명칭'''
Daewoo Motors Co., Ltd.
'''한문 명칭'''
大宇自動車 株式會社
'''국가'''
[image] 대한민국
'''설립일'''
1972년 6월 7일
'''해산일'''
2016년 3월 31일
'''업종명'''
승용차 및 기타 여객용 자동차 제조업
'''기업 분류'''
대기업
'''상장 여부'''
비상장기업
'''법인형태'''
폐업법인
'''주소'''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대로 70(부평동)
1. 개요
2. 역사
2.1.2. 도요타와 기술 제휴
2.1.3. GM과 기술 제휴
2.1.4. 파산과 새한자동차 시절
2.2.1. 새한자동차 인수
2.2.1.1. 명품 만(MAN) 엔진
2.2.2. 대우자동차로 변경
2.2.4. 우즈대우-아브토
2.2.5. GM과의 결별과 침체기
2.2.6. 파산
2.3. 공중분해
3. 역대 임원
3.1. 대우자동차
3.2. 대우국민차
4. 생산 차량
5. 관련 문서


1. 개요



'''1998년 대우자동차 독일 광고(1998 Daewoo Deutsch Ad)'''
대우그룹 계열 자동차 회사. 1972년 6월에 GMK(General Motors Korea)로 신진자동차와 GM의 합작 형태로 설립되었다. 2002년 최종 부도처리 이후, 현재는 승용, RV는 한국GM이, 버스는 자일대우상용차, 트럭은 타타대우상용차로 각각 분할매각되었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dm.co.kr'[1]이었으며, 노조는 1963년 결성 이후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이었다가 1994년 탈퇴 이후 2002년 GM대우 변경 전까지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이었다.

2. 역사


일단 모체는 밑에서 서술할 신진공업이며, 신진공업이 인수한 옛 새나라자동차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국내 최초의 자동차(엄밀히 따지자면 영운기이다.)인 시발을 생산한 국제차량제작과 함께 초기 자동차 사업의 중심에 있는 회사로 평가된다.
일부에서는 국제차량제작이 정부 정책으로 새나라자동차에 강제 합병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몇몇 곳에서는 국제차량제작에서 생산한 시발까지 대우차로 포함하기도 했다.[2]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정보로, 시발의 생산 라인은 을지로용산구 문배동 등에 있었으며, 부평에 있었던 새나라자동차 공장은 1937년 설립된 적산기업인 국산자동차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는 부도 이후 어느 기업에도 인수되지 않았고 당시 시발자동차의 생산에 참여하였던 기술진과 경영진들 중 일부가 신진자동차 등 다른 기업으로 스카웃된 것을 제외하면 국제차량제작과 새나라자동차는 딱히 연결고리가 없다. 정확히 국제차량제작은 5.16 이후 정부지원 중단과 새나라의 등장으로 재정난을 겪다가[3] 1964년 정부 주도 자동차종합정책 실시의 영향과 최무성 3형제의 미국 이민으로 폐업하였고, 새나라자동차는 국제차량제작과 별도로 1964년 2월 '새나라 의혹' 사건으로 생산을 지속할 수 없게 되어 부도처리되자 신진공업이 정부 주선으로 이를 인수한 것이다.

2.1. 신진자동차그룹 시절



2.1.1. 신진자동차 설립


1955년 부산 전포동에서 김창원, 김제원(이후 김제원은 국회의원을 지냄) 형제에 의해 신진자동차공업으로 시작해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폐차 섀시를 이용해 버스를 만들면서 버스 생산 권한을 획득하고 사세를 키웠으며, 1962년에 국내최초의 25인승 소형버스를 제작해(어찌 보면 레스타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2천대의 판매고를 자랑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이후 1963년에 미군 지프 등의 재생 부품을 이용하고 새나라자동차의 디자인을 따서 만든 승용차인 신성호를 생산함으로서 당시 승용차 제작 권한까지 획득했다. 그러나 당시 신성호는 재생차다 보니 품질이 영 좋지 않았고 가격도 비싸서(...) 평가와 판매량도 영 좋지 않았다고 한다(...)

2.1.2. 도요타와 기술 제휴


1965년에 부도가 난 새나라자동차의 부평공장을 인수했다.
이때 토요타와 기술 제휴를 맺었다. 원래는 미쓰비시와 제휴를 하려다가 틀어져 버렸는데, 때마침 도요타가 신진 측에 제휴를 제의하면서 성사되었다.
도요타와의 제휴로 신진자동차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토요타 코로나, 크라운 등 도요타의 명품 승용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면서 돈을 제대로 쓸어담았다. 도요타 차량 생산으로 대박을 거둔 신진은 1968년 한국기계 인수, 1969년 경향신문 인수, 1970년 신진공고 설립, 1971년 스파이서 설립 등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신진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자만 1970년 토요타는 저우 4원칙에 따라 중국 진출을 위해 신진자동차와의 제휴를 중단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해버렸다.(...) 저우 4원칙은 당시 중국 총리저우언라이가 일본 경제사절단과의 회담에서 밝힌 것으로, 한국 및 대만과 거래하는 상사, 베트남 전쟁에 무기를 공급한 기업, 미국계 기업의 일본 자회사들과는 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2.1.3. GM과 기술 제휴


마음이 급해진 신진자동차는 1972년에 미국의 GM과 자본금 180억원을 50:50으로 공동 출자해 종합자동차 제너럴모터스코리아자동차(GMK, 지엠코리아)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대우자동차의 전신이다. 즉 사실은 '''시작부터 GM 합작사였다.(...)'''
하지만 이전에 라이센스 생산을 하던 토요타 차량과 달리 GM계열 차량들은 국내 실정에 잘 맞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72년에 출시한 시보레 1700[4]은 경쟁 모델에 비해 연비가 매우 좋지 않았고, 포장도로용으로 설계되어 당시 국내 상황과 맞지 않았다. 결국 업계 선두를 현대에 내 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진그룹의 몰락에 헤드샷을 날리고 만다. 사실 신진자동차는 GM과 합작하여 지엠코리아를 설립할때 승용차 차종 까지도 이스즈자동차의 차종을 들여와서 베렛과 플로리안을 라이센스 생산 하려고 했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무산되고, 결국 한국의 도로사정과 잘 맞지 않는 문제의 차종들을 생산하게 되었다. 물론 이스즈의 승용차 차종이 토요타 승용차 차종 보다 상품성이 떨어지기는 했어도, 최소한 시보레 1700 같은 차종 보다는 국내 도로사정에 더 잘 맞고 연비에서도 우위에 있는 차종이고, 코로나, 코티나와 같은 급의 1,600cc 플로리안 보다는 한체급 더 낮지만 퍼블리카 보다는 한체급 높은 1,300cc급 베렛의 경우는 기아 브리사와 같은 급의 소형차인 만큼 베렛이 들어왔더라면 어쩌면 한국에 마이카 시대를 1~2년이라도 앞당겼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차라리 당초 신진자동차 측이 원했던 대로 이스즈의 승용차 차종을 생산하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때는 신진자동차 말고 신진지프공업이 있었는데, 이쪽은 미국 AMC와 신진이 제휴해서 설립한 회사다. 이후 AMC가 철수한 후 신진자동차, 거화를 거쳐 쌍용자동차가 되었고, 구 신진자동차 법인은 건설업으로 전환해 신원개발이 됐다가 삼성그룹에 팔려 삼성종합건설, 삼성건설을 거쳐 1995년 삼성물산에 합병됐다.

2.1.4. 파산과 새한자동차 시절


몰락한 신진은 1976년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고, 1976년에 한국기계공업과 세트로 묶여 산업은행이 한국 측 지분을 넘겨받으면서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꾼다. 1976년 대한민국 버스 역사의 불멸의 모델인 BF101를 출시했다. BF101은 이후 엄청난 대박을 거두지만 BF101 성공의 수혜를 입은 것은 1978년 새한자동차를 인수한 대우그룹이었다.

2.2. 대우그룹 시절



2.2.1. 새한자동차 인수


1978년에 대우그룹이 새한자동차의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하였다. 하지만 GM과 경영권 협상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1983년까지는 새한자동차라는 사명을 유지했다. 대우자동차를 대표하는 모델 중 하나로 항상 언급되는 BF101 버스도 1983년까지는 전면에 SMC(새한자동차)라는 로고를 새기고 다녔다.
대우그룹에 인수된 이후 기존에 판매가 잘되던 레코드 1900을 레코드 로얄로 바꾸어 판매했고, 시보레 1700의 후속으로 계속 시도해 왔으나 불발되었던 제미니를 출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미니 역시 포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이후 1982년에 맵시로 바뀌어 출시하게 된다. 반면 레코드는 승승장구해서, 1970년대 후반 중형차 시장을 장악했다. 이후 1980년에 로얄살롱을 내놓게 되는데, 운 좋게도 2차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장관급 관료의 관용차가 4기통으로 제한되면서 모델을 크게 앞지를 수 있었다. 이렇게 중형차 시장에서 독보적인 강세를 보였고, 버스 부문에서는 새한자동차 시절에 출시된 희대의 명작인 BF101가 대박을 쳐서 현대자동차 등 경쟁사의 버스 모델을 압도하는 판매량을 보였다. 70년대말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전국 어디든지 BF101이 안 돌아다니는 곳이 없었다.[5]

2.2.1.1. 명품 만(MAN) 엔진

이 시기의 대우자동차가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한 가지 꼽는다면 단연 만(MAN) 엔진을 들 수 있다.
한국의 대우자동차(당시 새한자동차)와 독일(당시 서독)의 MAN社 간의 기술 협정으로 대우차 과장급 기술진들이 독일로 산업 연수를 갔으며, 이 결과물로 탄생한 엔진 제품에 제휴회사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명문대 출신 또는 현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젊은 기술자들이 독일로 파견됐는데, 현지에서는 우리 기술진들에게 이론과 실제 적용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려고 베어링 같은 부피 작은 물건을 만들어 오라는 과제부터 내줬다고 한다. '''이론에 따라 완벽히 만들어 와도''' 온도나 기후 같은 '''환경 요소를 등한시'''했다며 학습자가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여러 차례 퇴짜를 놓으며, 첫날부터 혹독하게 진도를 나갔다고 한다. MAN사와의 기술제휴가 끝난 후에도 기술 연수를 다녀온 젊은 실무진들은 Storm 엔진을 개발해 국내 산업 발전의 든든한 일익을 담당한다. 또한 나중에는 MAN사에서 대우 측에 위탁생산(OEM)을 맡길만큼 기술력과 가성비를 인정받았다는 후문.
이전까지만 해도 버스 회사의 기술자들은 한 번 장거리 운행할 때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차량을 정비하며 노심초사했는데, 잔고장 적은 '''MAN 엔진이 탑재된 제품이 시장에 출시된 후부터 비로소 운수 회사들이 제대로 이익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단 정비관련비용을 절감할 수 있거니와, 도로사정이 나쁜 낙후지역에도[6] 뛰어들어 시장을 개척하게 된 덕분. 당시 BF101이나 BV101에 장착되었던 D0846HM은 185마력 엔진이었고, BU110이나 BV113 초기형에 장착되었던 D2156HM은 236마력 엔진이었다. 또한 5공화국 의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 시기에는 대우(새한) 뿐만 아니라, 현대, 아시아(기아), 동아(쌍용) 버스들도 D0846HM과 D2156HM 엔진으로 통일시켰을 정도로, MAN 엔진은 국내 상용차 시장에서 그 품질을 인정받았다.

2.2.2. 대우자동차로 변경


대우그룹과 GM이 수년간의 경영권 협상 끝에 대우그룹이 경영권을 물러받아 1983년 상호를 대우자동차로 바꾸게 된다. 같은 해 부평공장에 기술연구소를 세우고 1985년 긴급출동 서비스를 실시하는 등 발전에 열을 올렸지만, GM의 지분은 그대로여서 대우 르망 등 GM 계열의 차량을 배지 엔지니어링으로 생산했다. 이것 때문에 제5공화국 시절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현대양행(중공업)을 대우로, 대우자동차를 현대로 넘기는 소위 빅딜을 시도했으나 GM이 거절해서 결국 현대양행은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이 되었고 대우자동차는 그대로 대우그룹에 남았다.[7] 1992년에는 GM과의 합작관계를 청산하고 1993년 대우자동차판매로 판매망을 넘겼다. 1994년과 1995년에는 버스와 상용차 부문을 각각 대우중공업에 이관시킨 뒤 1996년 전북 군산종합자동차공장을 세웠다.
1990년대까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와 함께 '''국내 4대 자동차 메이커'''였으며, 특히 냉전 종식 후 시장경제 체제로 진입하기 시작한 동구권 국가들과 남미 등을 중심으로 먼저 판매법인을 속속들이 세운 후, 1995년에는 폴란드 FSO와 체코 AVIA를 각각 인수하며 해외 현지 공장들을 설립하고, 아시아에선 1993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합작해 우즈대우-아브토를 세우고 1995년 베트남에 현지법인 VIDAMCO를 세운 뒤 인도 DCM-토요타를 인수했다.
영국[8], 독일 등 자동차 선진국에서는 1995년에 뮌헨연구소를 세우고 이듬해 영국 IAD 사로부터 워딩연구소를 인수하는 등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모색한다. 또한 새로 출시된 준중형 르망, 에스페로는 80년대 중반 ~ 90년대 중반 대우자동차의 간판 제품으로, 후발주자임에도 선두 현대차의 경쟁차종을 위협하는 위치까지 '''맹추격'''하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대우차가 경쟁 회사들과 차별되는 특징은
  1. 차량용 페인트 제작 및 채색기술이다. 이 분야에서 앞서있는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을 제휴, 경쟁차종보다 녹이 좀처럼 슬지 않고, 윤기가 오래가는 채색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닛산자동차는 80년대 현장 견학을 온 한국 측 파견 기술자들에게 공정 대부분을 보여주면서도, 유독 페인트 도색 관련 과정은 대외비를 다루듯 공개하지 않았는데, 대우자동차 측에서 닛산과 기술 협력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덕분에 90년대 후반까지 많아야 15겹의 페인트층을 형성했던 현대차와는 다르게, 대우차는 거의 20겹 가까운[9] 기본페인트층을 형성하였다.
2. 현대자동차가 풍부한 자금력으로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까지 3 ~ 4년 간격으로 신차를 개발하며 내장 부품까지 대부분 전 세대와 다르게 설계하던 것과 다르게, 기존 차량의 일부 부품과 외관 모양을 개선해 시장에 출시하여 역설적으로 소비자들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를 테면 91년에 구입한 차량에 95년형 신차의 바뀐 부품들을 갈아 끼우기만 하면 새 차를 산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얘기이다.
3. 중형차 이상의 차량에는 고장력 철판을 사용해 안전성 측면에서 경쟁 차종보다 우위에 있었다.
4. 중형 차종 이상은 "후륜구동"을 채택해 운전자들이 묵직하면서도 편안하게 느낄 수 있었다.[10]
5. 후륜구동 특성상 차량 뒷부분에 디퍼렌셜 기어가 존재하여 공간확보에 불리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4사람 분량의 골프채 가방을 넣을 수 있는 수준의 트렁크 공간을 확보하였다.
6. ZF아이신에서 도입한 변속기의 특성 상 스타트는 굼뜨지만 고속은 좋다는 강점이 있었다.[11]
7. 소비자들의 "불필요한 수리비 부담"을 줄이고자 "영수증 환불제"를 실시하였다. 수리비용을 많이 덤터기 쓴 경우 => 영수증만 확실히 가져오면 그 비용 그대로 고객에게 환불해드리고, 바가지 씌운 차액은 해당 영업소에 청구한다는 취지. 실제로 이 정책 실시 후 대우차 소비자들의 수리비 부담이 줄어 고객 충성도를 늘리는 효과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PC통신이 활발했던 1994년에는 하이텔에 '''동종기업 최초'''의 텔넷 게시판인 오토컴을 설립해 국내 초창기 자동차 커뮤니티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이때는 대우차 빠들이 지금보다 충성심도 강하고 워낙 인터넷 매너를 지키던 시기라, 대우차를 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왔었다. 오토컴은 자동차 커뮤니티 계의 '''칭기즈 칸'''이라 불리며 엄청난 활동량을 선보였으나 그 이후의 후발주자 커뮤니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서 입지를 어느 정도 잃었고 무엇보다 1996년에 대우자동차 공식 홈페이지가 개설되고 민간인이 관리하기 시작,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2002년 1월에 폐쇄된다. 오토컴의 많은 자료들은 대우자동차 르망/씨에로/넥시아 동호회인 LCN이 가져가 사이트 설립과 함께 백업해 놓았으니 참조하자.

2.2.3. 대우국민차


대우의 경차는 여기서 생산했다. 원래 대우조선 자동차사업부(현 한국GM 창원공장)의 브랜드 명칭이었다. 1991년부터 티코, 다마스, 라보를 생산했다.
1994년 대우조선이 대우중공업에 합병되어 한동안 대우중공업에서 만들다가 1999년 3월에 상용차, 버스 부문과 함께 대우차에 흡수합병되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모델들은 모두 대우차 모델이 되었으며, 그 중 대우 티코는 몇 년 후에 단종되었다.

2.2.4. 우즈대우-아브토


1993년 대우가 동유럽시장 공략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에 세운 법인으로, 1996년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작하여 현재도 과거 대우차 임원들이 여기로 넘어가서 일하고있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후 2002년 부터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주도 하에 대우차 우즈베키스탄 법인을 국영화 하여 '우즈대우 (Uz-Daewoo Auto)'로 사명을 변경, 2016년 GM의 사업 재편으로 인하여 대우 브랜드의 사용이 종료되어 현재는 2008년부터 일부 동구권 국가를 중심으로 천천히 도입하던 라본 브랜드를 도입 및 사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2.5. GM과의 결별과 침체기


하지만 로얄 시리즈가 쏘나타에게 중형차 1위 자리를 내주며(1991년 9월 단종), 내수 시장에서 현대자동차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데에는 대우자동차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GM의 문제도 있었다. 즉, 50% 지분을 가진 GM의 입김이 작용해 고유모델 개발보다는 GM의 글로벌 차량을 뱃지 엔지니어링으로 주로 생산함에 따라 '''차량 자체의 성능은 나무랄 데 없지만 국내시장의 수요와는 뭔가 좀 안 맞는''' 차량을 출시한 것이 국내 시장에서 외면당하게 된 이유이다. GM의 입김이 단적으로 잘 드러나는 사례가 1978년에 대우그룹이 새한자동차의 지분 50%를 인수했을 때 나머지 50%의 지분을 가진 GM과 일종의 경영권 다툼이 있었고, 이런 경영권 다툼 때문에 대우그룹에 인수되고도 대우자동차로 개명되는 데까지 5년이나 걸렸다. 결국 GM과 대우그룹이 경영권에 관해서 어찌어찌하여 합의한 후인 1983년에서야 대우자동차로 사명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1992년에 대우는 GM 지분을 인수하여 GM과 결별했다. 이후 대우자동차는 해외 엔지니어링 기업을 인수해 고유모델 개발에 전력을 기울인다. 대우가 GM 결별 후 개발한 차종으로는 준중형 대우 누비라, 중형 대우 레간자가 대표적이다. (준)대형에서는 아래 설명된 것처럼 브로엄, 아카디아 등 여전히 해외 모델을 들여왔다. 누비라와 레간자의 후속모델인 대우 라세티, 대우 매그너스는 대우 시절에 거의 개발이 다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생산, 판매는 GM대우 인수 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GM과의 결별 및 독자 노선 전략은 득보다 실이 많았고 결과적으로 대우자동차는 쇠퇴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IAD(후의 DWTC) 인수와 뮌헨 GTC 개소 이후 진행된 개발은 김우중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 할 정도로 많은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 결과 짧은 기간 내에 자체모델 개발에 성공하는 등 성과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부채규모는 대우자동차의 자금사정을 더욱 옥죄였고, 이는 장기적인 로드맵 구축에 실패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더군다나 독자개발로 여러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구형 모델 대비 비교적 높아진 고장율은 경쟁사의 신모델에 대응하기 힘들게 만들었고, 그외의 파업과 그룹 사정등 복합적인 요인들도 판매부진에 작용했다.
GM과 결별 이후 대우가 독자 개발해서 내놓은 차들은 성능적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특유의 '''삼분할 그릴'''로 인해 디자인 측면에서도 소비자들의 호'''불호'''가 극심했다. 레간자, 누비라 등 대우가 독자 개발해 내놓은 새로운 모델들은 이전에 대우자동차가 현대자동차와 경쟁하도록 했던 로얄 시리즈, 그리고 르망 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성능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디자인 측면에서의 부정적인 여론은 더욱 컸다. 이전 로얄 프린스, 르망은 특유의 유선형 디자인으로 당시에 각진 디자인의 현대자동차의 프레스토/엑셀, 스텔라, 쏘나타보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라는 호평을 받았고, 이는 르망과 프린스의 상당한 판매량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GM과 결별한 후,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의 엠블럼을 상징하는 악명 높은 '''삼분할 그릴'''을 적용할 것을 강력 지시하시었다. 이에 대우가 독자개발한 핵심 모델인 누비라와 레간자를 위시하여 대우에서 생산하는 대부분의 차종에 삼분할 그릴이 적용되면서 대우자동차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대우자동차가 성능적인 측면에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삼분할 그릴의 전면부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무난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현대자동차의 엑셀, 소나타가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체어맨의 삼분할 그릴 해프닝이나, 라세티가 삼분할 그릴만 없앴을 뿐인데 판매량이 급증한 사례 등을 봐도 삼분할 그릴이 대우자동차에 얼마나 큰 해악이 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중형 이하 모델은 대우자동차에서 독자 개발을 했지만 (준)대형급 고급차 모델은 여전히 해외 모델을 베지 엔지니어링해서 판매했다. 대우의 독자 모델인 누비라, 레간자는 97년에야 나왔고, 그 이전에는 브로엄, 아카디아 등 (준)대형급 베지 엔지니어링 모델이 먼저 출시되었다. GM과 결별하기 직전에 내놓은 브로엄은 로얄 수퍼살롱의 후계차량으로 프린스의 차대에 2,000cc 배기량을 뿜는 최고급 중형차로, '수퍼 살롱'의 상급트림으로 '수퍼 살롱 브로엄'을 내놓은걸 나중에는 모델 이름을 아예 '브로엄'으로 바꾼 것이다. 대형차 시장에서도 1994년에 일본 혼다자동차의 레전드를 국내 도입한 아카디아(배기량 3,200cc)를 내놓으며 추격에 나선다.
하지만 프린스는 튼튼함과 후륜구동 그리고 저렴한 유지비의[12] 장점에도 불구하고, 편의성을 내세운 쏘나타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최고급 "중형"'''브로엄의 판매는 많은 소비자분들이 ''''수퍼살롱(브로엄) 보단 프린스를 사는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지지부진하였다.
아카디아는 주말 드라마에 PPL을 자주 내보내고,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혼다 모델인 레전드에 대한 신뢰가 겹쳐 잠시 선전했으나, 그랜저가 대형차 시장의 대세를 점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1998년 대우자동차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며 쌍용의 라인업을 모두 흡수하였고, 당시 잘 나가는 대형차 체어맨도 대우 체어맨으로 판매할 수 있었기에 아카디아의 존재는 더욱 쓸모가 없어졌다. 남은 재고를 대당 1000~2000만원 가량의 폭탄 세일로 처분하며 1999년 12월에 단종되었다. 아카디아의 발매 초기 가격이 4천만 원을 훌쩍 넘겼는데 폭탄 세일 시점의 가격은 2천만 원대에 불과했다. 자세한 내용은 대우 아카디아 문서를 참고할 것.
대우그룹은 1970 ~ 1980년대에 다른 상위 대기업들처럼 자체 기술개발에 공을 들이지 않았는데 이것이 1990년대 이후 대우그룹의 몰락의 전조였다. 80년대 후반부터 대우 기술연구소의 활동이 강화되었지만 좀 때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것은, 대우의 새한차 인수는 1978년이었고, 부평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 설립은 1981년이었다. 새한차 시절 기술 개발 관련 시설이 아무것도 없었다가 연구소 설립 후 XQ엔진 등의 엔진 개발을 한 걸 생각하면 조금 애매하긴 하다. 때문에 인수시점과 연구소 설립 시점을 생각하면 대우자동차는 비교적 기술개발 진척을 상당히 빠르게 시작했다 할 수도 있다.
그밖에도 김우중 회장의 수완과 현지 주민들의 호감을 얻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홍보진들에 힘입어 적극 제3세계 시장을 공략하였지만, 공격적인 해외진출에 비해 내실(기술력)이 덜 갖춰진 탓에 1997년 말부터 1997년 외환 위기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구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휩쓸리게 된다. 사실 대우자동차가 자체 기술개발에 공을 들이지 않은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는데, 1992년 까지만 해도 대우그룹과 GM이 대우자동차의 지분을 50:50으로 가지고 있다 보니 GM의 입김도 상당하였고, GM 입장에서는 자사의 기술과 부품들을 계속 팔아야 하는 만큼 대우자동차의 자체 기술 개발을 최대한 막으려고 했고 계속 자사의 기술을 가져다 쓰게 만드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2.2.6. 파산



대우그룹 시절 막바지인 1997년 초에 나온 대우자동차 기업 홍보 및 당시 신모델이었던 누비라 광고 영상.

파산 직전이었던 2001년 기업 광고.

'''역덕이슈오늘 I 88 2000년 11월 8일, 대우자동차 부도'''
이 상황에서도 대우 김우중 회장은 구조조정을 하는 대신, 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IMF 사태가 터진지 일주일만인 1997년 12월 9일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것이다. 본래 삼성그룹에서 부채를 떠안는 대신 상징적인 의미의 '''"1원 인수"'''를 제안했지만 쌍용 측이 거부, 일정한 보상을 약속한 대우그룹으로 회사가 넘어간 것이다. 덕분에 소형차 ~ 대형차, 지프까지 전 차종 생산이 가능하게 됐고 1998년 5월부터 판매망까지 통합됐지만, 모기업인 대우의 자금 사정이 불안했던 관계로 기존에 쌍용 측에서 기획한 모델들의 개발은 계속 미루어진다. 이 무렵의 대우-쌍용자동차가 개발을 시도하던 모델들로는 쉬라츠, P-100, 스포츠 로드스터인 마야(1999년 서울 모터쇼에서 프로토타입(컨셉트카)가 공개되었다.)가 있으며, 또한 포니 픽업이 단종된 이후 맥이 끊겼던 국내 승용픽업 시장을 부활시키기 위해 폴란드 현지공장의 생산모델인 FSO 폴로네즈 플러스의 안전설계와 배기기준을 업그레이드 해 베타테스트를 했고, 스타렉스급 RV 차량인 루빌론을 국내에 3대 가져와 테스트하는 등 다인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물론 부채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허사로 돌아가지만(...) 한가지 희망은 있었다. 렉스턴 같은 경우는 프로젝트가 쌍용자동차로 이원되어 재개발이 되었고, 다행스럽게 2001년에 출시되었다. 반면 1999년 1월에는 (주)대우 무역부문으로부터 자동차수출부문을 이관받았고, 대우중공업으로부터 상용차/국민차/버스사업부문을 넘겨받으며 인천 대우 제우스 운영권까지 넘겨받았다.
김우중 회장은 그동안 동구권, 베트남, 중국 등지에 꾸준히 공을 들여 대우 인지도를 쌓았기 때문에 대출을 더 받으면 틀림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IMF 사태로 한 달 사이에 3,000곳의 기업체가 도산하는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미온적이면서도 추가 대출을 기대하는 모기업인 대우그룹에 협조해 줄 여유가 있는 은행은 없었으며, 오히려 쌍용자동차 인수 이후 국내 2위의 재벌이 된 상황에서 '''막대한 부채를 빌미로 배짱'''을 부린다는 오해를 받았고[13], 1998년 10월에는 일본 노무라 증권사에서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시장의 평판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모기업의 위기'''에 같이 휘말리게 된다.
1999년 가을, 결국 모기업이 워크아웃을 당하자 본사는 대우 제우스 농구단을 신세기통신으로 팔았고, 12월 들어 정부는 대우차 및 쌍용차를 해외에 매각하겠다고 방침을 밝혔다. 이는 각 완성차 회사 노동자들에게도 생생히 전해져 한국 자동차업계가 해외 자동차업체의 하청/단순생산기지로 전락되고 고용불안이 심화될 것을 우려해 완성차업체 노조 대표자들이 긴급대표자회의에서 투쟁방향을 대우차의 공기업화로 정하며 재벌 및 해외매각 반대 투쟁을 개시했다.
이에 따라 2000년 3월 22일 본사 노조가 먼저 파업을 개시했고, 이는 쌍용차 등 경쟁업체 노조에 파급되어 4월 6일부터 공동파업을 전개했다. 같은 시기 총선 정국이 일었던 터라 해외매각 반대 여론이 확산되자 인수희망 업체들이 자동차산업 발전 보장 및 기술이전, 고용보장 등 인수 조건을 약속하기에 이르렀으며, 대우차와 채권단은 6월에서 8월로 매각완료 기일을 연기했다. 그러나 총선이 끝나자 정부는 본사에 경찰을 투입해 추영호 노조위원장 등 노조 간부들을 연행했다. 그러나 완성차노조와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 등이 하강국면 때문에 총파업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고, 포드가 대우차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가 포기했으며 11월 8일 최종 부도처리돼 법정관리를 받았다.
12월 19일에 사측은 생산직 5,494명 등 총 6,884명 인력감축안을 노조에 통보했고, 2001년 1월 16일에 생산직 2,794명 정리해고 계획서를 노동부에 냈다. 이에 노조가 1월 17일부터 부분파업에 돌입하자, 사측은 2월 12일에 부평 승용1공장 가동을 멈추고 16일에는 노동자 '''1,750명'''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노조 측이 공장을 점거하자 경찰이 부평공장 전체를 가로막은 채 노조비상투쟁위원회 소속 간부 30명에 업무방해 혐의로 체포령을 내렸다. 2월 19일에 전의경 40개 중대 4,200명이 부평공장에 진입해 집회 해산을 감행했고, 경력 5,000명이 공장 내에 상주했다. 이에 따라 노조 집행부는 산곡동 성당으로 가서 농성을 개시했으며, 민주노총도 산별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 정리해고 분쇄투쟁 지휘부'를 만들고 2월 20일부터 민노총과 금속산업연맹이 부평역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으며, 2월 23일부터 김우중 회장 체포결사대도 꾸려졌다. 3월 6일에는 민노총 중앙위원회에서 투쟁방향 역시 '신자유주의 정권 김대중 퇴진'으로 정립됐다. 이로써 파업 내내 부평공장을 비롯해 부평구 일대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전쟁터가 되었다.
3월 7일 노조 측이 부평공장 탈환 투쟁을 전개했으나 사측이 공장 가동을 재개했고, 4월 10일에 노조원과 집행부가 노조사무실 출입을 허용한다는 법원의 결정에 따라 출입을 시도하려 했으나, 전의경 병력에 의해 방패와 군홧발 등으로 무차별 구타당해 4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 모습이 노조 영상패에 의해 촬영되어 다음날 지상파 방송과 인터넷 등지에 공개돼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외신에도 보도되었다.#[14][15] 4월 13일에 민노총 등이 '정리해고 분쇄/살인적 폭력만행 김대중 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열자, 동월 17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유감 의사를 밝혔으며 7개 시민사회단체가 4.10 폭력진압 당시 경찰 관계자 5명 및 5개 전경대원 등을 고발했다. 이후 동월 19일에 과잉진압에 가담했던 인천 1002중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해체되었다. 한편 해당 파업은 GM코리아 매장 항의집회나 주한미상공회의소 등 규탄집회 등 반미/반GM 투쟁 성격도 내포됐다. 이와 같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김일섭 노조위원장 등 노조 집행부 등이 구속됐고, 정리해고도 강행되었다.[16] 다만 승용 파트는 GM에 인수된 이후 닉 라일리 사장이 전원 복직시켰다. 버스와 트럭파트는 알려진것이 없다.
그럼에도 본사는 2001년 11월 KTF와 국내 최초로 텔레매틱스 서비스 '드림넷'을 개발하는 등 재기를 위해 노력을 했다.

2.3. 공중분해


결국 2002년에 승용차 사업부문은 GM이 인수해서 GM대우(현 한국GM)가, 버스사업부문은 영안모자에서 인수해서 대우버스가, 트럭사업부문은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해서 타타대우상용차가 되었다. 부평공장은 GM이 인수를 보류하는 바람에 차량, 엔진 등을 GM대우에 납품하는 형태의 대우인천자동차라는 별도 법인으로 한동안 운영되다가 2005년 10월에야 GM대우에 통합되기도 했다. 기존 대우자동차 법인은 잔존법인이 되어 청산절차를 밟았으며[17], 이때쯤 대우자동차판매의 쌍용자동차 판매를 중단했다.[18]
이렇게 쪼개진 회사들의 차량을 '대우자동차판매'라는 곳에서 팔았었다. 2010년에 대우자동차판매는 워크아웃에 들어갔으며, 워크아웃 직전 한국GM과 타타대우상용차는 대우자동차판매와 결별했다. 후에 건설 부문은 대우산업개발로 분리되었고, 나머지는 자일자동차판매로 재편되었다. 대우자동차판매가 이름은 자동차 판매지만 건설 부문을 유지한 것은 이유가 있다. 생산회사와 유통회사가 이전처럼 한 그룹에 속한 계열사가 아니기 때문에, 생산회사에서 자체유통하기로 결정하면 유통회사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사업다각화를 해놔야 했다.
더불어 씨에로를 만들던 우즈베키스탄 공장은 대우그룹 해체 뒤에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국유화를 한 상태다. 씨에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명이 바뀐 현재는 젠트라를 넥시아로 판매하고 있다.(하단사진 참조) 2016년 현재 우즈대우(UZ-DAEWOO)는 라본(RAVON)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수출시장에서 겪었던 굴욕은 나열하기가 눈물날 정도. 미국 시장에서는 누비라 하나에 수천 달러의 현금 할인과 40인치 PDP TV를 묶어 팔았고, 유럽 시장에서는 1년치 보험료와 핸드폰까지 무료로 묶어 팔았으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 탑기어에서는 마티즈의 리뷰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트랙을 돌다가 나자빠져서 '''이딴 기본이 안된 차에는 점수를 줄 수가 없다'''고(...) 한가지 변을 하자면 마티즈 같은 경우 이미 디자인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차를 만든 경우이고 아시아 국가의 좁은 경차 조건에서 최대한의 공간을 뽑다 보니 다마스나 레이처럼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높아진 감도 있다. 실제로 닛산 큐브같은 경우 탑기어 코리아에서 트랙을 돌다가 전복될뻔 했다. 동유럽이나 남미, 중앙아시아 등지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우즈-대우 등에서 생산한 티코, 씨에로 등이 불티나게 팔렸으며 해당 국가에서 '''국민차'''라고까지 불리기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우즈베키스탄에서 GM Uzbekistan 차량 외엔 전부 수입차 취급을 받는데, 이 때 세금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 국민의 자부심도 대단해서 뮤직비디오엔 어김없이 쉐보레 혹은 라본 차량이 나온다.

3. 역대 임원



3.1. 대우자동차


  • 대표이사 회장
    • 김우중 (1979~1999)
    • 이석희 (1982~1983)
    • 김태구 (1995~1997)
  • 부회장
    • 최명걸 (1985~1986)
  • 대표이사 사장
    • 김창원 (1972~1976)
    • 김종달 (1976~1978)
    • 김우중 (1978~1979)
    • 김영승 (1979~1980)
    • 이석희 (1980~1982)
    • 최명걸 (1982~1985)
    • 김정웅 (1985~1987)
    • 이경식 (1987~1989)
    • 김성중 (1989~1991)
    • 김태구 (1991~1995/1999)
    • 양재신 (1995~1997)
    • 강병호 (1997~1999)
    • 김신정, 정주호 (1999~2000)
    • 이영국 (2000~2002)[19]
  • 대표이사 수석부사장
    • 하워드 W. 벤지 (1972~1975)
    • 허버트 L. 텔쇼 주니어 (1975~1978)
    • 리처드 존슨 (1978~1982)
  • 관리인
    • 이종대 (2000~2003)
    • 김유식 (2003~2016)
    • 이상일 (2003~2006)

3.2. 대우국민차


  • (주)대우 국민차사업담당 부회장
    • 최명걸 (1990~1993)
  • 대우조선공업 국민차부문 사장
    • 김정웅 (1991~1993)
    • 최은순 (1993~1994)
  • 대우중공업 국민차사업부문 대표이사
    • 이관기 (1994~1999)
  • 대우자동차 국민차사업부문 사장
    • 이관기 (1999)

4. 생산 차량





5. 관련 문서



[1] 지금 들어가보면 자일대우자동차판매 홈페이지로 뜬다. [2] 대표적으로 지금은 사라진 디씨인사이드의 자동차 전문 자매사이트였던 카 디씨인사이드와 이곳에서 그렇게 분류한 바 있으며, 동아일보의 대우자동차 관련 기사에서도 부평에서 시발이 생산되었다고 서술하기도 했다.[3] 다만 이 기간 동안에 엔진 기술자 김영삼이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개발한 윌리스 고데빌 카피 엔진은 신진 신성호에 공급되기도 하였다.[4] 당시 명칭으로 절대 쉐보레가 아니다. 이때에는 일본식발음을 썼다. 현재도 일본에서는 시보레라 표기한다.[5] 당시 대형버스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렸으면서도 가장 먼저 도태된 버스이다 가장 먼저 도태된 버스는 1980년대 중반에 서울에서 도입되었던 2기 모델 시내버스 및 대도시에 도입되었던 좌석버스 한정이며 이는 서울에서 1980년대 후반 시내버스 리어엔진화(리어엔진버스가 계단이 완만해 승하차하기 좋고 운전석의 엔진소음을 덜며 운전자의 시야가 넓다.)를 위해 프론트엔진 버스를 조기대차한 것이고, 일부 대도시에서 1980년대 후반 좌석버스를 리어엔진 및 냉방화를 위해 프론트엔진 무냉방좌석버스를 조기대차한 것이다. 이는 대우 BF101 외에 같이 서울에 많이 도입되었던 현대 FB485, 아시아 AM907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외에 대부분 대도시 및 중소도시 농어촌 지역에 운행했던 시내/농어촌버스들은 대부분 차령을 다 채우고 대차했다.[6] 예를 들면,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는 전남 광주 ~ 전남 광양까지 가는 데 '''3 ~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7]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생전 인터뷰집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한 바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른데, 그나마 대우차를 현대로 넘기는 내용이 없고, 현대양행을 일방적으로 대우에 넘기라는 압박을 받으며 매우 분하게 생각했다고 전한다. 정세영(포니 정) 전 현대자동차 회장의 자서전에 따르면, 차량 관련 빅딜을 시도한 건 전두환 정부 이래 청와대 사람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기아자동차로, 현대의 주수입원이었던 버스-트럭 생산라인과 기아의 승용차 라인을 정부 주도로 바꿔 승용차 전문 업체로 바꾸려 했다고.[8] 일례로, 영국 시장에서는 진출 1년만에 점유율 1%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대우차의 파산 속에서도 유일무이하게 이익을 내는 법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9] 닛산 최고급 차종이 당시 23겹까지 칠했다고 한다.[10] 1997년 출시된 레간자부터는 전륜구동을 적용[11] 단, 자동변속기는 90년대 후반 기술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고, 대한민국 (상위)1% 고객 분들이 타는 차량이라 홍보한 차종에까지 기름값이 더 드는 4단 변속기를 적용시키는 우를 범하고 만다. 이 자동변속기 미션이 더 고급이었어도, 차량 판매가 달랐거나 입소문이 완전 달라졌을 것이라는 결과론이 있을 정도.[12] 프린스를(수동변속) 타다가 그랜저 TG로(자동변속) 차를 바꿨더니 관리비가 기존 4 ~ 5배로 뛰었다는 차주의 경험담도 있다. 사실 무게가 나가는 준대형 이상 차량은 일단 '''자동변속기 성능에 따라 기름값이 널뛰기'''할 수밖에 없다. 전술한 그랜저 TG는(자동변속) 시속 60km가 넘어야 수동 5단에 해당하는 기어변속이 이뤄지기 때문에 차량통행이 많은 시내에서는(...)[13] 생전의 강봉균 전 경제부총리가 이런 시각을 견지하였다.[14] 영화 부러진 화살에도 해당 영상이 나온다.[15] 대우차 공동투쟁본부 홈페이지대한변협 측 진상보고서도 참고할 것.[16] 이하 출처: <민주노총 20년사 연표> p238~239.[17] 舊 대우자동차 법인은 2002년을 끝으로 모든 사업을 신설법인에게 내주고 무려 14년을 더 유령회사로 존속하다가 청산되었다.[18] 대우와 쌍용 라인업이 겹치는 대형 세단 스테이츠맨이 갓 출시되고, SUV 윈스톰의 출시를 앞둔 시기다.[19] 2005년 GM대우 시기에 생산부문 사장으로 재취임. 이후 2007년 11월 명예 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