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고려대학교 총장'''
제8대
김상협

'''제9대
김준엽'''

제10~11대
이준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준엽
金俊燁 | Kim Jun-yop'''

<colbgcolor=#0047a0> '''출생'''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시
'''사망'''
2011년 6월 7일(향년 91세)
서울특별시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본관'''
충주 김씨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인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2.1. 일제강점기
2.2. 광복 이후
2.3. 고려대 총장 재임시기
2.4. 고려대 총장 퇴임 이후
3. 그 외


1. 개요


'''이제 독립되어 건국사업이 전개되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사회군사에 걸친 제반 건설사업이기 때문에 국민 각자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에 투신하여 최선을 다해야만 될 것이다.'''

장정 2권』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사학자, 교육자. 본관은 충주(忠州).#
초년기에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광복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대한민국에서 중국사공산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고려대학교의 영원한 총장이자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920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번지#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한 대지주 김종걸(金宗傑)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선대는 조선 성종 때 이래로 평안북도 벽동군에 세거하였는데, 조부 김봉구(金鳳九) 대에 이르러 강계군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 독립운동가였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을 길렀다. 강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신의주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압록강 건너 단둥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김준엽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1944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동양사학과 2학년 때 강제징집 되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1] 일본군으로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에 배치된 뒤 단독으로 탈영, 같은 조선인 출신 학병 장준하와 합류하여 '''수 천리를 걸어(장정, 長征)'''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때가 일제가 패망하기 몇 달 전. 이후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는 등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장준하 등과 더불어 미국 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특공부대의 일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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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의 모습으로 왼쪽부터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
일부에선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폄하하지만,[2][3]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 광복군 등 항일독립운동단체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일본군에 걸리면 무조건 처형이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중국군에 잡혀도 일본 간첩으로 오인되면 죽은 목숨이다. 뭐 다행히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덕에 오해 없이 잘 끝났지만.[4] 이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 징집 전 나침반을 마련하여 갈 정도로 광복군에 합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가 탈출한 쓰가다 부대는 조선인 탈영병이 나오지 않은 아주 혹독한 부대였는데, 김준엽은 그 부대에서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 병사였다.
광복군 시절 이범석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이범석의 비서였던 민영주 여사와 만나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는 이범석이 맡았다. 민영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명문인데 아버지 민필호는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판공실장(비서실장)을 지냈고, 외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이다. 김준엽은 이런 처가의 이력을 긍지로 여겼다.

2.2. 광복 이후


해방 후에는 중국 남경의 중앙대학에서 잠시 있다가, 1949년부터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51년 잠시 국립타이완대학에 유학했다가 1955년 완전히 귀국한다. 이후 후학 양성에 힘써 1957년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웠다. 이듬해 아세아문제연구소 내에 공산권 연구실을 설치했는데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적 연구기관으로 그는 공산주의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공산주의를 연구한 이유는 '통일을 위하여'.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통일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그의 노력으로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공산권 연구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깊이 연구하였고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통[5]으로 꼽힐 정도였다. 고려대학교에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하기도 하였다.[6] 중국에서도 한중 관계에 대한 김준엽의 공로를 인정해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훈장을 준 최초의 사례였다.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광복군 시절의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정계 진출 요청이나 장관 제의를 여러번 받았으나, 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집중하겠다며 모두 고사한 바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2.3. 고려대 총장 재임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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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에서 연설하는 김준엽
1982년 김상협의 뒤를 이어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여러가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사사건건 맞서다 결국 1985년 강제로 사임하게 된다. 총장이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 CBS 기사 참조.

1)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 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하신 양반이다.[7]

2)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샜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3)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어용 학생회를 없애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준엽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인데 제자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4)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준엽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8]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준엽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쫓겨나고 고려대에서는 총장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 졸업식 당일날은 총장 퇴진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졸업식 한쪽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경찰이 학내에 진주해서 기기묘묘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5년 신학기가 개강하자마자 총장퇴진 반대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계속됐는데, 기숙사 수위의 강아지까지 따라 나섰다고 전해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당시의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경찰에게 쫓기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밀리는 정도였다고(...). '''훗날 김준엽은 이를 자신의 최고 자랑스러운 일로 꼽았다.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나밖에 없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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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에서 총장사임 반대데모
이쯤 되면 그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절에 3년씩이나 총장을 한 게 신기할 정도이다.[9]

2.4. 고려대 총장 퇴임 이후


1987년 대한민국 헌법의 9차 개헌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는 문구를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제헌 헌법 이후로는 3.1 운동이나 4.19 혁명 정도가 언급되었을 뿐 임정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던 것인데, 뒤늦게나마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다시 공인한 것이다.
학자로서의 자존심 또한 꿋꿋히 지킨 분으로서,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 2번의 총리직을 포함한 총 12번의 입각 제의를 거절했다. 폴리페서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참 드문 케이스. 그 거절 이유로 "모든 사람들이 다 입각을 하는데, 나같은 사람도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려대학교 총장이 총리보다 높은 자리인데, 총장 하다가 어떻게 총리가 되나."라고 말하여 고대생들의 애교심, 자부심을 높였다.
특히 노태우 정부의 총리직 제의에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국민들, 특히 젊은 층이 실망할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스승이라는 자가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 며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본인의 회고록인 <장정>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외에도 몇 가지 입각 거절 이유가 더 나와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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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고록 <장정>을 집필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장정>은 일본 징집병 탈출 및 광복군 시절을 다룬 1/2권, 고려대 총장 시절을 다룬 3권, 총장 퇴임 이후(1980년대 후반까지)를 다룬 4권, 중간에 빠졌던 평교수 시절 및 1990년대 이후를 다룬 5권으로 나뉘어 있다.(위 사진에는 5권이 빠져 있다.) 한국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자. 저자 스스로가 직접 겪은 경험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문기사나 여러 자료들을 함께 수록했는데, 후배 사학도를 위해 연구와 교육용으로 쓰일 수 있도록 편집하셨다고 한다. 주례를 부탁받았을 때 자신도 늙었다는 것을 체감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2011년 6월 7일 별세했다. 그냥 링거 맞으러 병원 갔더니 1~2주의 최말기 시한부 폐암이었다고. 그의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 담배를 피고 있는데 그것이 발목을 잡았다. 부음을 알리는 고대신문에 수록된 사진 또한 연초 한 개비를 들고 미소짓는 모습이었다. 생전에 이미 광복군 시절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은 데 이어, 타계 직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고, 장례 후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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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빈소
국립대전현충원 하관식

3. 그 외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데도 고려대학교에서는 학교장을 치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김준엽과 이사회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며, 고인이 별세하기 약 반년 전, 2010년 11월에 김준엽 구순 기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봉정식이 있었을 때 고려대의 전현직 총장을 비롯, 사학과, 한국사학과 등의 각계 교수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당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김준엽 선생의 사학과 제자였던 김정배도 포함되어 있었다.[11]
2012년 6월 고려대에서는 김준엽 전 총장 서거 1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김준엽 선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참조.
생전에 장준하의 생애 관련으로 인터뷰를 많이 받았는데 그는 "나도 중국 땅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내가 뭘 했는지 물어보지 않고 장준하만 물어보더라" 라고 서운해 하기도 했다.
선생은 초년기에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였지만, 광복 이후 현실 문제에 참여하기 보다는 학자 본연의 길에 충실했다. 그래서인지 생전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수립, 발전을 위해 일생을 교육에 투신하여 역사에 남는 길을 선택했고, 이러한 점이 인정받으면서 정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자 스승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명이인으로 K리그에서 뛰고있는 김준엽 선수가 있는데 그의 부친이 김준엽 선생의 일대기를 읽고 깊이 감명 받아 아들의 이름을 똑같이 지었다고 한다. [12]

[1] 이후 게이오대학으로 복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을 하지못했다.[2] 생각해보면 해방 당시 25세였던 청년이 그때까지 이룩한 업적이 없다고 폄하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일제강점기 김준엽의 나이 이전에 세상이 주목할 정도의 업적을 이룬 인물은 흔치 않다.[3] 다만 당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독자적인 기반 없이 장개석중국 국민당 정부에 얹혀 살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 실질적 활동이 없었다는 점은 애석한 사실이다. 이 점은 일본군과 싸우겠다면서 화북으로 떠난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대)의 활동과도 비교되는 대목이다. 당시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조차 해방 이후에는 남북 모두에서 외면당했지만...[4] 1900년대부터 먹고 살기 위해,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한민족이 중국과 만주지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국민당/공산당/일본군/군벌 등 여러 세력이 다투는 혼란 속에서 한민족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5] 92년 수교 이후 최초로 중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훈하기도 하였다.[6] 우리나라 최초의 중어중문학과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1946)이다.[7] 근데 생각해보면 그 직원도 참 무지한 것이, 아니 '''1949년부터'''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신 어른을, 서무과 전체가 못 알아 본 격이 아닌가? [8] 당시 대학에서 관행에 가까웠던 교직원 자녀의 특례 입학을 문제로 삼으면서 '특례로 입학한 학생들을 제적시키든지, 아니면 총장직을 그만두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김준엽은 자신이 총장직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9] 한국 광복군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권위있는 학자가 명문대 총장을 맡고 있으니 독재정권도 어찌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정부가 학생들을 퇴학시키겠다는 명목으로 협박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었다.[10] 노태우 당선 후 그와 2시간 동안 회동에 대한 기사. #[11] 김정배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었는데, 이 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12] 참고로 동생의 이름은 장준하 선생에게서 따와 준하라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