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三淸敎育隊, Samchŏng Camp
1. 개요
2. 상세
3. 목적과 징집 대상
4. 실상
4.1. 실제로 끌려간 사람들
4.2. 설립과 징집 과정
4.4. 후속조치
4.5. 삼청교육대에서의 가혹행위
4.6.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4.6.1. 근거없는 카더라 주장
4.6.2. 법무연수원 2004년 범죄백서
4.6.3. 삼청교육대 이후 조직폭력배 단체의 존재유무
4.7.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4.8. 야만적 탄압의 공범, 언론
5.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
6. 예찬론
7. 관련 법
8. 여담
9. 삼청교육대가 등장하는 창작물
9.1. 삼청교육대를 이용한 농담
10. 관련 자료
10.1. 문헌
10.2. 다큐멘터리
11. 신문 보도자료
11.1. 동아일보 - <추적 삼청교육대>
11.2. 중앙일보 - <실록 80년 서울의 여름>
11.3. 시사저널 <여자 삼청교육대는 끔찍했다>
11.4. 프레시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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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공화국 말인 1980년 8월부터 1981년 1월까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위원장이었던 전두환이 '삼청계획 5호'[1]에 따라 만든 대표적인 불법 인권유린 막장행각이자 과거 대한민국의 굴라크 혹은 정치범 수용소. 근거법령이었던 1980년 계엄포고 제13호가 2018년 12월 28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위헌임이 확인되면서 법적으로 무효이자 헌법과 법치주의를 유린시킨 것으로 최종평가된 국가폭력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01월 27일 47회 버림받은 희생, 삼청교육대 방영분의 제목이 삼청교육대의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해준다.

2. 상세


사회에 존재하는 범죄자인간쓰레기들을 모아놓고 훈련을 시켜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설립했지만, 정작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도 비난했던 북한의 아오지 탄광 정치범수용소와 다를 것 없는 모순이었다. 아래에서도 반복해서 언급될 내용이지만 실제로 전두환 반대파 및 김영삼, 김대중 등의 재야 지지자들도 끌려갔다. 예를 들어서 보안사령관 재직 시절 하나회 축출을 시도했고 전두환의 집권을 반대했던 강창성은 2년 동안 4회 끌려갔다. 그 결과 제6공화국 정부조차 삼청교육대는 강제수용소라고 정식 인정하였다.
5공 시절에 있던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확히는 아직 전두환이 국보위 위원장으로서 제5공화국이 출범하기 전이었으므로[2] 엄밀히는 제4공화국 시기 사건이 맞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이 '박정희, 최규하=제4공화국, 전두환=제5공화국'이기 때문에 편의상 그냥 제5공화국 시기로 취급해도 크게 상관 없기는 하다.
1988년 국회 5공특위에 제출된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실시 부대로는 대한민국 육군 부대들 중 3사단, 26사단, 33사단, 특전사, 여군교육대 등을 위시한 전국 26개 부대였으며, 간혹 교도소에서 실시하기도 했다. 지금도 육군 부대 장소 및 교도소로 쓰고 있어 보안 때문에 쉽게 알 수 없다. 삼청교육대라고 해서 간혹 종로구 삼청동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실은 당시 삼청계획을 주관한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분과위원회의 본진이 삼청동에 소재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수용할 숙소와 훈련장은 삼청교육 실시 2~3달 전부터 준비되었으며, 교육을 담당할 조교들은 육군 여러 부대에서 미리 차출되어 강도 높은 유격훈련을 받았다. 충정훈련과 마찬가지로 그런 과정에서 피교육생에 대한 적대감과 폭력성이 높아졌다.
원래 박정희 군정 시기 비슷한 목적과 방법으로 조직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던 '국토건설단' 계획의 짝퉁이었지만 국토건설단은 그나마 단순노동력이 대단히 유용한 최후진국 시절 강제노동을 시켜서 경제 성장에 써먹기라도 했지, 나름대로 공업화가 진행된 이후에 세워진 삼청교육대는 태생부터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조직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만들어진 거라 자신이나 가족이 끌려갔어도 어디다 항의조차 할 수 없었으며, 민주화 이후에도 상당기간 국가로부터 피해보상조차 제대로 못 받았다.

3. 목적과 징집 대상


  • 현행범 및 재범우려자
  • 불건전 생활 영위자
  • 깡패조폭두목 및 집단 전체.
  • 개전의 정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 도둑 및 강도.
  • 반(反)정부 및 무정부주의자 또는 불온선동자.
  • 사회풍토 문란 및 사회질서 저해사범
  • 전두환 비방자 또는 허위사실 유포자, 5.18 유언비어 유포자 등.
  • 윤락가 여성, 포주, 여인숙 주인 등과 같은 매춘업자, 계주 등.[3]
하지만 이런 기준들은 덮어씌우기 나름이었다.[4]

4. 실상



4.1. 실제로 끌려간 사람들


명목 상 대상자일 뿐 본문에도 몇 번 언급되었지만, 애시당초 당시 삼청계획 5호에 적힌 소탕 대상 중에 '개전의 정 없이 주민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자'로 애매모호하게 명시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징집 대상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끌려간 경우가 있었다. 물론 범죄자가 끌려간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짜 잡아야 할 조폭들은 사전에 끌려간다는 사실을 알고 조용해질 때까지 잠적했고 끌려간 사람들 중 대부분은 도둑질을 하거나 폭력을 저질렀다가 잡힌 잡범이나 양아치들이었다. 물론 이들도 범죄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문신이 있는 그 하나만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다. 끌려간 사람들 중엔 나이 어린 중, 고등학생(만13세~18세)도 있었지만 주로 학교폭력 가해자들이었다. 그리고 폐인, 문제아, 사회부적응자우울증 환자[5], 지적장애 혹은 경계선 지능을 가진 사람들도 고발당하면 딱 봐도 지적능력이 어린아이 수준이거나 중증 정신증이 있는 게 명백한 사람이 아니면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주변에 피해를 많이 끼친다는 이유로 잡아갔다. 또한 어떻게든 할당량을 채우라는 명령으로 인해 연고가 없으면 잡아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끌려간 사람들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있었다. 끌려간 여자들은 삼청교육대 교육요원들의 폭행 뿐만 아니라 강간까지 당했고, 특히 같은 여성인 여군들에게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하기도 했다.
이를 보아 삼청교육대는 자비심이 개미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이 많은 자들 중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도중 군경에 뒷돈을 주고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은 교육대 요원들이 어린이들도 끌고 가서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후술할 2002년 오마이뉴스 기사에 나오는 감호중대 수용 중이던 12살짜리 구두닦이 소년의 사례가 있다.
  • 노숙자, 부랑자를 비롯한 무연고자.
  • 부녀자들 - 황당하게도 할당량을 채우려고 이들을 윤락업소 종사여성으로 몰아 끌고 갔다고 한다.
  •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운동을 한 노동자들 - 상당히 많이 잡혀갔는데, 악의를 품은 고용주들이 이들을 반(反)정부 및 무정부주의자 또는 불온선동자로 몰아서 신고하는 바람에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다.
  • 일용직 노동자들.
  • 학교폭력 가해자[6]
  • 대학생 및 대학원생들 - 대학생 중 전두환 반대파, 전두환을 전면적으로 비방하거나 국보위, 민정당에 반대하고 비방하는 이들은 무조건 끌고갔다. 또 반정부, 반여(反與) 시위에 가담하였어도 무조건 끌려갔다.
  • 전과자들 - 당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이없게 전과기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갱생된 사람들도 끌고 갔다.
  • 무고한 시민들 - 인원수를 채우려고 죄 없는 일반 시민들 중 일부를 끌고 가기도 했었다. 개중에 싸움판이나 도박판을 구경했다가 잡혀가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저녁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다가 잡혀가는 경우도 있었고 길거리에서 노래 불렀다고 끌려온 사례도 있다.
  • 종교인들 - 10.27 법난 피해자 삼보 스님이 대표적이다.
  • 언론인들 - 당시 충주MBC 사장이었던 유호 씨(2007년 작고)가 대표적인 예다.
  • 전두환 반대파 및 재야 지지자들 - 전두환 독재에 반대하고 김영삼, 김대중 등 재야인사를 지지하였던 이들은 1순위로 끌려갔다. 보안사령관 재직 시절 하나회 축출을 시도했고 전두환의 집권을 반대했던 강창성은 2년 동안 4회 끌려갔다.
  • 사회부적응자, 문제아, 지적장애인들 - 심리적으로 우울질 성향의 사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문제아, 관심종자, 그 외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납치해갔다. 정신에 문제가 있을 경우 누가 봐도 정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사람이면 그나마 풀려나기도 했으나. 애매하면 제대로 된 사회인이 되기 싫어서 요령을 피운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잡아갔다.
  • 광주 시민군 포로들 - 5.18 민주화운동 막판 도청에서 항쟁 중에 붙잡힌 시민군들을 신군부는 국가에 대항한 무장폭동 참여자로 분류하였고[7], 지휘부는 징역형 선고. 나머지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이들 중 일부는 삼청교육대에서 풀려난 뒤에도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추가적인 강제노동을 강요당하고 나서야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4.2. 설립과 징집 과정


삼청교육대의 근간인 '삼청계획 5호'는 1980년 7월 10일경부터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장 김만기가 주관하고 실무간사 서완수 등이 기안하였으며, 7월 28일에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의 재가를 받은 후 29일에 계엄사령부에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분과위원회는 '삼청계획'을 입안하여 전반적인 조정·통제업무를 담당하였고, 계엄사령부는 내무부와 법무부를 지휘·감독하여 불량배 검거와 분류심사를 맡았으며, 전후방 각 부대는 피검거자를 수용해 순화교육 및 근로봉사 등을 시행하도록 역할이 부여되었다. 이는 국책에 관한 사항으로서 입안 과정에서 국무회의에 올려야 하나 이는 이행되지 않았다.
계엄포고 제13호가 발동되기 3일 전인 1980년 8월 1일부터 불량배 소탕 작전이 시작되어 11월 27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단속이 벌어져 연인원 80여만명의 군경에 의해 국보위 지침상의 검거대상인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우려자, 사회풍토 문란사범, 사회질서 저해사범’ 등 총 6만 755명이 체포되었다.
검거된 이들은 시·군·구 관할 경찰서 단위에서 검사, 경찰서장이나 경찰 간부, 보안부대 요원, 헌병대 요원, 중앙정보부 직원, 지역 정화위원 등 6~7명으로 구성된 군·경·검 합심제에 의한 등급 분류 심사를 통해 A, B, C, D 4등급으로 분류되었는데 A급은 폭력 전과 2범 이상과 현행범들, B급은 전과자 및 재범의 우려가 있는 사람들, C급은 우발적인 범죄를 저질렀거나 조그마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그리고 D급은 소년범이었다.
재판 후 A급은 군사재판 또는 검찰 인계,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 후 사회복귀, D급은 훈방 조치되었다. 당시 A급으로 분류되어 재판에 회부된 인원은 3,252명이었으며, D급으로 분류되어 훈방 조치된 인원은 1만 7,761명이었다. 나머지 3만 9,742명이 순화교육 대상자인 B, C급으로 분류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에겐 변론 따윈 주어지지 않았으며 B, C급으로 분류된 이들은 1980년 8월 4일부터 1981년 1월 21일까지 전후방 26개 부대에서 11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기간은 4주간을 원칙으로 하되 죄질 및 개과천선 가능성에 따라 2주간 훈련 후에 조기 퇴소를 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전체 피검자의 1/3 이상이 무고한 일반인이었다. 범죄자와 그저 전과자, 무직자, 부랑자라는 이유로 끌려간 자들도 있고, 제대로 된 직장과 집이 있던 가장이 단지 술을 먹고 취해서 누워 있다는 이유로 노숙자라 판단하여 끌려가거나 귀가하던 길에 이유없이 끌려가기도 했다. 어이없게도 퇴근길에 버스를 기다리다가 할당량에 눈이 먼 형사들에 의해 연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 통금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끌려가기도 했고 불심검문에서 신분증을 집에 놔두고 나왔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경찰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끌려간 경우도 있고, 문신이나 장발을 했다는 이유로 끌려가기도 했다. 전두환 측근들 눈에 띄여 체포된 사람들[8]도 많았다. 또한 전두환에 대해서 대머리 새끼, 문어 대가리라고 하거나 단순한 욕설이나 비방, 또는 5.18 관련 비판을 하면 잡혀가게 되었으며 반정부 주동자나 시위주동자,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생포된 시민군 포로들도 삼청교육대로 징집되었다.
심지어 그저 아는 사람들끼리 사적으로 관계가 틀어졌는데 한쪽이 상대를 허위로 '불효자'나 '대통령을 욕했다'라고 고발해서 잡혀가는 일도 결코 드물지 않았다. 간질 환자가 길을 가다 발작이 일어났는데 마약 중독자로 몰아 잡아간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교도소 정문 앞에서 출소자를 잡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출소를 앞둔 재소자를 유치장 안에서 잡아가기도 했다. 심지어는 장애인까지 대상자에 포함되었는데 여기에는 지적장애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985년에 구타 후유증으로 사망한 지적장애인(내용상으로는 정신지체 장애인)도 있고, 길을 지나가다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적이 있는 지적장애인도 있다.
중고등학생들도 포함되었다. 당시 교장을 했던 몇몇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 교육청으로부터 "이번에 이 구역에서 몇 명을 보내기로 했으니 당신네 학교에서 몇 명을 차출하여 보내시오"와 비슷한 내용의 공문이 왔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정화시키지 못하는 문제학생을 군에서 정화시켜줄 테니 보내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끌려간 학생 대부분은 문제학생이긴 했다. 단 부모가 신경 안 쓰거나 원래 없는 학생들이 더 많이 끌려갔으며, 1981년 당시 감호중대 복무 병사의 말에 따르면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12살 구두닦이 소년도 있었다.
이에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당시 남대전고 1학년이었던 안희정은 학도호국단 1학년 연대장 시절에 학교로부터 문제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교장에게 "문제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냅니까. 여기가 학교입니까?"라고 항의하다 제적처분을 받기도 했다.
강창성씨는 1973년에 하나회의 후원자였던 윤필용 장군의 쿠데타 혐의를 조사하면서, 당시 비밀결사였던 하나회를 감지, 이를 뿌리뽑으려다가 하나회 회장인 전두환을 총애하던 박정희의 눈밖에 나서 해임되었으나 이때 권익현 등의 하나회 회원 일부는 여기에 휘말려서 예편당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지리산에서 탱크 병단을 이끌었던 황학소의 경우 백선엽과의 인터뷰에서 전향 빨치산이라는 이유로 노구에 삼청교육대에서 견딜 수 없이 고생했다고 토로했다. 유호 씨의 경우 충주MBC 사장 시절 계엄당국의 보도검열을 거부하고 언론인 정화대상자 해직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잡혀 '524번'이란 수번을 단 채 3주간 훈련을 받고 첩을 두었다는 누명까지 써야 했다.
거기에 1970년대 말에 파업을 이끌었던 원풍산업(원풍모방, 현 킹텍스), 반도상사, 대한전선, 콘트롤데이타, 청계피복 등의 노조 지도자들을 포함한 191명이 강제정화를 당했는데, 이들 중 70여 명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고문수사를 당했으며 19명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80년의 한국은 제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여유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엄연한 중진국으로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1인당 GDP가 5천 달러 정도는 되는 중위권 개도국이고 국민들 생활수준이 현재의 중국 중산층과 농민공 사이 정도는 됐기 때문에[9] 600~1,000달러 안팎의 후진국이던 1950~60년대와 달리 사회 및 경제가 단순무식한 통치방식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스케일이 커질 대로 커져서 삼청교육대는 경제적 효과가 전혀 없었다. 당장 신군부 본인들도 이들을 노역에 투입하지 못하고 부대에서 굴리기만 한 것이 그 증거다. 국토건설단은 노역에 의한 성과라도 나왔지만 삼청교육대는 그저 정권 정당성 약화+교육(을 빙자한 학대)비용+대규모 피해자 발생으로 인한 국가 및 사회적 비용 등 낭비만 심각했다.
게다가 신군부가 누명을 씌워서라도 잡아들여 시각상으론 엄청난 숫자를 잡아들인 실적을 올린 것마냥 상부에 보여주기식 집행을 했는데 별 시덥잖은 이유로 잡혀온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며 지역별로 할당량을 채우라는 교지도 당연히 내려왔다. 학교별로 문제아들을 몇 명 집어서 1차 순화교육식으로 간 경우도 있었는데 뮤지컬 배우 남경주가 이런 케이스로 다녀왔다.[10]
삼청교육대가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서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영등포교도소에서 순화교육을 하루 4시간씩 받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증언과, 보도검열 거부하고 전두환의 노여움을 사 3주간 훈련을 받은 유호 충주MBC 사장의 사례, 어떤 아줌마가 곗돈 문제로 15일간 교육을 받고 난 뒤 또 가는 것이 두려워 채무인들의 빚을 탕감해 준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11]를 들 수 있다. 이렇듯 삼청교육대 징집 대상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끌려갔다.
심지어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국내 거주 화교들도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연행되어 징집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당시는 아직까지는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대만과 수교중이었고 관계 역시 우방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12] 중화민국 정부간 외교마찰까지 벌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당시 장징궈의 중화민국 정부는 리처드 닉슨핑퐁 외교이후 점점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서방 1세계 국가가 많아지면서 서방 수교국이 하나라도 더 아쉬운 상황이었던 터라 해외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국민 범죄자 보호를 이유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아시아 내 최대 우방국을 잃어야 할 이유가 없었고, 장징궈 내각 역시 대만 계엄령을 실시하며 국민들을 탄압하던 독재 정권인지라 한국내 독재정권이 실시하는 삼청교육대에 간섭하고 신경쓸 처지가 아니었다.
억울하게 끌려간 화교 피해자들은 2004년 삼청교육대 특별법 시행 후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신청했지만 특별법 발의 당시 구제 대상을 외국인이 아닌 한국 시민으로 한정하면서 보상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소수의 재일교포들도 끌려갔다. 이들은 1960~70년대 한국에 다시 정착한 이들로 언어소통이 잘 안 돼서 경찰이나 시민들한테 오해를 사 끌려가기도 했다.[13]
부산에서는 삼청교육대 할당 인원을 채우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어느 부서에 할당 인원을 다 채우지 않은 어느 담당자가 있었다. 그 부서가 전부 그랬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동네 불량배 1명은 자신은 아무 댓가, 부탁도 없었는데도 삼청교육대로 보내지를 않아서 그 담당자에게 몇 년 간에 걸쳐 고맙다고 자주 안부 인사를 건넸다는 이야기도 있다.

4.3. 보호감호 제도


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조.

4.4. 후속조치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료증까지 줬는데, 원래 의도는 새사람이 됐으니 이제 잘 대해 주라는 뜻이겠지만 정작 사회에서 삼청교육 수료를 마친 이들에게는 '삼청교육 이수자'라는 낙인이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즉 빨간줄만 안 그인 전과자 취급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배부되었던 수료증 내용을 보면, "본 수료증은 항시 휴대하여야 한다. 본 교육 수료자가 재범시는 엄중 처단된다." 라고 쓰여 있었고, 1990년대 초반까지 주민등록 등/초본 상단에도 '삼청교육 순화교육 이수자'란 문구까지 나왔다.
후술할 2002년 <시사저널> 기사에 나온 사례처럼 경찰이 삼청교육 대상자를 연행한 후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나쁜 점만 얘기하도록 강요한 경우가 있었고, 한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뒤돌아선 뒤 "삼청교육대 끌려갔다 온 어쩌구"라는 말을 공공연히 들었다고 하며, 교육 이수 후 받아야 할 돈을 받으러 찾아갔는데,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러니까 삼청교육대 끌려가지" 라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공권력 차원에서도 사실상 전과자 대접을 했다. 원래 국보위 측에서는 순화교육만 마치면 전과 기록을 지워주고 직업 알선 등 사회복귀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퇴소 후에는 취업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동네에서 살인, 절도 등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관할 경찰서에서 방문해 왔으며, 오늘 어디에 갔으며,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를 캐묻고, 확인차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물어보고 다니는 바람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는 증언도 있다. 각 경찰과 동사무소에는 상부에서 "제대로 정화가 되었는지, 다시 나쁜짓은 안 하는지 퇴소자의 사후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공문서가 내려왔으며, 특히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삼청교육 이수자들의 기록을 전산화시켜 1982년 1월 15일부터 1988년 6월 28일까지 이를 범죄수사에 활용하는 등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감시가 이어졌고, 또 지자체 등 각 행정기관에서는 내무부의 지시에 의하여 동·면사무소 별로 순화교육 이수자 사후관리 기록카드를 작성하고 생활환경을 관찰하였으며, 이사를 갈 시 해당 동·면사무소에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퇴소자를 관리하였다.
또 고3때 술집에서 1,500원 외상값[14]을 안 갚았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다녀온 사람은 이로 인해 음독 자살했다.

4.5. 삼청교육대에서의 가혹행위


[image]

1. 선동 및 도망치는 자, 반항자는 사살한다.

2. 수련생은 교육대 요원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3. 음주 및 흡연은 금한다.

4. 신문, 잡지 구독 및 라디오, 티브이 시청을 금한다.

5. 허가되지 않은 면회, 외출이나 외인(외부인) 접촉을 금한다.

6. 동료간의 장난행위 및 시비, 기간 장병에 대한 반항자는 엄단한다.

7. 집단 행위를 금한다.

당시 삼청교육대 생활수칙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

알맞게 먹고 헛되게 버리지 말자!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

당시 모 삼청교육 실시 부대의 식사구호[15]

※ 삼청교육대 관련 증언 : 보기 / 접기

“이 박달봉은 전두환 대통령께서 우리에게 하사하신 봉이다. 이 봉으로 너희들을 때려서 1년~2년 안에 골병들어서 죽게 하라 했다.”

피해자 이연수 씨의 증언

“눈이 쌓인 연병장 위에 소주병을 깨 유리 조각을 뿌리고는 팬티 바람으로 눈 위에서 구르게 하는데, 단순한 포복이 아니에요. 낫으로 가지를 5센티 정도 쳐낸 참나무 몽둥이로, 알몸으로 기는 우리의 가슴이나 잔등, 허벅지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거예요. 그러면 꽁꽁 언 몸이 마치 장작 빠개지듯이 빠개져요. 서너 시간 지나면 연병장은 완전히 피바다로 변해버리는 거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27사단에서 근로봉사를 했던 피해자 유영근 씨의 증언

"새벽 6시부터 구보하고 포복 훈련을 했다.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기합을 받았다. 행동이 늦으면 고무 양동이에 물을 퍼다가 머리를 집어넣었고, 반항하면 몽둥이로 때리고 여군 여러 명이 몰려와 짓밟는 것을 보았다."

충남 서산에 사는 피해자 고 아무개의 증언

“나를 직싸게 두들겨 패면서도 하는 얘기가 뭐냐면은, 너 하나 죽이고도 양면지 석장이면 끝나[28]

! 양면지 있지요? 그 편지 쓰는 종이!”

근로봉사 후 보호감호 2년를 겪은 피해자 김기태 씨의 증언

“(입소자에게)너 죽여봐야, 송판때기 6000원[29]

짜리 하나 사면 대패밥도 안 밀고 한 거, 6000원짜리 하나 사 가지고 못질 해가지고, 집으로 보내버리고 탁송 해버리고, 사고내용은 '훈련 도중 병이 나서 죽었음' 하면 끝이라.......”

익명의 순화교육 피해자 증언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죽으니까. 내가 오죽하면 구두를 핥으라고 해서 구두를 핥았어요. 살려고……. 내가 그놈 명찰을 다 봐놓고도, 찾았더니 없어…….”

3사단 순화교육 피해자 최상월 씨의 증언

“국보위, 보안부대, 헌병대, 부대 참모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두들겨 패면 그쪽에서는 희희낙락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죄책감이라는 것은 없어지거든요.”

당시 부산 2관구 교관 양모 씨의 증언,

"입소 첫날이면 조교들은 공포심을 부각시키기 위해, 흔히 시범 케이스를 몇 명 지목해서 집중적으로 가혹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때 걸린 사람은 양손을 밧줄로 묶고, 차량에 연결해서 연병장을 돌게 했습니다. 차의 속도가 빨라지면 일어서려다 엎어지거든요. 그러면 안면까지 다 나가요. 그런데 일어나지 못할 속력이었으니깐 계속 넘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면 옷이고 뭐고 다 해지죠. 아무것도 없는 산을 깎은 바닥인데.."

당시 삼청교육대 조교의 증언

“발길로, 발길로 차가지고서는 창자가 터져 죽었어. 터져서 그 물이 코로 질질질 나오는걸 가지고 "지금 여기 삼청교육대에 들어와서 너무 잘 먹는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이 중류급 인사가 먹고있는 음식을 먹고있다. 그래서 너무 잘먹어가지고 배 터져 죽었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내 눈에서 쌍불이 나오더라니까요.”

근로봉사 후 보호감호 2년을 겪은 김기태 씨의 증언


근로봉사 후 보호감호 2년을 겪은 김기태 씨의 증언}}}

당시의 가혹행위는 가히 북한에 뺨칠 정도로 악명높았다. 위의 증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가혹행위는 매우 잔혹했으며 사람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순화교육 시 각 교육장에 소총을 든 헌병들을 배치하여 엄중한 감시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주로 고된 육체훈련으로 이루어졌다. 교육과정에서는 구타와 얼차려가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지시불이행자나 태도불량자 등은 별도로 설치된 특수교육대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심지어 삼청교육은 군부대만이 아니라 1980년 8월 22일부터 법무부에 의해 전국의 교도소 내에서도 '재소자 특별 순화교육'이란 이름으로 모든 재소자들에게 실시되었다. 당시 A급으로 분류된 범죄자들은 재판 이후 교도소행이었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체포된 사람들을 등급을 나눠 A 등급은 감옥으로 보내고 D 등급의 사람들은 훈방조치 되었으나, B, C 등급을 받은 사람들은 전국 25개 부대에 분산 수용돼 4주간의 순화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B, C 등급을 받은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타서 삼청교육대로 향했는데 증언에 의하면 처음 버스에 올랐을 때는 군경이 예의를 지켰으나, 딱 삼청교육대에 들어가자 조교들이 욕설을 사용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시범 케이스로 몇명을 집중적으로 고문하고 구타했다. 피해자들은 조교들이 첫날 도착하자마자 개머리판으로 죽도록 패면서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며 폭력을 가했으며 위에 증언처럼 몇명을 골라서 시범을 보여준다며 사람을 차에 연결한 뒤 연병장을 빙빙 도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이때 조교들에게는 공병대에서 사용하는 참나무로 만든, 일명 '빳다'라고 하는 단단한 곡괭이 자루가 지급되었는데, 조교에 증언에 따르면 "악질적인 불량배가 오니깐 처음에 혹독하게 다루지 않으면, 우리가 잡힐 수 있다면서 말 안 들으면 무조건 '빳다'로 후리라고 가르쳤어요."고 증언했다. 물론 조교들에게는 "나는 수련생들에게 구타·욕설·기합 등으로 비인간적인 모독 행위를 하지 않는다."라는 형식적인 규율이 존재했지만, 그 규율은 있으나 마나한 규율이였다
입소 이후에는 여러 훈련을 실시했는데 목봉체조는 기본이고, 유격훈련 교육장에서 PT체조, 똥통에 빠졌다가 나오기, 깨진 유리병 밑에서 낮은 포복 실시 등등. 매우 잔인하고 가혹한 훈련과 고문을 실시했으며 조교들은 여자라고 특별히 봐주지 않았다. 실제로 여자들 역시 야외에서 천막생활을 하며 가혹한 생활을 해야했다. 물론 내무 생활이라고 편할 수는 없었다. 매우 억압된 환경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점호를 취했고, 점호시간에는 으레 욕설과 구타, 원산폭격, 한강철교, 쥐잡기[16], 볼펜 위에 손가락으로 깍지 끼고 1시간 동안 엎드려 뻗히기 등의 얼차려가 반복됐고 자기 전에는 반성문도 써야 했다.[17] 이런 생활이 매일 반복되었으니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교나 교관들은 크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너 하나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고 입소자들에게 협박을 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혹한 환경에 탈출을 감행하다 총살당한 사람도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삼청교육대에서 사망한 사람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임근실이다. 1980년 12월 15일 28사단에서 사망한 당시 31세였던 임근실은 신체적으로 매우 허약한 사람이였고 이 때문에 삼청교육대의 가혹한 생활을 하던 중 배고픔을 참지 못해 땅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었다는 이유로 조교들한테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서 사망했다.[18] 그의 죽음은 은폐되었다가 1988년 열린 청문회 과정의 증언을 통해 드러났고 이로 인해 삼청교육대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또한 삼청교육대 교육을 담당했던 조교 역시 가족이 없고 때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구타했다고 하며 현재도 수많은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에서 자신이 인권유린을 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가담했던 조교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삼청교육 시행 당시 1사단에서 조교로 복무했던 정모씨의 증언에 의하면 순화교육 시행 2~3달 전부터 강도 높은 유격훈련과 동시에 수용자들을 제압할 몽둥이를 미리 깎아 만들었고, 게다가 지침에서 수용자를 범법자와 동일시했으며 그들에게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이런 식으로 조교들에게는 제압하지 못하면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주입했다.
막상 처음 맞이하는 수용자 중에 자신의 형뻘, 아버지뻘, 심지어는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들까지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말을 쉽게 놓지 못한 한 조교는 반말을 안 했다는 이유로 선임들에게 구타를 당해 척추뼈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 이 때문인지 조교들은 필요 이상으로 더욱 가혹하게 수용자들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처음, 이런 환경에서 가장 쉬운길은 반말하고 때리는 길이었을 것이다. 조교들에게도 상부(당시 정권 및 군사당국)의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졌다. 수용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온화한 모습을 보이거나 수용자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것을 거부했다가는 그 뒤의 일은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항명으로 구속 및 처벌된 군인이라면 군복을 벗어야 함은 물론,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든 남한산성 교도소로 끌려가든 남산으로 끌려가든 온갖 신체적 고초가 따르게 된다. 조교들도 군인인 이상 상명하복의 의무가 있다. 삼청교육대 조교로서 하달받은 명령을 거부한 조교의 가족들에게도 위협이 가해질 것임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까딱하면 지금 눈앞에서 맞고 있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조교들도 이게 옳지 않은 일인 줄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나, 당시 정권의 폭압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조교들도 그저 민초에 불과하였기에, 책임소재를 묻고자 한다면 당시 정권의 높으신 분들에게 묻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순화교육 이후 근로봉사나 보호감호 과정에서도 사망자가 나온 바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1984년에 청송제1보호감호소에서 사망한 박영두씨(당시 30세). 그는 1980년에 전과 3범이라는 이유로 경남 통영의 비진도 해수욕장에서 휴가 도중 계엄군에 의해 충무경찰서로 연행되어 삼청교육대에서 4주동안 지옥훈련을 받고 근로봉사자로 구분되어 강원도 화천의 육군 제27사단 77연대 4대대에서 근로봉사 도중인 1981년 10월 1일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감호생들과 함께 비인간적인 처우에 항의하여 무장봉기를 이끌다 결국 군사재판에서 군용물자 손괴 및 특수절도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경북북부교도소(구. 청송제1보호감호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도중인 1983년 11월에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감호소 내 재소자들의 열악한 처우에 항의하다가 교도관들에 의해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독방에 수감되다 1984년 10월 4일에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에 박영두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는 식으로 교도소 측이 은폐해오다가 민주화 이후인 1988년에 한 재소자가 칫솔을 삼켜가며 공개한 편지[19]로 인해 박영두 사망의 진실이 알려졌으며, 이후 2001년부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박영두는 2006년에야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참고.

4.6.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4.6.1. 근거없는 카더라 주장


삼청교육대 덕분에 일본과 다르게 치외법권이 사라졌으며 사회정화 및 순화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해서 조직폭력배 세력의 대형화, 고착화를 막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카더라. 만약 그렇다면 그걸 증명한 통계나 자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것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 일본보다 치안이 좋아졌다면 그 둘을 비교하는 통계자료라도 제시해야하는데 정작 그런 자료도 제시하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런 주장을 하는 측이 증거란 걸 제시했는데 그 증거란 게 나무위키 서술이다.# 심지어 이 주장에는 통계라는 증거조차 없다. 그 주장을 보면 "전두환 재임기간동안 범죄율은 앞뒤 정권들과 비교해서 별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삼청교육대가 "조직폭력배 세력의 대형화, 고착화를 막은 결정적인 계기"라고 주장하는데 통계증거조차 없는데 나무위키 유저가 그걸 대체 어떻게 안단말인가?

4.6.2. 법무연수원 2004년 범죄백서


법무연수원에서 발간한 범죄백서에 근거하면 살인, 강도, 강간, 방화와 같은 4대 흉악 강력범죄의 발생건수는 1979년(전두환이 집권 전)에는 5755건. 전두환의 마지막 임기년도인 1987년에는 9342건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4대 흉악 강력범죄의 연평균 증가율은 6.24%다.
5공 정권 시기에는 이전 정권 때처럼 경찰과 검찰이 민생치안보다 집회, 시위, 파업 등 시국사건 처리에 열중했던 터라 통계상 줄어든 범죄율이 없다.

4.6.3. 삼청교육대 이후 조직폭력배 단체의 존재유무


불량 조직이 지역마다 거대 규모로 존재했다. 언론 기사에 의하면 지속적으로 검거하며, 사회적으로 관심을 이끌었다. 1984년여성 500여명 인신매매 조직 적발#, 1987년 3월 인신매매 조직 30개파 검거#, 1987년 10월 인신매매 조직 15개파검거# 1988년 인신매매 조직 21개파 검거# 하였다.
전두환 정부의 기간에도, 특히 정권 말기부터 대형 범죄 조직들을 적극적으로 체포한 보도가 있다. 심지어 노태우 정부 들어서는 아예 그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범죄가 늘어나기 때문에 반짝 잡아다가 굴리는 쇼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50년 ~ 80년대 폭발적인 인구증가율은 감안해서 봐야한다는 반론도 존재하니 범죄 통계에 대한 해석은 기준이 일정해야한다. 20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절도, 사기, 마약 문제를 현대의 무능한 경찰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고 범죄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

4.7.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가서 사망한 사람들은 1988년 국방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54명이다. 현장에서 사고 등으로 사망한 사람만 54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 2,678명이라고 발표.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이 숫자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시각이 대부분인데, 부산2관구 소속이던 양 모 교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의 부대에서만 3명이 자살을 하였고[20] 경기 파주 1사단에서 복무했던 정 모 조교는 자신이 속한 연대에서 교육기간 도합 1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21] 따라서 실제 사망자 수는 현장 및 후유증 합쳐 1천 명이 넘지 않느냐는 말도 있는데,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것이 군대처럼 팔팔한 청년들만 잡아간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마구 잡아들였기에 어린 학생과 여성, 노숙자, 장애인과 나이가 많은 중장년층도 잡혀가서 신체 건강한 청년들도 견디기 힘든 훈련과 구타를 당했는데, 사망자가 현장만이라지만 54명밖에 안 될 가능성은 없다.
다만 잔혹행위를 심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기는 하다. 2002년 10월 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삼청교육대 실시 당시 검거된 인원이 60,755명, 훈련을 받은 사람이 40,347명에 이르며, 이 중 삼청교육 실시 과정 및 이후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339명이었고 나중에 신체장애를 입은 부상자는 2,700여명이었다. 그 외 장애를 입지 않은 부상자의 수는 불명이지만 적어도 만 명은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그마치 4만여 명에 달하는 삼청교육대 이수자들의 명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몇 명이 들어갔다는 기록은 있는데 몇 명이 나왔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온 사람이 못나온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긴 하겠지만 기록이 없으니 얼마나 죽었는지를 모르는 것.
또한 교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무연고자거나 부랑아 같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죽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 교관의 말에 따르면, 일과가 종료된 후 교관 회의를 할때, 상관이 "너희는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군인 정신에 따라서 하라. 그러다가 죽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삼청교육대 문제에서 이런 케이스는 적어도 주민등록증으로 대조 가능한 경우이다. 그러나 주민등록증 자체가 없는 사람이나 주민등록은 있으나 확인이 어려운 노숙자등의 경우는 파악이 불분명한데, 이런 경우는 사망자에서 제외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심지어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북파공작원 교육이 실시됐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시체를 인근 강에 유기하다가 주민들의 항의가 들어오자 소각장을 세워서 시체를 화장했다는 증언도 있어서 실제로는 현장 사망자만 수백명은 되는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공식적으로 삼청교육에 끌려간 사람만 4만여 명에 가깝고, 20~40대 초반 조폭만 끌고 가서 굴려도 사망자가 수십은 나올 정도로 가혹하게 다룬 판에 중년층이나 학생들도 끌려갔고, 거의 반 죽여 놓는 수준의 가혹행위가 이뤄졌으니 학살이 목적이 아니고 4주 정도의 학대만 이뤄졌다 해도 사망자 수백명은 충분히 가능한 숫자다.
후유증으로 인한 피해는 더 심각한데, 삼청교육대에 다녀온 김정웅씨는 출소 5년만에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부인인 박춘화씨의 증언에 따르면, 술을 마시고 넓은 고무통에 물을 받아놓고 자기 아들 머리를 집어넣으면서 "내가 끌려가서 이런것도 당하고 왔는데 너 이새끼는 이것도 못하냐"며 아이를 학대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술이 깬 후에는 자기가 자기 아들을 학대했다는 자책감에 서럽게 울더라고 한다.
구타로 방광이 파열되어 퇴소 이후 20여년간 주머니를 차고 살고 계신 분도 있다.
희귀난치병인 루게릭병 발병자를 키운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주부 한 명은 이웃의 밀고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아들은 정신분열증에 걸려 현재까지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한다. 퇴소한 어머니는 정작 별 일이 없어 보이지만 자신이 죽은 뒤 아들의 인생 문제를 걱정한다고 한다.

4.8. 야만적 탄압의 공범, 언론


1980년대에 그려진 교육용 만화 중에는 도박과 술에 쩔어 살던 남자가 순화교육 받고 새사람되어 새마을역군이 되는 얘기도 있었다. 더욱이 국군홍보 프로그램인 배달의 기수에서는 건달출신 수용자가 새사람이 되어 나왔다며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삼청교육대가 어떤 조직이었는지를 입증해 줬고 당시 언론사에서도 '현장르포'라고 하여 미화 기사를 수없이 써서 신문에 내고 방송해댔다. 1980년 8월 13일을 전후해 각 신문에 실린 당시 삼청교육 현장르포 기사들은 다음과 같았다.
  • 경향신문8월 13일자 보도에서 "이곳에 들어온 후 뉘우침의 눈물이 값비싼 것임을 느꼈다. 악으로 얼룩진 과거를 씻고 새 사람이 되어 부모에 효도하련다"는 요지의 기사를 작성했다.
  • 중앙일보같은 날 기사에서 "낮에는 고행하는 승려처럼 육체적인 훈련을 받고 밤에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정말 다행이라고 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썼다.
  • 동아일보 역시 "도시의 뒷골목에서 선량한 시민들을 못살게 군 흔적을 온몸의 문신과 칼자국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참회의 눈물과 땀방울에서 이같은 흉터는 조금씩 씻겨져나가는 것 같다. (중략) 특히 4백여 명의 지도요원들이 자신들의 개과천선을 돕고 있는 데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면서"라는 식으로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왜곡해왔다.
  • 거기에 동아일보는 계엄포고 제13호가 발동된 다음날인 8월 5일자 사설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통해 "사실 이러한 조치는 온 국민이 극구 바라는 바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면서 "이번 국보위의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온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다시 한 번 강조해 마지않는다."라고 주장했다.
그 외의 사례들은 오마이뉴스 2002년 10월 9일자 기사를 참고할 것.
한술 더 떠 방송은 신문들이 한 짓을 똑같이 반복해 여론조작을 일삼았는데, 방송의 경우 신문에 비해 조작하기 어려운 게 딱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인터뷰였다. 입소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삼청교육을 정당화했지만 자신의 심경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강요된 대사를 외우고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듯 인터뷰 내용은 조작할 수 있어도 사람의 본성에 따라 떨리는 표정 같은 건 절대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범죄 저지를 놈들은 삼청교육대가 있건 말건 신경 안쓰니 범죄 예방 효과도 전무했다. 당장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이 벌어진 해가 삼청교육이 한창이던 때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신문과 방송이 합세해 폭포수처럼 퍼부어 대는 여론조작 속에서 이에 치밀하게 따져 볼 시청자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있다고 쳐도 범죄자들이 가혹하게 다뤄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무시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프로파간다에 영향받은 자들도 있는지 전사모에선 한국에 이바지한다는 식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현실은 물론 달랐다. 진짜 근육질 조폭들에게 삼청교육대 생활은 힘들긴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영근 등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봉체조하는 조폭들은 오히려 언론에 클로즈업되어 이미지 조작에 이용됐으며, 이들에겐 담배 한 개비씩 주어지기도 했다.
오히려 대다수의 일반인이나 잡범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공포나 분노만 얻어서 돌아가는 게 대다수였고 심한 경우 아예 멀쩡하던 사람이 정신질환을 얻어 오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일[22]로, 혹은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갔던 사람들 중에는 멀쩡한 몸으로 돌아오고도 억울함을 참지 못해 미쳐버린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시인 이승하가 쓴 <머릿속에는 온통 그것뿐>에 따르면 무의식적으로 수련생 수칙과 지시사항, 구호 등을 여전히 외우는 경우도 있다.

5.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


1988년 11월 26일에 노태우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공직자 해직, 삼청교육대 사건 등에 대해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담화 이후 당시 국방부 장관 오자복은 삼청교육과 관련해 2,026명이 보상을 신청했다고 발표했다. 1989년까지 피해 신고자 3,221명 중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무려 2백명에 달했으며, 나머지 2,800명은 장애자 또는 상해자들로 신고되었다.
그러나 노태우가 특별담화에서 보장한 보상과 명예회복은 전부 거짓이었다. 예산 부족을 핑계로 보상을 해주지 못하겠다고 말한 뒤, 2004년 '삼청교육대 피해보상법'이 제정되기까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후술할 2002년 <시사저널> 기사에서 언급된 피해자인 주부 박씨의 사례처럼 노태우의 보상금 약속만 믿고 피해신고를 했다가 오히려 삼청교육을 받은 사실이 사돈의 팔촌까지 알려져 인생이 파탄난 경우도 있었고, 인우보증을 서준 사람까지 경찰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피해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회, 시위, 청원과 탄원을 벌였고 진상조사를 통해 백서도 만들고 증언집을 내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에 동의한 몇몇 국회의원들은 제 13~15대 국회에 걸쳐 삼청교육 피해배상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지만, 상임위의 심의조차 받지 못한 채 법안은 늘 자동 폐기됐다. 심지어 여러 차례에 걸쳐 삼청교육대 입안과 실시에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고소와 배상 요구 소송을 사법부에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삼청교육피해자동지회장 이택승[23]은 1989년 12월에 최규하, 전두환, 이희성, 김만기(당시 사회정화분과위원장) 등을 불법체포,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지만, 3년 뒤인 1992년 12월 서울지검으로부터 공소시효 만료라고 판결되었다. 이후 이씨는 여러번 항고, 재항고, 재정신청까지 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4월에 법원은 똑같은 이유로 기각했으며 대법원에서조차 이를 되풀이했다.
이씨는 1995년에 검찰에 고소장을 넣어도 허사였고, 이후 헌법재판소헌법소원을 하였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고려할 때 사건의 공소시효는 1995년 7월 18일에 완성된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95헌마365). 이 외에 1991년 12월에도 피해자 500여명이 손해배상을 집단으로 요구하며 소송까지 했으나 같은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리고 1996년 12월에 대법원은 이러한 피해 보상에 대해 '손해배상 시효 만료'를 이유로 패소 판결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1년 7월에 대법원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들에게 국가가 피해배상을 약속하고도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며 약속위반에 따른 정신적 피해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하여 개인당 1천만 원에서 1천 3백만 원의 피해보상금을 받았다. 이어 10월에 삼청교육대 인권운동연합(회장 전영순)을 필두로 삼청교육 피해자들이 정부가 삼청교육의 종료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소할 때 발급된 수료증에 따르면 지금까지 삼청교육이 진행 중이며 고소 시효는 적용될 수 없다"며 집단으로 소송을 했으나 2002년 3월 13일에 서울지검 최창호 검사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 "이미 불기소처분이 된 사건에 대해 새로운 증거 없이 고소/고발하는 경우에 해당된다."며 이를 각하시켰다.
그해 9월 30일 연희동 전두환 사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삼청교육대 인권실천연합회장 전영순은 "정부는 예산타령만 하지 말고 전두환과 노태우 재산을 환수해 그 돈으로 피해를 보상하라"며 피맺힌 절규를 토해냈다. 2003년 1월 23일에는 삼청교육대 인권실천연합회가 한국은행 본점 앞에서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던 중에 삼청교육대에서 학대와 고문으로 장애인이 된 양동학 씨가 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 검찰, 법원, 헌법재판소 모두 '시효의 노예'가 되어 피해자들의 주장을 전부 배척했다. 이 시기에 여러 차례 배상소송을 진행해 왔으나 최종 승소까지 간 사례는 없다. 특히 2003년 11월 28일에 대법원은 지난 7월에 삼청교육대 피해자 전모씨가 노태우 대통령의 담화만 믿은 데에 따른 신뢰 상실에 근거해 국가가 5백만원 가량의 위자료를 지급토록 한 원심을 파기환송시켜 사법적 구제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2002다72156). 당시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하고 이에 따라 국방부장관이 삼청교육 관련 피해자들에게 그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공고하고 피해신고까지 받음으로써, 상대방은 그 약속이 이행될 것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가지게 되고, 이러한 신뢰는 단순한 사실상의 기대를 넘어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이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나, 삼청교육으로 인한 피해와 관련하여 노태우 대통령이 1988. 11. 26. 발표한 담화는 그 발표 경위와 취지 및 내용 등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그 담화를 발표한 대통령의 시정방침에 지나지 아니하고, 한편, 후임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의 시정방침을 그대로 승계하여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고 볼 수도 없으므로 노태우 대통령이 위 담화에 따른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여 보상관련 정부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지도 않은 채 방치하다가 1993. 2. 24 퇴임한 이상, 그 때 삼청교육 피해자들의 신뢰는 상실되어 손해배상청구권이 발생하였다고 할 것이고, 그 후 일부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매 회기마다 보상관련 법률안이 발의되어 그 법안이 국회에 계속되다가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된바 있다거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직자회의에서 보상입법을 지시하여 그것이 언론에 보도된바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은 위 손해배상청구권의 발생에 영향이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신뢰상실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된 다음날인 1993. 2. 25.부터 기산하여 5년이 경과하면 시효로 소멸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이 와중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등과 같이 여러 종류의 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고려하여 모든 법적 수단을 완전히 차단당한 삼청교육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특별법을 제정해 삼청교육 전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및 유가족들에 대한 구제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을 판단하고, 2003년 3월 10일에 박관용 국회의장과 조영길 국방부 장관에게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압력,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권고에 따라 2003년 12월 29일,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16대 국회에서 재적의원 206명 중 반대 2표, 기권 11표, 찬성 193표로 통과되었고, 2004년 1월 29일에 노무현 대통령의 결재로 제정되어 동년 7월 30일에 시행되었다.
이후 국방부는 '삼청교육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를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해 2004년 8월부터 2005년 7월 30일까지 피해자 또는 유족들로부터 보상신청을 받았다. 그 후 국방부는 과거사 진상규명의 바람과 함께 스스로 '삼청교육 피해보상 지원단'을 국방부 산하에 설치했다. 그러나 그 '보상법'은 사망자나 실종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실제 고통받아 온 생존자들이 보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누더기 법'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왔고, 생존자들은 자신이 입은 상처임을 입증하기 위해 20여년 전 봉급 명세서 등을 준비하여 이를 제출해야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또 생겼다.

2018년 12월 28일, 대법원은 삼청교육대 근간이던 '계엄포고 제13호'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6. 예찬론


단적으로 말해, 삼청교육대의 교화 효과가 정말로 있었다면 삼청교육대에 이미 갔다 온 조두순이 어린 여자아이를 끔찍하게 성폭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두순이 순화교육 이후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3년의 시간이 있었다고 변명하는데 이런 논리대로라면 삼청교육대의 그 교화 효과라는 건 결국 아무리 잘 쳐줘봐야 시한부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1981년 계엄령 해제 후 표면적으로 삼청교육대는 없어졌고, 1987년 6.29 선언으로 민주화가 된 후에도 한국인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는 한국 사회의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관념때문에 여전히 이른바 엄벌주의자,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 그중에서도 극우성향의 인사들은 잊을만하면 삼청교육대 부활을 주장하고 있다. 정말 잊을만하면 언급되는 사회질서확립을 위한 보수들의 치트키처럼 사용하고 있다. 5공의 독재정치를 욕하는 사람들 중에 "삼청교육대, 그거는 전두환이가 잘한 거야"고들 하는데 실상을 생각하면 섣불리 입 밖에서 내뱉을 소리가 아니다.
공권력 시비, 강력범죄 사건등이 늘어나자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일각에서는 "삼청교육대를 부활시키고 싹 다 가두어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실상을 안다면 이러한 주장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비단 범죄자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 다수가 이곳에 들어가 온갖 인권침해를 당하였다.[24]
공인 신분으로 언론 앞에서도 삼청교육대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더 보수적인 고연령층은 버르장머리없는 젊은이들을 가리켜서 "이런 놈들은 삼청대에 가서 고생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야지"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영화 아저씨에서 조폭 두목인 오명규가 한 대사인 "삼청교육대 다시 세아가(세워서) 싹 다 잡아 처넣어야 나라가 산다"는 대사는 이런 세태를 반영한 것. 기성세대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삼청교육대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이 가끔 있다. 이렇듯 세대를 막론하고 삼청교육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고루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모르고 그저 '나쁜 놈 잡아다가 사람 만드는 곳' 정도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어설픈 지식으로 엄청나게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 것.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저런 말은 제발 하지 말자.
자극적인 주장이어야 관심도가 높아지는 인터넷, 유튜브 등지에 있는 삼청교육대 관련 영상에서는 제발 부활시키자는 글이 상당히 많다.(맨 위에 있는 영상과 같다) 특히 무고한 시민 잡은 것만 아니라면 탁월했다면서 조두순같은 범죄자들을 싹 넣자는 글이 나오는데 조두순은 밑에도 서술했지만 이미 삼청교육대에 갔다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진 바가 없었으며, 오히려 20여 년 후 더 악질 범죄를 일으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삼청대 무용론(無用論)의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거론되고 있다. 조직폭력배인 조양은도 여기 출신이었는데 오히려 더 날뛰고 있다. 인간은 웬만하면 변하지 않는다는걸 기억하자.
2009년도에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위원이 민심이 원한다면서 조폭들에 대한 대응으로 삼청교육대 부활이 어떠냐는 발언으로 좌우 구분 없이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5년 진성준 새민련 의원이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를 인용하며 이완구 총리 후보자가 1980년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에서 삼청교육대 관련 업무를 했다는 걸 밝혀서 논란이 됐지만, 이완구 총리 후보 인사청문회 준비단은 "국보위 내무분과위는 삼청교육대와 관련 없다"고 해명했다.
따지고 보면 삼청교육대는 제1공화국 시절 보도연맹 사건과도 비슷한 맥락이라 볼수 있는 것이다. 둘 다 공포 통치의 도구라는 점이 공통분모다. 보도연맹은 학살, 삼청교육대는 교정을 빙자한 고문으로서 사용된 것.
2019년에는 공관병 갑질사건으로 사실상 불명예 전역당한 박찬주 육군 제2작전사령관이 자유한국당 입당이 보류되자 기자회견을 열어 총선출마를 선언하면서 한 기자회견때, 자신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폭로한 군인권센터는 해체하고 임태훈 소장에게 삼청교육대에 가야 한다고 막말을 쏟아냈다.[25]

7. 관련 법


삼청교육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삼청교육"이라 함은 1980년 8월 4일 법률 제69호 계엄법 제13조의 규정에 의하여 선포된 계엄포고 제13호에 의하여 실시된 순화교육ㆍ근로봉사 또는 법률 제3286호 사회보호법 부칙 제5조의 규정에 의하여 실시된 보호감호를 말한다.

8. 여담



9. 삼청교육대가 등장하는 창작물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은 삼청교육대가 진짜 교육대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인공 박태수는 친구 이종도의 배신 + 딸 윤혜린과 떼어놓으려는 윤회장의 의도에 따라 삼청교육대에 들어갔다. 과거 정치깡패 시절 적이었던 노주명과 정인재를 만나지만 노주명과 정인재는 죽고 혼자만 살아 돌아온다. 혜린과 윤회장의 거래에 따라 무사히 출소 후 노주명의 장례식에서 정인재의 동생 정인영과 함께 자신의 조직을 재건한다. 노주명에게 개처럼 짖으라는 교관(중사)과 엎드려서 버티다 포기하고 멍멍 소리를 내는 노주명의 참혹한 모습이 충격적인 장면.
주인공 이강모는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갔다가 조필연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옮겨진다. 삼청교육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근로봉사 부대에 투입되지만 한편으로는 형의 도움으로 교육 중 사망한 입소자와 신분을 바꿔치기해 서류상으로 사망 처리되어 자신을 쫓는 자들을 따돌린다.[26] 같이 삼청교육대 생활을 했던 동료 2명은 이강모가 세운 회사의 창립멤버가 되고 다른 한명은 경제신문사에 취직해 뒤에서 이강모를 돕게 된다.
전두환을 까는 드라마답게 몇 화를 할애해 삼청교육대의 악행을 집중 조명했다. 범죄자, 불량배 뿐 아니라 기자, 학생 등 출신 인원들도 제각각. 위에 언급한 삼청교육대 출신자들의 증언을 적극 반영하여 입소식에서 까부는 불량배를 차에 묶어놓고 달리거나 부대 내에서 잘못을 저지른(것으로 추정되는) 입소자를 감금시키는 등 충격적인 장면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삼청교육대에서 죽어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보고에 그런 것들은 없어지는게 낫다는 전두환의 반응도 충격적이다. 나레이션도 정치보복과 공포분위기 조성이 목적이었다고 꼬집는다.
> 삼청교육대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악 일소를 외치며 불량배들을 잡아들였다. 하지만 또 다른 이면에는 정치적 보복공포 분위기 조성이라는 부수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
>드라마 제5공화국 23회
등장인물인 강기태와 조태수,조명국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등장인물인 최형배가 삼청교육대에서 다리 하나를 다쳤었다고 말한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후유증으로 진통제를 복용하고 다닌다.
  • 나비 - 김민종, 김정은 주연의 영화.
>김형은 체불임금 요구하며 농성중에
>사장놈 멱살 흔들다 고발되어 잡혀오고
>열다섯 난 송군은 노가다 일나간
>어머니 마중길에 불량배로 몰려 끌려오고
>
>딸라빚 밀려 잡혀온 놈
>시장 좌판터에서 말다툼하다 잡혀온 놈
>술 한잔 하고 고함치다 잡혀온 놈
>춤추던 파트너가 고관부인이라 잡혀온 놈
>
>우리는 피로와 아픔 속에서도
>미칠 듯한 외로움과 공포를 휘저으며
>살아야 한다고 꼭 다시
>살아 나가야 한다고
>얼어터진 손과 손을 힘없이 맞잡는다.
>
>박노해, <삼청교육대> 중에서
  • 윤조병의 희곡 <아버지의 침묵>
기자였던 김재호가 국토건설대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나와서 실어증을 앓게 된다.

9.1. 삼청교육대를 이용한 농담


삼청교육라는 이름을 듣고 삼청교육대학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를 이용해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들은 '삼청교육대학교에 가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보통 정시 라군에 속해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꽤나 유명한 드립이었는지 90년대 유머집에도 자주 등장한다. 한국영화 만남의 광장에서는 임창정이 진짜 교육대학인줄 알고 삼청교육대에 자진입소한다... 비슷한 요소로는 군 등이 있다. 2014년 OCN에서 방영한 나쁜 녀석들에서는 박웅철인신매매 범인들을 향해

"니들이 죄가 없어 왜! 어! 새끼들 싹 다 잡아다 그냥 뭔 교육대야 그 춘천 교육대인가 거기다 싹 보내버려야 해 새끼들."

이라는 개그 대사를 날린다..[27]
다만 삼청교육대라는 게 쉽게 농담거리로 사용될 만한 사건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듯. 보통 정치풍자 같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농담과는 다르게 일반인이 피해본 곳이고 사람이 죽고 다친 곳이라 고인모독의 여지는 있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농담치는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왠지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듯.

10. 관련 자료



10.1. 문헌


  • 정화작전: 삼청교육대 수기 - 이적 저. 전예원. 1988.
  • 삼청교육대: 아직도 들리는 절규의 소리 - 정진욱 저. 청목서점. 1988.
  • 삼청교육대: 생생한 현장고발 - 강인엽 저. 보성사. 1988.
  • 삼청교육대 악몽의 363일 - 정충제 저. 청사. 1988.
  • 삼청교육대 2탄: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정충제 저. 태웅출판. 1988.
  • 여자 삼청교육대: 80년대 초의 한국판 수용소군도 - 박현숙 저. 삼원출판사. 1988.
  • 여자 삼청교육대: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를 무색케한 여자 삼청교육대의 실상 - 양미순 저. 청목서점. 1988.
  • 충격폭로! 여자 삼청교육대 - 한재희 저. 시대문화사. 1988.

10.2. 다큐멘터리


  • 다큐멘터리 극장 - 삼청교육대 (1993, KBS1)
사실상 최초로 삼청교육대 내용을 방송했다
12.12 군사반란, 영욕의 청와대, 5.16에서 삼선개헌까지 등을 방영하며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삼청교육대 등의 과거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전문배우들의 심도있는 연기로 극의 사실성을 더했다

11. 신문 보도자료



11.1. 동아일보 - <추적 삼청교육대>


※ 1988.10.3. ~ 10.8일자 연재.

11.2. 중앙일보 - <실록 80년 서울의 여름>


※ 1988.9.8. ~ 10.13일자 연재분

11.3. 시사저널 <여자 삼청교육대는 끔찍했다>


※ 2002년 10월 21일 기사

11.4. 프레시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 210회

12. 관련 문서


[1] 1호는 부정축재자 척결, 2호는 정치비리자 척결, 3호는 고급 공무원 숙청, 4호는 3급 이하 공직자 숙청.[2] 제5공화국은 1981년 3월 출범했다.[3] 숙박이 아닌 매춘이라 보는 게 정확하다.[4] 물론 위의 경우로 잡혀온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 사소한 이유로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들이였다.[5] 그 당시에는 우울증 환자를 꾀병으로 분류했다.[6] 진짜 학교폭력 가해자들도 있었으나, 공부를 못하는 학생 중 가난하거나 고아인 학생들이 학교 할당량을 위해서 가해자로 낙인찍히고 끌려온 경우도 있었다.[7] 극우 유튜버들은 북한과 연계된 반란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장 신군부부터 광주 시민군과 북한과의 연관성을 공식적으로 부정했고, 도청 진입 당시에도 반란진압이 아닌 폭동진압으로 발표하고 붙잡힌 포로들을 폭도로 분류했다. 물론 폭동으로 분류한 것 역시 사실 왜곡이라는 점은 분명하다.[8]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강창성 전 육군보안사령관, 유호 前 충주MBC 사장.[9] 출판시장을 살펴보면 1970년대 중반부터 출판물의 질이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연구가 필요한 교양서적이나 전집, 앨범 등이 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그 전부터 없었다는 게 아니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왔다는 소리인데, 일반 국민들의 구매력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1950년대 출생자들과 1970년대 출생자들의 마인드는 상당히 차이가 큰 반면, 1970년대와 1980~1990년대 출생자들의 마인드는 정작 의외로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인다.[10] 2009년 4월 12일자 KBS2 <박중훈쇼: 대한민국 일요일밤>에 출연해 언급했는데, 고교 시절 선후배간의 구타를 말리다가 줄줄이 파출소로 연행되었고,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고 한다. 반면, 다른 인터뷰에서 형 남경읍은 학창시절 동생이 문제아였고, 동생 때문에 자신이 자주 혼났다는 회고를 하기도 했다.[11] "상대방에게 삼청교육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을 악용해 수사기관에 고소를 하는 방법으로 빚을 탕감 받았다면, 상대방의 궁박(窮迫)을 이용한 현저하게 불공정한 법률행위라서 무효"라고 판시한 대법원 판례다.[12] 한국 정부가 중공간의 외교를 비공식적으로나마 시작한 것은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벌어진 1983년, 중공과의 외교에서 실리를 추구하며 중화민국과 거리가 멀어진 것은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을 수습한 1985년 이후였다.[13] 실제로 이들은 한국어에 유창하지 못한다. 그래서 재일어라는 일종의 피진으로 재일교포들 끼리 소통하는데 이게 한국인들한테 외국어 수준으로 이해가 안 돼서 오해를 산거다.[14] 지금 물가로 치면 1만 5000원에서 2만원[15] <계엄사(戒嚴史): 10.26사태와 국난극복(1982)> 발췌[16] 내무반 마루 밑으로 빨리 기어들어갔다 나오기[17]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한국노동운동사 p.127~128)[18] 이적 민통선평화교회 담임목사 증언, 당시 신문사 지방주재기자로 근무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끌려갔다.[19] 이 재소자의 노력이 눈물겹다. 1984년부터 8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처우 개선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며 무장 인질극을 벌였으나 진압되었고, 결국 퐁퐁을 마시고 칫솔 2개를 삼키는 등 자해를 벌여 외진의 형태로 안동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병원 화장실 변기 뚜껑 밑에다 당시의 야당 당수였던 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한겨레신문 편집부 앞으로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편지를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두었고 이를 기자들에게 알려 편지가 공개되면서 끝내 사건의 진실이 알려졌다.[20] 1명은 작은 유리로 혀를 긁어 과다출혈로 자살, 1명은 못을 21개나 삼켜 즉사. 1명은 바르는 모기약을 먹고 자살.[21] 당연히 현장 사망만 따진 것이다. 전역한 교관이나 조교들이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들에 대해 알리 없으니...[22] 노상방뇨, 노숙 등[23] 201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24]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삼청교육대 때문에 사회가 깨끗해졌는데 종북주의자들이 왜곡해서 선동하는 것이라고 믿고있는 경우가 많다.[25] 이후 불법적이고 비인권적이었던 삼청교육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적어도 그정도 급의 정신교육은 받아야 한다며 발언 철회를 거부하기까지 했다.[26] 근로봉사로 간 것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바로 나가면 평생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살아야 하니까.[27] 이걸 들은 오구탁의 대답은 "얘들 선생 시킬 일 있냐? 교육대 보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