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태
1. 임실군 출신 독립운동가, 한영태
한영태는 1878년 3월 10일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임실군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3월 2일 전주 교구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건네받고 즉시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신자인 강계대·박판덕(朴判德)·한준석(韓俊錫)·최양옥(崔養玉)·우성오·황성진(黃成 )·김영원(金榮遠)·박성근 등과 만나, 이의 배포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후 강계대에게 9매를 주어 읍내의 장터·학교·경찰서·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도록 하고, 한준석·김영원은 운암면 내의 입석리, 선거리, 학산리 일대에 게시하게 했고, 박판덕 등 다른 신도들에게도 자신의 거주면내와 이웃면 내에 게시하게 했다. 이로 인해 3월 12일 임실읍에서의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만세시위가 전개되기 전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체포된 뒤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3월 5일 옥중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영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장진군 출신 독립운동가, 한영태
한영태는 1854년 7월 27일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 중흥리(현 장진군 만풍노동자구)에서 아버지 한범호(韓範祜)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화릉참봉(和陵參奉)을 지낸 그는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경 신남면 고토리에서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가담해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에 헌병들이 군중에게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폭행을 가하자, 그와 시위대는 흥분하여 맞서 저항했다. 이에 헌병들은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고, 시위 군중들은 헌병주재소로 쇄도해 들어갔다. 이때 탈출한 헌병보조원이 하통리(下通里) 헌병대에 일본 헌병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놀란 하통리 헌병대는 하갈리(下碣里)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즉시 출동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 군중을 무참히 짓밟고 해산시켰다. 이때 붙잡힌 사람만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한영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