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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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징(韓澄)

효창(曉蒼)
생몰
1886년 2월 29일 ~ 1944년 2월 22일
출생지
한성부 남부 훈도방 죽동계 죽동[1]
본관
청주 한씨
사망지
함흥형무소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조선어학회
2.3. 조선어대사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어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한징은 1886년 2월 29일 한성부 남부 훈도방 죽동계 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7살때부터 한학과 국학을 공부했고, 15살 때 사서삼경에 정통했으며, 일찍부터 한국어와 한글에 관심을 두고 연구에 몰두했다. 또한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신문 편집 기자로 활동했고, 1923년에 대종교에 입교했다.
1927년, 계명구락부가 조선어사전 편집부를 설치하고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한징은 사전 집필에 참여해 최남선이 전문 어휘, 정인보가 한문 어휘, 임규가 용언 어휘, 변영로가 외래어 어휘, 양건식이 신어 어휘, 이윤재가 고어 어휘를 맡는 동한 자신은 주해를 맡았다. 그러나 1929년경 철자법의 통일이 미비하고 경비가 부족해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 작업이 중단되자, 한징은 이윤재와 함께 계명구락부를 탈퇴하고 조선어연구회에 가담했다.

2.2. 조선어학회


한징은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했고, 1931년 조선어학회가 조직되자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 제정과 우리말 사전의 편찬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조선어학회가 1934년에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에서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을 맡았다.
당시 한민족의 말과 문자에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도의 방언이 난무했다. 따라서 표준어의 제정은 언어를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데 반드시 이뤄져야 할 일이었다. 이에 한징은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표준어 사정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 1934년에 12월 2일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조선어학회는 표준어 사정을 위한 독회(讀會)를 온양에서 열고, 사정위원은 회원 이외에 각 도별로 하되 서울말을 표준으로 하기에 서울 및 경기 위원이 총 위원의 반수가 되게 했다. 그 외의 반수는 방언에 대한 참고를 위해 각 도별로 위원수를 배정했다.
1935년 1월 2일 온양 온천에서 제1회 독회가 열렸다. 한징은 이 회의에 참여해 표준말 하나를 놓고 몇 시간이고 회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조선어학회가 조선어 표준말 사정의 민족적 권위를 확보하고자 사정위원 30명을 70인으로 늘릴 때, 그는 서울 출신에 배정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차례 열린 독회에 모두 참여했고, 1936년 7월 제3회 독회에서 표준말의 사정을 비로소 마감하고 최종 수정위원 11명에 선정되었다. 사정을 마친 조선어학회는 이만규의 발성으로 "조선어학회 만세"를 삼창하고 폐회했다.
한징을 비롯한 수정위원들은 3개월 동안 마무리 작업을 하여 표준말 사정 체계를 완성했고, 조선어학회는 1936년 10월 28일 490주년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했다. 표준어 6,231개, 약어 134개, 비표준어 3,082개, 한자어 100개로 사정 어휘 총수는 9,547말에 달했다. 또한 조선어학회는 239쪽에 달하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도 발간했다. 이 책자는 표준어와 표준 철자를 찾아볼 수 있도록 편찬하여 철자사전(綴字辭典)의 역할도 병행했다. 이 책자의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이는 총 150여 명에 달했다.
한징은 표준말 사정에 참여하는 동안 몇 편의 글을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기고했다. 한징은 1937년 9월 '양문대신의 언문 시'라는 글에서, 조선 후기의 대신인 이서구가 지은 언문시를 소개했고, '조선말 지명'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말 땅 이름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39년 4월 '군수의 꿈'을 <한글>에 기고해 백성의 재산을 토색질하던 악질 군수를 비판했다. 이 작품의 전체 문장은 한글로만 썼고, 부득이 한자어에 한자를 쓸 경우 괄호 안에 넣어 표기했다.

2.3. 조선어대사전


이 무렵, 이극로는 1929년 1월에 조선에 귀국한 뒤 신명균, 이중화, 이윤재, 최현배, 장지영, 정열모 등과 협의하여 1929년 10월 31일 경성부 수표동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위원자으로 선임되었다. 한징 역시 사전 편찬의 전담 집필에 이극로, 이윤재, 김선기, 이용기 등과 함께 참여했다. 그 후 사전 편찬원들은 2년간 각종 어휘를 분담 수집하면서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했다. 이극로는 순수한 조선어를 맡았고, 한징은 한문 계통의 어휘를 정리했다. 그러나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사전편찬 작업은 1933년 6월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한징 역시 생업을 꾸리기 위해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해야 했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한글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하고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간하자, 각계 인사들이 거액의 자금을 기부했다. 또한 이극로는 사전편찬 후원회를 조직해 총 1만원 상당의 후원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매일같이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출입했기 때문에 작업 진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어대사전 편찬을 이어가기로 결심한 한징은 1936년 4월 조선어대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을 맡았다. 그는 정인승, 이윤재, 이극로, 이중화와 함께 작업에 착수했고, 1938년 6월 권승욱이, 7월에 권덕규가 사전편찬에 참여했으며, 1941년 4월에는 정태진도 합류했다.
한징은 서울 태생이어서 서울 구석구석의 유래, 의복, 음식, 길흉간의 민속, 주택, 사색(四色)에 따라 다른 풍습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이들의 어휘는 모두 그의 힘을 입어 조선어대사전에 수록되었다. 또한 사전 원고를 많이 써서 사전 원고지의 양이 많기로는 이극로와 한징이 제일이었다. 이석린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조선어학회가 주는 월급이 박봉이어서 한징 선생도 조선어학회에서 퇴근한 뒤 인쇄소에서 교정 일을 했다고 한다. 또 한징은 문세영이 단독으로 조선어사전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전 원고의 교정을 마무리해줬다. 문세영은 그의 도움 덕분에 1938년 조선어사전을 최초로 발간했다.
일제 말기 사전편찬원들은 일제가 기념을 막았던 한글날 기념행사를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몰래 했다. 일제는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이 한글날에 민족의식을 고취하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이 행사를 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그럼에도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학회 사무실에서 몰래 행사를 거행했다. 한징은 종종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고 한다.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이윽고 1940년 초, 한징, 이윤재, 이극로, 정태진 등의 노고로 조선어사전의 원고가 나왔다. 조선어학회는 1940년 3월 7일에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조선어대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했다. 이에 조선총독부 도서과는 조선어사전 원고의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정정한 뒤 1940년 3월 12일에 출판 허가를 내렸다. 조선어학회는 이우식의 재정 후원을 받아 1942년 봄부터 사전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조판하게 하였다. 이우식으로부터 매월 250원씩을 지원받기로 하고 나머지 어휘를 정리하여 그 원고를 1942년 말까지는 인쇄소로 넘기기로 했다.

2.4. 조선어학회 사건과 옥사


그러나 1942년 10월 1일, 일제는 조선어학회 33명을 검거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했다. 한징도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고 형사로부터 물고문을 받고 날마다 폭행을 받았다. 그는 계속되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 말을 쓰고, 조선 말을 사랑하는 데에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결국 한징은 1944년 2월 22일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향년 59세.그의 유해는 경기도 과천에 안장되었다가 1992년 7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한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