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진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태진
丁泰鎭'''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903년 7월 25일
경기도 교하군 아동면 금릉리
(現 경기도 파주시 금릉동)
'''사망'''
1952년 11월 2일
경기도 파주시
'''묘소'''
경기도 파주시 금릉동
'''본관'''
나주 정씨(丁)[1]
'''호'''
석인(石人)
'''수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방언 연구 및 민족 교육
2.4. 해방 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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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어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정태진은 1903년 7월 25일 경기도 교하군 아동면 금릉리에서 부친 정규원과 모친 박씨 사이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월에 졸업했고, 그해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 때 그는 6살 위의 동창생인 정인승과 만나 우리 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토대로 서로 깊은 우정을 맺었다. 또한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면서 국학자이자 민족주의자인 정인보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습득했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4월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영어와 조선어 담당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문학작품, 그 중에서도 한국의 명시(名詩)를 다양하게 소개해 여학생들에게 한국의 우수한 문학 수준을 인식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게 했다. 2년 후 미국에 유학하여 우스터대학교 철학과와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1931년 9월에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2.2. 방언 연구 및 민족 교육


영생여학교 교사로 부임한 정태진은 이때부터 방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방언에 한국어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고 여겼고 이것을 보전하는 것이 우리 말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방언을 수집하고 우리 말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수업시간 때마다 여학생들에게 “너희들끼리는 조선말만을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아니 가서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게 된다.”라고 해 학생들의 민족 의식을 일깨웠다.
가령 그는 한민족의 국난 극복 역사를 열거하면서 일본군 장군을 껴안고 대동강에 뛰어든 평양 기생 계월향 등 한국 여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일화들을 소개하며 여학생들도 독립 정신을 가지고 진취적으로 살아야 함을 역설했고, 마의태자를 소개하면서 "옛날 신라 때의 마의태자는 그 아버지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일생을 조국 부흥에 바쳤으니 너희들도 한국이 유구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마의태자처럼 조국을 생각하는 정신을 가져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3월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의 상용을 강요했고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개정, 반포하여 1939년부터 각극 학교에서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정태진은 이로 인해 조선어 교육을 더이상 하지 못하고 수신(修身), 대수(代數) 같은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그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있던 정인승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영생여학교를 사직한 후 조선어학회에 가입했다.

2.3.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에 가입한 정태진은 1941년 5월부터 한글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선행 사업으로 어휘의 수집,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개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또한 한글 연구성과의 보급과 한글 교습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을 위해 회원들을 파견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수시로 한글 강습회를 개최했고, 1932년 5월부터 기관지로 <한글>을 창간, 발행했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전임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사전 원고를 기술하면서 어휘를 뽑아 주석을 달고 이를 카드로 정리하는 한편 회원들이 써 보낸 원고를 정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의 증인 소환 명령을 받은 그는 경찰서에 출두했다. 경찰은 그를 증인이 아닌 피의자로 다루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는 자백을 받아 내려고 숱한 추궁과 고문을 했다.
그렇게 20여 일간 고문을 받은 그는 결국 영생여학교 교단에서 여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한 사실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는 사실을 시인했다. 이후 일제는 1942년 10월 1일부터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고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했으며 뒤이어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정태진은 홍원경찰서에 갇혀 있을 때 부친상을 당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은 옥중시를 남겼다.

망국의 한도 서럽다하거늘 아버지 또한 돌아가시니(國破父亡事事非)

망망한 하늘 아래 어디로 가자는 말인고?(天涯無際我何歸)

한 조작 외로운 혼이 죽지 않고 남아 있어,(一片孤魂今猶在)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날아가네.(夢裡向南夜夜飛)

이후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아들 정해동이 징병 1기로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어 아버지를 면회했다. 정태진은 아들에게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정도를 걸어야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5년 1월 16일, 정태진은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상고를 포기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7월 1일에 출옥했다.

2.4. 해방 후 경력


1945년 8.15 해방 후, 정태진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했고, 연세대, 중앙대, 홍익대, 동국대, 국학대 등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국어를 강의했으며, 1948년 9월 조선어학회에서 6개월 과정으로 설립한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에서 일하며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그는 한글을 애용하여 자주 문화를 꽃피우려는 염원에 불타 다음의 시를 지었다.

우리의 말은 자연의 꽃이요,

우리의 글은 문화의 꽃이다.

이 말 이 글이 빛나는 날에

아름다운 꽃향기

쓸쓸하던 이 강산에

새 봄을 자랑하리.

정태진은 미군정청과 대한민국으로부터 고위관료직을 제의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 업무에 집중했다. 1946년 6월에는 <한자 안쓰기 문제>를 발간하고, 10월에는 김원표와 <중등국어독본>을, 12월에는 시집인 <아름다운 강산>을 간행했다. 또한 1947년 4월에 <고어독본>을 발간했으며, 1948년에 김병제와 함께 <조선 고어 방언사전>을 펴냈다.
1948년 3월 20일 일본의 오사카 학무국이 재일 한인을 교육하는 모든 교육 기관에게 조선말로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이에 정태진은 4월 10일 <조선중앙일보>에 논설을 게재해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중략) 동포여! 우리가 뭉치어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킬 때는 온 것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혼을 영원히 지키어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깨끗하게 전하여 줄 우리의 보물을 저 강도 왜적에게 다시금 백주에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지 말자!

1949년 9월 25일, 정태진은 정인승, 정열모, 방종현 등과 함께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까지 피난을 갔고, 1952년 5월 20일 서울로 올라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몰두했다. 같은 해 10월 28일, 그는 <조선말 큰사전> 4권의 지형을 떠놓았다. 그 뒤 고향인 파주에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11월 2일 군용트럭이 전복되는 바람에 현장에서 즉사했다. 향년 50세. 그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금릉리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정태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28세손 진(鎭)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