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사건

 

朝鮮語學會 事件
1. 개요
2. 사건의 경과
2.1. 검거된 33인
3. 해방과 큰사전 출간
4. 기타


1. 개요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일본한글 교육 및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에 따라 당시 한글에 대한 연구를 해왔던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에 대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한글 사용 금지를 어겼다는 사유로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했던 사건. '한글학회 사건'[1], 또는 '한글학자 집단 체포사건' 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현 한글학회에서는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국어사전 편찬 사업은 중단되었고, 원고가 실종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남한에서는 1957년 한글학회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 사업이 완료되었으며, 북한에서는 김두봉 등의 주도로 《조선말사전》이 편찬되었다.

2. 사건의 경과


통념과 달리 일제가 일제강점기 내내 한국어 학습을 금지시킨 것은 아니었다. 병합이 되었다 한들 일본어는 엄연히 외국어였고 기초적인 교육은 모국어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일본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 민족말살정책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우선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으로 한국어한국사 수업이 의무 교육에서 해지, 지금의 선택 과목에 해당하는 '수의과목(隨意科目)'으로 격하되었고 이로 인해 사실상 조선어 과목은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한국인일본인은 본래 같은 민족[2]이라는 논리로 전시 체제의 동조를 유도하는 내선일체론을 내세웠으며, 이를 위해 한국어의 말살과 창씨개명 등을 시도하였다. 이로인해 '조선어 교육'은 결국 1943년 완전히 폐지된다. 같은 시기에 일제는 일본어 교육 및 사용을 의무화하라는 훈령을 각급 학교에 지시한 상태였다. 현재 90대 이상인 어르신들이 '내가 학교 다닐 적엔 조선어 쓰면 벌금 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 때문. 한편 지식인에 대한 탄압도 계속되어, 1941년에는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이 발령된 상태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모종의 사건과 연루되어 1942년 9월 5일에 조선어학회 소속 한글학자인 정태진이 경찰의 취조를 받고 이후 체포된 것이다. 그러나 정태진이 체포되기까지의 그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한 설에 의하면, 함경남도 함흥에서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소속의 여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대화를 하자 이를 눈치챈 친일계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한국명: 안정묵)'가 즉시 체포하였다. 박영옥은 일본제국 경찰의 취조와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 소속 한글학자이자 서울에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정태진이 그녀에게 민족정신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했다고 진술했다.
또 다른 설 있다. 일본 유학생 박병업이 검문을 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그의 집에 일본제국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조사를 하고 있을 때, 한 경찰이 박병업의 조카 박영희의 일기장이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 몇 장을 넘기자 “오늘은 학교에서 국어를 써서 혼이 났다.”라고 써있었다. 그 경찰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때는 국어가 일본어였을 땐데 "왜 국어를 썼는데 혼이 났냐?"라고 물으며 추궁을 시작하였다. 박영희는 "국어가 ‘조선어’인 줄 알고 그랬다"며 넘어가려 했지만, 경찰의 고문과 추궁 끝에 조선어학회가 일본어를 배제하고 조선어를 몰래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참고로 이렇게 설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은, 해방 이후에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이 각각 이 사건에 대한 회고록을 투고했을 때 그 내용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와 영생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김상필은,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모아 진상을 검토한 결과 이희승의 회고가 가장 사실과 가깝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그렇다고 다른 회고록을 완전히 부정할 근거를 수집할 여력이 다들 없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이 경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장신, 2016). 사건의 핵심이 되는 여학생의 이름이 '박영옥'인지 '박영희'인지 왔다갔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론적으로는 '박영희'가 맞다. 이희승이 당시 회고록을 쓸 때 관련 여학생의 이름을 '백영옥'이라는 가명으로 처리했었는데, 나중에 이를 고치는 과정에서 '박영옥'으로 잘못 고쳤고 이를 다른 사람들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하여튼,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자신들은 우리말 연구와 사전편찬에 신경을 쓴 것 외에는 독립운동을 조장한 적이 없다고 변론했지만, 일제는 1943년 4월까지 총 33인의 한글학자들을 검거하였다. 그 결과 학자 대부분이 일본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거나 모진 고문 등을 당한 끝에 이 중 16인은 치안유지법에 근거하여 '내란죄'를 죄명삼아 함흥형무소로 수감됐고 12명은 기소유예 처리를 받았다. 그중 한글학자였던 이윤재, 한징은 형무소 수감 중 옥사(獄死)하였으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남은 학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2.1. 검거된 33인


총 33명이 검거되었다.
권덕규
권승욱
김도연
김법린
김선기
김양수
김윤경
김종철
서민호
서승효
신윤국
안재홍
안호상
윤병호
이강래
이극로
이만규
이병기
이석린
이우식
이윤재
이은상
이인
이중화
이희승
장지영
장현식
정열모
정인섭
정인승
정태진
최현배
한징
이 중 김도연, 김법린, 김양수, 이극로, 이우식, 이윤재, 이인, 이중화, 이희승, 장지영, 장현식, 정열모, 정인승, 정태진, 최현배, 한징 16명은 기소되었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권덕규안호상은 와병 중이라 체포를 면했다.
기소된 사람은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와중에 이윤재한징이 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하고[3] 장지영과 정열모는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최종적으로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다.
공판 결과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성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과 정태진 각각 징역 2년, 김도연, 김법린, 김양수, 이중화, 이우식, 이인 각각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선고되었다.
참고자료

3. 해방과 큰사전 출간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투옥됐던 한글학자들은 석방되었고,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국어사전 출간을 재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건 당시 압수된 후 행방불명이었던 초고 26,500여 장의 원고를 경성역(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찾아내게 된다. 고등법원에 항소를 내면서 증거물로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유야무야하다 보관되게 된 것.
이후 되찾은 원고를 기초로 내용을 추가하고 수정한 끝에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하였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국어사전을 출판하게 된 이들의 감개가 담긴 서문은 지금 읽어도 뭉클해지는 명문. 우리말 큰사전 머리말 전문
우리말 큰사전은 표제어가 16만4천125개에 달하고, 200자 원고지 2만5천900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당시 전국 8도의 순우리말한자어, 외래어, 관용어, 전문어, 옛말, 고유명사까지 포괄한 첫 종합사전이다. 또한 음소부분의 발음과 문맥에 따른 사용처, 어휘구조까지 명기하여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4]
1949년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조선말 큰사전》에서 《우리말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3권까지 나왔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큰사전의 출판은 다시 중단되었다. 전쟁통에 원고를 땅에 파묻고 피난을 가는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발간이 시작되어 1957년에 6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완간까지 '''무려 28년이 걸린 '''인고의 결과물이었다.
이희승은 사건 당시의 수감 생활을 소재로 한 칠불당(七佛堂)이란 제목의 수필을 썼다. 이희승 특유의 유머 감각이 잘 살아있는 수필로 칠불당이란 필자인 이희승 본인을 포함한 감방 수감자 7명을 부처님에 비유한 것이다. 처참한 수감 생활을 유머있게 표현함으로서 반어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된 학자들은 일제에게서 우리말 우리글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해방 후 모두 독립유공자로 임명, 또는 추서되었다. 즉 조선어학회 사건도 명실상부 국가 공인 독립운동이다.

4. 기타


  • 2019년 1월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조선어 학회를 주인공으로, 1929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조선말 큰사전 편찬과정과 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하지만 모티브만 땄을 뿐 실제 사건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1]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꾼다. 즉 현재의 한글학회는 조선어학회의 후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조직 그 자체인 것.[2] 현실은 당시 대다수의 일본인도, 조선인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형식상으로만 일본인이고 일제로부터 온갖 차별과 탄압을 받은 대다수 조선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히 총알받이로 쓰려는 의도이다.[3] 이윤재 선생의 유골은 아들이 수습하였다.[4] 사전 편찬위원들은 수 년에 걸쳐 어휘를 모으고, 이를 이극로, 이윤재, 김선기, 이용기, 한징 등이 순수한 조선어를 맡았고, 한문 계통의 어휘를 각각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재정문제로 중단되기도 하고, 사전 편찬위원들은 생업을 위해 신문기자 등으로 투잡을 뛰는 등, 안타까운 일화들이 많다. 종로경찰서의 탄압은 덤. 조선어 학회 사건 이전에도 조선어 학회는 주요 구성원이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대동단 사건 연루자들이 많아 늘 요시찰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