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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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어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정인승은 1897년 5월 19일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정상조(鄭相朝)이며, 모친은 송성녀(宋姓女)이다. 부친은 유학자로, 평소에 아들에게 일제에 빌붙어 살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정인승은 훗날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또한 그는 가족이 일본에게 직접적인 해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선친께서는 서울에 갔다 오시면 여러 가지 책을 사다 주시며 공부 잘해야 된다고 타이르셨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공부를 하되 나라가 이 모양이 된 마당에 돈 주고 사는 벼슬을 하려거나 출세를 하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특히 일본이라면 질색을 하신 까닭에 '아무리 왜놈 세상이 되었다지만 그 밑에서 벼슬할 생각은 말라.'고 준엄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국어 운동 50년>
정인승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일제에게 반감을 품으면서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향리에서 한학자 한응수에게 한문을 익혔으며, 이후 전북 진안군에 위치한 용담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연정학원과 중동학교를 거쳐 내자동에 있는 종교예배당 영어 강습소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동네에서 가장 크던 우리 집은 일본군에게 징발당하여 병참소로 사용되었다. 우리 집을 근거로 주변에서 의병 토벌 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밤이면 이들이 잡아온 의병들을 고문하느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동네 앞산 소나무에 사람을 달아 놓고는 총살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중략)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마을에 머물면서 갖은 나쁜 짓을 하고 있던 중 하루는 나의 형 인영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다친 적도 있었다.
<국어 운동 50년>
이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그는 영어를 주로 공부했는데, 우리 말과 한글에 관련해서는 수사학 담당 교수이던 정인보와 같은 학부 3년 선배이던 김윤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특히 김은경으로부터 주시경의 국문본 학설을 얻어들으면서 한글에 대해 많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신학문에 접하기 이전의 한학 공부도 거의 모두가 언해로 된 책을 통해 혼자서 공부했다. 이 언해본을 통해 사서삼경의 질서를 모두 익혔으니 한글과의 인연은 이때부터였다고나 할까. 또한 그 때에 할머니께서 병환으로 누워계셨는데, 심심하시니까 나를 불러 국문 소설 책을 읽게 하셨다. (중략) 국문을 연구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국어와의 인연을 맺게 된 자연적인 계기가 이 때가 아니었던가 한다.
<국어 운동 50년>
김윤경은 그의 옛스승 주시경 선생의 창의적인 국어문법 학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여 나에게 우리말을 연구하게 영향울 준 바가 적지 않아 영문법 교수인 백남식 선생의 <영어 구문론 해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것과 함께 나름대로의 국어문법에 대한 이치를 전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내 나이 여든 일곱에>
2.2. 국어 연구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정인승은 같은 해 4월부터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해 1935년 8월까지 근무하면서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연구를 벌였다. 그는 애초에 영어 교사로 부임했지만, 영어보다는 조선어를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국가관과 민족 관념을 뚜렷이 의식하고 그것을 심어주려면 국어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봤다. 그는 한두 시간밖에 안 되던 국어 교육을 일본어 시간 수에 버금가는 다섯 시간으로 늘렸으며, 영어는 뒷전으로 놓아두고 각 학년의 한국어 과목을 모두 맡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한국어 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가담한 많은 학생들이 퇴학당했다. 이에 정인승은 퇴학당한 학생들을 받아들일 것을 교장에게 건의해 그 뜻을 관철시켰다. 이후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고창고등보통학교는 한인 민족주의의 온상으로 인식되었다. 일제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 고창고등보통학교를 공립 학교로 전환해 통제하려 했고, 정인승은 뜻을 같이하는 교사들과 함께 반기를 들었다가 일제의 노골적인 감시를 받게 되자 1935년 8월 31일에 마침내 사임했다.학생들의 진급에 있어서도 다른 과목은 과목 낙제가 있어도 평균 성적이 60점 이상이면 진급을 시켰지만, 국어 과목만은 한 과목이라도 낙제점을 받으면 진급을 시키지 않도록 고집을 했다. 나라말을 제대로 모르고 진급을 해서 졸업하면 무엇을 쓰겠느냐는 뜻이었다. 학생들에게도 틈만 있으면 우리 역사를 들려주면서 조선놈이 조선말 공부를 안 하면 무엇에 쓰느냐고 호통을 치곤 했다.
<국어 운동 50년>
사임 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3] 에서 염소 목장을 경영하던 정인승은 1936년 4월 한징과 함께 조선어학회에 가입했다. 그는 이윤재, 이중화,정태진, 한징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사전 편찬의 기초 이론을 천착한 논문 <사전 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 <표준어 사정과 한자어의 표준음>을 발표했고, 1937년에 펴낸 '고친 판'의 수정위원 7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1940년에 발표한 '새판'의 개종 조항 기초위원 3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모자라는 어휘를 수집하고 어휘를 풀이하는 데 매진했으며, 1937년 6월부터는 이윤재의 뒤를 이어 <한글> 잡지의 발행을 주관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조선어 사전 집필에 몰두하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러나 이렇듯 일에 몰두했음에도 4년이 지나도록 끝을 보지 못했고, 결국 1940년 무렵에 사전 편찬이 중단되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이우식이 단독 지원을 약속하면서 다행히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1939년 말에는 작성이 끝난 원고를 총독부에 제출해 다음 해 봄에 본문 중 많은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출판 허가를 받아냈고, 1942년 봄부터 조판에 들어가 교정을 전담했다. 또한 어휘 풀이도 계속하여 가을에는 풀이를 거의 다 마치기에 이르렀다.여러 애로 속에서도 일을 해오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인지 낮인지의 구별도 없었다. 우리가 이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일에 매달린 것은 사전 편찬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해 준 분들에게 3년 안에 사업을 마무리짓겠다고 약속한 것도 있었지만, 일인들이 우리 말을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워 이를 점차 노골화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우리 말 사전은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말 형편이었다.
<국어 운동 50년>
2.3.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10월, 정인승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 동화 정책을 달성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내세운 뒤 일본어를 보급하고 한글, 한국어에 대한 사용 금지 및 말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어학회의 한글 연구와 사전 편찬 작업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리하여 체포된 정인승은 함흥지방재판소 공판에 회부되어 내란죄가 적용되었고, 조사를 받던 중 동료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그는 그 곳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석방되었다.
2.4. 큰사전
정인승은 광복 후 서울로 상경해 살아남은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을 모아 학회를 재건했고, 광복된 조국의 국민 교육을 위해 학회에서 벌어는 여러 여러 일에 관여했다. 교재를 꾸미는 일, 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일, 각 분야의 용어를 다듬는 일, 국어 강습회를 여는 일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어 사전을 펴내는 것이었다. 그는 잃어버렸던 사전 원고를 다시 찾아 전면적인 수정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7년 한글날에 <큰사전> 첫째 권을 세상에 내놓았고 1949년 5월에는 둘째 권을 내었다. 1950년 6월 1일에는 셋째 권을 찍어 제본을 추진했고, 6월 25일에는 넷째 권의 조판을 끝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어 사전 편찬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정태진, 권승욱, 류제한 등과 더불어 편찬 작업을 지속했다. 그는 서울과 전주를 오가면서 한편으로는 조판 교정을 봤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고를 수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학회는 미국 록펠러 재단의 원조를 다시 받고 1956년 4월에 업무를 재개했다. 그리하여 1957년 한글날에 국어 사전 편찬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정인승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글학회 이사장 최현배는 "이러한 거친 세파 속에서 이 편찬 사무에 관여한 여러 사람들 가운데 천우의 건재로써 가장 오랫동안 중심적으로 각고 면려하여 오늘의 성과를 이룬 이는 정인승님"이라며 정인승의 공적을 기렸다.<큰사전> 완결을 이룸으로써 우리 민족 문화사상 하나의 획기적인 사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떄의 감격이야말로 어찌 한 마디의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실로 내가 당시의 조선어학회에 몸담아 사전 편찬의 일을 시작한 1936년 이래 21년간의 인고에 따른 노력의 결정이었다.
<국어 운동 50년>
2.5. 이후의 경력
정인승은 6.25 전쟁 시기 전주로 피난한 뒤 1951년 4월 1일부터 명륜대학[4] 에 출강했다. 이후 그는 전북대학교, 중앙대학교, 건국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글 및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편, 그는 한글학회의 임원으로서 학회의 여러 일에 충실히 참여했다. 1958년에 편찬한 <중사전>, 1960년에 편찬한 <새한글 사전> 작업에 참여했으며, 1973년부터는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 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1980년에 한글 학회에서 발표한 <한글 맞춤법>의 수정 위원을 역임했으며, 1981년부터 2년간은 <쉬운말 사전>의 증보판을 준비했다.
정인승은 말년에도 한글과 한국어를 보전하고자 노력했다. 조오현의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는 죽기 몇년 전 투병 생활을 하던 중에도 제자나 친지들이 병문안을 할 때 외래어에 밀려 사라져 가는 나라 말을 걱정했고 찾는 이 없을 때는 목을 고정시킨 채 책상에 있아서 국어학 서적을 뒤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병석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86년 7월 7일, 정인승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9세.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언젠가는 왜놈이 또 넘볼지 모르니 왜놈의 간교한 꾀에 속지 말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정인승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