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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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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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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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에서 유족들.
李克魯
1893년 8월 28일 ~ 1978년 9월 13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어학자,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고루 이극로 연보. 본관은 전의(全義)[1] , 호는 '고루'로, 이름인 '극로'를 중국식(커루, Kèlǔ)로 읽은 이름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2]#에서 이근주(李根宙)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에 중국 상하이로 넘어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상하이 퉁지대학 예과 수료 후 1927년 독일로 유학가 베를린대학교에서 주경야독으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땄으며, 이어 대학교에 동방어학부 조선어학과를 창설, 강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1929년 귀국, 이후 한국어학자로 많은 활동을 한다. 오늘날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사전편찬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 핵심 역할을 맡았다. 조선어학회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활동을 했는데,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이극로가 한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가 처음으로 한국어의 표준어 규정을 정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표준어가 없다보니 지역 간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2년 이극로가 평안북도 창성군의 어느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던 중에, 일행 중 한 사람이 식당 주인에게 고추장을 청하였는데, 주인이 '고추장'을 못 알아듣다가 일행들의 설명을 들은 이후에야 "옳소, 댕가지장 말씀이오"하더니 고추장을 내왔다고 한다. # 이 일을 계기로 이극로가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파, 특히 뉴라이트 진영에서 이 사람을 '좌익계열 친일파'라고 주장한다.#[3] 물론 아는 사람의 반응은 '''말이 되냐?'''. 이극로는 한글 운동에 앞장섰던 제1세대 한글학자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구속되는데, 그것도 그냥 연루되어서 구속된 정도가 아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멤버 중에서도 같은 한글학자인 최현배, 이윤재와 더불어 가장 중추적인 핵심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극로는 1943년에 징역 6년을 선고(이외에 최현배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받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채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8월 17일이 돼서야 최현배와 같이 출옥했다. 출옥당시 굉장히 처참한 모습이었다고하는데, 당시 이극로가 출옥했을때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주요인물이 최현배라고만 알고 있는데 사실,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가장 핵심적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이극로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 이극로는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말,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일어나면서, 반탁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는 등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행보를 보인다. 그리고 1948년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하지만 이극로는 그냥 북한에 남으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 학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공직으로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의장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정도였지만, 딱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의 김일성 우성화로 인한 숙청 바람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한글보급 운동 및 한글연구에 몰두하면서 지냈다고 하며 김두봉이 실각한 이후로는 북한의 어문정책을 담당하였다. 그가 북한에 남은 이유는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라고(...)[4] 조봉암과도 같이 일할 정도로 좌파라고 배척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김구와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5]
1978년에 병사했으며 묘소는 북한의 국립묘지인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다.
1920년대 외국에서 유학공부했을 시절에 세계 곳곳에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목받고 있다.(#) 또 프랑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적이 있다.#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자판과도 약간 관련이 있다. 공병우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 환자로 방문한 이극로에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화를 받아서 한글에 대한 열정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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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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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에서 유족들.
李克魯
1893년 8월 28일 ~ 1978년 9월 13일
1. 개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어학자,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고루 이극로 연보. 본관은 전의(全義)[1] , 호는 '고루'로, 이름인 '극로'를 중국식(커루, Kèlǔ)로 읽은 이름이다.
2. 생애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2]#에서 이근주(李根宙)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에 중국 상하이로 넘어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상하이 퉁지대학 예과 수료 후 1927년 독일로 유학가 베를린대학교에서 주경야독으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땄으며, 이어 대학교에 동방어학부 조선어학과를 창설, 강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1929년 귀국, 이후 한국어학자로 많은 활동을 한다. 오늘날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사전편찬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 핵심 역할을 맡았다. 조선어학회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활동을 했는데,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이극로가 한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가 처음으로 한국어의 표준어 규정을 정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표준어가 없다보니 지역 간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2년 이극로가 평안북도 창성군의 어느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던 중에, 일행 중 한 사람이 식당 주인에게 고추장을 청하였는데, 주인이 '고추장'을 못 알아듣다가 일행들의 설명을 들은 이후에야 "옳소, 댕가지장 말씀이오"하더니 고추장을 내왔다고 한다. # 이 일을 계기로 이극로가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파, 특히 뉴라이트 진영에서 이 사람을 '좌익계열 친일파'라고 주장한다.#[3] 물론 아는 사람의 반응은 '''말이 되냐?'''. 이극로는 한글 운동에 앞장섰던 제1세대 한글학자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구속되는데, 그것도 그냥 연루되어서 구속된 정도가 아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멤버 중에서도 같은 한글학자인 최현배, 이윤재와 더불어 가장 중추적인 핵심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극로는 1943년에 징역 6년을 선고(이외에 최현배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받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채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8월 17일이 돼서야 최현배와 같이 출옥했다. 출옥당시 굉장히 처참한 모습이었다고하는데, 당시 이극로가 출옥했을때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주요인물이 최현배라고만 알고 있는데 사실,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가장 핵심적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이극로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 이극로는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말,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일어나면서, 반탁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는 등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행보를 보인다. 그리고 1948년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하지만 이극로는 그냥 북한에 남으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 학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공직으로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의장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정도였지만, 딱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의 김일성 우성화로 인한 숙청 바람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한글보급 운동 및 한글연구에 몰두하면서 지냈다고 하며 김두봉이 실각한 이후로는 북한의 어문정책을 담당하였다. 그가 북한에 남은 이유는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라고(...)[4] 조봉암과도 같이 일할 정도로 좌파라고 배척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김구와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5]
1978년에 병사했으며 묘소는 북한의 국립묘지인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다.
1920년대 외국에서 유학공부했을 시절에 세계 곳곳에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목받고 있다.(#) 또 프랑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적이 있다.#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자판과도 약간 관련이 있다. 공병우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 환자로 방문한 이극로에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화를 받아서 한글에 대한 열정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
[1] 전서공파 28세손 로(魯)[2] 인근의 오천리, 봉곡리, 성산리와 함께 전의 이씨 집성촌이다.[3] 뉴라이트 진영에선 이광수나 최남선같은 친일행적자를 '민족의 양심수'라고 옹호하고, 다른한편으로 평생을 독립운동가인 인사 중 우파 계열과 친하지 않았던 이들, 예를 들어 이극로, 안재홍, 여운형, 허헌, 한용운, 홍명희 등을 '좌익계열 친일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계열 친일파들은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꼼꼼히 수록되어 있다.[4] 박태균 저, <한국전쟁> p.51 참고.[5] 아이러니하게도 조봉암은 박헌영의 독단과 당 운영에 회의를 느끼고 공산당을 탈당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