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흥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흥근은 1890년 2월 19일 함경남도 함흥군에서 부친 한응구(韓應球)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사서삼경을 수학하다가 서양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원산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졸업한 뒤 측량학교(測量學校)를 다시 이수하였다. 20세 때 원산 홍도학교(弘道學校)의 교사로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이동휘, 남공선을 따라 만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다시 러시아령인 해삼위로 가서 신한촌에 들어가 한인거류민단장(韓人居留民團長) 채성하(蔡成河)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동지를 규합했다.
그 후 독립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추진하고 국내의 인사들과 유대를 맺기 위해 원산으로 돌아간 그는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를 오가면서 조병철(趙炳喆)·김장석(金章錫)·안돈우(安敦雨)·최자남(崔子南)·문무술·김상익(金相翊)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일제 관공서 및 주요 생산시설을 파괴하기로 결정하고, 해삼위에서 폭탄을 반입하여 원산 광석동 야산에 묻어놓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1919년 7월 하순경, 최자남을 통해서 강우규의 방문을 받고, 그로부터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처단할 것이라는 계획을 듣자 적극 찬동했다. 그해 9월 강우규가 서울 남대문에서 폭탄을 투척했으나 사이토 마코토 처단에 실패한 뒤, 그는 곧바로 일제 경찰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북만주와 연해주 등지를 전전하며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 관헌을 습격했다.
그러던 중 원산에 있던 가족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가족과 만났다. 그러다 일본 헌병대원에게 체포되어 원산으로 압송되었고, 원산형무소에서 3년간 미결수 신분으로서 옥고를 치르다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8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함흥 형무소를 전전하다 1925년 8월에 출옥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소련군이 1945년 8월 23일 원산에 진주했을 때 소련군사령관으로부터 불려와서 협력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후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1947년 4월 월남하여 서울에서 원산시민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지만 1948년 8월 13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흥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4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