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읍
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의 읍, 대양면, 봉산면, 율곡면, 묘산면과 맞닿아 있다.
2. 지명 유래
2.1. 합천리
- 중흥동유래 : 중흥은 읍 소재지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다섯 개 동(洞) 중 가장 개발이 늦어 마을세가 약한 편이였으나, 최근에는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의 개설과 아파트의 건립등으로 상당히 발전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합천여자 중,고등학교와 선거관리위원회, 상하수도사업소, 군민공설운동장이 있고, 합천읍 상수도 정수장이 있다.
- 창동유래 : 창동마을은 중흥동과 정대동 중간 지역으로 중흥 다음으로 마을세가 약한 곳이였으나, 최근에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면서 신주거지역으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읍사무소, 우체국 등의 주요 기관이 있고, 남정초등학교와 애육원이 있다.
- 옥산동유래 : 옥산동은 읍 소재지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대가 낮고 합천천(川)을 끼고 있어 매년 우수기에는 배수 불량으로 수해피해가 잦은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군청과 객사 등이 있어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마을 북쪽 합천천변에 “옥산”이란 작은 동산이 있는데 마을 이름을 옥산으로 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옥산동에는 합천, 대양, 율곡, 용주 등 합천군민들이 이용하는 합천시장과 KT 합천지사, 종합사회복지관등이 있다.
- 정대동유래 : 정대동은 읍소재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가장 발전한 마을이였으나, 개발 할 수 있는 여지(餘地)가 없어 지금은 타 마을에 비해 발전이 뒤지는 추세에 있다. 정대동에는 합천군 농업기술센터와 강양향교가 있고, 중앙 도로변에는 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 교동유래 : 교동은 합천읍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합천리 5개동중 가장 동세(洞勢)가 크며, 유서깊은 「대야성」과 함벽루가 있고, 군청, 문화예술회관, 경찰서, 등기소 등 각급기관과 학교, 체육시설 등이 많이 모여 있다
2.2. 서산리
- 서산마을은 읍소재지 서쪽편에 접한 마을로 행정리가 단일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100여년전으로 추정되며, 당초 대부분의 주민들이 합천천(川) 건너 영창리 북산 밑에 살았는데 어느 해(연도미상)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큰 수해를 입게 되어 모두 이곳으로 이주 하였다고 하며, 당초 마을이 있던 곳에서 볼 때 서쪽 산 밑이라 하여 서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 안계마을은 원래 서산리에 속한 마을로 1966년 4월 별도 행정리로 분리 되었으며, 보통 “안지골”로 부르고 있다. 안계마을은 내안계, 외안계의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외안계(外安溪) : “바깥안지골”이라고도 하며, 합천에서 내안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내안계보다 약 1백년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 계림(溪林) : 계림마을은 새마, 굿마, 보림, 상보림, 남전동 등 5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잇고, 관내 행정리 중 자연 마을 수가 가장 많다. 조선말엽 상삼리면에 속한 지역으로 남전동 옆 골짜기에 지금의 시장격인 저자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저자골로 불리고 있다.
- 새 마 : 신촌 또는 계림이라고도 하며 관내에서 가장 마을의 역사가 짧다. 서기 1900년 가을 사천에 살던 밀양박씨 63세손인 박준제(朴俊濟)공 일가 몇 명이 처음 정착하면서 마을이 만들어졌다고 함.
- 굿 마 : 이 마을은 조선말엽부터 해방 이후까지 “노암동”으로 불렀으며, 약 120여년전 고성군 하일면에 거주하던 합천이씨 29세손인 관구(寬久)공이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앞 전답이 모두 인근의 하상보다 낮아 굼논(濕畓)이 많으므로 “굿마”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합천천 건너 산 밑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아주 불편할 뿐 아니라 조금만 비가 와도 교통이 두절되어 통행이 불가능한 실정으로 마을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한편으로는 개울건너편에 새마을이 형성되어 새마라고 부르고 이곳을 “구”마을이라 하다가 굿마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보 림(寶林) : 이 마을은 합천천을 건너 외곡리 신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남전동 옆 저자골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외곡천과 합천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매년 홍수피해가 잦은 곳이다.
- 상보림 : 이 마을은 원래 보림촌으로 불린 곳으로 오현동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450여년전으로 추정되며, 계림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보인다. 처음 마을이 들어선 것은 합천이씨 20세손인 이 대(垈)공이 현 마을 북쪽 약 50m지점 고개 넘어 보림골에 정착하였으며, 제법 많은 가구가 그곳에서 300여년을 보내다가 약 150여년 전, 전국에 유행했던 전염병으로 많은 주민이 죽고 마을이 피폐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마을 서쪽 약 1km지점 산기슭에는 일제시대 아연을 생산한 폐광이 있다.
- 남전동(南田洞) : 이 마을은 외곡천을 사이에 두고 보림과 마주하고 있다. 마을이 창건된 것은 조선말엽으로 추정되나 그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보림동에서 볼 때 서남쪽에 있어 남전동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2.3. 영창리
- 영창(盈倉) : 영창마을은 본동과 의원동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의원동(宜院洞) : 이 마을은 본동에서 서북 방향에 접하고 있으며, 일부지역은 지대가 낮아 여름철이면 가끔 홍수 피해를 입기도 한다. 마을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읍 소재지와 같이 가장 오래된 마을중의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옥산과 함께 상삼리면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합천향교(陜川鄕校)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 있던 향교는 1881년에 야로면 구정리로 이전한 후 현재까지 그곳에 있다
- 신소양(新昭陽) : 상·하동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상동(上洞, 윗마을) : 상동마을은 마을 창건 연대가 100여년 밖에 안되어 “새마” 또는 “신기”라고도 부른다. 당초 합천이씨 몇 가구가 살았는데, 이들은 마을 뒤 산 넘어 생골이라는 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광산김씨 재실인 광암재와 합천이씨 재실인 강양재 및 망덕재가 있고, 마을 뒤 골짜기에는 수질이 좋은 약수터가 있어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 하동(下洞, 아랫마을) : 예전에는 “구소양” 또는 “소양”으로 불리다가 한 때 “양정”이라고도 불리웠다. 마을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꽤 오래된 마을이다. 조선조 말 한 때는 역(驛)이 있었으나, 이곳에 있던 역을 금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광산김씨 재실인 육모재가 있고, 합천군 축협 양돈센터와 한전변전소가 있다.
2.4. 금양리
- 금양(金陽) : 본동(本洞) 하나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신소양(新昭陽) : 사동마을은 금양삼거리에서 국도 24호선을 따라 거창 방향으로 조금 가면 도로변에 상,중,하사동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 상사동(上巳洞) : “웃배암골”이라고도 하며, 관내 자연 마을 중 가장 위쪽(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작은 개울을 경계로 용계리 법정과 접하고 있으며, 이곳은 원래 옹기굴이 있던 곳으로 처음에는 “점촌”이라고 불렸는데 120여년전 삼가 덕정에 거주하던 진주 강씨들이 들어와 정착하면서“강촌”으로 부르기도 했다. 마을 앞 개울가에는 전에 물레방앗간이 있어 인근 지역의 곡식을 찧었다고 한다.
- 중사동(中巳洞) : 마을 창건 연대가 약 250여년 전 쯤으로 추정되며 , 관낸 자연마을 중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합천이씨와 파평윤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마을에는 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 127호인 주자영정을 모시는 “자양강당”이 있다.
- 하사동(下巳洞) : 금양(金陽)에서 가장 가까운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통칭“아래배암골”로 불린다. 마을이 창건 된 것은 약 200여년전 쯤, 금양마을 앞 뱀골에 살던 합천이씨 29세손인 이상필(李相弼)씨 형제가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3개 마을 모두를 사동(배암골)으로 부르는 것도 금양 뱀골에서 이주하면서 그대로 따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근대 문학가였던 이주홍(李周洪)씨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2.5. 용계리
- 용계(龍溪) : 금양삼거리에서 국도 24호선을 따라 묘산방향으로 약 4㎞가면 법정마을이 있고 여기서 우측으로 분기되는 군도를 따라 한참을 가면 만대산 기슭에 상?하 용계 2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옛날 만대산 밑에 용이 승천(昇天)했다는 깊은 소(沼)가 있는데 여기에 기인하여 “용계”라 불렀다고 한다
- 하용계(下龍溪) : 법정과 상용계 마을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 350여년 전 인동장씨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 후손들이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으며 밀양박씨와 동래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 법정(법정) : 1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2.6. 내곡리
- 내곡(內谷) : 1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소사(本洞) : 소사마을은 금양 삼거리에서 국도 제 24호선을 따라 거창방면으로 약 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사본동과 들목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있다.
들목 : 바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외곡 주민들이 출입하는 길목으로 주막형식의 취락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태종 때부터 일제시대 초기까지 두상면 소재지로써 제법 많은 주민이 살았던 곳이다
2.7. 외곡리
- 외곡(外谷) : 1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신평(新村 ) : 읍소재지에서 거창 방향인 국도 24호를 따라 약10㎞를 가면 소사 들목에 도달하게 되고 여기서 국도와 분기하여 좌측으로 내려가면 외곡마을을 지나 신평 마을에 닿게 된다. 신평마을은 신촌(新村)과 평촌(坪村) 2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신촌의 “신”자와 평촌의 “평”자를 따서 신평이라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강양군 두상면에 속하였고 외곡마을과 같이 상상리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1940년경 외곡리에서 별도 행정리로 분리되었다.
- 평촌(坪村) : 평촌마을은 주변이 대체로 넓은 들로 형성되어 “들마”라고도 불리운다. 이곳에 마을이 창건된 것은 1760년경 성산이씨 27세손 광춘(光春)공이 넓고 비옥한 토지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의 후손들이다. 또한 밀양박씨들도 가구수는 얼마되지 않지만 거의 같은 시기부터 거주한 것으로 보여진다
2.8. 장계리
- 장계(長溪) : 장계마을은 읍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8㎞떨어져 있으며 본동과 내기동,육정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있다.
- 내기동(內基洞) : “안터”라고도 부르며 앞 430여년 전 합천이씨 15세손인 계손(繼孫)공이 내곡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처음 정착한 곳은 현재 마을 약간 위 “웃터”란 곳이였는데 약 100년후 학교 옆 도로변인 “대문밖”이라는 곳으로 이주하였다가 수년 뒤 현재의 위치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는 아주 오래 된 절터가 있는데 이곳에 “장계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있는 장인초등학교는 1993년 폐교되었다.
- 육정 : 마을 창건 연대가 약 500여년 전으로 가장 오래 된 마을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합천이씨와 달성서씨 몇 가구가 지금 마을 입구인 속칭 “개밥골”하부에 터전을 이루었으나 약 70여년 전 풍수지리설에 의해 현재의 마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육정으로 부른 것은 당시 마을 주변에 여섯그루의 큰 정자나무가 있어 육정으로 불렀다고 하며 그 중 한그루는 지금도 마을 어귀에 남아있다
- 남암마을 : 남암마을은 장계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암(白岩),남옥(南玉),넘실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묘산면 사리 동편으로는 외곡리 신쳥과 경계하고 있다.
- 남옥(南玉) : 일명 “나무골”로도 불리며 약 450여년 전 함양 오씨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으나 160여년 전 유행성 전염병인 “호열자”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마을이 피폐되어 남은 사람은 읍소재지와 타지로 이사를 하였고 그 후 수년 뒤 합천이씨들과 의령 운무실에 거주하던 칠원 윤씨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넘실 : 3개 자연 마을 중 가장 역사가 짧은 마을이다. 1925년경 외곡리 신평 마을에 살던 광주인 노수용(盧秀龍)씨가 처음 단독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십수년 뒤 몇 가구가 더 들어오면서 마을 형태로 이루게 되었다
2.9. 인곡리
- 인곡(仁谷) : 인곡마을은 읍소재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을로 인덕산 밑이라 하여 인곡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본동과 영하동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있다.
- 영하동(嶺下洞) : 영하동은 본동 입구에서 서북쪽 약 2.7㎞ 떨어진 인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두리태 또는 재밑터라고도 부른다. 150여년 전 밀양손씨 40세손인 희우(希雨)공이 처음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지대에 정착하게 된 것은 당시 합천지역에서 거창이나 함양을 갈 때 지름길로서 많은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였다. 한때는 큰주막, 작은주막 등 주점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 관자 : 관자마을은 인곡리에 속한 행정리로서 갓골, 샛담, 백자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있다
- 샛담 : “새터”또는 “신촌”이라고도 부르며 1770년경 갓골에 거주하던 진주강씨 23세손인 응주(應周)공이 풍수지리설에 능하여 지금의 마을 위치가 자손이 번창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터라하여 처음 이주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단일성씨로 살고 있다.
- 백자동 : “잣마무골”이라고도 하며 개울을 사이로 곡내에서 유일하게 서편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이 창건 된 것은 약 350여년 전 조선 인조 때 서산 정씨들이 처음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대성으로 살고 있다.
3. 지역특징
읍소재지는 합천리이다. 합천읍은 합천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읍소재지를 낙동강 지류인 황강이 감싸흐르고, 관내 주요 수계는 합천천과 금양천을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든 행정기관이 합천읍에 집중해 있으며, 동쪽은 율곡면, 남쪽은 대양면과 용주면, 서쪽은 용주면과 봉산면, 북쪽은 묘산면과 경상북도 쌍림면이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도로 교통에 있어 읍소재지를 통과하고 있는 국도 제24호선과 제33호선이 전국 주요도로를 연결하는 주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생활권이 진주와 대구로 분산되어 있다. 합천읍 합천에서 유일하게 PC방, 편의점, 황강 등 놀 수 있는 곳이 많아 젋은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4. 교통
4.1. 도로교통
33번 국도와 103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2028년에 남부내륙철도가 지나갈 예정이다.
4.2. 버스교통
합천발 초계행, 삼가행, 해인사행 등 시내버스가 운행중이다. 이외에도 서울과 대구, 부산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다.
5. 교육
초등학교 - 합천초등학교 (공립), 남정초등학교 (공립)
중학교 - 합천중학교 (공립), 합천여자중학교 (사립)
고등학교 - 합천고등학교 (공립), 합천여자고등학교 (사립)
5.1. 교육환경
타 시군과 달리 교육환경은 좋지 않지만 학교규모는 항상 큰 편에 속한다.
6. 기타
[1] 22행정리 82반[2] 2020년 12월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