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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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의 제2대 왕. 금와왕의 아버지로. 삼국유사의 부여 건국 설화에 의하면 북부여를 건국한 시조 해모수의 아들이라 전해진다. 나라의 도읍을 옮겨서 동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해부루에겐 서손으로 우태가 있었는데, 그와 소서노 사이에서 백제 시조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온조 시조설에 의해 고구려를 세우는 고주몽의 아들로 알려져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여러 전승을 동시에 전하고 있으며, 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백제 왕실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 부여에서 내려온 것이 된다.
夫餘, 扶餘는 상고한어로 /*pa.la/ '빠라' 또는 /*ba.la/ '바라'로 읽었을 것으로 재구되는데, 이와 음운적 연관성이 있기에 해모수(태양신)와 마찬가지로 부여를 의인화한 관념적 인물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2. 생애
2.1. 출생
삼국유사에 따르면 하늘에서 오룡거를 타고 내려온 해모수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도읍으로 삼고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아들을 낳았다.[1]
해모수는 아들의 이름을 부루(扶婁)라 지었으며 그 성을 해(解)라 하였다. 이리하여 해씨 성과 이름을 얻게 된 해부루는 장성하여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 지어진 응제시주에 따르면 '''하나라 우임금 시절부터 살아있던 것'''으로 나온다.
2.2. 동부여 건국
그러던 어느날 신하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나타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 땅에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하라. 동해 해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지가 기름져 왕도를 세울 만하니라."'''라는 계시를 내렸다.[2]
아란불이 왕에게 이를 고하자 해부루는 이를 따라 나라의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3]
그러나 '''동부여는 이 285년 모용선비의 침입 때 일부 사람들이 수립한 체제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 근거로는 삼국지 관구검전에 북옥저를 매구(루)라고 호칭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동옥저가 미구루라고 호칭되어 있는 것과, 자치통감에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북부여가 서쪽으로 이동해 옥저와 교통이 끊어졌다'라는 기사가 있어 그 근거로 본다. '''즉, 해모수-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는 부여 4대왕은 모두 북부여의 왕이라는 것이다.'''모용선비의 침입을 받아 왕인 의려가 자살하고 자제들이 북옥저로 도망간 이후 왕자 의라가 왕위에 오르고 진나라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진서> 동이전 부여편
그러면 이 설화는 무엇인가. 가장 유력한 추정은 위 설화에서는 '국가를 통째로 버리고' 동해바다 가섭원으로 천도하고 백두산으로 추정되는 태백산에서 유화를 만났다고 나오는데 이것이 위의 피난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후대의 누군가가 조작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동부여의 건국시기, 구체적인 역사 및 위치 등은 위처럼 '후대의 조작'이라고 간단히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선 노태돈[4] 이후 동부여와 관련해서는 위 학설이 통설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고고학적, 문헌적 근거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비판적인 후속 연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우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초기 기록, 당대 금석문인 광개토왕비문에 '동부여'라는 실체가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기 어렵다. 비문에는 시조 출자지로 전하는 '북부여'와 '동부여'가 모두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부여엄리대수(夫餘奄利大水)'라고 하여 '부여'라는 명칭도 함께 기록되는 등 3가지 부여의 존재가 모두 등장하고 있다. 비문에서 시조 출자지는 북부여지만 동시에 동부여에 대해 '일찍부터 추모왕의 속민(舊是鄒牟王屬民)' 이라고 기술하여 시조 추모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5] 즉, 동부여가 285년 부여 1차멸망 당시 북옥저 지역에서 수립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원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고구려 중심의 북부여, 동부여가 등장하기 이전에 부여 중심의 북부여, 동부여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송호정[6] 은 북부여를 옛 고리국(혹은 탁리국)이 있던 송눈평원 일대로 상정한 바 있으며, 동부여와 관련해서는 동해안 일대에 실재한 국가라기보다는 '원부여'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임기환 역시 기록에 남아 있는 '북부여'와 '부여'를 동일하다고 단정하기 어려우며, 백제의 비류설화에도 해부루의 계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해부루설화가 뒤늦은 시기에 주몽설화와 결합하였다고 볼 수 없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게다가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추모왕의 북부여 출자를 내세워 고구려가 북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동부여는 추모왕의 속민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조의 출자지는 어디까지나 북부여이며, 동부여는 건국전승 내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무신왕대 정벌의 대상이 되는, 즉 추모왕의 속민인 존재였던 것이다. 따라서 추모왕-유리왕-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경쟁했던 금와-대소의 부여는 북부여가 아닌 동부여일 수 있으며, 기원전부터 동부여라는 실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초기 기록에 '동부여'와 '북부여'가 혼재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동부여 관련 기사가 후대에 조작 및 삽입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임기환의 경우 유리왕 및 대무신왕 대의 북부여를 국명이 아닌 '(고구려보다) 북쪽의 부여'로 해석하는 편이 옳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7]
2.3. 아들을 얻다
이후 해부루는 나이가 들어서도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을 고민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내 아들을 얻기를 빌었다. 그러자 해부루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어 큰 돌 앞에서 멈추어 서더니 눈물을 흘렸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해부루가 돌을 치워보니 그 아래에 황금빛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있었다. 해부루는 이 아이를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아들이라 하면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는 태자로 삼았다.
2.4. 죽음과 사후
해부루왕이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해부루 왕이 죽은 후에 그 아들인 금와왕이 부여의 재위에 올라 부여를 다스렸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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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주몽에서는 배우 박근형이 연기하였다. 극중 해부루 왕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한나라와 화친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해모수가 해부루 왕의 아버지라는 것은 모순으로 취급되어 잘렸다. 그래서인지 아들인 금와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고조선 부흥군을 이끄는 해모수와 의기투합하자 이를 굉장히 못마땅해하는 듯한 모습도 드러난다.
[1] 홀승골성(오녀산성)은 훗날 주몽이 졸본으로 탈출해 고구려를 세울 때 도읍지로 삼았던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고구려 건국 신화와 부여 건국 신화가 겹치는 부분이 많은 이유는 훗날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하면서 그 건국 신화가 융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2] 물론 고대의 이런 기록들이 그러하듯 후대각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3] 삼국유사 동부여 편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지만 북부여 편에서는 단순히 상제의 명령을 받아 해부루 왕이 도읍을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 동부여 편에서는 천제의 계시에 나오는 천제의 자손이 바로 동명성왕이었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4] 「부여국 경역과 그 변천」,『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495쪽.[5] 임기환,「고구려 건국전승의 시조 출자와 북부여, 동부여」, 2016.[6] 「동부여에 대한 고찰」,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 59쪽. [7] 「고구려 건국전승의 시조 출자와 북부여, 동부여」, 2016, 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