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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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추홀에 터를 잡은 비류국의 유일한 국왕. 삼국시대의 인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동명성왕 고주몽의 아들 혹은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優台)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의 형.
비류의 기록은 백제 본기 0년에 온조의 건국과 함께 등장하는데 건국 상황을 묘사한 2개의 기록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아래 2개의 기록은 서로 뒤섞여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1번의 기록이 먼저 나온 다음 일운(一云, 혹은)을 붙이고 다음 2번 기록이 전개되기 때문에 본래는 전혀 다른 출전을 가진 2개의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모두 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2개의 기록은 어떤 한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기는 한데 관점이 상당히 다르다. 애초에 형제의 혈통을 기록한 부분이 전혀 다르며 소서노의 존재를 명확하게 언급하는 것도 후자의 문헌 뿐이다. 현대에 우리가 소서노의 이름을 알고 그녀의 역할이 컸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는 후자의 문헌에 있다.
후자는 "시조 비류왕"이라고 시작한다. 비류를 백제의 초대 왕으로 보는 관점이 되는 셈이다. 세부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어 비류가 온조에게 남하를 권유했다든가 미추홀은 정착하기 부적합하다든가 하는 내용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비류가 자결하는 장면이 없다. 온조가 백제의 시조라는 설화는 이래저래해서 비류는 실패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반면 비류 설화는 이래저래해서 비류라는 분이 우리 백제의 시조가 되셨다는 내용인 것.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비류 설화가 먼저 쓰였고 이후 온조 세력이 비류 세력을 흡수하며 비류 설화를 참조하여 온조 설화가 쓰였고 이는 비류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과 온조로 대표되는 농업 세력 간의 갈등에서 농업 세력이 끝내 승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3] . 비류백제가 독자적으로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재야 측의 주장이라 큰 의미는 없다.
2. 삼국사기 - 온조 시조설
시조 온조왕(始祖 溫祚王)
아버지는 동명성왕 고주몽이고 어머니는 졸본부여(卒本扶餘)왕의 세 딸 중 1명이다. 동명성왕이 유리명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자 비류는 온조와 더불어 남하한다.
비류는 한산(漢山)에 올라가 지형을 보다가 바닷가에 터전을 잡으려고 했지만 형제를 따라온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는 비류에게 반대하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바닷가인 미추홀(彌鄒忽, 인천광역시)에 도읍하고 온조는 10명의 신하 의견을 받아들여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물이 짜고 습해서 이 때문에 농사도 안 되는 통에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위례성에 돌아와 보니 백성들은 평안하고 도읍이 안정되어 있어서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자살한다. 이후 비류의 백성들도 위례성으로 와서 온조왕에게 귀부한다.
3. 삼국사기 - 비류 시조설
시조 비류왕(始祖 沸流王)
아버지는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인 우태(優台)이며 어머니는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이다. 나중에 과부가 된 소서노를 동명성왕 고주몽이 아내로 맞아 비류와 온조 형제도 친아들처럼 대했으나 역시 유리명왕 고유류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자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의 시조가 된다.
전자의 문헌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남하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쪽에서는 비류가 동생 온조를 설득하여 남하를 주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미추홀은 정착하기에 부적합했다는 내용이 없다.
4. 삼국유사
삼국유사에서는 『고전기(古典記) 』라는 사서를 인용하는데 여기서도 주몽의 셋째라고 기록 되어있다.
『고전기(古典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이다.】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5.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에서는 한국의 고대 사서인 『기로기(耆老記)』를 인용한 대목에서 백제의 건국이 등장하는데 이 기록에는 비류와 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6. 비류왕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
비류는 이름이 비슷한 비류왕의 활동연대를 앞당겨 만들었을 것이라 보는 가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해부루(解扶婁)의 후손 우태(優台)와 그 아들인 비류는 비류왕이 모델이며 해모수(解慕漱)의 후손 고주몽(高朱蒙)과 그 아들인 온조는 근초고왕이 모델이었는데 근초고왕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나라를 강성하게 하여 자신을 관념상 시조인 온조왕과 동일시하자 사관을 재구성하면서 온조 시조설이 비류 시조설을 제치고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비류는 바로 비류국의 비류와 '''한자까지 똑같다.''' 온조왕이 백제의 순우리말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를 응용해 비류 또한 비류국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해석한 것. 참고로 비류국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비류는 고구려에 합병된 후 비류나부(연노부)라는 이름으로 개칭되는데 한동안 전왕족으로서의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7. 창작물에서의 비류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 소서노와 우태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우태 사후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여 고구려의 왕자가 된다.
8. 둘러보기
[1] 삼국사기.[2] 해동고승전.[3] 사실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다는 등의 내용은 농사에 부적합하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농업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곳에 정착했으니 망할 수 밖에였을 뿐. 이보다 안습한 지역에 정착하여 크게 성공한 경우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들 수 있다. 베네치아 역시 이전에는 미개발지에 가까웠던데다 5세기경 석호에 살던 원주민들과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에게 쫓긴 북쪽 도시인들이 합심해 세운 뒤 본격적으로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들이 주인격이었던 동로마 제국에게서 벗어난 뒤에 역으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정도로 성공한 것은 약 12세기 이후에나 가능했다. 농경 사회인데다 딱히 해외와의 교역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의 해안 지역은 당시로서는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비슷한 예로 신라 역시 당항성을 점령한 이후에 중국과의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