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楷書
한자 서체의 일종. 대중들이 흔히 아는 한자의 모양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서체이기 때문에 정체(正體)라고도 한다. 이 서체를 구사한 유명한 서예가로는 당나라 때의 구양순, 안진경 등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아는 한자의 모양이 시작된 것은 해서 그 이전에 쓰인 진나라(秦) 서체 예서(隸書)[1] 부터지만, 예서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옆으로 퍼져있다. 그런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해서는 그냥 예서가 세로로 퍼진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2] 사실 가로로 납작한 예서가 표준이고 예서를 세로로 길게 늘린 게 해서라는 표현이 맞는데 이는 예서가 개발된 시기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서가 나타난 전한 시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종이라는 물건이 없었고 기록물은 아주 중요한 기록은 비단에, 그렇지 않은 일반 기록은 죽간에 글씨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비단도 그렇고 죽간이라도 해도 생산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정보를 수록하려면 글자를 구겨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는 세로쓰기가 표준이라 당연히 글자의 높이를 찌그러트려서 많은 글자를 기록할 공간을 확보해야 했던 것. 현대의 가로쓰기에서 한줄에 최대한 글자를 욱여넣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장평을 세로로 길쭉하게 조정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종이가 발명되어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고 기록용지의 생산단가가 비약적으로 내려가면서 균형잡힌 글자체인 행서, 해서가 나오게 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해서는 예서와 완전히 동떨어진 새로운 서체라기보단 이전부터 사용해오던 예서를 세월이 지나며 발전하고 변형시킨 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측(점), 늑(가로획), 노(세로획), 즉(갈고리), 책(오른 삐침), 양(긴 왼 삐침), 탁(짧은 삐침), 책(파임)이 기본글자이다. 길 영(永)자에 이 8가지가 전부 나와있다 해서 이것을 영자팔법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해서의 시조는 삼국지연의를 읽어봤거나 코에이 삼국지 게임을 좋아한다면 아주 익숙할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인 종요[3] 로 본다. 종요의 서체에서 예서가 해서로 변해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체로서의 해서는 동진시대 왕희지에 의해 정리된 후 육조시대를 거쳐 당나라에 와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육조시대의 해서와 당 이후의 해서는 서체의 모양에 차이가 있는데[4]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의 한자 모양은 당나라 이후의 것이다.
여담으로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예 실력이 봐 줄만 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해서,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당대의 대가로 유명한 일중 김충현 선생(1921~2006)을 선생으로 모시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글씨, 관련 칼럼.[5]
한자 서체의 일종. 대중들이 흔히 아는 한자의 모양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서체이기 때문에 정체(正體)라고도 한다. 이 서체를 구사한 유명한 서예가로는 당나라 때의 구양순, 안진경 등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아는 한자의 모양이 시작된 것은 해서 그 이전에 쓰인 진나라(秦) 서체 예서(隸書)[1] 부터지만, 예서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옆으로 퍼져있다. 그런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해서는 그냥 예서가 세로로 퍼진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2] 사실 가로로 납작한 예서가 표준이고 예서를 세로로 길게 늘린 게 해서라는 표현이 맞는데 이는 예서가 개발된 시기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서가 나타난 전한 시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종이라는 물건이 없었고 기록물은 아주 중요한 기록은 비단에, 그렇지 않은 일반 기록은 죽간에 글씨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비단도 그렇고 죽간이라도 해도 생산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정보를 수록하려면 글자를 구겨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는 세로쓰기가 표준이라 당연히 글자의 높이를 찌그러트려서 많은 글자를 기록할 공간을 확보해야 했던 것. 현대의 가로쓰기에서 한줄에 최대한 글자를 욱여넣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장평을 세로로 길쭉하게 조정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종이가 발명되어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고 기록용지의 생산단가가 비약적으로 내려가면서 균형잡힌 글자체인 행서, 해서가 나오게 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해서는 예서와 완전히 동떨어진 새로운 서체라기보단 이전부터 사용해오던 예서를 세월이 지나며 발전하고 변형시킨 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측(점), 늑(가로획), 노(세로획), 즉(갈고리), 책(오른 삐침), 양(긴 왼 삐침), 탁(짧은 삐침), 책(파임)이 기본글자이다. 길 영(永)자에 이 8가지가 전부 나와있다 해서 이것을 영자팔법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해서의 시조는 삼국지연의를 읽어봤거나 코에이 삼국지 게임을 좋아한다면 아주 익숙할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인 종요[3] 로 본다. 종요의 서체에서 예서가 해서로 변해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체로서의 해서는 동진시대 왕희지에 의해 정리된 후 육조시대를 거쳐 당나라에 와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육조시대의 해서와 당 이후의 해서는 서체의 모양에 차이가 있는데[4]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의 한자 모양은 당나라 이후의 것이다.
여담으로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예 실력이 봐 줄만 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해서,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당대의 대가로 유명한 일중 김충현 선생(1921~2006)을 선생으로 모시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글씨, 관련 칼럼.[5]
[1] 그러나 실제로 예서가 널리 사용된 것은 한나라(전한)에 와서이다. 예서가 발생한 것은 진시황 때의 정막이라는 사람에 의해서라고 알려져있기는 하나 당대에는 진시황의 명령으로 전서, 그중에서도 대전을 간략화 시킨 소전(小篆), 즉 전서를 국가의 통일 서체로 삼고 있었다. 예서 항목에도 쓰여있지만 정막이 빵(...)에 간 이유가 국가 통일서체인 소전을 안 쓰고 자기가 만든 예서를 써서라는 설이 있을 정도.[2] 물론 상세하게 들어가면 명확하게 차이가 있다. 가령 역입-장봉의 원칙은 유지하되 운필과 형태에는 차이가 있다거나 하는.[3] 잘 모른다면 '''종회의 아버지'''정도로만 알면 된다.[4] 그래서 당대 이전의 해서체를 '육조체', 혹은 고형 해서로 유명한 '장맹룡비'를 세운 북위의 이름을 따 '북위체'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5] #1, #2 이 포스팅들도 읽어 보자. 나름대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