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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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隷書)
진(통일왕조)대에 나온 소전체를 편하게 쓰기 위하여 다시 간추린 서체로, 드디어 현재 한자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서체. 전서체를 소박하게 간추린 글씨로, 예서에서 본격적으로 해서, 행서, 초서의 모체가 나왔다. [2]
진시황 시대에 정막(程邈)이라는 인물이 10여 년을 연구하여 예서 3천 자를 만들어 진시황에게 진상했다고 사서에 나온다. 일설에는 정막은 옥리였다가 진시황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는데 감옥 안에서 예서를 만들어 바친 공으로 사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투옥된 이유가 국가공인 서체(...)인 소전을 사용하지 않고 사적으로 예서를 만들어 써서라는 썰도 있어서 좀 미묘. 정막의 예서 창제설이 사실이라면 예서와 소전은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노예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쉬운 서체' 라는 뜻에서 예서라고 이름 붙였다는 말도 있고 정막이 죄수 신분일 적에 만든 서체라 예서라고 이름 붙였다는 말도 있지만 정설은 없다.
예서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때는 전한시대. 전한시대에는 고예의 모습이 세련되게 정리되어 팔분(八分), 혹은 한예(漢隷)라는 서체가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예서체로 예스러운 멋을 풍긴다. 전후한 시대를 관통하는 서체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그린 영상물 등에서 예서를 자주 볼 수 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등에서 예서체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특유의 반듯하고 고풍스러운 디자인 덕분에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서체이다. 서예가 가장 발달한 한중일에서 한국에는 유독 예서를 배우는 사람이 많다. 추사 김정희 이후로 예서가 극도로 예술적인 경지를 이루고 한반도 서예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으로, 전서를 예서로 바꾸는 과정에서 서로 관련이 없었던 글자의 형태가 수렴되는 오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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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대표적인 예서작품인 조전비의 탁본. 후한 영제 중평 2년(185)에 만들어진 비석으로, 돈황 사람 조전(曹全)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삼국지 좋아하는 위키러라면 눈에 익었을 법한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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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도 예서로 쓰인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졸하고 강건한 멋이 있는 고예를 사용했다.


[1] 추사 김정희의 현판.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 적혀있다. 다만 이 작품은 전통적인 예서라기보다는 예서에 기반하여 김정희의 독특한 서풍이 많이 가미된 스타일.[2] 참고로 행->해->초 순서대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