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와다이 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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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시에 위치한 야구장으로, 과거 니시테츠 - 타이헤이요 클럽 -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의 홈구장으로 쓰였으나 1979년 구단이 세이부에게 매각되어 사이타마로 연고이전 한 뒤 지방경기 용도로 쓰이다가 5~60년대 라이온즈와 퍼시픽리그 우승을 다투던 라이벌 난카이 호크스가 다이에에게 인수된 뒤 오사카에서 후쿠오카로 연고이전하면서 이 구장을 사용했다.
구 일본 육군 부대 부지에 건설됐으며 1950년에 일본프로야구에 참가하기 시작한 니시테츠 클리퍼스(퍼시픽리그)와 니시니폰 파이리츠(센트럴리그)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51년에 두 팀이 합병해서 니시테츠 라이온즈(퍼시픽리그)로 다시 출범했으며 이 구장을 계속 홈구장으로 삼았다. 개장 당시에는 조명시설이 없었으나 1954년에 조명시설을 설치했다.
1953년 8월 29일, 강타자 나카니시 후토시가 헤이와다이 구장의 백스크린을 훨씬 넘는 비거리 160미터(추정)의 홈런을날린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니시테츠는 토요다 야스미츠, 오시타 히로시, 이나오 가즈히사, 오기 아키라 등 투-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1956~1958년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1958년은 3연패 후 4연승을 거두며 리버스 스윕을 달성했다. 이후 개축 공사를 실시하여 잔디 좌석에 모두 스탠드를 설치했다. 1958년 일본시리즈에서 이나오가 맹활약했는데 어느 팬은 구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며 '하나님, 부처님, 이나오님'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1963년 니시테츠 시대 마지막 우승 이후(일본시리즈에선 교진군에게 패배) 점점 팀은 약체화되었으며, 결정적으로 1969년에 터진 검은 안개 사건에 의해 니시테츠 라이온즈 팀의 많은 선수들이 영구제명 등의 처분을 받은 계기로 팀이 개발살나면서 결국 모기업이던 니시테츠는 1972년 구단 운영을 포기해버린다. 그 뒤 1973년 전 롯데 오리온즈 구단 소유자 나카무라 나가요시가 구단을 인수했고 명명권 판매 방식으로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1973~1976년),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1977~1978년)이란 이름으로 팀명을 바꿔가며 계속 존속해왔지만 명명권+나카무라의 사재로 운영되는 팀 경영엔 한계가 많았고, 성적 하락 및 관중수 감소 및 수익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78년 라이온즈 구단이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사이타마의 도코로자와로 떠나 버렸고, 후쿠오카 팬들은 연고팀을 잃은 상실감에 빠졌다.
1979년에는 천연잔디를 인조잔디로 교체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이후 연고팀은 없지만 프로야구 지방경기 용도로 주로 쓰였고, 니시테츠를 상징하는 에이스 이나오 카즈히사가 1984년 롯데 오리온즈 감독으로 취임 시 내건 조건은 미래에 홈구장을 당시의 가와사키 구장에서 이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은 1986년 이나오가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고 1991년 롯데가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름을 바꾸고 치바로 연고이전하며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8년 9월, 난카이 호크스가 다이에에 인수되면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바꾸고 후쿠오카로 이전하면서 홈구장을 오사카 구장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다.[1] 그 후 1993년 후쿠오카 돔이 완성되기 전까지 사용했다.
1987년 말 신라, 당의 사신을 접대했던 고대 유적 코로칸(鴻臚館)의 유적이 구장의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유적 발굴 추진과 동시에 이 곳을 역사 공원으로 재정비할 계획을 수립했다. 1992년을 끝으로 다이에 호크스가 무려 자비를 때려박아가며 후쿠오카 돔으로 홈구장을 바꾸며[2] 프로야구 경기가 더 이상 치뤄지는 일은 없었으며, 그 이후로 고시엔 후쿠오카 지역 예선 경기에 사용되다가 1997년에 완전 폐쇄 후 외야쪽만 남기고 철거됐다. 외야쪽 부분은 2000년대까지 남아있다가 2005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붕괴의 위험성이 대두되어 2007년 12월 ~ 2008년 4월에 철거를 완료,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이 구장 부지에는 코로칸 유적 안내문이 세워져 있으며, 근처에 니시테츠 OB 선수들이 세운 기념비가 남아있다(2002년 건립).
나카니시 후토시가 술회하길 "그라운드의 흙이 배수가 잘 돼서 수비하기 쉬웠다. 그러나 벤치에는 악취가 풍겼다. 시에서 구장을 관리해서 마음대로 개조할 수 없고, 탈의실과 목욕탕이 생긴 것은 일본시리즈 3연패 그 뒤였다. 그래도 전국에서 처음으로 우천 연습장을 만든 것은 미하라 오사무감독님이다. 지금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제일 먼저 시작한 건 니시테츠였으며 미하라 감독님이었다"라고 했다.
이나오 가즈히사감독과 가네다 마사이치감독이 짜고 연출한 원한 게임(일명 "하카타에는 피의 비가 내린다")의 장소였다. 실제로 이 두 감독은 사이가 좋아 사전에 협조를 요청하여 연출한 것인데 이를 모르는 팬들을 자극하여 양 팀 팬덤의 충돌을 빚어내고 말았다.
라이온스 외골수로 통산 251승을 기록한 투수 히가시오 오사무는 "헤이와다이 시절에 피칭한 기쁨이 더 컸다.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다"고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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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후쿠오카시에 위치한 야구장으로, 과거 니시테츠 - 타이헤이요 클럽 -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의 홈구장으로 쓰였으나 1979년 구단이 세이부에게 매각되어 사이타마로 연고이전 한 뒤 지방경기 용도로 쓰이다가 5~60년대 라이온즈와 퍼시픽리그 우승을 다투던 라이벌 난카이 호크스가 다이에에게 인수된 뒤 오사카에서 후쿠오카로 연고이전하면서 이 구장을 사용했다.
2. 역사
구 일본 육군 부대 부지에 건설됐으며 1950년에 일본프로야구에 참가하기 시작한 니시테츠 클리퍼스(퍼시픽리그)와 니시니폰 파이리츠(센트럴리그)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51년에 두 팀이 합병해서 니시테츠 라이온즈(퍼시픽리그)로 다시 출범했으며 이 구장을 계속 홈구장으로 삼았다. 개장 당시에는 조명시설이 없었으나 1954년에 조명시설을 설치했다.
1953년 8월 29일, 강타자 나카니시 후토시가 헤이와다이 구장의 백스크린을 훨씬 넘는 비거리 160미터(추정)의 홈런을날린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니시테츠는 토요다 야스미츠, 오시타 히로시, 이나오 가즈히사, 오기 아키라 등 투-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1956~1958년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1958년은 3연패 후 4연승을 거두며 리버스 스윕을 달성했다. 이후 개축 공사를 실시하여 잔디 좌석에 모두 스탠드를 설치했다. 1958년 일본시리즈에서 이나오가 맹활약했는데 어느 팬은 구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며 '하나님, 부처님, 이나오님'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1963년 니시테츠 시대 마지막 우승 이후(일본시리즈에선 교진군에게 패배) 점점 팀은 약체화되었으며, 결정적으로 1969년에 터진 검은 안개 사건에 의해 니시테츠 라이온즈 팀의 많은 선수들이 영구제명 등의 처분을 받은 계기로 팀이 개발살나면서 결국 모기업이던 니시테츠는 1972년 구단 운영을 포기해버린다. 그 뒤 1973년 전 롯데 오리온즈 구단 소유자 나카무라 나가요시가 구단을 인수했고 명명권 판매 방식으로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1973~1976년),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1977~1978년)이란 이름으로 팀명을 바꿔가며 계속 존속해왔지만 명명권+나카무라의 사재로 운영되는 팀 경영엔 한계가 많았고, 성적 하락 및 관중수 감소 및 수익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78년 라이온즈 구단이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사이타마의 도코로자와로 떠나 버렸고, 후쿠오카 팬들은 연고팀을 잃은 상실감에 빠졌다.
1979년에는 천연잔디를 인조잔디로 교체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이후 연고팀은 없지만 프로야구 지방경기 용도로 주로 쓰였고, 니시테츠를 상징하는 에이스 이나오 카즈히사가 1984년 롯데 오리온즈 감독으로 취임 시 내건 조건은 미래에 홈구장을 당시의 가와사키 구장에서 이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은 1986년 이나오가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고 1991년 롯데가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름을 바꾸고 치바로 연고이전하며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8년 9월, 난카이 호크스가 다이에에 인수되면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바꾸고 후쿠오카로 이전하면서 홈구장을 오사카 구장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다.[1] 그 후 1993년 후쿠오카 돔이 완성되기 전까지 사용했다.
3. 철거
1987년 말 신라, 당의 사신을 접대했던 고대 유적 코로칸(鴻臚館)의 유적이 구장의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유적 발굴 추진과 동시에 이 곳을 역사 공원으로 재정비할 계획을 수립했다. 1992년을 끝으로 다이에 호크스가 무려 자비를 때려박아가며 후쿠오카 돔으로 홈구장을 바꾸며[2] 프로야구 경기가 더 이상 치뤄지는 일은 없었으며, 그 이후로 고시엔 후쿠오카 지역 예선 경기에 사용되다가 1997년에 완전 폐쇄 후 외야쪽만 남기고 철거됐다. 외야쪽 부분은 2000년대까지 남아있다가 2005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붕괴의 위험성이 대두되어 2007년 12월 ~ 2008년 4월에 철거를 완료,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이 구장 부지에는 코로칸 유적 안내문이 세워져 있으며, 근처에 니시테츠 OB 선수들이 세운 기념비가 남아있다(2002년 건립).
4. 여담
나카니시 후토시가 술회하길 "그라운드의 흙이 배수가 잘 돼서 수비하기 쉬웠다. 그러나 벤치에는 악취가 풍겼다. 시에서 구장을 관리해서 마음대로 개조할 수 없고, 탈의실과 목욕탕이 생긴 것은 일본시리즈 3연패 그 뒤였다. 그래도 전국에서 처음으로 우천 연습장을 만든 것은 미하라 오사무감독님이다. 지금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제일 먼저 시작한 건 니시테츠였으며 미하라 감독님이었다"라고 했다.
이나오 가즈히사감독과 가네다 마사이치감독이 짜고 연출한 원한 게임(일명 "하카타에는 피의 비가 내린다")의 장소였다. 실제로 이 두 감독은 사이가 좋아 사전에 협조를 요청하여 연출한 것인데 이를 모르는 팬들을 자극하여 양 팀 팬덤의 충돌을 빚어내고 말았다.
라이온스 외골수로 통산 251승을 기록한 투수 히가시오 오사무는 "헤이와다이 시절에 피칭한 기쁨이 더 컸다.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다"고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