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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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사이타마현으로 195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총 3번의 일본시리즈 3연패로 왕조를 구축했던 퍼시픽 리그 전통의 명문팀이다.[5] ''' 특히 80년대 ~ 90년대 라이온스는 이 기간동안에만 퍼시픽 리그 우승 9회, 일본 시리즈 우승 8회를 달성하며 요미우리의 V9 시대에 버금가는 왕조를 구축했었다. '''23회 퍼시픽 리그 우승, 1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일본야구 그 자체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음가는 성적으로 퍼시픽 리그에서는 최근에 떠오르는 강호인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제외하면 독보적인 기록이다.
한국 언론에는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세이부 라이온즈'라고 쓰지만, 매체 등에서는 '세이부', '사이타마 세이부' 식으로 쓴다. 하지만 그냥 일반적으로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저 식으로 부르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굳이 귀찮게 사이타마까지 붙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2. 역사
2.1. 니시테츠 시절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1949년 창단하고 1950년 양대리그제 시행 이후 후쿠오카의 헤이와다이 구장[6] 을 연고지로 한 니시테츠 클리퍼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같은 후쿠오카의 센트럴리그 구단 니시닛폰 파이리츠와 합병하여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었다. 애초에 후쿠오카 정도의 지방도시에 야구팀이 두 개나 있는게 무리였으나, 당초에는 철도회사인 서일본철도와 신문사인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의 합작으로 후쿠오카의 단일연고팀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센트럴리그, 퍼시픽리그 중 어느 리그에 속할 것인가를 두고 두 회사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결국 따로따로 팀을 창단했고 결국 1년만에 니시닛폰이 GG를 치고 니시테츠와 합병하여 퍼시픽리그 소속이 되었다. 1950~60년대의 강팀으로 군림하면서 1956~1958년에는 명감독 미하라 오사무. 명투수 이나오 카즈히사와 강타자 오시타 히로시, 나카니시 후토시의 활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물리치고 일본시리즈 3연패를 차지했다.
그 후 1963년 리그 우승을 끝으로[7]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원래 지방 사철이 모기업이라 재정도 넉넉하지 않은데다 당시 비인기팀들이 모여있던 퍼시픽리그 소속에 소규모 지방도시를 홈으로 쓰는 덕분에 관중동원도 여의치 않아 팀의 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프로야구 최악의 흑역사인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전들 대부분이 줄줄이 구속→영구제명 크리를 먹어 팀이 순식간에 약체화되었고, 그 때문에 니시테츠가 더이상 팀을 유지할 수 없어서 1972년 구단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2.2. 고난의 시기: 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시절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8]
이후의 사정은 '''현대 유니콘스와 우리/서울/넥센/키움 히어로즈가 짬뽕된듯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니시테쓰는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단에서 손을 떼면서 기시 노부스케의 비서이자 롯데 오리온즈의 구단주였던 나카무라 나가요시[9] 에게 구단 매각을 의뢰했는데,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직접 '''후쿠오카 베이스볼(주)'''라는 구단 운영법인을 만들어 팀을 인수하고 팀 운영비는 롯데 오리온즈 시절처럼 팀의 명칭을 팔아 조달했다.
이렇게 해서 스폰서의 변천에 따라 1973년 다이헤이요 클럽(太平洋クラブ)라이온즈[10][11] , 1977년 크라운 라이터[12]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꾸면서 라이온즈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롯데와는 달리 라이온즈의 스폰서로 나선 기업들은 업종을 보면 알겠지만 프로야구 구단을 인수할만한 능력은 전혀 되지 않아서 이 당시의 라이온즈는 키움 히어로즈 창단 이후 2년간과 거의 비슷한 안습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13] 1976년에 MLB 명장이던 레오 듀로처를 영전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미덥지 못한 스폰서의 쥐꼬리만한 재정지원으로 강팀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팀의 막장화만 가속되었다. 끝내 얼마 안되는 스폰서 자금과 나카무라의 개인 인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GG를 치고 팀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있을때 한 줄기 빛과 같은 광명이 비추었으니 당시 부동산, 사철 재벌로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세이부 그룹이 구단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후쿠오카의 시민들도 든든한 구단주를 얻어서 옛 영광을 다시 재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세이부가 관심을 표명했을 때만 해도 이것이 일본판 현대 유니콘스, 아니 현대 유니콘스의 선구자적 사건이 될 줄은...'''
2.3. 세이부의 인수
2.3.1. 1980년대 황금기
1978년 말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구단을 인수할 것을 표명했다.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프랜차이즈를 인수하기 전에 두 차례나 야구단 스폰서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나눠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일본야구연맹(JBL)에 참여했던 도쿄 세네터스(東京セネタース)-츠바사군(翼軍)의 재정적 스폰서를 해줬다.[14] 당시 귀족원 의원이었던 아리마 요리야스와 세이부 그룹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너터스가 재건에 실패하자 1970년대에는 다이요 훼일스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건립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다이요의 2대 주주로 경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이부는 구단인수의 조건에 자신들이 한창 부동산 개발중이던 도쿄 근교의 사이타마로의 이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철인 도쿄-사이타마 지방의 세이부 철도를 기반으로 하는 세이부 그룹에게 있어서 거의 적자가 안 발생하는게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스포츠단인 라이온즈를 그나마 적자가 최대한 안 나게 운영하고, 연고지 주변 지역의 관중을 끌어들어 수익을 올리려면 반드시 사철이 자리잡은 곳 근처에 스포츠단 연고지를 두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애초에 간토 도쿄-사이타마 및 간사이 시가[15] 지방의 세이부가 드럽게 멀리 떨어진, 자기네 철도도 안 다니는 큐슈 후쿠오카 지방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게 넌센스였다. 당장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가 왜 해체되었는 질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온다.
그 조건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팀 해체밖에는 길이 없었던 라이온즈 구단으로서는 무조건 조건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팀은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후쿠오카를 떠나 사이타마로 이전했고, 후쿠오카의 팬들은 옛 영광의 재현은커녕 크나큰 상실감만 맛보아야 했다. 결국 후쿠오카는 1989년 서로 죽이지 않고는 못살던 예전의 라이벌 호크스가 후쿠오카 이전을 발표할 때까지 무려 10년동안의 세월을 연고팀 없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세이부에게 인수된 뒤 인기 만화였던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를 마스코트로 삼았다. 레오의 일러스트는 실제로 테즈카 오사무에게 저작권료를 주고 정식으로 사용권을 승인받았다. [16] 후쿠오카에서 도쿄 근교로 이전해 오면서 일단 기존 팬층은 개척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만화주인공을 마스코트로 해서 어린이들부터 공략하자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공략당한 어린이들이 밑에서 기술한 세이부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3, 40대 성인으로 성장한 지금 세이부 팬층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계약이 끝난 2009년부터 이 로고는 폐기되고[17] 클래식 유니폼 데이 때만 일 단위로 계약하고 있다.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뀐 이래,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팬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일념하에 구단주인 츠츠미 요시아키는 감독 겸 관리부장(GM 역할)이던 네모토 리쿠오(1982년부터는 관리부장 직에만 전념)에게 구단 운영의 전권을 위임했고, 네모토는 각종 방법을 동원[18] 하여 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19] 결국 이러한 전력 보강 등을 이어간 끝에 1982년, 팀은 드디어 퍼시픽리그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플레이오프 에서도 후기리그 우승팀 닛폰햄 파이터즈를 격파하며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루고[20] 뒤이어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격파. 24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룩하며 그 결실을 이루어냈다. 그 뒤로부터 1992년까지 10여년의 기간, 그러니까 1980년대~1990년대 초반 동안은 가히 세이부의 황금시대, 왕조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세이부는 이시게 히로미치-츠지 하츠히코 키스톤과 아키야마 코지-키요하라 카즈히로-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일명 AKD 클린업 트리오, 모리의 계승자 이토 쓰토무가 버티는 백스톱까지 갖춘 철벽 야수진을 갖췄고, 투수진에는 와타나베 히사노부-쿠도 키미야스 원투펀치에 '오리엔탈 특급' 곽태원(궈타이위안, 카쿠 타이겐)가 선발진에 버티고 있고 구원진에는 카토리 요시타카.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건재했다. 이 시기 세이부는 V9 시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버금가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강 전력의 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명장 모리 마사아키의 지도 아래 이 기간만 '''리그 우승 9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리그 우승으로 일본시리즈 진출 후 패한 경우는 한신 타이거즈의 양대리그제 실시 이후 현재까지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인 1985년... 리그 우승을 못한 경우는 1984년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1위 자리를 내준 경우와[21] 1989년의 긴테츠 버팔로즈에게 리그 3번째 우승을 헌납한 경우.[22]
그렇게 해서 세이부(西武) 라이온즈로 30년 가까이 이어졌으나, 인기도 떨어지고 모기업 세이부 철도의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자 2008년 지역 이미지 부각을 위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되었다. 도쿄에 미련이 남아있던 세이부 그룹으로서는 끝까지 사이타마라는 명칭의 사용을 거부해왔으나(이것도 수도권의 수원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끝까지 서울 연고를 포기하지 않은 한국의 현대 유니콘스와도 비슷하다.) 결국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팬베이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도쿄 중심부가 아닌 사이타마의 베드타운 지역에 형성된 탓에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오죽 사이타마라는 명칭을 쓰기 싫었으면 세이부(西武)라는 명칭은 과거 전국시대의 도쿄와 그 주변지역을 의미하는 무사시노(「武」蔵野)의 서부지역을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주장하며[23] 본거지와 팬베이스가 도쿄의 서부지역이니 세이부라는 명칭도 지역명칭이라는 해석을 굳이 강조하면서까지 사이타마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면서 버텼다.[24]
2.3.2. 황금시대 이후 ~ 2012년 시즌
1992년 이후 세이부 황금시대 주역들이 노쇠하거나 타 팀으로 트레이드[25] 및 주축 선수들의 FA(자유계약선수) 선언[26] 으로 1980년대의 황금기는 끝난다...라고는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도 세이부는 여전히 파리그의 강호였고, 첫번째 리그 우승을 이룬 1982년부터 2007년[27] 까지 B클래스로 떨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단지 문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 해서 그렇지.''' 모리 마사아키의 뒤를 이어 팀을 맡은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이 지휘한 1997~1998년에는 2년 연속으로 파리그 우승을 하였지만, 당시 일본시리즈에서는 각각 노무라 카츠야의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 이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제4대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명 유격수 마쓰이 카즈오, 대형 슬러거 알렉스 카브레라 등이 투타의 기둥으로 활약하면서 이하라 하루키 감독 지휘 하에서 2002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오랜 기간의 감독 수업을 거친 이토 츠토무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4년에는 정규시즌에 2위를 하였으나 플레이오프를 통해 닛폰햄과 다이에를 차례대로 꺾고 리그 우승을 하고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와 7차전 까지 가는 접전 끝에 1992년 이후 12년만에 다시 일본시리즈를 우승하게 된다.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이 지휘한 2008년 시즌에는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대결하여 4승 3패를 기록,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신인 니시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1950년 2리그제 시행 후 현재까지 리그 21회, 일본시리즈 14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엠블렘, 홈 덕아웃 위치(1루에서 3루로), 유니폼을 변경하고 출발한 2009년에는 B클래스를 기록하였고 2010년에는 퍼시픽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PS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패배하며 탈락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2011년과 2012년에서 UTU을 하다가 각각 2011 클라이맥스 2스테이지에서, 2012클라이맥스 1스테이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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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아노하나의 배경이 사이타마라서 정식으로 콜라보하여 이런 이미지도 나왔다.
2.3.3. 모기업의 위기와 매각위기
모기업인 고쿠도[28] 의 경영 부진이 계속되자 세이부 구단도 점점 살림을 줄여나갔고 2004년 세이부 돔과 2군 구단의 명명권을 인보이스에 매각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2004년 긴테츠-오릭스 구단 합병으로 일본 야구계 재편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세이부 구단도 치바 롯데, 니혼햄 파이터즈, 다이에 호크스 4개 구단과 합병을 논의하였으나 니혼햄 파이터즈는 삿포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합병에서 발을 빼고 롯데 마린즈와 다이에 호크스도 세이부가 아닌 서로 간의 양자 합병을 모색하게 되면서 세이부의 합병 시도는 무산되었다.[29]
이후 세이부 철도의 뇌물공여 및 유가증권 허위기재 등 비리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결국 상장폐지까지 되자 세이부 그룹에서는 구단 매각 방침을 세웠고 긴테츠 인수, 신구단 창단 등에서 연달아 물을 먹은 라이브도어에서 적극적으로 인수의사를 밝히면서 순조롭게 매각협상이 진행되나 싶었지만 200억~250억에 이르는 구단 인수비용과 세이부 돔을 반드시 사용해야한다는 조건 때문에 인수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세이부 그룹에서는 매각을 포기하게 된다.
2.3.4. 2013년 시즌 이후
3. 홈구장
니시테츠로부터 구단을 인수한 후 메트라이프 돔을 홈구장으로 쓰고있다. 세이부 연선과 유원지에 있어 구장에 올 때 자차 이동이 아니라면 세이부 철도 이용이 강제되는 구장이다. 문제는 세이부 철도는 오미야 쪽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것.[30] 그래서 주중과 주말 관중편차가 크다.
그 외에 사이타마현영 오미야공원 야구장이 제2홈구장이다. 여기선 1년에 3경기 정도 치른다.
4.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
5. 2군 시설 및 클럽하우스
세이부 제2구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공단에 있는 컨테이너 기숙사나 군부대의 BEQ처럼 생겼'''었'''다(...) 안습했던 세이부의 선수 기숙사 현지에서는 도호쿠 대지진 등으로 집을 통째로 날린 이재민들을 수용하는 가설주택이라고 까였'''었'''다. 사진에는 안 나와있지만 세이부 돔 안에 있는 1군 라커룸도 안습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한 때 구리기로 유명했던 요코하마 스타디움만 하더라도 DeNA가 구단을 인수한 후로 적극적인 투자의 일환으로 대대적으로 개수가 이루어져 지금은 메이저리그가 부럽지 않은 클럽하우스가 됐는데 이 팀의 클럽하우스는 팬들로부터 "만화가게냐"라면서 까였'''었'''을 정도.
츠츠미 일가가 그룹 총수자리에서 야구단에 아낌없이 투자하던 80년대만 하더라도 선수들이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12개 구단 중에서 손꼽히는 시설이었으나 츠츠미 일가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뗀 이후로는 시설이 낡아가는데도 그냥 방치하는 바람에 현재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중 열악한 쪽으로 선두를 다투는 기숙사, 훈련 시설이 되어버'''렸'''다. [31] 경영주체가 바뀐 이후로 모기업인 세이부 측에서 야구단을 짐짝으로 보고 있는 시선이 많아지다 보니[32] 제대로 된 개/보수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홈구장인 세이부 돔의 개/보수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키시 타카유키의 FA 이적, 세이부 선수단의 집단 성명 등이 이어지자 그제서야 공조 시설 확충 등의 시설 개선을 하였다.
그리고 2017년 시즌 종료 이후 세이부돔과 2군 시설, 기숙사 시설 리모델링에 180억 엔을 투자해 2021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다. 2019년 7월 현재 스토어샵, 실내 연습장, 기숙사가 최신 시설로 완비되어있는 상태. 기사+탐방 동영상
6. 이모저모
- KBO 리그 키움 히어로즈가 하고 있는 네이밍 마케팅의 원조가 바로 이 팀이다. 다이헤이요 클럽과 4년, 크라운 라이터와 2년간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네이밍 마케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후에 세이부 철도가 인수,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뀌게 되었다. 이 팀의 2군도 한때는 명명권 계약으로 2005~2006년까지는 인보이스(インボイス), 2007년에는 굿 윌(グッドウィル)과 계약을 맺어서 팀명을 변경했다가 2008년에 계약종료 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뀌었다.
- 2015년까지 일본시리즈에서 홈 경기로 스윕 승리를 맞이한 유일한 구단이다.(1990년 일본시리즈) 나머지 4연승의 4번째 경기는 전부 원정 경기에서 나왔다.
- 최후의 9인 선발제 일본시리즈 우승 구단이다. 1986년 히로시마를 꺾고 우승했으며, 1987년부터 홈구장 엔트리 규칙을 따른다고 바뀌었다.
- 팀명에 '사이타마'라는 지역명이 들어가 있으나 정작 사이타마는 시즈오카와 함께 '일본 축구의 성지' 라고 불릴 정도로 축구의 인기가 야구보다 압도적으로 높다[33] . 실제로도 사이타마 현에서 세이부는 현대 유니콘스보다는 아주 조금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34] [35] [36] 2010년대 들어서 지역밀착 마케팅, 2008년부터 시작한 오미야구장 홈경기, 2017~2018 시즌의 호성적으로 인해 세이부 구단의 홍보물이 오미야역 근처에도 걸리는 등 사이타마현 동부지역에서도 인기가 늘어나는 중. # 실제로 우승을 차지한 2018시즌에는 구름관중이 모여들었다.
- 역사적으로 드래프트에서 제비를 잘 뽑는 팀이기도 하다.[37] 특히 일본프로야구의 판도를 바꿀만한 초대형 신인[38] 이 나오는 해의 경우 유난히 제비를 잘 뽑아서 팀 전력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예로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있고[39] 2009년에도 6팀의 경쟁을 뚫고 코시엔 여름 대회에서 154km/h를 뿌린 좌완 투수인 기쿠치 유세이를 뽑아내는 강운을 과시했다. 2010년에도 또다기 6구단 경합이 벌어진 와세다 대학의 마무리 투수였던 오오이시 타츠야를 한방에 뽑아서 2년연속 6개 구단경합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40][41] 확률로 보면 2.7%. 이정도 되면 사기같다(...). 그리고 이 드래프트 1픽 운은 2010년대 들어서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가져갔다.
- 반면 2017년 종료 시점에서 FA 제도로 15명의 선수를 유출하며 일본프로야구에 FA 제도가 도입된 이후 가장 많은 선수를 유출한 구단이기도 하다. FA 제도 도입 초창기에 이시게 히로미치, 쿠도 키미야스, 키요하라 카즈히로 등 황금시대의 주역들을 정리하던 시기가 있었고 2000년대에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와쿠이 히데아키, 호아시 카즈유키, 키시 타카유키, 노가미 료마 등 주축 선발투수들, 토요다 키요시, 마키타 가즈히사 등 불펜 투수, 마쓰이 가즈오, 카타오카 야스유키, 나카지마 히로유키 등의 주축 야수 등 국내건 해외건 유출이 많았다. 노후화된 시설, 돔구장 전환 이후 선수들에게 쾌적하지 못한 구장 환경과 구단의 좋지 않은 경영 사정이 맞물린 결과라는 이야기가 있다.
- 노모 히데오가 나왔던 1989년[42] 과 다르빗슈 유가 나왔던 2004년[43] 의 경우에는 아예 지명자체를 하지 않아서 제비뽑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지명을 안 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뽑겠다고 달려들면 사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제비뽑기운이 좋은 팀이다.
- 80년대 황금시대에 보여줬던 퍼시픽리그의 끝판왕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교류전 성적은 신통치 않다. 2017년 현재 교류전 통산 승률은 5할을 살짝넘는 정도로 12개 구단 중 정확하게 중간인 6위이고, 교류전 우승은 한 차례도 없다. 저정도면 본전치기는 한 게 아니냐고 생각도 할 수 있겠으나 교류전이 워낙 퍼시픽 리그가 센트럴 리그를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되어온지라 상대적으로 부진한 편. 실제로 퍼시픽 리그 내로만 따지면 리그 내 4위에 해당하고 2~3위권인 롯데와 닛폰햄과는 통산 승수에서 10승 정도 차이가 나고 5위인 오릭스와도 얼마 차이가 안 나는 성적이라 교류전에서 별로 재미를 못 봤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 왠지 2000년대 말부터 몇 년 간은 '중간계투가 불을 지르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니코니코 동화 같은 곳에서는 '세이부의 중간계투'라는 전용 태그가 따로 있으며, 2군에서는 통하는데 1군에서는 중요한 순간에 볼질에 불만 지르는 중간계투의 모습을 풍자한 '우리들'(俺達, 오레타치)라는 네타가 정리되기도 했다.오레타치 그래도 이 네타가 처음 등장한 2010년대 초반 즈음에는 와쿠이, 키시, 마키타 등 우수한 선발들이 있기라도 했는데 산적타선으로 다시 강팀으로 올라선 2018~19년엔 옛날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를 연상시키는 타고투저의 팀이 되어서... 중간계투 뿐만 아니라 선발진도 키쿠치 유세이가 메이저로 간 2019년에는 폭망하면서 2020년에는 12구단 중 유일하게 개막 투수이자 1선발로 외국인 선수(잭 닐)을 내세웠다(...)[44]
- 유달리 보복성, 고의성 빈볼 및 사구(死球)가 많은 팀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빈볼 공세는 후쿠오카 시절 말기~세이부 인수 초창기 팀의 에이스였던 히가시오 오사무의 전매특허였고, 히가시오가 1990년대 중~후반 7년동안 감독을 맡으면서 투수들을 육성한 영향도 어느정도 있다. 문제는 이 팀의 배터리가 대체적으로 이러한 빈볼투구를 비신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대팀의 심리를 흔들기 위한 전략의 일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히가시오와 배터리를 이룬 이토, 선수시절 선후배로서 히가시오로부터 이러한 투구술을 배운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차례차례로 감독을 맡으면서 "몸쪽 공을 공략 못하거나 못 피하고 맞는 쪽이 기술이 없는 것"이라는 식의 태도가 코칭스탭과 선수뿐만 아니라 팬들 사이에까지 만연해 있다. 또한 팀에 입단하는 투수들에게 신인시절부터 그러한 인식을 주입시켜오기 때문에 이 팀의 투수들이 대체적으로 빈볼에 대한 죄의식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그 결과, 2012년에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FA를 선언하고 라이벌 팀에 입단한 호소카와 토오루에게 4번연속으로 상반신에 140km 볼을 던졌지만, 이를 호소카와가 모두 회피해 결국 포볼로 진출시킨적도 있다.[45] 또한 오릭스와 사이가 안좋을때는 오릭스 타자에게 예고 빈볼을 맞춘후 사과도 안하고 당당하게 퇴장해 빈축을 산적도 있고, 홈런 세레모니가 요란한 모 타자는 세레모니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빈볼을 맞은 적도 있다. 또한 한이닝에 빈볼을 3연발을 한적도 있어서 상대팀이 항의하러 뛰어나오자 세이부 팬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세이부 선수들은 씩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힌바 있다. 이상 나열한건 일부 사례일 뿐이고 수개월의 한번씩 매번 다른구단과 고의사구(死球)로 벤치 클리어링을 벌이고 있다. 2013년 6월 라쿠텐의 앤드류 존스에게 고의사구로 벤치클리어링을 유발했고, 2010년 닛폰햄전에서는 연전중 3명을 고의사구로 병원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인상이 그냥 인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수치상으로도 드러나는데 실제로 2014~2017 4시즌 동안 팀 최다 사구 1위를 3번이나 기록했으며 그 중에서도 2번은 2위와 상당한 차이가 나는 1위이다.
- 우승이 귀한 센트럴리그 두 팀의 위안거리로 세이부가 두들겨맞는 거 다시 보기라는 말이 있다. 양 팀 모두 세이부를 꺾은 게 마지막 일본제패였기 때문. 또한 퍼시픽 리그에서는 유이하게[46] 센트럴리그 6팀과 최소 한번씩[47] 시리즈에서 맞붙어본 적이 있는 팀이기도 하다. [48]
- 2017년 기준으로 과거 9년간 홈 구장에서 6번이나 우승을 허용한 전적이 있다. 특정 구장에서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를 치를 확률이하고 해봐야 크게 잡아야 1/6인데 이것 또한 엄청난 확률이다. 18년은 본인이 우승하여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끝...인 줄 알았으나 홈에서 일본시리즈 진출을 허용했다.
- 전술한 우승 허용 전적 외에도, 1985년 일본시리즈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허용해 한신팬들에게는 인터리그 세이부 원정경기 동안 세이부돔 1루부터 3루까지 한신팬들로 꽉꽉 찰 정도로 세이부돔이 성지 [49] 취급받는 중. 2013 인터리그 롯코오로시 2018 인터리그에서도 1루를 가득 메운 한신 팬들이 롯코오로시를 합창하였다.[50] [51]
- 묘하게 8로 끝나는 해에는 우승 아니면 팀 역사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창단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8로 끝나는 해인 1958년에는 이나오 가즈히사를 앞세운 기적의 리버스 스윕으로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1968년에는 5위에 그쳤는데 그 다음 해에 검은 안개 사건이 터지는 등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된 해였다. 하지만 이 해 드래프트에서 히가시오 오사무를 지명하며 훗날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는 유망주를 발굴하기도 하였다. 1978년은 세이부 그룹이 구단을 인수해서 후쿠오카에서 사이타마로 이전하고 세이부 라이온즈로서 출범한 해이다. 세이부가 구단을 인수한 이후로는 매년 무슨 일이 있어도 8로 끝나는 해에는 최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에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1패로 꺾고 1958년 이후 30년만에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고, 1998년에도 리그우승을 차지했으나 이 해에는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무릎을 꿇었다. 2008년에는 그 직전해 25년 연속 A클래스의 기록이 중단되고 B클래스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성적으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해서 하라 감독이 나믿승믿(...)을 시전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탈환했다. 그 후 10년동안 우승과는 인연이 없다가 2018년에도 시즌 전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선두로 나서 10년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한편 현재의 구단 역사와는 관계 없지만 1948년엔 옛 모기업이었던 서일본 철도 소속 사회인야구팀이 도시대항야구대회[52]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6.1. 마스코트
예전에 쓰던 로고는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를 로고 겸 마스코트로 사용했다. 지금은 마스코트만 레오와 라이나로 사용중.
이에 대해서 나오는 이야기중 유명한 것이 데즈카 오사무가 자신은 마스코트로 판쟈를 그렸는데, 세이부 라이온즈 측에서 멋대로 레오라고 주장한다더라하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일본위키백과에서도 언급은 하지만 출처제시가 안되는 부분이고, 세이부는 레오라고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정글대제 출판본을 기준으로 보면 '''미묘하게 다르게 생겼다''' 같은 이야기를 제외하고 보면, 판쟈와 레오의 외모 차이를 두는 부분은 '''귀 끝의 검은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물론 판쟈의 귀끝도 검게 그리는 예가 없지는 않지만[53] , 전집을 포함해서 둘의 차이를 둘 때는 판쟈는 그야말로 순백으로 그려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마스코트는 판쟈보다는 레오의 성체 버전일 가능성이 높다...기 보다는 판쟈라는 근거가 저 카더라와 느낌적 느낌 밖에 없다. 사실 이런 것 다 필요없이 세이부 측이 레오라고 사용하고 있고, 이름 들어가는 부분은 다 레오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마스코트는 레오가 맞다.
프로야구 초창기 삼성라이온즈 어린이 회원 점퍼의 마스코트가 저 마스코트를 약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수준에서 모방한 것이었다. 어느 어린이 회원은 삼성 라이온즈 점퍼를 입고 민속촌에 갔다가 일본 관광객들이 '세이부 라이온즈네' 하는 바람에 약간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팀명을 바꾸면서 사이타마현 캐릭터인 코바톤을 비공식 마스코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6.2. 팬덤
유니폼 교체 이후 응원문화가 점차 바뀌고 있다. 과거 1루 외야 홈 시절엔 작은 배트를 사용한 비교적 전통적 응원이었는데, 서포터즈들은 배트를 놓고 손뼉응원을 많이 하고 있으며, 한 손으로 드는 작은 깃발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거기다 게이트기도 심심찮게 보여 축구장이 다 되어가고 있다. 누가 응원으로 경쟁하는 팀 아니랄까봐 롯데처럼 점프 응원도 즐겨 한다. 그러나 응원콜을 좋아해서 응원가를 안 부르는 타석도 많은 롯데와는 다르게 응원가를 많이 부르며 선발 라인업 발표 직후에 모든 선수의 응원가를 한번씩 불러주는 것도 여전히 하고 있다.(롯데는 현재 선발 라인업 발표 후에 응원가를 불러주지 않는다.)
2013년에 비교적 가까운 치바 롯데 마린즈와 라이벌전을 선포하고 양 측 홈에서 3연전을 [54] '사이타마 vs 치바 라이벌 시리즈'로 각 한번씩 치뤘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클라이맥스 퍼스트에서 도호쿠행 티켓을 놓고 붙게 되었다. [55]
간사이권에서 다른 부, 현은 한신 인기가 가장 많은 데 비해 시가현에 팬이 상당히 많다. 세이부 계열 오미 철도가 있고, 세이부 그룹의 발상지가 시가현이기 때문. 기사
참고로 응원단 멤버 중 테드 스미스가 있다.
7. 유니폼
8. 주요 선수들
8.1. 현역
8.1.1. 감독 및 코치
- 85. 츠지 하츠히코 : 1군 감독
- 83. 바바 도시후미 : 1군 작전겸수비•주루코치
- 74. 니시구치 후미야 : 1군 투수코치
- 81. 토요다 키요시 : 1군 투수코치
- 84. 아키모토 코우사쿠 : 1군 배터리코치
- 76. 아베 마사히로 : 1군 타격코치
- 86. 아카다 쇼우고: 1군 타격코치
- 87. 쿠로다 사토시 : 1군 내야수비•주루코치
- 79. 오젠키 타츠야 :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 77. 마츠이 카즈오 : 2군 감독
- 92. 키요가와 에이진 : 2군 팜 투수종합코치
- 90. 스기야마 켄토 : 2군 투수코치
- 91. 쇼우 민치에 : 2군 투수코치
- 82. 노다 코우스케 : 2군 배터리코치
- 80. 시마 시겐노부 : 2군 타격코치
- 75. 타카기 히로유키 : 2군 내야수비겸 주루코치
- 70. 사토 토모아키 : 2군 외야수비겸 주루코치
- 88. 우에모토 타츠유키 : 2군 육성코치
- 71. 타나베 노리오 :3군 총괄코치
- 93. 아오키 하야토 : 3군 투수코치
8.1.2. 투수
- 11. 이마이 타츠야 : 98회 고시엔 우승투수 출신의 우완 영건 에이스
- 12. 와타나베 유타로
- 13. 타카하시 코나
- 14. 마스다 타츠시 : 2020년 마무리 투수.
- 15. 미야가와 렌
- 16. 마쓰자카 다이스케
- 17. 마츠모토 와타루
- 18. 타와타 신사부로
- 19. 사이토 히로마사
- 20. 하마야 슈타
- 21. 토가메 켄
- 22. 나카츠카 슌타
- 23. 노다 쇼고 : 2020년 현재 일본 최단신 투수. 좌완 원포인트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56]
- 25. 히라이 카츠노리 : 2019년 81경기에 등판하며 퍼시픽 리그 단일 시즌 최다 등판 기록을 갈아치웠다. 결국 2020년에는 추격조로 강등당했고 여기서도 작년보다 좋지 못하다.
- 26. 아와츠 카이토
- 27. 우츠미 테츠야 : 2009년 WBC에서 이용규에게 헤드샷을 던진 것으로 유명하다.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요미우리서 활약하다 2019년에 세이부로 이적했으나, 시범경기 외에는 1군 등판기록이 없다.
- 28. 모리와키 료스케
- 29. 오가와 류야
- 30. 에노키다 다이키
- 33.리드 개럿 : 평균구속 155km/h의 강속구 불펜용병. 2020년 8월 8일 최고구속인 시속 162키로미터를 기록하였다.
- 34. 사노 야스오
- 36. 이토 쇼
- 40. 타무라 이치로
- 41. 이노우에 히로키
- 44. 요자 카이토: 언더핸드 선발투수. 직구 평균 구속이 120대 중후반이다.
- 45. 혼다 케이스케[57]
- 47. 마츠오카 코우키
- 48. 타케쿠마 쇼타
- 49. 노린 : 2020년 새 용병인데 개막하고 1달 반이 되도록 2군에 있다.
- 50. 나카즈카 슌타
- 54. 잭 닐 : 2019 시즌에 11승 1패[58] 라는, 그 궈타이위안에 필적하는 성적을 거둔 우완 에이스.
- 57. 코쿠바 츠바사
- 61. 타이라 카이마
- 64. 우에마 토와
- 66. 아이우치 마코토 : 2012 드래프트 2위로 입단한 2군 에이스(...)
- 67. 후지타 코키
8.1.3. 포수
- 2. 오카다 마사토시 : 모리 토모야의 오사카토인고교 선배인데 후배에게 밀려서 백업포수 전용이다.
- 10. 모리 토모야
- 37. 쓰게 세나
- 38. 마키노 쇼야
- 62. 코마즈키 히토토 : 백업 포수도 밀려서 외야수와 포수를 왔다갔다하던 선수. 2019년 데뷔 8년만에 1군을 밟았다.
8.1.4. 내야수
- 0. 미즈구치 다이치 : 현 일본 최단신 선수 (163cm) 주로 대주자 및 대수비 역할을 맡고 있다.
- 3. 야마카와 호타카 : 2020시즌부터 세이부 거포의 상징 번호인 3번을 달게 된다.
- 4. 야마노베 카케루
- 5. 토노사키 슈타 : 2017 시즌엔 주로 외야수로 출전, 내외야 전천후로 활약 중. 2019년부터는 주전 2루수로 출전하며 20-20을 달성하는 등 아사무라의 공백을 잘 메워줬다. 2017 APBC에서 최우수 선수상을 받는 등, 국가대표에도 그 전천후성을 인정받아 자주 거론되곤 한다. 친가가 아오모리 현에서 사과농장을 해 홈런을 치면 '애플 펀치'라는 세레모니를 한다.
- 6. 겐다 소스케 : 17년 데뷔시즌에 유격수로 전경기 출전, 역대 신인 최다안타 4위인 155안타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을 획득한 유망주. 참고로 1998년 이래 무려 19년만에 나온 퍼시픽리그 야수 신인왕이다.[59] 그리고 데뷔 경기부터 299경기를 풀타임으로 연속 출장했다.[60]
- 31. 사토 류세이
- 32. 나가에 쿄헤이
- 39. 우녠팅 : 대만에서 유학, 다이이치공업대학 졸업
- 49. 타이싱어 브랜든 타이가 : 2020년 드래프트에서 6라운드로 지명한 미국 혼혈 대졸 내야수. 이름이 엄청나게 길다. 타이가(大河)는 미들네임이고 성이 타이싱어, 이름이 브랜든이라고 한다. 즉 미국식 이름은 브랜든 타이가 타이싱어. 미들네임을 빼자면 브랜든 타이싱어. 이름 길이만 놓고 보면 다른 선수들의 2배이다(...).[61]
- 52. 야마다 하루카
- 60. 나카무라 다케야
- 99. 에르네스트 메히아
8.1.5. 외야수
- 1. 쿠리야마 타쿠미 : 18년째 세이부의 타선을 책임져 준 베테랑 외야수. 최근에는 지명타자로 주로 출전하고 있다. 라이온즈 통산 최다 안타 기록 보유 중.
- 7. 카네코 유지 : 2016년, 2019년 도루왕. 발군의 주력을 자랑하지만 타격이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다. 재일교포라는 썰이 있으나 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근거는 없다.[62]
- 9. 기무라 후미카즈 : 5툴 플레이어 외야 노망주. 2019년에는 주전 우익수를 차지했으나 컨택의 부족으로 2할 초반을 겨우 기록했다. 원래는 투수 출신으로 4시즌 41경기 1승 4패 1홀드를 기록하며 어느정도 출장기록도 있었으나 결국 타자로 전향.
- 22. 코리 스팬젠버그: 내외야 전 포지션을 소화 가능한 유틸리티 용병.
- 46. 스즈키 쇼헤이
- 53. 타케다 아이토 - 등록명 "아이토"
- 58. 쿠마시로 마사토 : 내외야 전포지션을 소화하는 유틸리티 백업... 이지만 그보다는 경기 전 선수들에게 훈화(...)를 하는 등 팀 내 분위기 메이커로 맹활약중이다.
- 65. 토가와 다이스케
- 72. 카와고에 세이지
- 73. 타카기 와타루
8.2. OB[63]
8.2.1. 투수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1970년 영구제명 당했다가 2005년 복권되었다. 이나오 카즈히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받았지만 불상사로 인해 불과 24세의 나이에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 히가시오 오사무 (1969 - 1988)
니시테츠 시절부터 다이헤이요 클럽, 크라운라이터, 세이부 시대까지 살아남은 유이한 프랜차이즈 선수.
- 가토 하지메 (1972 - 1975)
- 나가이 타모츠 (1974 - 1986)
- 하마우라 토루 (1974 - 1980)
- 사오토메 유타카 (1976 - 1981)
- 쿠라모치 아키라 (1977 - 1978)
- 모리 시게카즈 (1979 - 1988)
- 마츠누마 히로히사 (1979 - 1990)
- 마츠누마 마사유키 (1979 - 1989)
- 후루사와 켄지 (1979 - 1982)
- 고바야시 세이지 (1981 -1983)
- 스기모토 타다시 (1981 - 1984)
- 쿠도 키미야스 (1982 - 1994, 2010)
- 에나츠 유타카 (1984)
- 와타나베 히사노부 (1984 - 1997)
- 곽태원[64] (1985 - 1997)
- 이시이 타케히로 (1989 - 1997)
- 카토리 요시타카 (1990 - 1997)
- 시오자키 테츠야 (1990 - 2004)
- 토요다 키요시 (1993 - 2005)
- 하시모토 타케히로 (1994 - 2002)
- 이시이 타카시 (1994 - 2007)
- 니시구치 후미야 (1995 - 2015)
일본판 Mr. Almost. 노히트 노런 달성 기회를 총 3번 놓쳤는데, 그 중 한 경기는 9회 3아웃까지 퍼펙트 피칭을 하고도 타선이 점수를 뽑지 못해 10회까지 넘어가서 안타를 맞았기에 노히터와 함께 퍼펙트 게임도 깨진 경우였다.(...) 게다가 그 세 경기 모두 세이부 홈경기였다는 것이 두 배로 슬픈 우연. 아무튼 오랜 기간 세이부의 프랜차이즈 에이스로 활약했고, 사와무라상도 한 번 타고 통산 182승을 거둔 훌륭한 선발 투수였다. 현재 세이부 코칭스텝으로 활동중이다.
- 모리 신지 (1997 - 2005)
- 데니 토모리 (1997–2002)[65]
- 호시노 토모키 (1999 - 2012)
- 오누마 코지 (2001 - 2010)
- 쉬밍지에 (2001 - 2011)
- 호아시 카즈유키 (2001 - 2011)
- 장즈자 (2002 - 2006)
- 오노데라 치카라 (2003 - 2011)
- 와쿠이 히데아키 (2005 - 2013)
- 알렉스 그라만 (2006 - 2011)
- 키시 타카유키 (2007 - 2016)
- 이시이 카즈히사 (2008 - 2013)
- 오카모토 신야 (2008 - 2009)
- 노가미 료마 (2009 - 2018)
- 오이시 타츠야 (2011 - 2019)[66]
- 마키타 가즈히사 (2011 - 2017)
- 데니스 사파테 (2013)
- 마이클 보우덴 (2014)
- 궈쥔린 (2015 - 2019)
- 앤디 밴 헤켄 (2016)
- 알렉시스 칸델라리오(2017)[67]
- 스테판 파이프 (2017)
- 파비오 카스티요 (2018 - 2019)
- 타카기 하야토 (2018 - 2019)
8.2.2. 포수
- 노무라 카츠야 (1979 - 1980)
- 이토 쓰토무 (1982 - 2003)
2012년 두산 베어스 수석코치로 지낸 그 이토 맞다. 라이온즈 프렌차이즈 사상 최고의 포수하면 떠오르는 인물. 선수시절 수많은 리그우승은 물론 일본시리즈 재패에도 큰 기여를했으며 2012년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로 재임하기도 했다. 당시 최재훈을 발굴해냈으며 한국에선 이토센세라고 불렸다. 2013년 지바롯데로 떠나 2019년에 주니치 수석코치가 되며 2021년 현재까지 주니치 코치로서 생활하고 있다.
멘도사 라인의 수비형 포수. 그러나 의외로 거포 스타일이라서 전성기 때는 15홈런 정도 쳤다. 물론 홈런만 치지 컨택 선구안 모두 쓰레기라 전형적인 공갈포였었다. FA로 세이부를 떠난 후에도 여러 팀을 거쳐오면서 2019년에도 뛰는 중. 물론 지금은 한국나이로 40세라 장타툴마저 사라졌다.
- 스미타니 긴지로 (2006-2018)
일본의 제프 매티스. 철벽수비를 자랑하지만 타율은 진짜 NPB에서도 역대급 멘도사 타격이다. 3000타석을 넘게 나왔는데 통산 타/출/장이 2/2/2에 OPS가 5할대 중반으로, 그 정도 타석을 소화한 선수로서는 일본 야구 사상 손꼽힐 정도의 암울한 타격을 보여주었으며 세이부 시절로만 한정하면 그 기간 찍은 OPS와 홈런 수(.3455타석 OPS .532, 31홈런)가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의 그것(2054타석 OPS .525 38홈런)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는 선배인 호소카와 토오루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암울한 공격력. 호소카와가 FA를 선언하고 소뱅으로 이적한 이후 8년째 주전포수 하고 있는 데 8년 동안 100안타를 친 해가 없고 타율도 2할 1푼만 찍어줘도 고마운 수준이다. 거기다가 장타력도 풀 시즌 뛰어서 홈런 5개 칠까말까한 수준에 3할을 넘긴 해가 거의 없으며, 볼삼비는 에르네스토 메히아보다 안 좋으니[68] ... 하지만 수비력만큼은 NPB 최강이라서 주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해온데다 국가대표까지 승선했다. 사실 이런 모습은 2005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을 때의 평가와는 전혀 딴판인데 드래프트 때는 수비와 투수리드는 뛰어나지만 공격이 안 되는 호소카와 때문에 고교 통산 48홈런의 공격형 포수의 소질을 보고서 스미타니를 지명한 거였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상기한대로 흘러갔고, 2018년 시즌부터는 그래도 포수 수비가 가능한 정도로까지 성장한 공격형 포수 유망주 모리 토모야에게 완전히 주전자리를 뺏기고 백업으로 밀려났으며 오프시즌에 바로 FA를 통해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냉정하게 크보나 대만야구 와도 수비형 포수할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요미우리에 이적하자 무슨 보약을 먹었는지 58경기에서 2할 6푼의 타율에 6홈런, OPS .723을 기록하며 갑자기 쓸만한 타격을 보여주었다.
8.2.3. 내야수
- 나카니시 후토시 (1952 - 1969)
- 토요다 야스미츠 (1953 - 1962)
- 오기 아키라 (1954 - 1967)
- 모토이 미츠오 (1967 - 1978)
- 이하라 하루키 (1971 - 1975, 1978 - 1980)
- 마유미 아키노부 (1973 - 1978)
최후의 후쿠오카 연고지 시절 라이온즈 선수.
1983, 84년 연속으로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차지하고 81~85년 4년 연속 규정타석 3할 타율을 기록한 정교한 중장거리 타자였다.
2014 ~ 2015년 SK 와이번스의 코칭스태프로 일했고 2015년에는 SK의 2군 감독을 맡았다.
- 츠지 하츠히코 (1984 - 1995)
- 타나베 노리오 (1985 - 1999)
- 키요하라 카즈히로 (1986 - 1996)
- 스즈키 켄 (1988 - 2002)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1989 - 1992, 1995)
- 나라하라 히로시 (1991 - 1997)
- 쿠로다 사토시 (1993 - 2001)
- 마쓰이 가즈오 (1994 - 2003, 2018) - 1998년 퍼시픽리그 MVP.
- 다카기 히로유키 (1995 - 2008)
- 도밍고 마르티네스 (1997 - 1998)
- 토니 페르난데스 (2000)
- 나카지마 히로유키 (2001 - 2012)
- 알렉스 카브레라 (2001 - 2007)
일본진출 2년차에 오 사다하루. 터피 로즈와 타이기록이자 당시 단일시즌 최다 홈런이었던 55홈런을 때려낸 것을 포함해 세이부에서만 273홈런을 쏘아올린 베네수엘라 출신의 우타거포 1루수로 라이온즈 사상 최강의 외국인 선수,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하나로 꼽힌다. 비공식 기록으로 추정치 180m 비거리의 홈런을 때려낸 적도 있는 괴력과 우람한 체격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선수. 다만 2007년 미첼 리포트에 이름이 거론되고, 2014년에는 멕시코 윈터리그에서 뛰던 도중 도핑이 적발되어 리그에서 영구제명된 적도 있는[69] 일본프로야구의 펠릭스 호세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일단 일본에서 뛰던 시절에 약물검사에 걸린적은 없다지만...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하고 통산 320도루를 기록한 발빠른 2루수였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로 FA 이적했고 그곳에서 은퇴. 현재는 요미우리의 내야수비주루 코치를 맡는 중.
NPB의 외국인 타자로는 드문 유형인 쌕쌕이 유틸리티 내야수. 한자릿수 홈런에도 불구하고 세이부에 있던 2년 연속으로 40도루를 기록하고 2013년에는 .413의 출루율로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출루능력도 있었던 리드오프맨으로 활약했다.
- 코디 랜섬 (2014)
선수로서의 활약은 별볼일 없었지만, 이 선수를 위해 응원단이 미국 흑인 가스펠인 Joshua Fit the Battle of Jericho를 갖고 만들었던 응원가가 엄청난 중독성을 자랑해서 그 응원가 하나만으로 지금까지도 간간히 거론되곤 한다. 인도 볼리우드 영화의 마쌀라 군무 씬에 합성. 위화감이 없다. 2017년 올스타전 경기 후 퍼시픽리그 팬들이 부르는 영상.
8.2.4. 외야수
히가시오 오사무와 마찬가지로 니시테츠 시절부터 다이헤이요 클럽, 크라운라이터, 세이부 시대까지 살아남은 유이한 프랜차이즈 선수
- 도이 마사히로 (1975 - 1981)
- 백인천 (1975 - 1976)
- 송재박 (1975 - 1982)
- 홍문종 (1976 - 1980)
- 타치바나 요시이에 (1977 - 1991)
- 코노 준키(홍순기) (1980 - 1984)
- 아키야마 코지 (1981 - 1993)
- 아베 오사무 (1981 - 1996)
- 카나모리 에이지 (1982 - 1988)
- 하뉴다 타다카츠 (1983 - 1997)
- 타오 야스시 (1985 - 1986)
- 조지 부코비치 (1986 - 1987)
- 요시타케 하루키 (1987 - 1996)
- 타일러 반 바클레오 (1988 - 1990)
일본 첫 시즌에 700만엔이라는 엄청 낮은 연봉에도 불구 38홈런에 OPS 1.024라는 대박 가성비 활약을 펼치며 아키야마-키요하라를 잇는 'AKB'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었다. 이후엔 첫 시즌만큼의 활약은 못 하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트레이드된 뒤 그곳에서 일본 생활을 마감. 은퇴 후엔 오랫동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코치를 맡고 있는 중이다.
- 히라노 켄 (1988 - 1993)
츠지와 함께 전성기 테이블 세터를 보던 스위치 히터 외야수. 주니치의 주전 중견수였으나 젊은 히코노 토시카츠 등에 밀려 트레이드로 세이부에 왔다.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수비력, 빈틈없는 작전 수행과 주루능력을 보여주며 아주 쏠쏠히 써먹었다. 은퇴 후KIA 타이거즈에서 타격코치를 지내기도 했다.
아키야마 코지와의 '세기의 트레이드'로 세이부에 입단한, 난카이 말기~다이에 초창기 호크스를 대표하는 호타준족의 프랜차이즈 외야수였다.
- 오제키 타츠야 (1995 - 2005)
- 카와다 유스케 (1996 - 2002)
- 시미즈 마사지 (1996 - 2002)
- 오오토모 스스무 (1996 - 2004)
- 와다 카즈히로 (1997 - 2007)
사회인야구를 거쳐 포수로 입단했으나 특히 수비에서 더딘 성장세를 보이며 이토 츠토무 등의 기라성같은 선수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20대 후반까지도 자리를 잡지 못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외야수로 포지션을 전향한 뒤 타격 재능이 대폭발, 정교함과 파워를 겸비하며 3할-30홈런을 꾸준히 찍는 퍼시픽리그 대표 우타 슬러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2007년 오프시즌에 주니치 드래곤즈로 FA 이적한 뒤에도 페이스를 이어갔으며 특히 2010년에는 38세의 나이로 타율 .339 37홈런 93타점 OPS 1.061(리그 최고)의 호성적을 찍고 리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어 센트럴리그 MVP[70] 가 되고 최종적으로는 2050안타, 319홈런을 때려내며 명구회에도 가입한다, 만 30세에 처음 규정타석을 넘기고 통산 안타의 90퍼센트 이상을 30대 이후에 때려냈을 정도의 대기만성형 선수.
8.2.5.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마쓰이 카즈오 (재적 1994 - 2003, 2018. 뉴욕 메츠 → 콜로라도 로키스 → 휴스턴 애스트로스 → 일본 복귀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세이부 복귀)
- 마쓰자카 다이스케 (재적 1999 - 2006, 2020~, 보스턴 레드삭스 → 뉴욕 메츠 → 일본 복귀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주니치 드래곤즈 → 세이부 복귀)
- 나카지마 히로유키 (재적 2001 - 2012,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일본 복귀 후 오릭스 버팔로즈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마키타 가즈히사 (재적 2011 - 2017,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일본 복귀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기쿠치 유세이 (재적 2010 - 2018, 시애틀 매리너스)
- 아키야마 쇼고 (재적 2011 - 2019, 신시내티 레즈)
8.3. 영구결번
'''24. 이나오 카즈히사''':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 님'''. 이나오가 은퇴한 때부터 1972년까지 24번을 달고 감독직을 지냈다. 그런데 구단이 다이헤이요로 매각된 1973년에 이나오 자신은 81번으로 번호를 바꾸고 24번을 후배 선수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며 준영구결번으로 남겼다. 이후 라이온즈 24번의 계보는 고가 마사아키(古賀正明)-아키야마 코지-히라노 켄(平野謙)-마츠나가 히로노리(松永浩典)로 이어지다, 결국 2012년에 이나오 탄생 75주년을 맞아 동년 5월에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8.4. 준영구결번
3. 오시타 히로시: 1960년 은퇴 후 오시타의 커리어를 기리기 위해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구단사장이었던 니시 마다지로(西亦次郎)가 '당분간 오시타의 3번을 결번으로 처리하겠다'라고 해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나, 1968년 오시타가 토에이 플라이어즈에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슬그머니 영구결번을 해제했다. 이에 대해 오시타의 동의가 있었는지는 불명이라고. 어쨌든 세이부가 구단을 인수하고 나서는 라이온즈의 3번은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이후 이 번호를 받은 선수로는 나카지마 히로유키, 아사무라 히데토가 있었고 2020년부터는 야마카와 호타카가 단다.
6. 나카니시 후토시: 1970년에 은퇴 당시 나카니시에 견줄만한 선수가 등장하면 그 선수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여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위의 이나오 카즈히사와 비슷한 이유로 해제가 됐고, 당시 감독이었던 이나오가 추천한 키쿠카와 소지로(菊川昭二郎)가 이 번호를 사용했다. 세이부로 바뀌고 나서 그나마 이 등번호를 달만한 자격이 있던 플레이를 했던 선수는 90년대 초반 유격수로서 황금시대를 떠받친 타나베 노리오. 2017년부터는 사회인야구 출신의 신인 유격수 겐다 소스케가 이 번호를 달고 플레이하는 중이며, 빈틈없는 수비주루와 정교한 타격을 보여주며 2017년 신인왕을 수상해 이 등번호의 전망을 밝게 하는 중.
27. 이토 쓰토무: 은퇴 후 이토 스스로가 인정한 후배 포수에게 넘겨주기로 하여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후 2006년 호소카와 토오루(細川亨)가 사용했으나 2010 시즌 종료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FA 이적하면서 결번 상태였다가, 2012년부터 스미타니 긴지로(炭谷銀仁朗)가 사용하고 있다가 FA이적한 후로는 그의 보상선수로 요미우리에서 넘어온 우츠미 테츠야가 달고 있다.
9. 역대 성적
[1] 개장 당시에는 야외 구장이었으나 이후에 지붕을 덮었다.[2] 제 2홈구장[3] 전후기리그제 성적도 포함.[4] 괄호 안은 재적 연도[5] 다만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2010년대 들어 단 '''10년간의 기간 동안''' 총 7번의 우승과 센트럴리그 전 구단 격파, 특히나 2020년 일본시리즈의 우승으로 세이부조차 이뤄내지 못한 '''퍼시픽리그 구단의 JS 4연패'''를 달성함으로서 이젠 독보적인 명문이라는 주장은 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전성기를 가진 명문 구단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6] 후쿠오카 돔이 지어지기 전까지 오사카에서 이사온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홈구장이기도 했다. 그러다 구장 보수를 하던 도중 이 구장 부지가 헤이안 시대에 있었던 유적지 코로칸(鴻臚館)이 위치했던 유적지였음이 밝혀졌고, 결국 1997년 폐장 후 철거된 뒤 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7]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 근데 누가 알았을까. '''이로부터 불과 2년 뒤가 진정한 요미우리의 캐씹사기 리즈시절인 V9의 시작이란 걸(...).'''[8] 활동기간이 얼마 안 돼서인지 구글에 일본어로 검색해도 구단기를 거의 찾기 힘들다.[9] 당시 오리온즈는 1964년 마이니치 신문이 손을 뗀 후에 영화회사 다이에이의 사장인 나가타 마사이치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그래서 팀 이름도 마이니치 오리온즈에서 도쿄 오리온즈로 바꾸었고 다시 롯데의 자금지원을 받아서 현재 키움 히어로즈와 같은 방식으로 롯데 오리온즈로 이름을 바꾼다. 롯데는 1970년 퍼시픽리그 우승 이후 팀 운영에 자신을 보이고 정식으로 구단을 인수했다. 이 롯데가 오리온즈의 네이밍 스폰서만 맡던 시절에 구단주를 맡은 사람이 나카무라였다.[10] 골프장, 리조트 개발회사이다.[11] 백인천이 이 때 리그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12] 우리가 아는 그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 만드는 회사 맞다.''' 80년대에 타업체에 인수되면서 업종변경으로 회사의 자취가 소멸되었다.[13] 물론 자금난을 버티지 못해 가끔 주력선수를 팔아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때의 라이온즈는 주력선수를 팔아서 연명하지는 않았다. 라이온즈 프랜차이즈의 레전드 중 한 명인 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는 저무는 니시테츠-고난의 행군기-세이부의 최전성기를 두루 거쳤던 팀의 간판이자 에이스였다. 팀이 막장이던 시절 타선의 빈타 때문에 시즌 20패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만 선수생활을 해 일본프로야구계에서도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평하기도 한다.[14] 나중에 도쿄 세네터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팀이 바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다.[15] 세이부 그룹이 시가현에서도 영업하는 이유는 오미 철도 문서에 간략하게 나와있다.[16] 근데 그 전에도 1960~70년대에 산케이-야쿠르트 아톰즈(現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철완 아톰의 아톰을 마스코트로 쓴 적 있기도 하다.[17] 다만 걸어놓는 팀 깃발에서는 잘만 쓰고 있다. 물론 영리 목적 사용은 금지이므로 판매하고 있지는 않다.[18] 마유미 아키노부 등을 보내고 거포 타부치 코이치를 데려오는 등의 대형 선수 트레이드는 기본이고, 드래프트에 지명이 확실한 전국의 고교 유망주를 뒷공작과 다른 구단과의 물밑 협상으로 선수 자격이 아닌 구단 직원 채용 형식으로 확보해둔 뒤, 드래프트외 선발로 입단시키는 방법(20년간 세이부의 안방을 지켜온 이토 쓰토무 前 치바 롯데 마린스 감독이 이런 케이스)이나 그룹 계열사 내 일본의 사회인야구 팀인 프린스 호텔 야구부로 빼돌려서 아예 다른 팀의 지명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세이부 황금기의 팀의 주장을 맡은 이시게 히로미치가 이런 케이스. 방법은 간단하다. 학교를 졸업할 때 '난 프로 안 갈래' 하고 일단 프린스 호텔에 입단한다. 그러고 나서 다른 팀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다음 드래프트 때는 미리 포기하는 것)까지 동원했다.[19] 1990년대 후반의 현대 피닉스가 연상된다면 이는 착각이 아니다.[20] 여담이로 이 해를 끝으로 퍼시픽리그는 1973부터 운영해 온 전후기리그-플레이오프 제도를 폐지하고 센트럴리그처럼 6구단 중 리그 우승(1위)팀만 일본시리즈에 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니 세이부가 전후기리그-플레이오프 제도 시대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우승팀인 것이다.[21] 그러나 한큐는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패배. 참고로 이게 현재 카프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 기록이다.[22]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3연승 후 4연패로 내리 역관광당하며 처참하게(...)''' 패배했다. 참고로 이때 긴테츠 감독은 공교롭게도 전신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였던 오기 아키라였다.[23] 세이부라는 그룹 명칭의 기원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타지 철도회사이자 도시권이나 공업 지대 지역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는 '한신'과는 달리 '세이부'는 어떤 곳에서도 지역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24] 사실 세이부 돔은 다른 사이타마 지역보다 도쿄 중심부에서의 접근성이 더 좋다. 사이타마현의 중심지 오미야에서 세이부 돔 가는 게 많이 어렵다.[25] 대표적으로 1994년 오프시즌의 세이부 - 다이에 간 2-3 트레이드. 아키야마 코지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건너갔다. 참고로 당시 다이에의 단장은 공교롭게도 1980년대 세이부의 황금기를 구축한 그 네모토 리쿠오였다.[26] 쿠도 키미야스가 FA로 다이에로 이적하고, 기요하라 카즈히로도 1996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된다.[27] 이토 쓰토무의 세이부맨 커리어가 이로 인해 끝장나게 된다.[28] 세이부 철도의 최대주주[29] 롯데-다이에 간의 합병 논의도 마지막에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소프트뱅크가 인수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30] 세이부 신주쿠선이 혼카와고에역으로 연결되어 있어 카와고에역까지 걸어가서 카와고에선을 타면 되긴 하지만,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31] 세이부 급으로 열악한 훈련시설로는 비만 좀 오면 그라운드가 침수되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야쿠르트 토다 구장, 공장 부지의 자투리 땅에 대충 그라운드만 만든 치바 롯데 마린즈의 롯데 우라와 구장 등이 꼽힌다. [32] 이는 세이부 구단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츠츠미 가문이 분식회계, 허위공시로 축출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뀐 때부터 이어져온 기조로, 매년 주주총회에서 한신만큼은 아니지만 야구단 운영에 대해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를 보다 못한 세이부홀딩스 주주가 2017년 구단 2군 시설 및 인재육성 시스템에 대해 주주총회에서 GM, 그룹 오너 앞에서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단 사장이 라쿠텐보다 연봉 많다는 개드립을 쳐서 세이부 팬들에게 까였다.[33] 당연히 이곳을 연고지로 둔 J리그의 우라와 레즈는 일본의 인기 프로축구팀이며, 게다가 서포터들의 규모 역시 일본 최대다.[34] 참고로 사이타마 시는 세이부 철도의 영업구간이 아니라 토부 철도의 영업구간이며, 야쿠르트와 롯데 2군 구장이 오히려 사이타마 시에서 더 가깝다. 그리고 세이부의 홈구장은 사이타마 시에서 접근하기 좀 골룸한 위치에 있는데, 평일에도 경기가 있는 야구는 경기장 접근성이 관중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히려 세이부를 지지하는 팬층은 사이타마 현보다도 도코로자와 시에 인접한 도쿄 도의 시 지역부분(우리가 생각하는 도쿄가 아닌 그 외곽의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진 도쿄 도의 영역)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이부가 도쿄에 집착한 것도 일리는 있지만 홈구장이 사이타마 현에 있어서...[35] 일각에서는 사이타마를 연고로 하는 J리그 최고의 인기구단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의 존재와 그에 못지 않은 오미야 아르디자의 인기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둘의 더비는 '사이타마 더비'로도 불릴 정도다.) 실제로는 같은 사이타마현이지만 세이부 라이온즈가 있는 도코로자와시와 사방에서 우라와 레즈깃발이 펄럭이는 사이타마시는 완전히 다른 동네다. 베드타운인 사이타마현의 특징 덕분에 도쿄로 가는 교통시설만 잘 정비돼 있기 때문에 사이타마 동부와 서부는 같은 현이라도 교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장 사이타마 시에서 야구를 보러 가려면 도쿄 돔이 오히려 더 가깝고 가는 시간은 세이부돔의 절반 정도밖에 안걸린다.(무사시노선 참조)[36] 사이타마TV, 분카 방송, NACK5 FM이 전담중계를 하는 세이부와는 다르게 오릭스는 그 어떤 간사이권 공중파 방송사에서도 전담중계를 하지 않으며, 제작해도 타국으로 보내버린다.[37] 일본프로야구의 경우 1차지명은 전구단 제비뽑기로 뽑는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프로야구 항목 참조.[38] 당연히 복수의 구단이 1순위로 지명한다.[39] 특히 기요하라가 있던 10년간 세이부는 퍼시픽 리그 우승 8회에 일본 시리즈 우승 6회를 차지하는 리즈시절을 누렸다.[40] 단 오오이시 타츠야는 1군에 자리 잡는 데 실패하고 2군에서만 줄창 썩고 있다...[41] 결과적으로 2010년 드래프트에서 무려 6구단과의 경합에서 얻은 귀중한 1라운더 오오이시 타츠야는 폭망했고, 그다음으로 뽑은 2라운더 마키타 가즈히사와 3라운더 아키야마 쇼고가 훗날 메이저리그 까지 도전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42] 대신 1990년대 세이부 불펜진의 핵심인 시오자키 테츠야를 지명했다.[43] 대신 와쿠이 히데아키를 지명했고 세이부의 에이스가 되었다 .[44] 한국에서는 개막 투수로 한국 선수를 내세우는 게 특이할 정도로 용병들이 에이스를 맡지만, 일본에서는 선발 용병은 보통 3~5선발을 맡는 경우가 많고 개막 투수는 어지간하면 토종선발을 내세운다. 수준급 선발투수가 한국에 비해서 많다보니 각 팀별로 못해도 토종선발 3명 정도는 두기 때문. 세이부도 100이닝 이상 던져줄 토종선발은 그래도 3~4명 가까이 있기는 하다.[45] 2012년에만 50개가량의 빈볼을 던져 리그 탑순위의 빈볼을 기록했다. 심지어 빈볼의 대부분은 중간계투가 아닌 선발투수의 의한 고의성 빈볼 [46] 2018년 소프트뱅크와 히로시마의 맞대결이 성사되었다.[47] 요미우리 : 1956~1958, 1963, 1983, 1987, 1990, 1994, 2002, 2008/한신 : 1985/주니치 : 1954, 1982, 1988, 2004/야쿠르트 : 1992, 1993, 1997/히로시마 : 1986, 1991/요코하마 : 1998. 승리한 연도는 볼드체 표시.[48] 센트럴 리그도 쉽지는 않은 게 오릭스가 클라이맥스 시리즈 시행 이후로 퍼시픽, 아니 12구단 중 유일하게 한 번도 일본시리즈에 올라온 적이 없다. 라쿠텐도 잘 안 보이지만 그나마 2013년에 진출했다.[49] 제 2 홈구장은 실제로도 고교야구 전국대회 기간에도 쓰는 교세라 돔 오사카. 홈경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릭스 원정 때도 한신 머리수가 더 많다.[50] 세이부 홈구장인 메트라이프돔은 간사이 주요 도시에서도 기본 4시간은 걸릴 정도로 심각하게 접근성이 나쁘다. [51] 공교롭게도 옆동네 라이온즈도 결승전에서 타이거즈를 꺾은 적이 없다. [52] 일본에서 거의 정상급 위치를 차지하는 사회인야구 대회[53] 데즈카 오사무 스스로 정글대제는 6번 단행본이 나왔고, 뭐가 맞다고 할 수 없다고 전집에서 언급했다.[54] 2013년 시즌 당시 타이업한 작품들.[55] 그러나 그 롯데도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라쿠텐에게 패하면서 2010년의 하극상은 이루지 못했다. [56] 성우 요시무라 하루카와 결혼[57] 축구선수 혼다 케이스케랑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58] 외국인 선발 10승 이상은 2002년 이후 마지막이며, 비 대만인 출신으로는 라이온즈 사상 최초.[59] 참고로 19년전인 1998년의 퍼시픽리그 야수 신인왕도 세이부에서 나왔다. 바로 아래에 나오는 오제키 타츠야가 주인공.[60] 300경기째 되는 날에 에토 미사와 열애중임을 인정했고, 3회에 몸에 맞는 볼로 인해 교체당했다.[61] 사실 한글로는 길이차이가 엄청나게 크게 나진 않지만 일본인들의 이름은 보통 한자 4글자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이 선수의 이름을 일본어로 써보면 シンガーブランドン大河로 13자가 된다.[62] 관보에 생년월일과 사는 곳이 똑같은 김유사(金侑司)라는 한국인이 귀화해서 재일교포 설이 나온 케이스. 카네코 유지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금자유사(金子侑司)이다 보니. 그런데 일본 웹에서 김유사라는 사람의 귀화 기록이 실제 관보에는 없고 누군가가 꾸며낸 가짜 기록이라고 쓴 블로그 글이 있는 걸 보면 동성인 카네코 치히로처럼 정말 재일교포와 무관한 순수 일본인일수도.[63] 괄호 안은 재적 연도[64] 한자: 郭泰源. 일본에서의 등록명은 가쿠 타이겐. 중국식 발음으로는 궈타이위안.나이 든 일본야구 전문가들은 곽태원이 더 익숙하다.[65] 등록명은 데니였으며, 일본식 이름은 유이 토모리이다.[66] 사이토 유키의 동기로, 6개 구단에 1지명을 받은 와세다대학의 영건이었지만 연이은 부상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67] 일본판 톰 션. 작년의 밴헤켄보다 더 허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말기인 9월에 방출당했다(...) 세이부에서는 똑같이 전력 외로 밀려난 다른 외국인 선수들을 10월 시즌 끝 까지 기다려줬는데 이 선수는 얼마나 빡쳤는지 중도에 방출.[68] BB/K가 메히아는 .334인데 스미타니는 .212 (...) 참고로 볼넷을 절대로 못 얻어나간다고 개까이는 박종윤의 통산 BB/K가 .277이다...[69] 후에 본인이 결백을 주장하여 재조사 후 영구제명은 취소되었다.[70] 2016년 아라이 타카히로가 경신할 때까지 센트럴리그 최고령 MVP였다. 다만 아라이의 MVP 수상은 베테랑 예우가 꽤 많이 반영되어 논란이 있다.[71]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