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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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구선수, 지도자, 해설가. 1960년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끈 멤버 중의 한 명이며, 은퇴 후에는 니시테츠, 킨테츠, 오릭스의 코치와 감독을 지내며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감독이기도 하다.
또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여 최고의 활약을 펼친 투수와 전설이 된 타자와 함께한 감독이다.
부모님은 학교의 선생님이었는데,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젊은 나이에 전사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거기다 어린 시절엔 여동생 2명을 모두 병으로 잃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기는 제철소에 취직해서 어머니를 부양하겠다는 일념으로 공업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당시 토치쿠 고교 야구부 OB 측에서 오기의 입학을 설득하여 결국 토치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토치쿠 고등학교에 재학 중엔 투수와 내야수로 뛰었으며, 3학년 때인 1953년 투수 겸 4번 타자로 팀을 하계 고시엔 대회에 진출시켰지만 2회전에서 오사카의 강호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2] 에 패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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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테츠 시절의 오기.
졸업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난카이 호크스, 주니치 드래곤즈 3구단의 입단 제안을 받았는데, 본인은 난카이 입단을 희망했고 실제로 난카이, 주니치 모두 계약금으로 100만엔이란 거금을 제안했지만, 니시테츠는 이보다 적은 60만엔을 계약금으로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이었던 미하라 오사무가 직접 자택으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저에게 (오기를) 맡겨주십시오"'''라고 열심히 설득한 것에 감명을 받아[3] , 1954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계약금 60만엔, 연봉 34만엔으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한다.
투수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했지만, 프리 배팅 때 투구하는 오기의 공이 프로에선 통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라고 생각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2루수로 전향할 것을 지시하면서 오기는 투수를 포기하고 2루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이는 당시 니시테츠의 주전 2루수이던 미야자키 카나메[4] 가 37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는 점을 고려한 것도 있다. 이후 캠프 때 오기를 주전 2루수로 키워내기로 방침을 잡은 수뇌진에게서 혹독한 2루수 훈련을 받았다.
사실 오기는 고교 시절 투수뿐 아니라 내야수로서도 실력이 좋았던지라, 데뷔 첫해부터 바로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찼고, 유격수 토요다 야스미츠와 함께 퍼시픽 리그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결성하여 비록 타율은 낮았지만 수비 등에서 맹활약하면서 니시테츠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데 한 몫을 거들었다.[5] 한편으로 오기는 시합 이외엔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 감독과 같이 야구 이론에 대해 항상 의논하고 공부하거나 일반상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도자로서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1955년 5월 22일 대 톤보 유니온즈 전에선 퍼시픽리그 최다 기록인 '''1시합 6안타'''를 기록하기도 했고, 1960년엔 현역 시절 최다 기록이자 유일한 100안타를 기록하면서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수상했다.
1963년 이후론 외국인 선수 영입 등으로 인해 출장기회가 감소해 갔고, 결국 1967년 시즌을 끝으로 14시즌 통산 '''800안타, 70홈런 326타점 116도루, 타율 0.229'''의 기록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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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코치 시절. 맨 앞줄 가장 오른쪽이 오기 아키라. 왼쪽의 등번호 68번은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은퇴 후 오기는 2년 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서 코치를 역임한 뒤 1970년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을 맡고 있던 니시테츠 시절 스승 미하라 오사무의 부름을 받고 킨테츠 코치로 취임하여[6] 수비, 주루 코치 보직을 맡았으며 경기 때 주로 3루 주루 코치로 출장했다.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때 에나츠 유타카의 그 유명한 '''에나츠의 21구''' 당시 오기가 3루 코치를 맡고 있었고 이 때 스퀴즈 번트로 홈을 노리던 3루 주자 후지세 시로가 아웃당하여 결국 일본시리즈 우승에 실패한 흑역사도 있었지만, 1974~1981년까지 킨테츠의 감독을 맡았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오기가 전임 미하라 감독의 오른팔 이었음에도 그를 실력만으로 중용했고, 평소 '''"오기는 벤치의 사인을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주루 코치이기도 했다. 오카모토 이사미가 감독으로 재임한 1984~1987년에는 킨테츠의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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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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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퍼시픽리그 우승 후.
무려 20년 동안 코치를 역임하던 오기는 1988년 오카모토 이사미의 후임으로 킨테츠 버팔로즈의 감독에 취임하며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감독으로선 초보였지만 코치 시절 쌓은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킨테츠 버팔로즈를 퍼시픽 리그의 상위권 돌풍의 핵으로 상승시켰다.
감독 첫해였던 1988년, 치열하게 세이부 라이온즈와 리그 우승 경쟁을 벌이던 킨테츠 버팔로즈는 그해 시즌 최종전이었던 10월 19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더블헤더 2경기를 전부 이겨야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 찾아왔다.
그날 1차전은 시작부터 롯데에게 7회까지 3:1로 끌려다니다가 8회에서 겨우 동점을 만든 뒤, 9회초 2사 2루 상황에서 터진 대타 나시다 마사타카[7] 의 극적인 역전 중전 적시타로 간신히 승리하고[8] 2차전에 들어갔다. 2차전에서도 롯데에게 선취점 1점을 내주는 등 고생했지만 6회에 동점으로 만든데 이어 7회에 2득점으로 역전하면서 3:1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7회 말에 킨테츠가 선발 타카야나기 이즈미가 롯데 타자 오카베 아키카즈에게 솔로포를 얻어맞은 데 이어 급히 투입된 주전 마무리 투수 요시이 마사토가 니시무라 노리후미에게 동점 적시타를 얻어맞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고, 8회에 어찌저찌 1득점을 추가해 4대 3으로 다시 우세해지자 오기는 에이스인 아와노 히데유키[9] 를 마무리로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아와노마저 연투에 지쳤는지 결국 8회말 이해 수위타자를 획득하는 롯데의 타카자와 히데아키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두들겨 맞는 바람에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결국 당시 4시간이 지난 시합은 4시간이 지난 시점의 이닝까지만 소화하고 마무리짓는다는 당시 규정상 시간제한으로 인해 10회 무승부로 마무리되면서, 세이부 라이온즈에 승률 2리 차로 아쉽게 퍼시픽 리그 우승을 내주며 2위에 머물렀다. 이날 더블헤더는 일본 야구계에서 이날 날짜인 약칭 '''10.19''' 로 불리면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명승부로 각인되어 있고 이날 긴급 편성된 더블헤더 2차전의 TV 중계는 시청율 31.4%로 퍼시픽리그 정규시즌 경기 중계로는 역대 최고 기록을 남겼다.
이듬해인 1989년, 킨테츠는 시즌 상반기까진 오릭스 브레이브스[10] 에게 다소 적잖은 게임차로 2위에 머물렀지만, 후반기에 오릭스가 하락세를 탄 것을 틈타 세이부와 함께 상승세를 올리며 오릭스와 세이부 2구단과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고, 한때 1위까지 올라갔다가 9월에 연패를 거듭해 3위로 떨어지면서 자력우승이 소멸하는 위기가 있었지만, 시즌 막판에 다시 상승세를 타며 자력우승 가능성이 부활. 더블헤더가 포함된 세이부와의 최종 4연전을 4연타수 홈런을 쏘아올린 랄프 브라이언트의 맹활약으로 모조리 쓸어담으며 결국 최종전 바로 직전 시합(129번째 시합)인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에서 승리하여 9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해 2위 오릭스, 3위 세이부 와의 게임차는 없었던 데다가 '''심지어 1~3위의 승률 차이가 고작 1리(!!!) 차밖에 나지 않았을 정도.''' 역관광 한번 제대로 한 셈이다(...). 그 해 기적적인 리그 우승을 계기로 오기의 지도력은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의 별명인 '''미하라 매직'''을 본따 '''오기 매직''' 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11] 그러나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먼저 3승을 따놓고도 내리 4연패로 역관광 당하면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놓치는 비운을 맛보았다(...)
이후 1992년까지 팀을 3위-2위-2위로 상위권으로 이끈 오기였지만, 1991~1992년 2년 연속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밀려 우승 경쟁에 실패하자 결국 199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오기는 킨테츠 감독에서 사퇴하였다. 킨테츠 감독 시절 노모 히데오, 아카호리 모토유키 등 에이스급 투수를 육성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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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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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의 홈경기 중. 옆의 선수는 스즈키 이치로.
킨테츠 감독 사임 후 1년 간 아사히 방송, 큐슈 아사히 방송,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로 활동하던 오기는 1994년 도이 쇼조의 후임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취임하며 현장으로 복귀한다.
오기는 초창기부터 뛰어난 잠재력을 선보였지만 도이 감독과의 불화로 2군을 전전하던 외야수 스즈키 이치로를 주전으로 발탁하여 그 해 이치로가 '''NPB 최초의 200안타 달성'''과 동시에 수위타자를 획득하는 등 슈퍼스타로 키웠고, 마찬가지로 뛰어난 잠재력을 보였으나 도이 감독과의 불화로 2군을 전전하던 유망주 다구치 소 또한 주전 외야수로 도약시키는 등 킨테츠에서 보여준 지도력을 오릭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며 도이 쇼조 감독 재임 하에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오릭스를[12] 취임 첫해 킨테츠 버팔로즈와 공동 리그 2위로 이끌었다.[13]
이듬해인 1995년, 그해 1월 17일 발생한 고베 대지진으로 상처받은 연고지 팬들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오릭스 선수단은 '''"힘내자 고베(がんばろうKOBE)"''' 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유니폼 소매에 붙이고 시즌에 임했으며 그 해 결국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14] 하지만 그 해에도 일본시리즈에선 또다시 노무라 카츠야가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1승 4패로 패퇴하여[15][16] 오기는 콩라인에 머무는 듯 했으나...
그 다음해인 1996년에 퍼시픽리그 2연패를 달성, 또다시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여 이 해 무려 11.5게임차를 따라잡는 극적인 리그 우승을 달성한 나가시마 시게오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작년에 야쿠르트에게 당했던 대로 4승1패로 물리치고 기어이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였다.[17] 팀 역사상으론 오릭스로 매각되고 고베로 연고이전한 이래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이자 한큐 브레이브스 시대였던 1977년 이래 무려 19년 만의 경사였고, 오기로서는 감독 데뷔 후 최초이자 현역 시절이었던 1958년 일본시리즈 우승[18] 이래 무려 38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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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 후 헹가레를 받는 오기.
이후 오기는 두번 다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와 연을 맺지 못했지만, 1999년까지 오릭스를 A클래스(리그 3위 이내)로 이끌며 킨테츠 감독 시절까지 포함하면 11년 연속 A클래스, 14년 연속 5할 승률의 대기록을 세우며 명감독으로서 부족함 없는 명성을 남겼다. 그러나 중심 타자인 이치로와 다구치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고 그 외 주전급의 선수들이 FA로 다른 팀에 이적하면서 팀 전력은 약화되었고 팀은 2000~2001년 시즌 2년 연속 4위에 그쳤다.[19][20] 결국 오기는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오릭스 유니폼을 벗었다.
오기는 2002~2004년 아사히 방송과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로 복귀하여 활동하였고, 2004년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인 야구전당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그 해 연말 열린 명예의 전당 입성 기념 파티에서 오기는 "오늘은 파티이기도 하지만, 저의 '''생전장(生前葬)''' 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라고 좌중들에게 말했는데, 사실 오기는 이미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하지만 오기는 자신의 암 투병 사실을 공표하는 일 없이 현역 시절 팀 동료이자 킨테츠 시절 수석코치로 함께 한 나카니시 후토시 등 친분이 깊었던 소수 외에는 비밀로 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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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돌아온 오기. 그러나 유니폼을 입고 미소짓는 그의 얼굴은 그 해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폐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오기는 2005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으로 탄생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감독 제의를 받아들여 4시즌 만에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감독 취임 이었다.[21] 여전히 암투병 중이긴 했으나, 오기는 '''"그라운드에서 쓰러지는 것이 소망이다"''' 라는 심정으로 감독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암 치료와 동시에 고령의 나이로 감독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시합 도중임에도 덕아웃에서 피곤을 못이기고 꾸벅꾸벅 졸거나 벤치에 등을 기댄 채로 움직이질 못하는 등, 투병과 고령으로 인해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모습이 눈에 띄었고, 특히 후반부 세이부 돔에서의 원정경기에선 구장 계단을 자력으로 올라가질 못해 외야의 대규모 장비 출입구를 통해 그라운드로 들어와야 하던 모습이 포착될 정도로 그의 건강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오기는 최선을 다해 팀을 지휘하여 3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을 리그 4위로 이끄는 성과를 보였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감독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오기는 고령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결국 감독을 그만두었다. 그것이 오기의 그라운드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기의 감독 통산 성적은 '''988승 815패 53무 승률 0.548''' 이다. 덧붙이자면 오기는 킨테츠 시절 코치로써 보좌했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처럼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전부 퍼시픽 리그에서 영위했다. 그리고 선수와 지도자 경력을 전부 대형 사철과 관련된 팀에서 기록한 셈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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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아키라 환송회''' 때 덕아웃에 걸린 오기의 유니폼과 꽃다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난 오기는 오릭스 구단의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취임하여 키요하라 카즈히로 영입에 몰두하는 등 현장 뒤에서도 팀의 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폐암 악화로 인해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고 퇴임 2개월 만인 2005년 12월 15일, 결국 지병인 폐암을 이기지 못하면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오기의 사망 소식을 접한 프로입단 동기인 노무라 카츠야는 '''"한번 더 감독으로서 그 녀석과 붙어보고 싶었다"''' 며 애통해 했고, 그 외의 많은 야구인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오기의 장례식은 생전 그의 바람대로 조용히 치루어졌지만, 오기의 지인들은 후에 별도로 각각 블루웨이브의 홈구장이었던 고베 종합운동공원 야구장과 오기의 고향 나카마 시에서 '''천국 환송회'''를 개최하여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2019년 4월 29일, 오릭스 버팔로즈는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서 팀 전원이 블루웨이브 유니폼에 오기 감독의 등번호인 72번을 달고 출전했으며(선수명은 미표기) 8회말 2사 1루 3-3 동점 상황에서 요시다 마사타카가 결승 투런 홈런을 날리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이 날 72번을 모두 달았던 이유가 바로 오릭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오기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은 "이 등번호를 달고 절대로 질 수 없다. 이길 수 있어 좋았다" 라고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 날 경기는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퍼시픽 리그 경기가 치뤄진 날'''이었다.
1. 소개
일본의 야구선수, 지도자, 해설가. 1960년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끈 멤버 중의 한 명이며, 은퇴 후에는 니시테츠, 킨테츠, 오릭스의 코치와 감독을 지내며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감독이기도 하다.
또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여 최고의 활약을 펼친 투수와 전설이 된 타자와 함께한 감독이다.
2. 유년 시절
부모님은 학교의 선생님이었는데,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젊은 나이에 전사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거기다 어린 시절엔 여동생 2명을 모두 병으로 잃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기는 제철소에 취직해서 어머니를 부양하겠다는 일념으로 공업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당시 토치쿠 고교 야구부 OB 측에서 오기의 입학을 설득하여 결국 토치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토치쿠 고등학교에 재학 중엔 투수와 내야수로 뛰었으며, 3학년 때인 1953년 투수 겸 4번 타자로 팀을 하계 고시엔 대회에 진출시켰지만 2회전에서 오사카의 강호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2] 에 패퇴한 바 있다.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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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테츠 시절의 오기.
졸업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난카이 호크스, 주니치 드래곤즈 3구단의 입단 제안을 받았는데, 본인은 난카이 입단을 희망했고 실제로 난카이, 주니치 모두 계약금으로 100만엔이란 거금을 제안했지만, 니시테츠는 이보다 적은 60만엔을 계약금으로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이었던 미하라 오사무가 직접 자택으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저에게 (오기를) 맡겨주십시오"'''라고 열심히 설득한 것에 감명을 받아[3] , 1954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계약금 60만엔, 연봉 34만엔으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한다.
투수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했지만, 프리 배팅 때 투구하는 오기의 공이 프로에선 통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라고 생각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2루수로 전향할 것을 지시하면서 오기는 투수를 포기하고 2루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이는 당시 니시테츠의 주전 2루수이던 미야자키 카나메[4] 가 37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는 점을 고려한 것도 있다. 이후 캠프 때 오기를 주전 2루수로 키워내기로 방침을 잡은 수뇌진에게서 혹독한 2루수 훈련을 받았다.
사실 오기는 고교 시절 투수뿐 아니라 내야수로서도 실력이 좋았던지라, 데뷔 첫해부터 바로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찼고, 유격수 토요다 야스미츠와 함께 퍼시픽 리그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결성하여 비록 타율은 낮았지만 수비 등에서 맹활약하면서 니시테츠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데 한 몫을 거들었다.[5] 한편으로 오기는 시합 이외엔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 감독과 같이 야구 이론에 대해 항상 의논하고 공부하거나 일반상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도자로서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1955년 5월 22일 대 톤보 유니온즈 전에선 퍼시픽리그 최다 기록인 '''1시합 6안타'''를 기록하기도 했고, 1960년엔 현역 시절 최다 기록이자 유일한 100안타를 기록하면서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수상했다.
1963년 이후론 외국인 선수 영입 등으로 인해 출장기회가 감소해 갔고, 결국 1967년 시즌을 끝으로 14시즌 통산 '''800안타, 70홈런 326타점 116도루, 타율 0.229'''의 기록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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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코치 시절. 맨 앞줄 가장 오른쪽이 오기 아키라. 왼쪽의 등번호 68번은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은퇴 후 오기는 2년 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서 코치를 역임한 뒤 1970년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을 맡고 있던 니시테츠 시절 스승 미하라 오사무의 부름을 받고 킨테츠 코치로 취임하여[6] 수비, 주루 코치 보직을 맡았으며 경기 때 주로 3루 주루 코치로 출장했다.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때 에나츠 유타카의 그 유명한 '''에나츠의 21구''' 당시 오기가 3루 코치를 맡고 있었고 이 때 스퀴즈 번트로 홈을 노리던 3루 주자 후지세 시로가 아웃당하여 결국 일본시리즈 우승에 실패한 흑역사도 있었지만, 1974~1981년까지 킨테츠의 감독을 맡았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오기가 전임 미하라 감독의 오른팔 이었음에도 그를 실력만으로 중용했고, 평소 '''"오기는 벤치의 사인을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주루 코치이기도 했다. 오카모토 이사미가 감독으로 재임한 1984~1987년에는 킨테츠의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
5.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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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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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퍼시픽리그 우승 후.
무려 20년 동안 코치를 역임하던 오기는 1988년 오카모토 이사미의 후임으로 킨테츠 버팔로즈의 감독에 취임하며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감독으로선 초보였지만 코치 시절 쌓은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킨테츠 버팔로즈를 퍼시픽 리그의 상위권 돌풍의 핵으로 상승시켰다.
감독 첫해였던 1988년, 치열하게 세이부 라이온즈와 리그 우승 경쟁을 벌이던 킨테츠 버팔로즈는 그해 시즌 최종전이었던 10월 19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더블헤더 2경기를 전부 이겨야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 찾아왔다.
그날 1차전은 시작부터 롯데에게 7회까지 3:1로 끌려다니다가 8회에서 겨우 동점을 만든 뒤, 9회초 2사 2루 상황에서 터진 대타 나시다 마사타카[7] 의 극적인 역전 중전 적시타로 간신히 승리하고[8] 2차전에 들어갔다. 2차전에서도 롯데에게 선취점 1점을 내주는 등 고생했지만 6회에 동점으로 만든데 이어 7회에 2득점으로 역전하면서 3:1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7회 말에 킨테츠가 선발 타카야나기 이즈미가 롯데 타자 오카베 아키카즈에게 솔로포를 얻어맞은 데 이어 급히 투입된 주전 마무리 투수 요시이 마사토가 니시무라 노리후미에게 동점 적시타를 얻어맞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고, 8회에 어찌저찌 1득점을 추가해 4대 3으로 다시 우세해지자 오기는 에이스인 아와노 히데유키[9] 를 마무리로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아와노마저 연투에 지쳤는지 결국 8회말 이해 수위타자를 획득하는 롯데의 타카자와 히데아키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두들겨 맞는 바람에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결국 당시 4시간이 지난 시합은 4시간이 지난 시점의 이닝까지만 소화하고 마무리짓는다는 당시 규정상 시간제한으로 인해 10회 무승부로 마무리되면서, 세이부 라이온즈에 승률 2리 차로 아쉽게 퍼시픽 리그 우승을 내주며 2위에 머물렀다. 이날 더블헤더는 일본 야구계에서 이날 날짜인 약칭 '''10.19''' 로 불리면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명승부로 각인되어 있고 이날 긴급 편성된 더블헤더 2차전의 TV 중계는 시청율 31.4%로 퍼시픽리그 정규시즌 경기 중계로는 역대 최고 기록을 남겼다.
이듬해인 1989년, 킨테츠는 시즌 상반기까진 오릭스 브레이브스[10] 에게 다소 적잖은 게임차로 2위에 머물렀지만, 후반기에 오릭스가 하락세를 탄 것을 틈타 세이부와 함께 상승세를 올리며 오릭스와 세이부 2구단과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고, 한때 1위까지 올라갔다가 9월에 연패를 거듭해 3위로 떨어지면서 자력우승이 소멸하는 위기가 있었지만, 시즌 막판에 다시 상승세를 타며 자력우승 가능성이 부활. 더블헤더가 포함된 세이부와의 최종 4연전을 4연타수 홈런을 쏘아올린 랄프 브라이언트의 맹활약으로 모조리 쓸어담으며 결국 최종전 바로 직전 시합(129번째 시합)인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에서 승리하여 9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해 2위 오릭스, 3위 세이부 와의 게임차는 없었던 데다가 '''심지어 1~3위의 승률 차이가 고작 1리(!!!) 차밖에 나지 않았을 정도.''' 역관광 한번 제대로 한 셈이다(...). 그 해 기적적인 리그 우승을 계기로 오기의 지도력은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의 별명인 '''미하라 매직'''을 본따 '''오기 매직''' 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11] 그러나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먼저 3승을 따놓고도 내리 4연패로 역관광 당하면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놓치는 비운을 맛보았다(...)
이후 1992년까지 팀을 3위-2위-2위로 상위권으로 이끈 오기였지만, 1991~1992년 2년 연속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밀려 우승 경쟁에 실패하자 결국 199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오기는 킨테츠 감독에서 사퇴하였다. 킨테츠 감독 시절 노모 히데오, 아카호리 모토유키 등 에이스급 투수를 육성한 바 있다.
6.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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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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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의 홈경기 중. 옆의 선수는 스즈키 이치로.
킨테츠 감독 사임 후 1년 간 아사히 방송, 큐슈 아사히 방송,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로 활동하던 오기는 1994년 도이 쇼조의 후임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취임하며 현장으로 복귀한다.
오기는 초창기부터 뛰어난 잠재력을 선보였지만 도이 감독과의 불화로 2군을 전전하던 외야수 스즈키 이치로를 주전으로 발탁하여 그 해 이치로가 '''NPB 최초의 200안타 달성'''과 동시에 수위타자를 획득하는 등 슈퍼스타로 키웠고, 마찬가지로 뛰어난 잠재력을 보였으나 도이 감독과의 불화로 2군을 전전하던 유망주 다구치 소 또한 주전 외야수로 도약시키는 등 킨테츠에서 보여준 지도력을 오릭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며 도이 쇼조 감독 재임 하에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오릭스를[12] 취임 첫해 킨테츠 버팔로즈와 공동 리그 2위로 이끌었다.[13]
이듬해인 1995년, 그해 1월 17일 발생한 고베 대지진으로 상처받은 연고지 팬들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오릭스 선수단은 '''"힘내자 고베(がんばろうKOBE)"''' 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유니폼 소매에 붙이고 시즌에 임했으며 그 해 결국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14] 하지만 그 해에도 일본시리즈에선 또다시 노무라 카츠야가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1승 4패로 패퇴하여[15][16] 오기는 콩라인에 머무는 듯 했으나...
그 다음해인 1996년에 퍼시픽리그 2연패를 달성, 또다시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여 이 해 무려 11.5게임차를 따라잡는 극적인 리그 우승을 달성한 나가시마 시게오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작년에 야쿠르트에게 당했던 대로 4승1패로 물리치고 기어이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였다.[17] 팀 역사상으론 오릭스로 매각되고 고베로 연고이전한 이래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이자 한큐 브레이브스 시대였던 1977년 이래 무려 19년 만의 경사였고, 오기로서는 감독 데뷔 후 최초이자 현역 시절이었던 1958년 일본시리즈 우승[18] 이래 무려 38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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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 후 헹가레를 받는 오기.
이후 오기는 두번 다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와 연을 맺지 못했지만, 1999년까지 오릭스를 A클래스(리그 3위 이내)로 이끌며 킨테츠 감독 시절까지 포함하면 11년 연속 A클래스, 14년 연속 5할 승률의 대기록을 세우며 명감독으로서 부족함 없는 명성을 남겼다. 그러나 중심 타자인 이치로와 다구치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고 그 외 주전급의 선수들이 FA로 다른 팀에 이적하면서 팀 전력은 약화되었고 팀은 2000~2001년 시즌 2년 연속 4위에 그쳤다.[19][20] 결국 오기는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오릭스 유니폼을 벗었다.
오기는 2002~2004년 아사히 방송과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로 복귀하여 활동하였고, 2004년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인 야구전당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그 해 연말 열린 명예의 전당 입성 기념 파티에서 오기는 "오늘은 파티이기도 하지만, 저의 '''생전장(生前葬)''' 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라고 좌중들에게 말했는데, 사실 오기는 이미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하지만 오기는 자신의 암 투병 사실을 공표하는 일 없이 현역 시절 팀 동료이자 킨테츠 시절 수석코치로 함께 한 나카니시 후토시 등 친분이 깊었던 소수 외에는 비밀로 하고자 했다.
7.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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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돌아온 오기. 그러나 유니폼을 입고 미소짓는 그의 얼굴은 그 해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폐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오기는 2005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으로 탄생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감독 제의를 받아들여 4시즌 만에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감독 취임 이었다.[21] 여전히 암투병 중이긴 했으나, 오기는 '''"그라운드에서 쓰러지는 것이 소망이다"''' 라는 심정으로 감독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암 치료와 동시에 고령의 나이로 감독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시합 도중임에도 덕아웃에서 피곤을 못이기고 꾸벅꾸벅 졸거나 벤치에 등을 기댄 채로 움직이질 못하는 등, 투병과 고령으로 인해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모습이 눈에 띄었고, 특히 후반부 세이부 돔에서의 원정경기에선 구장 계단을 자력으로 올라가질 못해 외야의 대규모 장비 출입구를 통해 그라운드로 들어와야 하던 모습이 포착될 정도로 그의 건강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오기는 최선을 다해 팀을 지휘하여 3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을 리그 4위로 이끄는 성과를 보였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감독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오기는 고령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결국 감독을 그만두었다. 그것이 오기의 그라운드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기의 감독 통산 성적은 '''988승 815패 53무 승률 0.548''' 이다. 덧붙이자면 오기는 킨테츠 시절 코치로써 보좌했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처럼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전부 퍼시픽 리그에서 영위했다. 그리고 선수와 지도자 경력을 전부 대형 사철과 관련된 팀에서 기록한 셈이다.[22]
8.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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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아키라 환송회''' 때 덕아웃에 걸린 오기의 유니폼과 꽃다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난 오기는 오릭스 구단의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취임하여 키요하라 카즈히로 영입에 몰두하는 등 현장 뒤에서도 팀의 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폐암 악화로 인해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고 퇴임 2개월 만인 2005년 12월 15일, 결국 지병인 폐암을 이기지 못하면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오기의 사망 소식을 접한 프로입단 동기인 노무라 카츠야는 '''"한번 더 감독으로서 그 녀석과 붙어보고 싶었다"''' 며 애통해 했고, 그 외의 많은 야구인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오기의 장례식은 생전 그의 바람대로 조용히 치루어졌지만, 오기의 지인들은 후에 별도로 각각 블루웨이브의 홈구장이었던 고베 종합운동공원 야구장과 오기의 고향 나카마 시에서 '''천국 환송회'''를 개최하여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2019년 4월 29일, 오릭스 버팔로즈는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서 팀 전원이 블루웨이브 유니폼에 오기 감독의 등번호인 72번을 달고 출전했으며(선수명은 미표기) 8회말 2사 1루 3-3 동점 상황에서 요시다 마사타카가 결승 투런 홈런을 날리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이 날 72번을 모두 달았던 이유가 바로 오릭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오기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은 "이 등번호를 달고 절대로 질 수 없다. 이길 수 있어 좋았다" 라고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 날 경기는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퍼시픽 리그 경기가 치뤄진 날'''이었다.
9. 에피소드
- 감독 시절 육성했던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하세가와 시게토시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했으며, 이 4명의 선수는 입을 모아 오기를 사부님으로 존경하고 있다.
- 1996년 올스타전 당시 퍼시픽 리그 감독이던 오기는 경기 막판 우익수 스즈키 이치로를 투수로 등판시켰다. 팬 서비스 차원의 깜짝 이벤트였지만 센트럴 리그 감독 노무라 카츠야는 "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 라고 반발하며 항의의 뜻으로 마쓰이 히데키 대신 투수인 타카츠 신고를 대타로 타석에 들여보냈다.[23] 결과는 내야 땅볼로 이치로의 승리(...).
- 승리를 위해서라면 투수 운용을 다소 무리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위에 얘기했듯이 아와노 히데유키나 아카호리 모토유키, 히라이 마사후미 등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24] 이 때문에 킨테츠 감독 시절 곤도 히로시 투수 코치, 요시이 마사토와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고, 오릭스 감독 재임 중에도 투수 코치이던 야마다 히사시와 종종 대립하곤 했다.[25]
- 스즈키 이치로의 성이 평범하다며 특징을 주기 위해 등록명을 이치로로 할 것을 제안한 이가 오기 감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타격 코치이던 아라이 히로마사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오기는 아라이 코치의 제안을 허가한 인물이었다.
- 일본 야구계에 길이 남는 명장이었지만, 사생활은 선수 시절부터 주당에 날라리로 유명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오기와 자주 야구와 일상생활 얘기를 한 건 오기의 이런 날라리 성향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심지어 현역 시절 시마바라에서 열린 니시테츠 구단 캠프 땐 휴일 날 몰래 아마쿠사에 배를 타고 놀러갔다가 풍랑으로 당일 돌아오지 못하고 다음날 몰래 복귀하다가 미하라 감독에게 걸려서 혼쭐이 난 적도 있을 정도.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그러한 기질을 숨기지 않았는데, 그라운드에서는 냉철한 지휘로 선수들을 이끌었지만 사석에서는 유행이 지난 펀치 파마 헤어스타일에 싸구려 양복 차림으로 아재개그를 날리는 캐릭터였다고. 심지어 킨테츠 감독 시절엔 경기 후 연회 자리에서 술게임을 벌여서 술을 가장 빨리 먹은 선수를 다음 시합 때 선발 멤버로 뽑은 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이 당시 퍼시픽 리그 심판 마에카와 요시오가 킨테츠 선수단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오기의 이런 모습에 어이없던 나머지 가까이 있던 카네무라 요시아키를 불러 "너희 팀은 뭐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냐"라고 깠다고 한다(...)
- 오기가 사망한 날은 2005년 12월 15일. 그런데 오기는 그로부터 5일 후인 12월 20일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뛰던 스즈키 이치로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던 상태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자, 오기는 주치의를 붙잡고 "20일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있게 해 달라" 며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오기의 폐암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고 결국 오기는 이치로와의 식사 약속을 지키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덧붙여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고 퇴단하여 오릭스 버팔로즈의 영입 제안을 받았던 키요하라 카즈히로와도 별도로 저녁 약속을 잡았지만 마찬가지로 오기의 죽음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죽기 직전까지 오기는 키요하라가 오릭스로 오도록 설득했고 결국 키요하라는 오릭스 버팔로즈에 입단하여 3년간 뛴 후 은퇴하게 되는데, 은퇴시합 때 키요하라는 오기에게 "천국에 계신 오기 씨. 저에게 마지막으로 활약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그에게 감사했다.
- 자신의 저서인 "이길 이유가 있다" 에서 각자의 개성을 개화시키는 자주성 존중형의 인재 육성 기술을 설명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프로야구계는 히로오카 다츠로(야쿠르트, 세이부), 노무라 카츠야(야쿠르트), 모리 마사아키(세이부) 등 데이터 분석에 근거한 치밀한 플레이를 실천하는 감독들이 일본시리즈 제패를 거듭했다. 이 시대는 각 스타들의 돌출된 능력에서 팀의 종합된 전력으로 싸우는 시대로 변화하는 과도기였다. 번트, 진루타 등 팀플레이를 중시하고 중간계투, 릴리프 등 역할을 세분화하여 견실한 전력으로 게임을 승리하는 것이 정석으로 되가던 시대에 그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돌출된 능력 스트레칭'이라는 방침을 가지고 갔다. 그런 지휘가 낳은 걸작중의 하나가 바로 노모 히데오였다. 노모는 아마추어 No.1 투수로 당시 드래프트 역사상 최다인 8개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았다. 개성적인 토네이도 투구법이 화제였으나 입단 초기에 명성에 걸맞는 실적을 내지 못하자 주위에서는 투구법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져갔다. 그러나 오기는 투구법 변경 대신 등판이닝수를 오히려 늘리는 결정을 했다. "저는 땀이 나오기 시작하면 컨디션이 좋아집니다"라는 노모의 의견을 존중했다. 노모는 서서히 프로무대에서 선풍을 일으켰고 18승을 거두며 신인왕뿐만 아니라 퍼시픽리그 투수부문을 휩쓸었다. 노모는 "저는 지금의 형태로 계속 해왔습니다. 이대로 가고 싶습니다. 연습방법도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대로 시켜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제가 이기지 못하면 그 때 생각해주십시오"라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타입이었다. 서울 올림픽 메달 획득 등 이미 아마츄어계에서 실적을 냈던 노모였기에 오기는 노모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우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가 나와야 감독이나 코치의 지도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기 분석이 되어 있지 않은 선수의 이기심을 용인하는 방임주의는 결코 아니다. 본인의 실력을 파악하고 의견을 듣고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 그리고 선수의 개성과 상황을 지켜 보면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지원을 실시한다. 오우기의 육성 방법은 개성을 살려줄 수 있게 선수의 개성을 판별하는 것이었다.
[1] 시즌 도중 해임.[2] 現 오사카 체육 대학 나미쇼 고등학교. 장훈의 모교이기도 하다. 참고로 장훈은 1956년 전학생으로 입학했다.[3] 본인은 후에 입단 당시에 대해 '''(니시테츠 입단이 나의) 운명이라고 느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4] 니시테츠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다가 1950년 양대리그 시작과 동시에 니시테츠가 프로팀으로 창단한 니시테츠 클리퍼즈에 선수 겸 감독으로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했다. 그후 니시테츠가 같은 후쿠오카의 니시닛폰 파이레츠를 합병하면서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된 이후로도 명목상 감독으로써(실제 지휘는 총감독으로 1951년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가 맡았다.) 1952년까지 재직했고 이후 오기 등에게 밀려 출장기회가 감소하자 1954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니시테츠에서 1955~1957년까지 3년간 코치, 조감독을 맡았으나 1965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5] 게다가 항상 파이팅 넘치는 허슬 플레이를 펼치던 나카니시 후토시도 3루수로서 철옹성 같은 니시테츠 내야진의 일원으로 맹 활약했다. 마운드에는 당대 최고의 우완 투수 이나오 가즈히사가 있었다.[6] 그러나 미하라는 1970년을 끝으로 킨테츠 감독에서 사임. 이듬해인 1971년 야쿠르트 아톰즈 감독으로 취임했다.[7] 나시다는 이해를 끝으로 은퇴하기로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차전의 이 적시타가 그의 현역 마지막 안타였다. 2차전에서도 출장했지만 타석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1차전이 마지막으로 타석에 선 경기가 되었다.[8] 규정상 더블헤더 첫 게임은 9회까지만 진행하며 9회말까지 승패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무승부 처리. 이 상황에서 첫 경기를 무승부로 끝냈다면 그 시점에서 킨테츠의 우승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9] 1987년 퍼시픽 리그 신인왕 수상자이며, 노모 히데오 입단 이전의 킨테츠의 에이스 투수였다. 그런데 아와노는 이날 1차전 9회말에 등판하여 1이닝을 던졌고, 그 이틀 전엔 무려 128개의 투구수로 9회까지 완투했던 상태였다! 결국 하단에 나오다시피 결과는.. [10] 전년도까진 한큐 브레이브스였으나, 1988년을 끝으로 모기업 한큐 전철이 브레이브스 구단을 오릭스에게 매각하며 구단명이 바뀌었다. 이후 1991년 고베로 연고이전하며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또다시 구단명을 바꿨고, 1994년에 오기가 바로 이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취임한다.[11] 아와노는 1989년 29경기(28선발) 등판해서 '''21완투''' 235.2이닝을 던진다. 사실 1987년에도 32경기(30선발) '''22완투''' 249.2이닝을 던진 전적이 있다(…).[12] 근데 침체라기엔 뭔가 애매한 게, 창단(구단명 변경)해인 1991년부터 오기 부임 직전해인 1993년까지 3년연속 3위(오릭스 브레이브스 시기까지 포함 시엔 5년 연속)로 상위권을 지켰다. 다만 도이가 지나친 옹고집으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중용하지 않고 주전 선수들과 팀 방침의 이견으로 불화를 일으킨 덕에 당시 주전 선수들이 도이 감독 재임 시기에 타 팀으로 이적하는 등, 팀이 점점 내부에서 썩어가던 게 문제였다.[13] 다만 '''덕분에 4위가 된 다이에보다 승리수가 딸리고'''(오릭스와 긴테츠는 68승, 다이에는 69승) '''1위 세이부와의 게임차가 다이에와 동일한데다'''(7.5게임차) '''다이에와의 승률차가 불과 6모밖에 안 나는'''(오릭스와 긴테츠는 0.5354, 다이에는 0.5348) 애매한 2위를 만들어냈다(...) 승률계산 때 무승부는 제외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이 해 다이에는 네모토 리쿠오 감독의 지휘 아래 난카이 시대부터 이어져온 16년간의 비밀번호를 끊어내려 했고 실제로 이해에는 시즌 후반까지 A클래스를 유지하며 비밀번호 탈출에 기대를 모았으나 하필이면 전반기 최하위였던 킨테츠가 압도적인 타력으로 초월적인 승률을 쌓아 하위권에서 치고 올라온 것 때문에 결국 불과 6모 차이로 B클래스에 머무르며 비밀번호를 17자리로 연장한다. 그나마 16년 만에 5할을 넘는 승률을 달성한 것으로 위안 삼긴 했지만.. 그리고 네모토는 프런트로 물러나고 온 후임 감독이 다름아닌 세계의 홈런왕. 그 후 후임 감독과 함께 3년간 해메고 난 후(...) 1998년, 다이에는 비밀번호 생성을 멈추고 퍼시픽리그의 대표 강팀으로 다시 재도약한다.[14] 1989년 오릭스에 팀이 인수된 후 1991년 고베로 연고지 이전을 한 뒤의 첫 리그 우승이었다. 팀 역사상으론 한큐 브레이브스 시대였던 1984년 이래 11년 만의 우승이었다.[15] 3연패 후 1승, 그 뒤 또다시 패배하며 우승실패(...)[16] 그것도 1차전, 승리한 4차전을 제외하면 '''패배한 경기가 전부 역전패였다!!(...)''' [17] 나가시마는 오릭스가 한큐 브레이브스였던 시절에도 일본시리즈에서 우에다 토시하루가 이끌던 한큐에게 1976년~1977년 2년 연속으로 패퇴한 이력이 있다(...) [18] 그 유명한 이나오 카즈히사가 혼자서 시리즈 4승을 거뒀던 시리즈였다. [19] 거기다 2001년 시즌엔 9월 26일 오사카 돔에서 열린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최종전에서 8회까지 5-2로 앞서있었지만 9회 말 마무리 투수 오쿠보 마사노부가 아웃 하나도 못 잡고 안타-2루타-볼넷 크리로 만루를 허용했다가 대타 키타가와 히로토시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아, '''세계 최초이자 현재까지 세계 유일의 대타 역전 끝내기 리그우승 홈런''' 을 선사했다(...) 심지어 당시 킨테츠 감독은 오기의 제자였던 나시다 마사타카였다!(...) [20] 다만 2001년엔 세이부 라이온즈가 오릭스 대 킨테츠 전 여부에 따라 20년만의 B클래스 추락 위기에 처했으나(승차가 같아지면 승률이 우세인 오릭스가 3위) 킨테츠가 만루홈런으로 역전 및 리그 우승을 확정지어 간신히 1게임차로 3위를 차지했고 반대로 오릭스는 킨테츠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제물이 됨과 동시에 4위에 그쳤다.[21] 이듬해인 2006년 71세의 나이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에 취임한 동갑내기 노무라 카츠야가 바로 기록을 경신했다. 단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퇴장기록은 여전히 오기가 가지고 있다(...)[22] 니시테츠 라이온즈(모기업이 니시테츠), 킨테츠 버팔로즈(모기업이 킨테츠), 오릭스 블루웨이브~오릭스 버팔로즈(옛 모기업이 한큐. 현역 시절과 코치 시절엔 라이벌팀)[23] 전업 투수도 아닌 야수한테 타자가 범타라도 친다면 그게 더 망신이라고 판단한 점도 있었다.[24] 다만 몇 년 안가서 은퇴시켜 버리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한 번 맛이 가면 더 이상 제대로 된 활약이 힘들 정도로 악화시킨다는 의미다. 아와노는 2000년, 히라이는 2014년 시즌까지 어떻게든 현역 생활은 이어갔다. 물론 혹사 이후의 성적은 전성기 시절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25] 재미있게도 이후 아와노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곤도 감독과, 히라이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야마다 감독과 다시 사제의 연을 맺고 선수생활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