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제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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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51대 천황. 시호인 '헤이제이'는 현 나라현 일대인 헤이조쿄에서 따 온 이름이다. '나라의 황제'라는 뜻에서 '나라노미카도(奈良帝)'로 불리기도 했다.
2. 생애
774년 간무 덴노와 황후 후지와라노 오토무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85년 숙부 사가라 친왕 대신 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병약한 데다가 황태자비의 어머니인 후지와라노 구스코[3] 와의 추문이 있어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다이도 원년(806년) 간무 덴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치세 초기에는 정치에 의욕을 갖고, 각종 정치·경제의 재건을 실시하였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추방했던 후지와라노 구스코를 귀환시켜 궁정 내부의 일을 일임시켰다. 다이도 4년 (809년) 치세 4년 만에 신병으로 인해 동생 사가 천황에게 양위하였다.
810년 수도를 헤이안쿄에서 헤이조쿄로 다시 옮기고, 정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가 천황측이 선수를 쳐 구스코의 관직을 박탈하는 등 상황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에 810년 헤이조쿄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구스코는 음독 자살하고 상황은 출가하였다. 또한, 상황의 아들 다카오카 친왕 대신 사가 천황의 동생 오토모 친왕(준나 덴노)이 황태제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구스코의 변'''이라 부른다.
824년 사망하였다. 향년 51세.
3. 기타
그의 시호가 헤이제이라는 것과 수도를 헤이조쿄로 옮기려 했던 것으로 보아 나라 시대의 정서가 강했던 인물로 보인다. 자신의 아버지인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로 옮긴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던 당시라 그런 모양.
4. 가족 관계
- 비 : 후지와라씨 황태자비(藤原氏 皇太子妃) - 후지와라노 타다누시(藤原縄主, 760~817)와 후지와라노 구스코(藤原薬子, ?~810)의 딸로 본래 동궁비(東宮妃)[4] 였다. 동궁비로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천황이 황태자였던 시절 황태자비로 입궐했으나 황태자가 천황이 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황후 : 증황후 후지와라노 타라시코(贈皇后 藤原帯子, ?~794)
- 비 : 아사하라 내친왕(朝原内親王, 779~817)
- 비 : 오야케 내친왕(大宅内親王, ?~849)
- 비 : 칸나비 내친왕(甘南美内親王, 800~817)
- 쇼지(尚侍) : 후지와라노 구스코(藤原薬子, ?~810) - 후지와라노 타네츠구(藤原種継, 737~785, 식가)의 딸
- 궁인 : 이세노 츠구코(伊勢 継子, 772~812) - 이세노 오키나(伊勢老人)의 딸. 여러 자식들을 낳았던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총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 3남 타카오카 친왕(高岳親王 799~865)
- 4남 코세 친왕(娘岳親王 799~865)
- 1녀 카미츠케누 내친왕(巨勢親王, 799/~882)
- 3녀 이소카미 내친왕(石上内親王, ?~846)
- 4녀 오하라 내친왕(大原内親王, ?~863)
- 궁인 : 후지이노 후지코(葛井藤子) - 후지이노 미치요리(葛井道依)의 딸
- 1남 아보 친왕(阿保親王, 792~842)
- 궁인 : 키노 이오카즈(紀魚員) - 키노 코츠오/키즈오(紀木津魚)의 딸
- 2녀 에누 내친왕(叡奴内親王, ?~835)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휘(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일본 헤이안시대 때 여인으로 미색으로 헤이제이 덴노를 사로잡아 권력을 전횡하였다. 9세기 초 후지와라노 타네츠구(藤原種繼)의 딸로 태어났다. 주나곤(中納言) 후지와라노 타다누시(藤原縄主)의 부인이 되어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딸이 아테노 친왕(安殿親王)의 궁녀가 되면서 자신도 도쿠센지(東宮宣旨, 황태자를 모시는 고급궁녀)로서 일하게 되었고, 이 때 자신의 딸이 모시는 아테노 친왕과 불륜의 사이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후지와라노 카다노마로(藤原葛野麻呂)와도 사통하였다고 한다. 간무 덴노가 이에 격분하여 구스코를 궁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806년, 간무 덴노가 사망하고 아테노 친왕이 헤이제이 덴노가 되자 그는 구스코를 쇼지(尚侍)에 임명하여 다시 총애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로 보내졌다. 이때부터 구스코는 오빠인 후지와라노 나카나리(藤原仲成)와 함께 권력을 전횡하기 시작하였다. 809년에 헤이제이 덴노가 병이 깊다는 이유로 가미노(神野) 친왕에게 양위를 했고 사가 덴노가 등극하게 되었다. 그런데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된 헤이제이가 병이 나아 양위를 해버린 것을 후회하고 천황으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자 구스코 자신도 오빠 나카나리와 함께 이에 동조하였다. 810년, 헤이제이 상황이 헤이조쿄(平城京)가 진정한 수도라며 천도의 조칙을 내리고, 천황에 복귀할 것을 선언하자 사가 천황은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최초의 세이이다이쇼군, 征夷大將軍)를 파견하여 이를 제압하였다. 헤이제이 상황의 거병이 실패하자 구스코는 10월 17일에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4] 황태자비를 뜻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