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 덴노

 


[image]
'''한풍 시호[1]'''
간무 덴노(桓武天皇, 환무 천황)
'''화풍 시호'''[2]
야마토네코아마츠히츠기이야테라스노미코토
아메쿠니오시히라키아메노시타시라스카시와바라노천황
(天國押撥御宇柏原天皇)
'''별호'''
카시와바라노미카도(柏原帝)
엔랴쿠노미카도(延曆帝)
''''''
야마노베 (山部)
'''능호'''
카시와바라 능(柏原陵)
'''생몰'''
737년 ~ 806년 음력 3월 17일 (양력 4월 9일)
'''재위'''
781년 4월 30일 ~ 806년 4월 9일
'''연호'''
엔랴쿠(延暦)
'''황거'''
헤이제이쿄/헤이죠쿄(平城京), 나가오카쿄(長岡京), 헤이안쿄(平安京)
1. 개요
2. 생애
2.1. 출신과 초기 생애
2.2. 나카오카로 가다
3. 가족관계
4. 기타


1. 개요


일본의 제50대 천황.

2. 생애



2.1. 출신과 초기 생애


코닌 덴노의 아들이지만, 황후인 이노우에 내친왕의 소생은 아니었다. 백제계의 여인인 타카노노 니이가사 소생의 1황자로,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이라 불렸다. 아버지 시라카베 왕은 덴지 덴노 계열의 황손으로 황통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아내가 덴무 덴노 계열의 쇼무 덴노의 딸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이었기에 황위를 이을 수 있었고, 내친왕의 소생인 동생 오사베 친왕(他戶親王)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황후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에 저주 사건이 발생하면서 황후가 폐출되었고, 야마노베 친왕이 황태자가 되어 황위를 계승하였다. 그 배후에는 간무 본인이나 후지와라 씨족, 모계의 도래인 세력 등의 음모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간무 덴노는 여러 가지로 백제와 연관되어 있다. 일제 시기의 일본 언어학자인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廣三郞)는 '간무는 백제인이다'라 말한 적이 있고, 아키히토 덴노가 2001년 12월 23일 자신의 만 68세 생일을 맞이한 기자회견에서 <속일본기>의 기록을 들며 간무 천황의 생모 타카노노 니이가사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3]이라 기록된 사실에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언급하였다.
사실 유명 일본사 참고서에서도 간무 덴노가 도래계라는 걸 인정하는 문구를 넣고 있다.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로 천도(794) 이후 수도 조영사업 및 에미시 정벌 건으로 백성이 힘들어한다며 이를 반대하는 후지와라노 오쓰구(藤原緒嗣)와 찬성하는 스가노노 마미치(菅野真道) 사이에 이른바 '덕정상론(徳政相論)'이 일었는데(805) 도래인 출신의 "마미치는 같은 '''도래인의 피를 이은 간무덴노'''를 옹호했으나, 천황은 오쓰구를 지지, 2대 사업을 중지했다"고 쓰여있다(출처: 理解しやすい日本史B). 간무 덴노 자신이 "구다라노고니키시(百濟王) 일족은 짐의 외척이다(百濟王等者朕之外戚也)"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간무 덴노는 황후 소생이 아니었고, 일본의 전통적인 지배계층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왕권신수설로서 백제고구려 신화까지 역사에 기록해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있는 건 속일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코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4]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간무 덴노의 입지는 외국 신화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약했다는 뜻이 되며, 후지와라 씨족의 권세 강화와 헤이안 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당시 수백 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신화가 당대 일본에도 알려져 있었으며, 해당 신화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2.2. 나카오카로 가다


간무 덴노의 치세때는 덴무 계열의 세력이 남아 있었고, 불교 사원 세력도 강성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저주에 관련된 소문이 헤이조쿄(平城京)에 판친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따라서 784년 야마시로국(山城國) 오토쿠니 군(乙訓郡)의 나카오카(長岡)에 도읍을 건설하고 천도하여 나카오카쿄(長岡京)에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재앙'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건은 785년 9월 23일 저녁에 벌어졌다. 나카오카쿄 건설 책임자인 후지와라노 타네츠구[5]가 누군가에게 화살에 맞아 암살된 것이었다. 범인은 곧 잡혔는데, 간무 덴노의 동생이자 황태제였던 사와라 친왕(旱良親王)과 그를 밀고 있었던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特)였다. 사와라 친왕은 곧바로 폐태제되었고, 아와지로 유배를 갔으며, 도중에 항의의 표시로 단식하다가 죽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후지와라 씨족이 주범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간무 덴노가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후원하는 사와라 친왕의 즉위를 꺼렸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씨족은 초창기부터 다른 씨족들을 무고와 음모로 살해하고 권력을 잡은 경우가 허다했다.
이후 자연재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간무 덴노의 주변에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사와라 친왕의 저주로 그런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고, 결국 나카오카쿄는 마경이 되고 말았다. 이에 간무 덴노는 사와라 친왕에게 '스도 덴노(崇道天皇)'라는 시호를 올리고, 정중히 제사를 지내 그 노여움을 달래고자 했다.

2.3. 헤이안 시대를 열다


결국 이러한 저주 소문을 못 이기고 도주하고자 헤이안(平安)에 도읍을 건설하고 천도하여 그곳을 헤이안쿄(平安京)로 명명하였으며, 헤이안 시대를 열게 된다. 이 헤이안이 바로 천년 고도 교토다. 첫 번째 천도는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천도는 누가 봐도 그냥 저주가 무서워서 도주한 것 이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
간무 덴노는 관제 및 군제와 토지 문제의 변혁을 통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율령제의 정비 및 통치안정을 꾀하였으며, 그에 따라 정부 조직과 기능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런 천도와 제도 정비 과정에서 자신의 부친의 옹립에 크게 기여했던 후지와라 가문을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특히 '후지와라 북가'의 인물들을 발탁하였다. 그 덕에 헤이안 시대는 황가와 강대한 귀족 후지와라 가문 간의 협치가 이어졌고, 후지와라 가문이 융성하게 되었다.
정부 조직과 기능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덴노로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를 에미시에 파병했다. 그리고 좌대신 후지와라노 우오나를 파면하고, 규슈로 유배시켰다. 얼마 후 간무 덴노는 상경을 허락해 후지와라노 우오나는 수도에서 사망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당시 후지와라 일족은 힘이 강한 외척이었지만 흔히 헤이안 시대하면 떠올리는 막나가는 세도 정치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지와라노 다마로가 우대신이 되었는데 당시 좌대신과 우대신 자리가 비어 있어서 간무 덴노가 권력을 직접 행사하고 있었다. 우대신이 사망한 뒤 후지와라노 고레키미가 새 우대신이 되었고, 덴교의 지도 아래에 엔랴쿠지가 건설되었다.
간무 덴노는 한창 나라에 있다가 나중에 헤이안으로 천도한 것이라 나라 시대 마지막 군주이기도 했다.

3. 가족관계


49대 코닌 덴노와 타카노노 니이가사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 황후 후지와라노 오토무로
  • 후지와라노 타비코 부인(藤原旅子, 759~788) - 후지와라 모모카와(藤原百川, 732~779)의 딸
    • 7남 준나 덴노
    • 장녀 아사하라 내친왕(朝原內親王, 779~817)
    • 사카히토 내친왕(酒人內親王, 754~829)
  • 후지와라노 요시코 부인(藤原吉子, ?~807) - 후지와라 코레키미(藤原是公, 727~789)의 딸
    • 3남 이요 친왕(伊予親王, 780~807)
  • 타지히노 마무네 부인(多治比眞宗, 769~813) - 타지히노 나가노(多治比長野, 706~790)의 딸
    • 4남 카츠가하라 친왕(葛原親王, 786~853)[6]
    • 9남 사미 친왕(佐味親王, 793~825)
    • 10남 카야 친왕(賀陽親王, 794~871)
    • 11남 오노 친왕(大野親王, 798~803)
    • 3녀 이나바 내친왕(因幡內親王, ?~824)
    • 4녀 아노 내친왕(安濃內親王, ?~841)
  • 후지와라 오쿠소 부인(藤原小屎) - 후지와라 와사토리(藤原鷲取)의 딸
    • 5남 만다 친왕(万多親王, 788~830)
  • 키노 오토이오 여어(紀乙魚 女御, ?~840) - 키노 마즈이오(紀木津魚)의 딸
  • 쿠다라노코니키시 쿄호 여어(百濟王敎法 女御, ?~840) - 쿠다라노니키시 슌테츠(百済王俊哲, 740 경~795)의 딸[7]
  • 타치바나 미코 여어(橘御井子 女御) - 타치바나 이리이(橘入居, ?~800)의 딸
    • 카라쿠 내친왕(賀樂內親王, ?~874)
    • 16녀인 스가와라 내친왕(管原內親王, ?~825)
  • 후지와라 나카코 여어(藤原仲子 女御) - 후지와라 이에요리(藤原家依, 743~785)의 딸
  • 타치바나노 츠네코 여어(橘常子女御 , 788~817) - 타치바나 시마다마로(橘島田麻呂)의 딸
    • 오야케 내친왕(大宅內親王, ?~849)
  • 후지와라노 마사코 여어(藤原正子 女御) - 후지와라 키요나리(藤原清成, 716?~777)의 딸
  • 사카노우에 마타코 궁인(板上又子) - 사카노우에 카리타마로(坂上苅田麻呂, 727~786)의 딸
    • 12녀 타카츠 내친왕(高津內親王, ?~841)
  • 사카노우에 하루코 궁인(板上春子, ?~790) -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8]의 딸
    • 12남 카도이 친왕(葛井親王, 800~850)
  • 카스가 내친왕(春日內親王, ?~833)
  • 후지와라노 카와코 궁인(藤原河子) - 후지와라 오츠구(藤原大継, ?~810)의 딸
    • 12남 나카노 친왕(仲野親王, 792~867)
    • 13녀 아토키 내친왕(安勅內親王, ?~855)
    • 오이 내친왕(大正內親王, ?865)
    • 15녀 키노 내친왕(紀內親王, 799~886)
    • 요시하라 내친왕(善原內親王, ?~863)
  • 후지와라노 아즈마코 궁인(藤原東子) - 후지와라 타네츠구(藤原種継, 737~785)의 딸
    • 칸나비 내친왕(甘南 美內親王, 800~817)
  • 후지와라노 헤이시 궁인(藤原平子) - 후지와라 타카토시(藤原乙叡, 761~808)의 딸
    • 8녀 이토 내친왕(伊都內親王, ?~861)
  • 키노 와카코 궁인(紀若子) - 키노 후나모리(紀船守, 731~792)의 딸
    • 아스카 친왕(明日香親王, ?~834)
  • 후지와라 우에코 궁인(藤原上子) - 후지와라 오구로마로(藤原小黒麻呂, 733~794)의 딸
    • 7녀 시게노 내친왕(滋野內親王, 806~857)
  • 타치바나 타무라코 궁인(橘御田村子) - 타치바나 이리이(橘入居, ?~800)의 딸
    • 이케노우에 내친왕(池上內親王, ?~869)
  • 카와카미 마누 궁인(河上眞奴) - 니시카베 하루히토(錦部春人)의 딸
    • 사카모토 친왕(板本親王, 793~818)
  • 쿠다라노니키시 쿄닌 궁인(百濟王敎仁) - 쿠다라노니키시 무쿄(百済王武鏡)의 딸[9]
    • 9남 오타 친왕(大田親王, 793~808)
  • 쿠다라노니키시 죠쿄 궁인(百濟王貞香) - 쿠다라노니키시 쿄토쿠(百済王教徳, ?~822)의 딸[10]
    • 14녀 스루가 내친왕(駿河內親王, 801~820)
  • 나가토미 토요코 궁인(中臣豊子) - 나가토미 오이오(中臣大魚)의 딸
    • 5녀 후세 내친왕(布勢內親王, ?~812)
  • 타지히노 토오츠구 여유(多治比豊継 女嬬)
    • 나가오카노 오카나리(長岡岡成, ?~848)
  • 쿠다라노 나가츠구 여유(百済永継 女嬬) - 아스카베노 나토마로(飛鳥部奈止麻呂)의 딸
    • 요시미네노 야스요(良岑安世, 758~830) - 이름으로 보아 신적강하된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와 달리 백제씨다.
  • 쿠다라노 묘신 여유(百済王明信 女嬬, ?~815) - 성이 백제왕씨로 보아 백제 왕족의 먼 후손으로 보인다.
후지와라 씨족 출신의 여인이 많으며, 후궁 중에는 백제씨와 백제왕씨 성을 가진 자도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까지도 일본 조정 내에 있던 백제계 인사들의 영향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 기타


당연하지만 교토에서는 지금도 큰 존경을 받으며 널리 모셔지고 있다. 특히 헤이안 신궁은 수도 자리를 어처구니없이 빼앗기고 침체되어 가던 교토의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간무 덴노를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궁궐 양식의 거대 신사다. 교토에는 간무 덴노의 어머니인 백제계 여인과 그 조상들을 섬기는 신사가 내려오고 있고 신사에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측 기록에는 백제 무령왕이 아들을 일본에 보냈다는 내용이 없는데, 무령왕 아들의 후손이 사실이라면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3대 사론서 중 하나인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 14세기)에서는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 같은 동족)의 나라였다.’고 적힌 책이 전해내려 왔는데, 이를 8세기 간무 덴노의 어대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고고학적으로 일본에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전파한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도래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야요이인들의 기원인 일대와 삼한 일대가 같다는 의미로 추정된다.[11]
책의 성격상 천황 가문의 해외 도래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간무 덴노가 백제와 연관되어 있으면서 일본 최초의 율령제 시대이자 일본의 이미지가 정립된 헤이안 시대를 연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이 시기부터 일본은 한반도-중국의 영향을 받은 성격이 점차 사라지며, 견당사가 중단되어 자국 중심적이고 독특한 국풍문화가 널리 퍼지게 된다.
교토 후시미구의 후시미 성 근방에 간무 덴노의 이 있다. 능으로 가는 길이 잘 되어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하는 듯. 또, 어머니인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묘는 다른 쪽에 있다.#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무령왕의 아들로 왜국에 온 사아군(순타태자)의 후손이라고 한다.[4]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5] 737~785, 후지와라노 우마카이의 손자로 식가였다. 그의 딸이 유명한 구스코였다.[6] 카츠가하라 친왕의 아들은 타마키 왕(高原王)804~867이며, 그의 아들인 타카모치 왕(高望王)은 간무 헤이지(桓武平氏)의 시조인 타이라노 타카모치(平高望)다. 당시 일본 황실의 법적으로 천황의 아들은 친왕, 친왕의 아들은 왕, 증손자부터 신적강하였다. 하지만 후대 전란을 겪으며 인원부족에 시달리자 천황의 아들~손자까지 친왕, 증손자~고손자까지 왕으로 바뀌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아들~손자까지 친왕, 증손자는 왕, 고손자부터 신적강하가 되었다.[7] 백제왕씨 성으로 보아 고대 일본으로 귀화한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 조정에서 백제계의 영향력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8] 초기 헤이안 시대에 큰 활약을 펼친 전설적인 무장이다.[9] 백제왕씨 성으로 볼 때 백제왕씨 여어와 마찬가지로 고대 일본에 귀화한 백제 왕실의 후손인 백제왕씨로 보인다.[10] 백제왕씨 여어와 백제왕씨 궁인과 마찬가지로 백제 왕실의 후손인 백제왕씨로 보인다.[11] 물론 이웃동네인 부여와 읍루(말갈 전신)의 차이처럼 그 시절에도 언어와 풍습이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한의 일부 지역에서 비슷한 문화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에서 삼한과 함께 나타난 민족이 일본으로 도래하고, 남은 민족은 삼한과 신라, 백제, 가야의 성립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