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
'''倭國'''
고대에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일본의 옛 이름이자, '일본(日本)'으로 국호가 확정된 이후에도 동아시아 주변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또다른 이름. 여담으로 외국과 단어, 발음 다 비슷해서 일부 사람들은 가끔 이 두 단어를 두고 혼동하기도 한다.
7세기 이전까지 '''야마토 정권'''하 일본의 공식 국명이 왜국(倭國)이었고, 그 이후에는 '왜 대신 일본이라고 불러 달라'라고 공표하게 되어 옛 한국과 중국의 공식 문서에서는 일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뒤로도 19세기까지 일상적으로는 왜로 많이 불렀으며, 현대에도 일본을 비하하는 멸칭으로서 종종 사용된다.
일본사의 시대구분에 의하면 아스카 시대까지가 왜국에 해당한다.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 아스카 시대 후반부이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과 같이 고대 중국과 한국의 사서에서는 일본을 공식적으로도 '왜국'으로 칭했다.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동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거의 가장 동쪽에 있으니)[1]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공포 때 공식적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으로 나오는데, 이미 7세기부터 일본이란 이름이 사용되다가 701년 이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본인을 가리키던 말인 왜(倭)라는 글자의 비하적인 의미를 희석하기 위해 이를 일본어로 발음이 같은 '화(和)'로 바꾸고[2] 앞에 '대(大)'를 붙여서 '大和'를 국명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일본내에서 사용하던 국명인 "야마토"와 연결시켜 '大和'라고 쓰고 야마토라고 읽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주변국은 일본을 왜(倭)라고 불렀다. 아주 공식적인 외교문서에서는 일본국이라고 불러주기도 했지만, 일상적으로는 왜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조선 통신사를 보좌하던 일본인들이 '우리는 일본인데 왜 왜라고 부르냐?' 하고 따지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왜란 말을 일본 측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과 근대적 통상을 하자마자, 왜국이라고 기재된 한자를 일본으로 고쳐줄 것부터 먼저 요청하기도 했다.(...)
기원에 관해 여러 설이 존재해서 정설로 정해진 것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일본어에서 1인칭 대명사 'wa'의 음차라는 학설도 존재하는데, 이는 12세기에 우라베노 카네카타(卜部 兼方)가 지은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서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각종 원시부족에게 누구인지를 물으면 가장 먼저 1인칭 대명사를 말한다는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두었다.
후한서에 등장하는 기록에 따르면 초기에는 '''委(위)'''로 쓰였던 것 같으나[3] , 나중에는 뜻을 좁히고자 사람 '인' 변을 붙여 '''倭'''라고 썼다. 중앙집권적 국가가 성립하면서 한자 자체의 의미가 부정적이라는 인식이 생겨, 일본어로 발음이 같은 '''和'''로 바꾸어[4] 는 오늘날에도 '''和'''라 부른다.[5] 일반적으로 和는 멸칭의 뉘앙스가 없다고 여긴다.[6] 초창기에는 노국(奴國)이라는 이름도 기록과 유물에 등장하는데 이게 '왜국'이란 나라와 별개로 일본열도에 존재하던 나라일 수도 있고 왜국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만, 종 노(奴)자는 '왜'자보다 대놓고 나쁜 의미라서인지 왜국보다 이른 시점에 쓰이지 않게 된다.
'矮'(키가 작다)에서 이 왜(倭)라는 나라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도 왜(倭)의 기원을 연구한 가설 중 하나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설은 두 한자가 발음이 같은 한국어와 달리 倭와 矮의 중국어(방언 포함), 일본어(음독) 발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 즉, 표준중국어의 경우 倭를 '워(Wō)', 矮를 '아이(ǎi)'라 발음하고, 일본어 음독으로는 倭를 '이(イ,ヰ)', '와(ワ)', 矮를 '에(エ)'(오음), '아이(アイ)'(한음), '와이'(ワイ)(관용음)로 발음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당한다. 또한 고대중국어, 중세중국어 발음을 봐도 이 두 단어는 전혀 혹은 미묘하게나마 다르게 발음한다. 하지만, 발음이 다르더라도 영향을 받은 한자는 많으며, 서로 연상시킬 수 있는 비슷한 한자라는 점에서 발음의 비유사성만으로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고대 일본인이 wa라고 한 것이 중국인은 wo라고 했다고 해서, '왜의 뜻은 키가 작다가 아니다' 라고도 할 수 없다. 왜(倭)는 일본인이 쓰던 말이 아니라, 중국인이 썼던 말이다. 일본인 스스로가 왜(倭)라고 먼저 지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중국인들은 倭를 '난쟁이'라는 비칭으로 불렀고, 그에 대한 역사적 사료는 끝없이 많다. 중국이 쓴 한자의 뜻을 묻는데 일본인이 말했던 원 뜻을 말하는 것은 웃긴 일.' 중국인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불렀던 것은 확실하다. 倭에 난쟁이라는 뜻이 없었다면 구당서에서 '그 이름(倭)이 부끄러워 '일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라고 말했는가? 그 전부터 '부끄러운' 뜻으로 통했고, 이를 알았기 때문에 바꾸었던 것. 아마 이런 기원에 대한 논란은 일본인들의 자격지심에서 나온 논리인 듯. 물론 초기에는 자국의 천황을 대왜왕이라고 칭하는 등, 자기들 스스로 이 명칭을 자랑스럽게 쓰기도 했으므로, 중국에서 자길 부르는 명칭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거나, 처음에는 비칭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대로 단순한 음차였다가 비하적인 의미가 추가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그 유명한 '한위노국왕' 금인이나, 히미코의 입조 시에 일본을 왜라고 칭한 건, 일본에 대해 비하하는 시각이 생기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7] .
중국 사서에 왜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대체로 전한 대에 성립이 완료되었다고 추정되는 《산해경》에서이다. 여기에서는 왜가 전국시대의 연나라에 신복한 것으로 나오지만, 애초에 산해경이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 모음집이라 그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왜가 분명하게 인류의 역사에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후한 광무제 때(57년)로, 지금의 규슈 북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노쿠니(奴國)의 왕이 후한에 조공하여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8] 이라는 칭호와 금인[9] 을 하사 받고 나서이다. 그 후에도 후한 안제 때(107년) 왜왕 '수승(帥升-스이 쇼우)'이 후한에 입조하여 노예 160명과 공물을 바친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로는 중국 기록에서는 조위(曹魏) 시대까지는 왜에 대한 기록이 한동안 없어진다. 한국 기록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왜인이 쳐들어오거나 왜국과 우호를 맺기도 하며,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히미코(卑弥呼, ひみこ,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이로부터 70여년 뒤인 중국 조위(曹魏) 때 야마타이국(邪馬台国, やまたいこく, 사마대국)의 여왕인 히미코가 낙랑군을 통해 조공의 의사를 밝히면서 재등장, 239년 위(魏)의 명제에게 사절을 보내 남녀 노예를 바치고는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을 통해 왜는 다시 한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여자가 다스리는 바다 건너의 섬나라라는 흥밋거리 때문인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동이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왜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정도이다. 히미코가 죽은 뒤 다시 남자가 왕으로 올라 통치하였지만, 오히려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가, 히미코의 종녀(宗女)인[10] 토요(臺與)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나라가 정리되어 서진에 입공하였다.
그 후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끊겨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다시 중국과 외교를 시작한 것은 소위 왜의 오왕(五王)시대로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의 다섯 왕이 5세기 전반(全般)을 통틀어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일본서기의 유랴쿠 덴노로 추정되는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국서는 전근대 중국의 외교 문서의 전범으로 크게 일컬어질 정도였다. 왜왕 무가 죽은 뒤 왜와 중국 간의 외교 관계는 또 다시 한동안 암흑으로 빠졌다.
한국의 사서에서는 꾸준히 신라와 국지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석우로와 관련된 기사에서는 일본 측의 일본서기와 교차검증되는 부분도 나타난다. 왜국은 한반도 중 백제나 가야와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었고 왜인이 백제나 가야에서 군인으로 일하거나 국제결혼 및 혼혈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두 나라의 요청으로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여러 번 지원군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나 관산성 전투와 가야 멸망을 계기로 신라의 국력이 탄탄해지는 6세기부터는 왜의 침략이 거의 사라진다. 오히려 527년에는 일본 규슈 북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이와이(磐井)를 신라가 사주해 그가 왜국 조정에 반기를 들어, 1년 후 왜국이 토벌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한국 측 기록에는 없는 사건이지만 이 것이 사실이라면 법흥왕이 역으로 일본의 정세를 역이용해 한 방 먹인 사례인 것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양제 때, 쇼토쿠 태자가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묻노니 무양하신가"'''라는 국서를 오노노 이모코를 시켜 보내게 한 그때가 왜가 다시 역사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16년(608) 6월 조에 따르면 隋(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에게서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백제가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 했던 걸로 보인다.[11]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동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거의 가장 동쪽에 있으니)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공포 때 공식적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으로 나오는데, 이미 7세기부터 일본이란 이름이 사용되다가 701년 이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는 왜가 국호를 일본으로 정하면서, 중국 정사의 열전에는 왜전(倭傳)이 사라지고, 일본전(日本傳)이 입전된다. 이때 중국에서는 일본과 왜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당서에서는 "중국의 글 뜻을 제대로 알고 왜라는 이름을 꺼려서 일본으로 바꿨다", "일본은 왜의 속국이었는데 왜가 병합하고 이름을 모방했다[12] ", "해 뜨는 곳에 가까워 일본이라고 했다"고 하며 "사신이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고로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고 할 정도였다.
고대 한반도에도 자질구레한 싸움에서 종종 왜인들이 언급이 되는데, 일본 우익에서는 이를 토대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대륙계 귀화인'''들의 일본 영향력보다 못 미치는 정도로서 고대 일본 지방 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하거나, 약탈을 위한 침범 혹은 용병으로 동원되었던 정도로 생각되고 있다. 더욱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삼국 정립 이전이나 이후에나 '''일본계 정부에 의한 행정권'''이라고 할 만한 영향력은 없었다[13] . 애초에 고대시대에 지금처럼 명확한 국경을 긋고 민족이 구역을 딱딱 나누어 살았을 리는 전무하다. 고대시대 왜인들의 침입은 신라 말기의 신라구가 보인 양상과도 비슷한데, 혼란 시대의 한반도 일부 지방에서나 보일 만한 중구난방 활동을 보면 그만큼 통제가 안 되는 여러 세력들이 집적거리면서 토벌되거나 이주자를 주고받는 식의 교류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7세기 이후 공식 국호가 왜에서 일본으로 바뀌면서 공식 명칭은 日本으로 통일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중국과 한국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로의 倭라는 명칭은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었다. "잘하면 일본국, 사고치면 왜국"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인식을 대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임진'''년에 '''왜'''인들이 들어와서 '''난'''리를 피운 사건.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왜인 이외에 '''예'''라는 순우리말 표현 역시 일본인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당시 옥편에서는 한자 倭를 두고 "'''예 와'''"라고 훈과 음을 달아두었고, 선조국문유서에서도 "예나라"를 일본을 뜻하는 표현으로 쓴 경우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신라 시대의 향가인 혜성가에서는 倭理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이 표기를 바탕으로 김완진 등 일부 국어학자들은 해당 어휘가 신라 시대에는 '여리'라고 읽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 볼 때 어중의 ㄹ발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탈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어의 일부 지명에도 아직까지 흔적이 약간 남아있다.
일본인을 왜, 왜놈, 왜구라고 부르면 매우 싫어하는 듯. 1876년, 일본의 억지 침공으로 맺은 강화도 조약 이후에 가정 먼저 하던 일이 왜관이라고 표기한 곳을 일본관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하던 역사적 일이나 왜노 문서 등을 참고해도 알 수 있다.
어느 나라나 사정이 비슷한지 일본 내에도 국까들이 있어서 (즉, 일본인 네티즌이 일본 자국을 까는 것.)[14] , 고대에 일본이 대외적으로 왜국(倭國)으로 불렸다는 점을 국까 본인들의 단골 소재로 써먹기도 한다. 여기에다 다른 나라들 평균 신장까지 같이 첨부해서 일본이랑 비교하면서 까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가끔씩 자국을 굳이 조선이라 부르면서 어그로를 끄는 그런거랑 비슷하다.
1. 개요
고대에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일본의 옛 이름이자, '일본(日本)'으로 국호가 확정된 이후에도 동아시아 주변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또다른 이름. 여담으로 외국과 단어, 발음 다 비슷해서 일부 사람들은 가끔 이 두 단어를 두고 혼동하기도 한다.
7세기 이전까지 '''야마토 정권'''하 일본의 공식 국명이 왜국(倭國)이었고, 그 이후에는 '왜 대신 일본이라고 불러 달라'라고 공표하게 되어 옛 한국과 중국의 공식 문서에서는 일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뒤로도 19세기까지 일상적으로는 왜로 많이 불렀으며, 현대에도 일본을 비하하는 멸칭으로서 종종 사용된다.
일본사의 시대구분에 의하면 아스카 시대까지가 왜국에 해당한다.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 아스카 시대 후반부이다.
2. 역사
삼국지 위지 왜인전과 같이 고대 중국과 한국의 사서에서는 일본을 공식적으로도 '왜국'으로 칭했다.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동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거의 가장 동쪽에 있으니)[1]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공포 때 공식적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으로 나오는데, 이미 7세기부터 일본이란 이름이 사용되다가 701년 이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본인을 가리키던 말인 왜(倭)라는 글자의 비하적인 의미를 희석하기 위해 이를 일본어로 발음이 같은 '화(和)'로 바꾸고[2] 앞에 '대(大)'를 붙여서 '大和'를 국명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일본내에서 사용하던 국명인 "야마토"와 연결시켜 '大和'라고 쓰고 야마토라고 읽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주변국은 일본을 왜(倭)라고 불렀다. 아주 공식적인 외교문서에서는 일본국이라고 불러주기도 했지만, 일상적으로는 왜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조선 통신사를 보좌하던 일본인들이 '우리는 일본인데 왜 왜라고 부르냐?' 하고 따지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왜란 말을 일본 측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과 근대적 통상을 하자마자, 왜국이라고 기재된 한자를 일본으로 고쳐줄 것부터 먼저 요청하기도 했다.(...)
3. 기원
기원에 관해 여러 설이 존재해서 정설로 정해진 것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일본어에서 1인칭 대명사 'wa'의 음차라는 학설도 존재하는데, 이는 12세기에 우라베노 카네카타(卜部 兼方)가 지은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서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각종 원시부족에게 누구인지를 물으면 가장 먼저 1인칭 대명사를 말한다는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두었다.
후한서에 등장하는 기록에 따르면 초기에는 '''委(위)'''로 쓰였던 것 같으나[3] , 나중에는 뜻을 좁히고자 사람 '인' 변을 붙여 '''倭'''라고 썼다. 중앙집권적 국가가 성립하면서 한자 자체의 의미가 부정적이라는 인식이 생겨, 일본어로 발음이 같은 '''和'''로 바꾸어[4] 는 오늘날에도 '''和'''라 부른다.[5] 일반적으로 和는 멸칭의 뉘앙스가 없다고 여긴다.[6] 초창기에는 노국(奴國)이라는 이름도 기록과 유물에 등장하는데 이게 '왜국'이란 나라와 별개로 일본열도에 존재하던 나라일 수도 있고 왜국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만, 종 노(奴)자는 '왜'자보다 대놓고 나쁜 의미라서인지 왜국보다 이른 시점에 쓰이지 않게 된다.
'矮'(키가 작다)에서 이 왜(倭)라는 나라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도 왜(倭)의 기원을 연구한 가설 중 하나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설은 두 한자가 발음이 같은 한국어와 달리 倭와 矮의 중국어(방언 포함), 일본어(음독) 발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 즉, 표준중국어의 경우 倭를 '워(Wō)', 矮를 '아이(ǎi)'라 발음하고, 일본어 음독으로는 倭를 '이(イ,ヰ)', '와(ワ)', 矮를 '에(エ)'(오음), '아이(アイ)'(한음), '와이'(ワイ)(관용음)로 발음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당한다. 또한 고대중국어, 중세중국어 발음을 봐도 이 두 단어는 전혀 혹은 미묘하게나마 다르게 발음한다. 하지만, 발음이 다르더라도 영향을 받은 한자는 많으며, 서로 연상시킬 수 있는 비슷한 한자라는 점에서 발음의 비유사성만으로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고대 일본인이 wa라고 한 것이 중국인은 wo라고 했다고 해서, '왜의 뜻은 키가 작다가 아니다' 라고도 할 수 없다. 왜(倭)는 일본인이 쓰던 말이 아니라, 중국인이 썼던 말이다. 일본인 스스로가 왜(倭)라고 먼저 지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중국인들은 倭를 '난쟁이'라는 비칭으로 불렀고, 그에 대한 역사적 사료는 끝없이 많다. 중국이 쓴 한자의 뜻을 묻는데 일본인이 말했던 원 뜻을 말하는 것은 웃긴 일.' 중국인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불렀던 것은 확실하다. 倭에 난쟁이라는 뜻이 없었다면 구당서에서 '그 이름(倭)이 부끄러워 '일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라고 말했는가? 그 전부터 '부끄러운' 뜻으로 통했고, 이를 알았기 때문에 바꾸었던 것. 아마 이런 기원에 대한 논란은 일본인들의 자격지심에서 나온 논리인 듯. 물론 초기에는 자국의 천황을 대왜왕이라고 칭하는 등, 자기들 스스로 이 명칭을 자랑스럽게 쓰기도 했으므로, 중국에서 자길 부르는 명칭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거나, 처음에는 비칭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대로 단순한 음차였다가 비하적인 의미가 추가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그 유명한 '한위노국왕' 금인이나, 히미코의 입조 시에 일본을 왜라고 칭한 건, 일본에 대해 비하하는 시각이 생기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7] .
4. 기록
중국 사서에 왜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대체로 전한 대에 성립이 완료되었다고 추정되는 《산해경》에서이다. 여기에서는 왜가 전국시대의 연나라에 신복한 것으로 나오지만, 애초에 산해경이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 모음집이라 그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왜가 분명하게 인류의 역사에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후한 광무제 때(57년)로, 지금의 규슈 북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노쿠니(奴國)의 왕이 후한에 조공하여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8] 이라는 칭호와 금인[9] 을 하사 받고 나서이다. 그 후에도 후한 안제 때(107년) 왜왕 '수승(帥升-스이 쇼우)'이 후한에 입조하여 노예 160명과 공물을 바친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로는 중국 기록에서는 조위(曹魏) 시대까지는 왜에 대한 기록이 한동안 없어진다. 한국 기록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왜인이 쳐들어오거나 왜국과 우호를 맺기도 하며,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히미코(卑弥呼, ひみこ,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이로부터 70여년 뒤인 중국 조위(曹魏) 때 야마타이국(邪馬台国, やまたいこく, 사마대국)의 여왕인 히미코가 낙랑군을 통해 조공의 의사를 밝히면서 재등장, 239년 위(魏)의 명제에게 사절을 보내 남녀 노예를 바치고는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을 통해 왜는 다시 한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여자가 다스리는 바다 건너의 섬나라라는 흥밋거리 때문인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동이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왜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정도이다. 히미코가 죽은 뒤 다시 남자가 왕으로 올라 통치하였지만, 오히려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가, 히미코의 종녀(宗女)인[10] 토요(臺與)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나라가 정리되어 서진에 입공하였다.
그 후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끊겨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다시 중국과 외교를 시작한 것은 소위 왜의 오왕(五王)시대로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의 다섯 왕이 5세기 전반(全般)을 통틀어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일본서기의 유랴쿠 덴노로 추정되는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국서는 전근대 중국의 외교 문서의 전범으로 크게 일컬어질 정도였다. 왜왕 무가 죽은 뒤 왜와 중국 간의 외교 관계는 또 다시 한동안 암흑으로 빠졌다.
한국의 사서에서는 꾸준히 신라와 국지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석우로와 관련된 기사에서는 일본 측의 일본서기와 교차검증되는 부분도 나타난다. 왜국은 한반도 중 백제나 가야와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었고 왜인이 백제나 가야에서 군인으로 일하거나 국제결혼 및 혼혈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두 나라의 요청으로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여러 번 지원군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나 관산성 전투와 가야 멸망을 계기로 신라의 국력이 탄탄해지는 6세기부터는 왜의 침략이 거의 사라진다. 오히려 527년에는 일본 규슈 북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이와이(磐井)를 신라가 사주해 그가 왜국 조정에 반기를 들어, 1년 후 왜국이 토벌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한국 측 기록에는 없는 사건이지만 이 것이 사실이라면 법흥왕이 역으로 일본의 정세를 역이용해 한 방 먹인 사례인 것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양제 때, 쇼토쿠 태자가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묻노니 무양하신가"'''라는 국서를 오노노 이모코를 시켜 보내게 한 그때가 왜가 다시 역사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16년(608) 6월 조에 따르면 隋(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에게서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백제가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 했던 걸로 보인다.[11]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동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거의 가장 동쪽에 있으니)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공포 때 공식적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으로 나오는데, 이미 7세기부터 일본이란 이름이 사용되다가 701년 이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는 왜가 국호를 일본으로 정하면서, 중국 정사의 열전에는 왜전(倭傳)이 사라지고, 일본전(日本傳)이 입전된다. 이때 중국에서는 일본과 왜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당서에서는 "중국의 글 뜻을 제대로 알고 왜라는 이름을 꺼려서 일본으로 바꿨다", "일본은 왜의 속국이었는데 왜가 병합하고 이름을 모방했다[12] ", "해 뜨는 곳에 가까워 일본이라고 했다"고 하며 "사신이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고로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고 할 정도였다.
5. 영향
고대 한반도에도 자질구레한 싸움에서 종종 왜인들이 언급이 되는데, 일본 우익에서는 이를 토대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대륙계 귀화인'''들의 일본 영향력보다 못 미치는 정도로서 고대 일본 지방 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하거나, 약탈을 위한 침범 혹은 용병으로 동원되었던 정도로 생각되고 있다. 더욱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삼국 정립 이전이나 이후에나 '''일본계 정부에 의한 행정권'''이라고 할 만한 영향력은 없었다[13] . 애초에 고대시대에 지금처럼 명확한 국경을 긋고 민족이 구역을 딱딱 나누어 살았을 리는 전무하다. 고대시대 왜인들의 침입은 신라 말기의 신라구가 보인 양상과도 비슷한데, 혼란 시대의 한반도 일부 지방에서나 보일 만한 중구난방 활동을 보면 그만큼 통제가 안 되는 여러 세력들이 집적거리면서 토벌되거나 이주자를 주고받는 식의 교류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6. 용법
7세기 이후 공식 국호가 왜에서 일본으로 바뀌면서 공식 명칭은 日本으로 통일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중국과 한국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로의 倭라는 명칭은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었다. "잘하면 일본국, 사고치면 왜국"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인식을 대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임진'''년에 '''왜'''인들이 들어와서 '''난'''리를 피운 사건.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왜인 이외에 '''예'''라는 순우리말 표현 역시 일본인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당시 옥편에서는 한자 倭를 두고 "'''예 와'''"라고 훈과 음을 달아두었고, 선조국문유서에서도 "예나라"를 일본을 뜻하는 표현으로 쓴 경우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신라 시대의 향가인 혜성가에서는 倭理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이 표기를 바탕으로 김완진 등 일부 국어학자들은 해당 어휘가 신라 시대에는 '여리'라고 읽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 볼 때 어중의 ㄹ발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탈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어의 일부 지명에도 아직까지 흔적이 약간 남아있다.
일본인을 왜, 왜놈, 왜구라고 부르면 매우 싫어하는 듯. 1876년, 일본의 억지 침공으로 맺은 강화도 조약 이후에 가정 먼저 하던 일이 왜관이라고 표기한 곳을 일본관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하던 역사적 일이나 왜노 문서 등을 참고해도 알 수 있다.
7. 기타
어느 나라나 사정이 비슷한지 일본 내에도 국까들이 있어서 (즉, 일본인 네티즌이 일본 자국을 까는 것.)[14] , 고대에 일본이 대외적으로 왜국(倭國)으로 불렸다는 점을 국까 본인들의 단골 소재로 써먹기도 한다. 여기에다 다른 나라들 평균 신장까지 같이 첨부해서 일본이랑 비교하면서 까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가끔씩 자국을 굳이 조선이라 부르면서 어그로를 끄는 그런거랑 비슷하다.
8. 같이보기
[1]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이때 도호쿠와 홋카이도는 일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해당지역은 연맹국가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통일된 국가체계가 형성된것은 아니었다.[2] 倭든 和든 일본한자음에서 둘 다 '와'로 읽는다.[3] 단, 漢委奴國王이라는 해당 구절에서 저 委라는 한자는 '임명하다'라는 동사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당시의 나라 이름은 노국(奴國)이 되는 것이다.[4] 倭도 和도 모두 일본 한자음으로는 ワ(와)이다.[5] 한편 和는 훈독할 때는 야마토라고 읽는데, 야마토라고 읽는 경우 그냥 '和'보다는 '大和'라고 쓸 경우가 많다.[6] 한국에서도 '일본'을 뜻하는 和를 '화'로 읽어 받아들인 것이 있다. ‘화과자’, '화변기' 등.[7] 이 시기의 중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단순한 오랑캐들 정도가 아니라, 여자가 왕으로 있는 신비의 나라였다. 그래서 '서불이 진시황의 명을 받고 동쪽으로 가서 세운 나라가 일본이다'는 전설까지 나온 것이다.[8] 실물 사진[9] 단, 지금 현재 에도 시대 때 발견되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이라는 현존하는 '금인'은 날조 조작 논란이 있다.[10] 삼국지에 따르면 종녀라는 표현이 나온다. 손녀인지, 조카인지 알 수 없다.[11] 노중국 교수도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 당시 성덕태자의 관위와 憲法 시행과 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 607년 수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국서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12] 소가 씨 축출을 이렇게 이해한 것일지도?[13] 다만, 러시아 태생의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삼국시대 초기에 일본계 민족들이 세운 나라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었다. 물론 임나일본부 같은 주장인 건 아니고, 그냥 일본 본토의 중앙 정부와는 관계없는 듣보잡 부족국가에 불과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보빈은 역시 한국계 민족이 세운 듣보잡 부족국가가 규슈나 혼슈 서부 지역에 일부 존재했으리라는 주장도 펼쳤는데, 이는 고구려어가 현대 한국어와 동계이고, 초기 신라어 같은 삼국시대 초기의 한반도 남부 지역의 언어들이 일본어와 동계라는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안한 주장이다. 자세한 건 고구려어 문서를 참조.[14] 특이하게도 일본의 국까들은 사대주의자거나 중세 잽 랜드같이 자조하는 의미에서 국까를 자처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마구 들춰내는 식으로 자국 혐오에 이른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는 일본이 전범국이라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일본군 위안부같은 자국의 추악한 진실을 깨닫거나 자국의 우경화에 환멸을 느끼는 진보 성향 일본인들이, 이런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쉬쉬하고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이렇게 된 경우다. 그래서 이런 진보 성향 국까들 중에는 친중이나 친한, 친미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아예 한빠나 미빠로 진화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