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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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奈良(なら('''
나라시 / City of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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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市旗)'''
'''문장(紋章)'''

'''시청 소재지'''
니조오지미나미1초-1-1
'''도도부현'''
나라현
'''면적'''
276.94km²
'''인구'''
353,910명[1]
'''중의원'''
고바야시 시게키 (나라현 제1구)
다카이치 사나에 (나라현 제2구)
'''상징'''
'''시화'''
나라노야에벚꽃
'''시목'''
가시나무
'''시조'''
휘파람새
홈페이지
1. 개요
2. 역사
3. 지리
4. 관광
5. 교통
6. 센토군
7. 출신 인물
8. 둘러보기


1. 개요


나라현의 현청 소재지. 인구는 약 35만명이다.
오사카시에서 동쪽, 교토시에서 남쪽으로 각각 30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시내에 이렇다할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양쪽의 베드타운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2]

2. 역사


이미 4세기와 5세기에 걸치는 거대한 고분군이 남아 있어 이전부터 야마토 조정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필 또 음독으로 '나라'라고 읽다 보니 마찬가지로 한국어에서도 국가를 가리키는 말인 '나라'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기도 했다.
나성문羅城門
평성궁平城宮
동대사東大寺
서대사西大寺
북변방北辺坊
북일조대로北一條大路
남일조대로南一條大路
이조대로二條大路
삼조대로三條大路
사조대로四條大路
오조대로五條大路
육조대로六條大路
칠조대로七條大路
팔조대로八條大路
구조대로九條大路
좌경左京
동시東市
일방대로一坊大路
이방대로二坊大路
삼방대로三坊大路
사방대로四坊大路
우경右京
서시西市
일방대로一坊大路
이방대로二坊大路
삼방대로三坊大路
사방대로四坊大路
외경外京
오방대로五坊大路
육방대로六坊大路
칠방대로七坊大路
710년 헤이조쿄(平城京)라는 도읍이 조성되어 784년 나가오카쿄로 천도할 때까지 74년 동안[3] 국도로서 번영을 누렸던 고도로 당시 활발하게 중국과 한국을 오가던 견당사 및 견신라사 등을 통해 전래된 당풍(唐風) 문화와 불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고, 이 시기의 문화를 덴표 문화(天平文化)[4]라고 한다.
나라에 수도가 있었던 시대를 가리켜 일본사에서 나라 시대라고 부르는데, 줄곧 헤이죠쿄에만 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740년에서 745년 사이에 쇼무 덴노(聖武天皇)가 구니노쿄(恭仁京)[5], 나니와노미야(難波京)[6], 시가라키노쿄(紫香楽宮)[7]로 옮겨다녔던 적이 있으며 이 시절들을 뭉뚱그려서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나라의 헤이죠쿄로 수도를 옮기기 전의 수도인 후지와라쿄(藤原京)와 헤이죠쿄를 비교해보면 당풍 문화의 영향이 크게 두드러지는데,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 도로를 놓고 도시를 건설하면서 왕궁이 수도 한복판에 위치했던 후지와라쿄와 달리 헤이죠쿄는 격자형 도로로 이루어진 도시 북쪽에 왕궁이 위치해 당의 장안성과 더욱 비슷한 구조가 되었다. 이는 후지와라쿄를 지을 당시에는 일본이 당에 사신을 보내지 않아서[8] 당의 수도 장안성이 어떤 구조인지 제대로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주례(周禮) 고공기에 써진 고대 중국의 도시 구조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라서 지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간무 덴노교토로 천도한 뒤에는 국도로서의 기능을 잃었기는 하지만 그 뒤로도 야쿠시지(藥師寺) ·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 고후쿠지(興福寺) · 도다이지(東大寺) 등이 남아 문전도시로 번영하였다. 불교 도시로써 나라에는 여섯 개의 불교 종파가[9] 존재했고,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교토에 대칭되어 남도(南都)라 불렸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국교 노릇을 했으며[10] 한국의 호국불교 사상과 같은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이 존재했기에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로써 불교는 엄청난 위세와 권위를 누렸고[11] 이에 힘입어 불어난 장원과 재산을 지킬 목적으로 소헤이들이 발호하게 된다. 특히 고후쿠지 승병들은 헤이안 시대 나라호시(奈良法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야마호우시(山法師)라 불린 히에이 산 엔랴쿠지 승병들과 함께 악명을 떨쳤다. 쇼무 덴노가 직접 발원해 지은 도다이지와 함께, 고후쿠지의 경우 후지와라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써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죠쿄로 옮길 때 같이 옮겨지은 것으로 후지와라 셋칸케와도 연줄이 닿아 있어서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겐페이 전쟁이 벌어진 12세기 말 전국에서 겐지 세력이 타이라노 키요모리헤이케 정권에 반대하며 봉기하는 와중에 지쇼 4년(1181년) 음력 12월 나라의 승병들이 다시금 현지에서 겐지들의 거병을 도와 헤이케 정권에 도전하려다 다이라노 시게히라[12]에 의해 승병들의 거점이었던 동대사와 흥복사가 불타버린다.[13] 이 와중에 '''불길이 나라 전체로 번져서''' 시가지가 소실되었다. 일본사에서 말하는 '''남도 소각'''(南都焼き討ち난토 야키우치)이다. 다이라노 키요모리는 불타 잿더미가 된 나라의 사찰을 다시 짓지 못하게 했지만 국가를 수호한다는 불교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불교의 중심 사찰 대접을 받던 절들을 태워버린 것에 당연히 세간의 반발은 혹심했고[14] 키요모리가 3개월만에 병사한 뒤 헤이케를 이끌게 된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불교 세력을 달래기 위해 나라의 절들을 다시 짓는 것을 허용했지만, 헤이케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13세기에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고 쇼군이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자신이 헤이케와 달리 불교를 보호할 것임을 어필하고자, 나아가 불교계를 회유해 아군으로 끌어들이고자 적극적으로 나라의 사찰 재건을 지원했고 이때에 나라의 여러 사찰들이 재건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나라 부교(奈良奉行)가 설치되어 막부가 직접지배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현청소재지가 되고 폐불훼석의 칼바람도 혹독하게 맞았는데, 고후쿠지 5중탑의 경우 '''25엔에 팔려서''' 하마터면 통째로 헐려 땔감이 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비교적 개발이 덜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에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도시 대부분과 달리 간헐적인 폭격은 있었으나 시내를 전소시키는 대공습은 면하여 고대의 목조건축물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나라는 오늘날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바뀌었으며, 서부는 오사카 도시권 안의 주택 위성도시로 변하고 있다. 나라공원에서는 꽃사슴을 1천 마리 이상 공원에 풀어놓아 기르며 시의 관광명소가 거의 공원 안에 산재해 있다. 나라에서는 사슴을 신의 사자로 여겨지는데, 고사기(古事記)에 오쿠니누시가 니니기에게 나라를 넘긴 신화에서 아마테라스가 오쿠니누시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요구하는데 보낼 사자로 아메노오하바리(アメノオハバリ)를 선택하고, 사슴신 아메노카쿠(天迦久)를 시켜서 아메노오하바리에게 사신으로 오쿠니누시에게 좀 갔다오라고 전하게 했는데 이때 아메노오하바리는 자신이 가지 않고 대신 아들인 타케미카즈치 신을 보내 오쿠니누시에게 "지상은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다스려야 할 곳이니까 니가 알아서 내놓으라"고 선포해 오쿠니누시로부터 나라를 넘겨받게 된다. 타케미카즈치는 카스가 산으로 내려올 때 흰 사슴을 타고 있었다고 하며, 이때부터 사슴을 신의 사자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15]

3. 지리


나라현의 북서쪽에 위치하여 교토부 경계와는 바로 인접하여 있다. 나라현 전체가 통으로 하나의 분지로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시 또한 동서로 산지가 펼쳐진다.
시가지는 가운데의 헤이조 유적을 중심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동쪽이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옛 나라에 해당하고, 서쪽의 야마토사이다이지역을 중심으로 한 니시노쿄(西ノ京) 일대는 1951~55년에 편입된 지역으로 원래의 나라시와는 군단위로 갈리던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서쪽 지역은 원래의 나라 도심 못지 않게 오사카 쪽에 교류가 잦은 지역이 되어 있다.

4. 관광



동쪽 구릉지에는 나라 공원을 중심으로 도다이지, 고후쿠지, 가스가타이샤, 쇼소인 등이 있고, 서쪽 교외의 니시노쿄에는 사이다이지, 야쿠시지, 도쇼다이지, 헤이조 궁 등이 있다. 이 중 일부가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이라는 유산군에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고전 행사가 많고, 칠기·먹·붓 등의 전통 공예품의 생산도 활발하다. 대한민국경상북도 경주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고 있는데, 실제로 매체에서 로컬라이징되는 것과 달리 경주시는 천여년 전에 수도였던 점이나 도시에 널린 고분, 오늘날 30만 정도 되는 인구 등, 교토보다는 나라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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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이지 등 세계유산이 있는 나라 공원 및 주변 도로에 사슴들이 바글바글하다. 농장이 아니라 공원이라는 이름처럼 사슴공원 주위에는 방책 같은 게 전혀 없어서 사슴공원 주위에도 사슴들이 어슬렁거린다. 공원 내에 차로도 있어 인도의 소들 마냥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도 일상다반사이고, 사슴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활보하는 일도 많아 간혹 로드킬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이카 개신때 삼한의 사신들이 있을 때 친삼한파였던 소가노 이루카를 죽이고 소가노 마코와 소가노 이루카 둘의 이름을 합하여 바카(바보)라는 의미로 나라에 사슴을 풀어놓고 나라에서 다른 곳으로 천도하였고, 이후 나라현에 사슴이 많아지게 되었다. 참고로 다이카 개신때 왜국은 오오키미에서 천황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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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와 노상에서 사슴에게 줄 센베(전병)를 10장 당 150엔에 파는데, 그냥 들고 있으면 사슴들이 몰려들어 광탈하니 주의. 슬슬 뿌리며 나눠주면서 사슴과 놀려다가, 갑자기 닥돌하는 사슴들에게 놀라서 허둥지둥 뿌려본 경험있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사실 노점에서 사자마자 사슴들이 달라붙는다. 옷과 여권을 질겅질겅 뜯어 먹기도 하는데, # 센베로 약 올리면 물거나 머리로 들이대기도 한다. # 사슴이 가장 밀집한 곳은 도다이지 입구(난다이몬) 앞인데, 여기서 센베를 들고 오랫동안 잘 도망다니면 과장없이 사슴을 백 단위로 끌고 다닐 수도 있다. 그나마 근처에 있는 카스가 신사나 도다이지에 있는 사슴은 덜 흉폭하긴 하지만 음식에 칼같이 반응하고 들이대는 건 마찬가지. 참고로 센베 줄 때 다칠 수도 있으니 손바닥 위에 얹어서 주지 말자. 대신 과자 끝을 잡고 주어야 손이 안전하다.
사슴이 워낙 많아 주변 길은 사슴똥 천지고, 사슴들은 행인의 종이가방이나 관광객이 들고 있는 지도까지 뜯어먹는다. 그런데 종이가 나무로 만든 거라 초식동물인 사슴이 일단 먹고 소화시킬 수는 있지만 당연히 화학처리된 종이를 먹으면 사슴 몸에 좋지는 않다. 과장 안보태고 길거리에 서서 사슴 구경을 하다보면 사슴들이 근처 사람들의 옷이고 모자고 뭐고 다 뜯어먹는 걸 구경할 수 있다. 2019년 한때에는 중국인 관광객들 덕에 이런 일은 줄어들었지만,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팍 줄어들면서 도로 원상 복귀되었다. 급기야 뼈만 남은 사슴까지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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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위 처럼 영화 쥬라기 공원을 패러디한 짤도 돌아다닌다. 이쯤 되면 사슴센베 파는 가게가 습격당하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 노점주인들은 사슴이 먹튀를 시전하면 맛깔나는 '''싸닥션'''으로 쫓아낸다. 물론 풋사과 관광객은 따라하다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수가 있다.
일본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지역드립으로 오사카 사람들은 솔직하지만 거칠고, 교토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교활한데 비해 나라 사람들은 '''겉도 속도 시크하다'''는 이야기가 있다.(간사이 사람들의 특징을 불상에 비유한 짤방)

5. 교통


간사이 게이한신 광역권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오사카, 교토와는 나라선, 간사이 본선(야마토지선), 많은 근교철도 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주요 역은 JR 니시니혼나라역긴키 일본 철도(긴테쓰) 긴테쓰나라역야마토사이다이지역이 있다. 다만 지역간 노선은 JR그룹은 없고, 긴테쓰 특급열차가 미에현 이세시 방향으로 운행하는 정도이다. 2040년대에는 주오 신칸센 중간역이 나라시내에 들어설 예정이다.[16]
간선도로는 제2한나도로(E92), 게이나와자동차도(E24)와 함께 24번 국도, 169번 국도가 경유한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장거리 간선도로를 타려면 대체로 오사카나 교토를 거쳐야 한다.

6. 센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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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대표하는 마스코트 캐릭터.동자승에 사슴뿔을 붙여둔 모양새인데 원안을 디자인한 야부우치 사토시(薮内佐斗司)[17]의 개인적인 취향이 들어가 상당히 기묘한 모습이 되었고 왜 저런 사람한테 마스코트 디자인을 맡기냐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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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센토군, 망토군, 시카마로군
결국 보다못한 일부 시민들이 망토군(まんとくん), 나무군(ナームくん) 시카마로군 등을 만들어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19] 이런 논란 때문에 오히려 이 캐릭터의 인지도가 올라갔고 지금은 넷 다 활발히 활동중이다.
현지에서 볼 수 있는 센토군에 관한 내용은여기를 참고. 여친도 있다.[20]

7. 출신 인물



8. 둘러보기





[1] 추계인구 2019년 11월 1일 기준[2] 이 때문에 관광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숙박업이나 쇼핑 등 관광업종이 발달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밥 한끼 안사먹고 나라공원만 훌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관광객이 많기 때문. 명색이 일본의 역사 수도라는 명소가 숙박업 객실수로 전국 도도부현 중 최하위이다.[3] 다만 나가오카쿄에서 다시 10년 뒤에 헤이안쿄, 지금의 교토로 수도를 옮기는데, 일본사에서는 교토로 천도한 794년을 헤이안 시대의 시작으로 잡고 나가오카쿄에 도읍이 있었던 10년 동안도 나라 시대로 간주한다.[4] 덴표(天平) 연호는 729년에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데, 767년에 진고게이운(神護景雲)으로 고칠 때까지 덴표간포(天平感寶, 749년), 덴표쇼호(天平勝寶, 749-757년), 덴표호지天平寶字(757-765년), 덴표진고(天平神護, 765-767년) 등으로 글자를 덧붙여가면서 '덴표' 연호를 계속 썼다.[5] 지금의 일본 교토 부 기츠가와 시(木津川市) 가모 지구.[6] 지금의 오사카. 오사카는 고토쿠 덴노 시절 잠시 수도였던 적이 있다.[7] 지금의 시가현(滋賀県) 코우가시(甲賀市) 신라쿠(信楽).[8]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를 도우러 왔던 왜의 수군이 나당 연합군 수군에 거의 박살이 났다.[9] 삼론종(三論宗), 성실종(成実宗), 법상종(法相宗), 구사종(倶舎宗), 화엄종(華厳宗), 율종(律宗). 이들을 난토 6종(南都六宗)이라고 하는데, 종교 종파라기보다는 학파로써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한 절에서 혹은 한 승려가 두 개 이상의 종파의 교리를 겸해서 익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10] 다만 기독교와의 차이점은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를 국가의 기간 종교로 존숭했던 어떤 시절에도 불교 이외의 도교나 신토 같은 토속 종교를 탄압하거나 금지하는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11] 신토는 진작에 불교에 거의 흡수되어 버리다시피 했다.[12] 다이라노 키요모리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13] 다만 오다 노부나가가 작정하고 히에이 산에 불을 질렀던 것과는 달리 시게히라가 일부러 작정하고 불을 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대사 대불전을 태워버린 악명이 전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경우 정말 그가 동대사 대불전을 태웠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존재하고 있다. 도다이지 항목 참조.[14]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키요모리가 죽기 전에 꿈에 지옥에서 키요모리를 데리러 온 사자를 보았는데, 키요모리가 수레를 가리키며 거기에 적힌 '無'자의 뜻을 묻자 지옥 사자가 "'''나라의 비로자나불을 태워 없앤 죄로 너를 무간지옥으로 끌고 갈 수레라는 뜻이다'''"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15] 타케미카즈치 신은 카스가 다이샤에서 모시는 신인 동시에 후지와라 씨의 수호신으로 섬겨졌다.[16] 2020년 현재 미정이나, 나라야마역으로 예상되고 있다.[17] 오사카 출신의 조형가로 불상 복원에 많이 관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센토군과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18] 존 올리버는 "안드레 애거시순록을 합성한 것 같다"고 평했다.[19] 야마토 초인 나라이가 같은 특촬물도 있다.[20] 참고링크의 오른쪽 마스코트는 나라현 카츠라기시의 마스코트 렌카(蓮花)짱 이라고 하며 주조히메(中将姫)라는 '''비구니'''가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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