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용군 사건
1. 개요
1948년 이승만 정권이 최능진 등의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공안사건.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최능진은 총살당하게 된다.
2. 전개 과정
2.1. 이승만에게 밉보인 최능진
최능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전력이 있었고, 광복 이후에는 북한에 있다가 월남하여 경찰 직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경찰에 몸 담으면서도 경찰의 친일과 부정부패, 공권력 남용 등을 비판했고 그 때문에 경찰 고위직에게 찍혀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1948년 5.10 총선거 때 이승만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이승만의 '제1호 정적'이 되어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친이승만 세력과 경찰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으로 선거 후보 자격을 박탈당했으나 여전히 이승만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에 있어서 최능진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2.2. 혁명의용군?
1948년 10월 정부는 엄청난 내용의 사건을 발표했다.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이 민간인 신분으로 내란혐의를 획책하고 오동기[1] , 안종옥, 박규일 등 여러 명의 군인들이 이 음모에 협력했다는 것이었다. 발표에 따르면 이 계획은 1947년 12월부터 준비되어 1948년 9월경 군자금을 모아 다음 달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맞춰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런데 오동기가 9월 말 소환명령을 받으면서 반란은 실패했고, 결국 꼬리를 잡혀 관련자 모두를 체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10월 중순 발생한 여순사건까지 겹치며 이 사건은 심각한 내란으로 여겨졌다.[2]전 수사국장이며 5.10 선거 당시 동대문 갑구 입후보로서 이 대통령의 낙선을 꾀한 것으로 이름있는 최능진(51)씨는 종로구 누상동 166-13 서세충(61), 후암동 105-65 김진섭(36) 양씨와 더불어 내란음모의 혐의로 지난 1일 오후 3시경 구금당하고 있다. 구속영장에 나타난 검거 혐의 내용을 보건대 전기 3씨는 작년 12월 이후 육군경비대 오동기 소령 등 국군소속의 젊은 장교 다수와 공모하여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서 정부를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인데
「조선일보」 1948년 10월 5일자
하지만 이 사건은 '심각한 내란'으로 보기에는 꽤 무리가 있었다. 일단 이들이 반란을 위해 모았다고 하는 병력은 2~300명 수준이었다.[3] 그래서 사건 관련자 김진섭은 '''"도대체 2,3백 명의 병력으로 중앙을 포위하여 쿠데타를 한다는 것은 어린애 장난이냐"'''면서 항변했다. 또 강원도의 원주와 춘천에 주둔하던 부대들을 포섭 및 동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던 안종옥과 박규일은 이등병과 일등병이었다... 이등병과 일등병 신분으로 그곳의 부대를 동원할 수 있었을까? 턱도 없는 소리다. 게다가 군인 관련자 중에 그나마 계급이 높은 오동기는 앞에 말한 부대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4] 심지어 이 사건은 결정적인 물적 증거조차 나오지 않았으며, 관련자들끼리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5] 게다가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문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1심 재판(1949년 5월 31일) 에서 최능진은 징역 3년, 김진섭은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최고 책임자 서세충은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이유는 그가 고령(...)이어서였다!''' 결국 판결이 의미하는 바는 '최고책임자는 무죄인데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유죄'라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최능진과 김진섭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1949년 11월 2일)에서는 증거능력도 없는 증거[6] 가 채택되어 형량이 오히려 더 늘어나 최능진은 징역 5년, 김진섭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군사재판[7] 에서는 오동기는 징역 10년, 나머지 군인 관련자들은 징역 1년~5년을 선고받았다.[8] 한편 군사재판은 혁명의용군 사건의 성격이 "좌익사상에서 나온 좌익혁명이 아니고 민족주의자 사상에서 나온 민족혁명이었다."라고 말하며 이 사건과 공산주의와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3. 사건 이후
높은 형량을 받은 관련자들은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최능진 등은 풀려났다. 사건의 주요 타겟이었던 최능진은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평화운동을 벌였는데, 이 행적이 문제가 되어 수복 이후 내란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아 1951년 2월에 '''총살당했다.''' 가장 높은 형량을 받았던 김진섭은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다. 한편 군인이었던 오동기는 6.25 전쟁 이후 감형되어 나중에 혁신계 활동을 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사건에 대한 자신의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4. 참고 자료
정치조작의 서막 - 혁명의용군 사건 1편2편
[1] 오동기(1901 ~ 1977)는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였다. 혁명의용군 사건 당시 그는 제14연대 연대장이었다. 그의 인생을 다룬 글[2] 실제로 정부는 이 사건을 여순사건과 연결시키려고 했다. 왜냐하면 사건 관련자 오동기가 연대장으로 있던 제14연대에서부터 여순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동기는 여순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3] 참고로 성공한 쿠데타인 5.16 군사정변에서 박정희와 8기생 군인들이 동원한 군인의 숫자가 6천여 명이었다. 이 사건에서 제시한 내란 동원 군인의 숫자는 그것의 5% 밖에 안된다.[4] 왜냐하면 오동기는 제14연대 소속이었던 반면 원주와 춘천에 있던 부대들은 제8연대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동기의 이전 행적에도 이들 부대와의 연관성은 찾아볼 수 없다.[5] 예를 들어서 오동기와 최능진은 같은 독립운동가였지만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재판에서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오동기가 신원보증을 해준 군인 2명이 최능진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적은 있었다.[6] 2심 재판에서 최능진과 같은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여순사건의 주모자가 사형을 당했으니 추도식을 하라는 말을 최능진이 했다고 증언하였다. 이에 감옥 간수장과 간수는 최능진이 그런 지시를 했는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증거로 채택하여 내란음모죄를 추가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증언이 최능진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진섭도 덩달아 같은 죄목을 추가당했다는 것이다.'''[7] 이 사건에는 민간인과 군인이 연루되었기에 민간인들은 민간 재판에서, 군인들은 군사재판에서 각각 재판을 받았다.[8] 당시 군사재판은 1심에서 끝났기에 이들은 바로 징역살이에 들어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