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금전
胡金銓
(1931~1997)
중국의 영화 감독.
장철 감독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전혀 다른 느낌의 무협 영화들을 만들어냈던 거장. 무협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올린 감독이다. 영화 <협녀(俠女)>로 중화권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 기술대상을 수상하였다.
북경에서 태어나 1948년 홍콩으로 이주한 후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1] 한 영화사에 미술감독으로 취직하였는데, 그 때 만난 엄준이라는 감독에게서 배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지 돈을 더 받을 수 있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의 그는 영화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급한 대로 엄준 감독에게 속성으로 연기를 배우고 촬영을 시작하였는데, 자신이 주인공을 맡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
이후 정식으로 쇼브라더스에 입사하여 배우 활동을 지속, 배우로 유명해진[2]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의 배우 훈련반에서 교사로 신인 배우들을 교육하면서[3] , 이한상 감독의 조감독으로도 일하며 영화를 공부하며 감독 데뷔를 준비하였다.
1963년, 드디어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은 호금전은 첫 영화 대지아녀(大地兒女)를 만들었지만 많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고, 두 번째 영화인 옥당춘(玉堂春) 마저 흥행에 실패하자 쇼브라더스의 회장 소일부가 권유한 무협 영화를 감독하게 된다. 그 영화가 바로 대취협이다.[4] 대취협을 찍을 당시,호금전은 대취협의 주연 여배우를 제자인 정패패로 일찌감치 낙점하였으나 남자 주인공을 맡을 만한 배우가 마땅히 없어서 호금전 본인이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사의 반대로 결국 신인급 배우인 악화를 캐스팅 하게 되었고, 정패패와 악화 모두 이 영화로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대취협을 촬영할 때 영화 제작비, 배우 선정 등의 문제로 쇼브라더스의 총수 소일부와 계속해서 갈등을 겪던 호금전은 결국 대취협을 완성하고 쇼브라더스 영화사를 퇴사하고[5] 대만으로 활동 장소를 옮긴다.[6] 호금전이 대만에서 만든 용문객잔과 협녀는 그 완성도로 호평을 받았지만[7]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그의 재정 상태는 파산 일보직전이었고[8] 결국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벌 회사인 골든하베스트사와 계약을 맺고 영춘각의 풍파와 충렬도를 감독하며 홍콩으로 복귀하게 된다.[9] 하지만 그는 이 영화들을 감독할 때 다시 영화사와 마찰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중화권 영화 제작사들에게 블랙리스트로 찍혀서 한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했다. 70년대 말이 되어서야 한국에서 겨우 영화 자금을 확보한 호금전은 공산영우와 산중전기를 동시에 제작, 완성한다. 두 영화 모두 한국의 해인사, 불국사, 설악산 등에서 촬영을 했는데 호금전은 헌팅과 촬영기간을 포함해서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오우삼[10] , 서극이 호금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영화인으로 유명하다. 서극의 경우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을 리메이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서극은 호금전이 1990년에 소오강호를 찍을 때 제작자 위치에서 계속 구박하다가 감독 자리까지 빼앗고[11] 호금전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용문객잔을 리메이크하였다. 그래놓고 호금전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거기다 장철이 연출한 독비도를 그대로 가져온 '서극의 칼'을 만들기도 하니. 서극은 그냥 돈되는 건 뭐든 다 한다고 봐야..
말년에는 미국에서 서부개척사 당시의 철도 노동자로 일했던 중국인들의 삶을 영화화하는 계획을 세우다 사망하였다.
(1931~1997)
1. 소개
중국의 영화 감독.
장철 감독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전혀 다른 느낌의 무협 영화들을 만들어냈던 거장. 무협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올린 감독이다. 영화 <협녀(俠女)>로 중화권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 기술대상을 수상하였다.
2. 생애
북경에서 태어나 1948년 홍콩으로 이주한 후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1] 한 영화사에 미술감독으로 취직하였는데, 그 때 만난 엄준이라는 감독에게서 배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지 돈을 더 받을 수 있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의 그는 영화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급한 대로 엄준 감독에게 속성으로 연기를 배우고 촬영을 시작하였는데, 자신이 주인공을 맡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
이후 정식으로 쇼브라더스에 입사하여 배우 활동을 지속, 배우로 유명해진[2]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의 배우 훈련반에서 교사로 신인 배우들을 교육하면서[3] , 이한상 감독의 조감독으로도 일하며 영화를 공부하며 감독 데뷔를 준비하였다.
1963년, 드디어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은 호금전은 첫 영화 대지아녀(大地兒女)를 만들었지만 많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고, 두 번째 영화인 옥당춘(玉堂春) 마저 흥행에 실패하자 쇼브라더스의 회장 소일부가 권유한 무협 영화를 감독하게 된다. 그 영화가 바로 대취협이다.[4] 대취협을 찍을 당시,호금전은 대취협의 주연 여배우를 제자인 정패패로 일찌감치 낙점하였으나 남자 주인공을 맡을 만한 배우가 마땅히 없어서 호금전 본인이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사의 반대로 결국 신인급 배우인 악화를 캐스팅 하게 되었고, 정패패와 악화 모두 이 영화로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대취협을 촬영할 때 영화 제작비, 배우 선정 등의 문제로 쇼브라더스의 총수 소일부와 계속해서 갈등을 겪던 호금전은 결국 대취협을 완성하고 쇼브라더스 영화사를 퇴사하고[5] 대만으로 활동 장소를 옮긴다.[6] 호금전이 대만에서 만든 용문객잔과 협녀는 그 완성도로 호평을 받았지만[7]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그의 재정 상태는 파산 일보직전이었고[8] 결국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벌 회사인 골든하베스트사와 계약을 맺고 영춘각의 풍파와 충렬도를 감독하며 홍콩으로 복귀하게 된다.[9] 하지만 그는 이 영화들을 감독할 때 다시 영화사와 마찰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중화권 영화 제작사들에게 블랙리스트로 찍혀서 한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했다. 70년대 말이 되어서야 한국에서 겨우 영화 자금을 확보한 호금전은 공산영우와 산중전기를 동시에 제작, 완성한다. 두 영화 모두 한국의 해인사, 불국사, 설악산 등에서 촬영을 했는데 호금전은 헌팅과 촬영기간을 포함해서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오우삼[10] , 서극이 호금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영화인으로 유명하다. 서극의 경우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을 리메이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서극은 호금전이 1990년에 소오강호를 찍을 때 제작자 위치에서 계속 구박하다가 감독 자리까지 빼앗고[11] 호금전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용문객잔을 리메이크하였다. 그래놓고 호금전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거기다 장철이 연출한 독비도를 그대로 가져온 '서극의 칼'을 만들기도 하니. 서극은 그냥 돈되는 건 뭐든 다 한다고 봐야..
말년에는 미국에서 서부개척사 당시의 철도 노동자로 일했던 중국인들의 삶을 영화화하는 계획을 세우다 사망하였다.
3. 작품 리스트
3.1. 객잔 4부작
- 대취협 1965년
- 용문객잔 1967년
- 희로애락지노 1970년
- 영춘각의 풍파 1973년
3.2. 풍경 4부작
- 협녀 1969년
- 충렬도 1974년
- 공산영우 1979년
- 산중전기 1979년
[1] 광동어를 전혀 할줄 몰랐기 때문에 말을 별로 안 해도 되는 직업을 찾으려고 했었다고 한다.[2] 배우 활동을 할 때에는 호금전에서 성인 호를 뺀 금전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다.[3] 대취협의 주연 여배우 정패패가 이 당시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4] 사실 호금전은 딱히 무협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고 무술 실력도 없었기에 경극을 하던 한영걸(후에 당산대형, 정무문등으로 유명해지는 무술감독 겸 배우) 무술감독으로 고용하고, 중국의 전통극들을 참고해서 대취협을 만들었다고 한다.[5] 대취협의 속편이었던 금연자는 결국 장철이 만들게 되지만, 금연자 라는 제목은 사실은 페이크였고, 영화의 제목을 은붕 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여주인공 금연자의 역할은 왕우가 연기한 남주인공 은붕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따라서 여주인공 정패패는 장철에게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사실 금연자는 말이 대취협의 속편이지, 정패패가 나온다는 것을 빼면 내용 상으로도 대취협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6]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이한상도 비슷한 시기에 소일부와의 마찰로 쇼브라더스에서 퇴사하여 대만에서 영화사까지 설립하고 활동하였다.[7] 협녀는 훗날 편집본으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 상을 받게 된다.[8] 이한상도 영화사 설립을 위해 빌린 자금도 갚지 못하여 빚쟁이들에게 쫓기다가 쇼브라더스로 복귀하였다.[9] 이 때 무술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바로 홍금보이다.[10] 사실 오우삼은 호금전의 라이벌격인 장철의 직계에 가깝다.[11] 정확히 말하자면 서극이 내쫓은 게 아니라 호금전이 "너랑 도저히 못 해먹겠다."고 때려 치웠다. 호금전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준비해놓는 타입인데 촬영 도중에 시나리오를 수십 번이나 바꾸는 서극의 스타일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