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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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극 독목관 대본 표지. 설인귀(좌),연개소문(우) [1]
북경에서 발전하였다 하여 경극이라고 하며[2] , 서피(西皮), 이황(二黃) 2가지의 곡조를 기초로 하므로 피황희(皮黃戱)라고도 한다. 14세기부터 널리 성행했던 중국 전통가극인 곤곡(崑曲)의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호금(胡琴), 징과 북을 사용하여 반주하며 중국 문화의 정수로 간주되고 있으며 2010년 유네스코가 1차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하였다.
경극의 표현방법은 염주창타(念做唱打)의 4가지 방법으로 나뉘며 염(念)은 음악성을 지닌 대사로 극중의 대사는 경백(京白), 운백(韻白)과 소백(蘇白)으로 다시 구분된다. 경백은 베이징 음, 운백은 호광 음(湖廣音), 중주운(中州韻), 소백은 소남지구(蘇南地區)의 방언을 사용한다. 주(做)는 동작과 표정 연기를 말하며 창(唱)은 노래, 타(打)는 종합 민간무술을 무용으로 표현한 무술동작을 말한다.
배우의 연출 유형인 행당(行當)은 크게 생(生), 단(旦), 정(净), 축(丑)의 네 종류가 있으며 생(生)은 남자를 지칭하며 연령이나 신분에 따라 노생(老生), 소생(小生), 무생(武生)으로 구분한다. 단(旦)은 여자를 지칭하며 푸른 옷을 입고 연기하는 젊은 귀족 부인과 여식, 조강지처 역의 정단(正旦)[3] , 중노년 여성 역의 노단(老旦)[4] , 활달한 젊은 여성역의 화단(花旦), 화삼(花衫), 도마단(刀馬旦)으로도 불리는 검녀, 여장군 등 무기를 다루는 여자역의 무단(武旦), 추녀 밑 중노년의 하녀, 여자 개그 캐릭터인 채단(彩旦) 등이 있다.[5] 정(淨)은 호방한 남자 연기자로 얼굴에 갖은 무늬를 그려 화안(花臉)이라고도 하며 정정(正淨), 부정(副淨), 무정(武淨), 모정(毛淨)으로 구분하고 있다. 축(丑)은 개그 캐릭터나 환관, 교활한 남자 역을 지칭하며 문축(文丑), 무축(武丑), 여축(女丑)으로 구분하고 있다.[6] 이외에도 고대 희극 중에는 단역인 말각(末角)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배역은 각기 문무(文武)의 2계통 이외에 다시 세분화된다.
경극에서의 분장 또한 독특하여 생(生)과 단(旦)의 분장에 역할과 배역에 따라 눈썹과 테두리를 그리는 방법이 다르며 정(淨)과 축(丑)의 분장은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은 붉은색, 간사한 사람은 흰색으로 분장을 하는 데 역사상 유명한 얼굴의 선을 그리는 형식은 정해져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가락이 아닌 붓이나 메이크업 도구 등을 사용하며 선과 분장이 세밀해졌다.
단(旦) 역할 같은 경우에는 본래는 남자들이 맡아왔지만, 1930년대 여성해방운동으로 여성의 사회적 영향력이 제고되면서 매란방을 포함한 순혜생, 정연추와 상소운과 같은 대가들에게서 여배우들이 사사해 경극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가들에게서 사사한 여배우들은 여제자들도 양성했고, 중화민국 시대 이후부터 남배우들의 수만큼 여배우들의 수도 늘어났다.
다만 여단(女旦)들의 수가 늘어난 이후 문화대혁명과 함께 사인방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기존의 남단(男旦)들의 운명과 미래는 점점 어두워지게 된다. 사인방 중 한명인 장칭은 남자가 여자역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이들을 박대했고, 많은 남단들이 홍위병들에게 테러 밑 학대를 당하거나 일자리를 잃게된다. 그 예시로 매란방의 아홉째 아들이자 제자, 그리고 후계자인 매보구(梅葆玖, 1934~2016)가 있는데, 한창 활동할 나이인 30~40대에 10년 동안이나 무대를 빼앗겼으나 무대 뒤에서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재주가 있어서 음향관계나 녹음과 같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또한 매씨 일가가 살고 있는 베이징 시내의 사합원에 홍위병들이 밀어 닥쳐 죽은 매란방을 비판하면서 그가 남긴 유물이나 기물을 훔친 것은 물론, 미망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는 수난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매란방을 높이 평가했던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가 항상 신경을 써 주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피해가 적었다.[7]
이렇게 되어 문혁이 끝난 1976년부터 80년대까지도 겨우 복귀한 기존 단 배우들을 제외한 새로 들어오는 남단 배우들의 수는 대폭 감소하게 된다. 원로 배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이 별세했고, 수가 적어졌지만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소수의 배우들이 남아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공연들은 대체로 찾아보기 힘든 편이며 수도 적다.[8]
즉, 문축(文丑)들이 겸업하기도 하는 채단(彩旦)을 제외하면 현재 경극 공연에 출현하는 단(旦) 배우들의 열의 아홉은 여성들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남자들의 여성 연기를 보고 싶다면 CCTV의 전통극 코너인 공중극장(空中剧院)에서 매년 춘절 때 마다 방영하는 '''연극광가족(戏迷家庭)'''의 반전(反串) 공연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며, 유투브나 비리비리 등의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9]
원나라 때의 잡극(雜劇: 元曲)의 뒤를 이어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걸친 300년 동안은 쑤저우 곤산에서 일어난 곤곡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왕후, 귀족의 위안물이 되고 형식에 치우쳐 쇠퇴하게 되자 18세기 중엽에는 많은 지방극이 앞을 다투어 나타났다. 그 무렵 안후이성, 후베이성 등 양쯔강 연안지방에 남곡(南曲)의 익양강(弋陽腔) 계통을 이은 이황조(二黃調)가 성행하여, 안후이성의 여자역 남자배우 고낭정(高朗亭)의 일단과 함께 베이징에 들어왔다. 이때가 1790년 청나라 고종(高宗: 乾隆帝)의 80세 생일 축하 잔치가 벌어진 해이다. '휘반(徽班)'이라는 안후이성 극단이 당시 난해하고 장황한 저음인 곤곡에 비하여, 명랑하고 쉽고 동작이 많은 이황조를 상연하자 곧 대중의 호평을 받아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신흥극종(新興劇種)인 데다가 형식상의 융통성도 있던 당시의 이황조는 곤곡을 비롯한 많은 선행 극종의 기술과 형식을 최대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1830년경 청나라 말의 북곡계(北曲系)인 진강(秦腔)의 흐름을 이은 서피라는 곡조와 합쳐 피황희(皮黃戱), 즉 경극으로 발전하여 곤곡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초창기에는 정장경(程長庚), 그 후 담흠배(譚鑫培) 등의 명배우가 배출되어 부단히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여 격조를 높였으며, 근세에 와서는 여자역 남자배우 매란방(梅蘭芳)이 한층 빛을 내었다. 해외에도 '베이징 오페라'로 알려져 그 독특한 예술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독일의 브레히트가 서사연극론(敍事演劇論)을 창안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에는 새로 설립된 중국희곡연구원, 중국경극단 등을 중심으로 '백화제방(百花齊放)', '추진출신(推陳出新)'의 기치에 따라 극 내용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봉건적인 내용을 추방하고 국민의 창조에 의한 것을 발굴한다는 각도에서 고전상연목록의 정리개편이 적극 행해졌으나, 경극무대에서 현대인과 현대인의 생활을 표현하는 일은 극도로 세련된 격조 높은 형식으로 보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958년경 소위 대약진운동 때 현대화의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론과 신중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4년 베이징에서 열린 현대경극 경연대회를 계기로 현대경극은 중국의 문화계를 석권하여 예술의 새로운 선구자가 되었다. 인민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내용과 등장인물의 현대화에 따라 상징적인 스타일이 줄어드는 대신 연기는 사실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가사에는 고전적인 격조가 남아 있으나 대화는 알기 쉬운 현대 표준구어(標準口語)로 진행되었다.
이때까지는 전통경극과 현대경극이 공존했지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현대경극을 제외한 전통 경극은 봉건시대의 잔재로 낙인이 찍힌채 공연이 금지당하고, 남녀노소 배우들, 명배우들 중 공산당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던 이들조차도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아 조리돌림 당하거나 심하면 구타를 당해 죽음에 이르곤 했다.
반강제된 현대경극의 유행과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얼굴에 그리는 선이나 여자역의 남자배우가 적어졌다. 이전부터 썼던 탁자와 의자 등의 소도구 이외에도 무대장치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대개 2∼3시간의 장편이며 극적 요소가 강하여 자연히 대화부분도 많아졌으나 노래나 무용적인 동작, 화려한 액션은 변함이 없다. 이렇듯 경극의 변질은 전통을 상실하게 하였다.[10]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 이후 핍박당했던 기존 경극 배우들이 복귀하면서 그 고유형태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시도되었고 어느정도 복원이 되었으나, 이와는 반대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경극을 즐기는 전통은 단절되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관심없는 박제화된 예술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 정부가 선양하는 중국 문명의 결정체로 나름 보호를 받고 있기는 하다.
상연되는 각본은 모두 피황조에 의거한 구성·문체·시형이며, 현존하는 1,000여 종은 대부분이 작자미상이다. 대개는 사전(史傳) 소설과 전설에서 소재를 따거나 원곡과 전기(傳奇)를 개작한 것으로, 수호지, 삼국지연의 등의 부분각색이 적지 않다. 매란방이 창시밑 주연했었던 매파(梅派)의 작품들, 특히 청나라 때 전해져오던 기존의 작품을 근현대 시기에 편곡/각색한 극들이 유명한데, 대표작으로 패왕별희(覇王別姬), 귀비취주(貴妃醉酒), 추강(秋江), 팔선과해(八仙過海), 요천궁(鬧天宫), 타어살가(打魚殺家), 사진사(四進士), 우주봉(宇宙峰), 백사전(白蛇傳), 장상화(將相和), 양문여장(楊門女將), 삼차구(三岔口), 안탕산(雁蕩山) 등이 있다.
그나마 한국에서도 유명한 건 패왕별희와 귀비취주인데 이 마저도 동명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모두 2~3시간 내외의 긴 가무극으로 연출과 연기 모두 지극히 서사적인 표현양식을 쓰고, 장치도 없이 상징적인 연기형식에 의하여 상황이나 행동을 나타낸다. 의상은 이전의 명나라 복식을 청나라 풍으로 어레인지한 것이며, 색과 형태에 따라 인물의 신분과 직업 등을 알 수 있다. 노래, 대사, 춤, 액션 등 어느 것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배역에 따라 결정되며, 배우는 어릴 때부터 소질에 따라 전문적 배역을 익힌다. 이를 위한 양성소를 '과반(科班)'이라 하며 매란방 등이 연기를 익힌 부연성(富連成) 등이 유명하다.
여담으로 패왕별희와 백사전 등의 유명 고전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제외하면, 경극 대본밑 가사와 줄거리가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 제대로 알려진게 없기 때문에 즐겨보고 싶어도 즐길 수가 없다는게 단점이다. 기본 대사는 한국어로 따지면 '''현대어 + 가벼운 사극말투'''지만, 공연전 자막으로 띄워주는 줄거리나 노래 같은 경우에는 '''고전 한문체''' 내지는 백화문으로 되어있어 해석이 어려운 점도 있다(...)
초기 중국과 홍콩 영화들의 대부분은 세트장을 세워놓고 그안에서 경극을 그대로 촬영하거나 경극 배우들을 고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최초의 중국 영화는 경극 정군산(定軍山)을 1905년에 촬영한 것으로[11] , 정군산 이후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13년작 <장자시처(莊子試妻)>라는 무성영화였다. 유성영화의 도입 이후에도 여러 고전 경극들이 영화화되었다.
경극과 관련해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1993년에 개봉한 천카이거의 영화 패왕별희가 있다. 199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2006년 28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후 2009년에 경극의 대가들 중 한명인 매란방(梅蘭芳)의 전기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고[12] , 2014~15년에 패왕별희(霸王别姬), 진향련(秦香蓮), 장원매(狀元媒)와 용봉정상(龍鳳呈祥)이 3D로 제작, 중영자막판으로 개봉 밑 공개되었다.
경극학교의 고된 수련과정을 보려면 패왕별희나 홍금보가 주연한 칠소복을 보기 바란다.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지는 않지만 한국 영화인 왕의 남자에서도 광대들이 연산군 앞에서 경극 혹은 곤곡 비슷한 연극을 하는 장면이 내용상으로 아주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대신들이 연산군의 광기를 두려워하여 중종반정을 계획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엄연한 고증 오류로, 당시 조선에 곤곡이 존재할리 없기 때문이거니와 비슷한 연극이 존재하였더라도 높은 공연 난이도 등의 이유로 조선의 광대들이 이를 공연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경극 독목관 대본 표지. 설인귀(좌),연개소문(우) [1]
1. 개요
북경에서 발전하였다 하여 경극이라고 하며[2] , 서피(西皮), 이황(二黃) 2가지의 곡조를 기초로 하므로 피황희(皮黃戱)라고도 한다. 14세기부터 널리 성행했던 중국 전통가극인 곤곡(崑曲)의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호금(胡琴), 징과 북을 사용하여 반주하며 중국 문화의 정수로 간주되고 있으며 2010년 유네스코가 1차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하였다.
경극의 표현방법은 염주창타(念做唱打)의 4가지 방법으로 나뉘며 염(念)은 음악성을 지닌 대사로 극중의 대사는 경백(京白), 운백(韻白)과 소백(蘇白)으로 다시 구분된다. 경백은 베이징 음, 운백은 호광 음(湖廣音), 중주운(中州韻), 소백은 소남지구(蘇南地區)의 방언을 사용한다. 주(做)는 동작과 표정 연기를 말하며 창(唱)은 노래, 타(打)는 종합 민간무술을 무용으로 표현한 무술동작을 말한다.
배우의 연출 유형인 행당(行當)은 크게 생(生), 단(旦), 정(净), 축(丑)의 네 종류가 있으며 생(生)은 남자를 지칭하며 연령이나 신분에 따라 노생(老生), 소생(小生), 무생(武生)으로 구분한다. 단(旦)은 여자를 지칭하며 푸른 옷을 입고 연기하는 젊은 귀족 부인과 여식, 조강지처 역의 정단(正旦)[3] , 중노년 여성 역의 노단(老旦)[4] , 활달한 젊은 여성역의 화단(花旦), 화삼(花衫), 도마단(刀馬旦)으로도 불리는 검녀, 여장군 등 무기를 다루는 여자역의 무단(武旦), 추녀 밑 중노년의 하녀, 여자 개그 캐릭터인 채단(彩旦) 등이 있다.[5] 정(淨)은 호방한 남자 연기자로 얼굴에 갖은 무늬를 그려 화안(花臉)이라고도 하며 정정(正淨), 부정(副淨), 무정(武淨), 모정(毛淨)으로 구분하고 있다. 축(丑)은 개그 캐릭터나 환관, 교활한 남자 역을 지칭하며 문축(文丑), 무축(武丑), 여축(女丑)으로 구분하고 있다.[6] 이외에도 고대 희극 중에는 단역인 말각(末角)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배역은 각기 문무(文武)의 2계통 이외에 다시 세분화된다.
경극에서의 분장 또한 독특하여 생(生)과 단(旦)의 분장에 역할과 배역에 따라 눈썹과 테두리를 그리는 방법이 다르며 정(淨)과 축(丑)의 분장은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은 붉은색, 간사한 사람은 흰색으로 분장을 하는 데 역사상 유명한 얼굴의 선을 그리는 형식은 정해져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가락이 아닌 붓이나 메이크업 도구 등을 사용하며 선과 분장이 세밀해졌다.
1.1. 남단
단(旦) 역할 같은 경우에는 본래는 남자들이 맡아왔지만, 1930년대 여성해방운동으로 여성의 사회적 영향력이 제고되면서 매란방을 포함한 순혜생, 정연추와 상소운과 같은 대가들에게서 여배우들이 사사해 경극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가들에게서 사사한 여배우들은 여제자들도 양성했고, 중화민국 시대 이후부터 남배우들의 수만큼 여배우들의 수도 늘어났다.
다만 여단(女旦)들의 수가 늘어난 이후 문화대혁명과 함께 사인방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기존의 남단(男旦)들의 운명과 미래는 점점 어두워지게 된다. 사인방 중 한명인 장칭은 남자가 여자역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이들을 박대했고, 많은 남단들이 홍위병들에게 테러 밑 학대를 당하거나 일자리를 잃게된다. 그 예시로 매란방의 아홉째 아들이자 제자, 그리고 후계자인 매보구(梅葆玖, 1934~2016)가 있는데, 한창 활동할 나이인 30~40대에 10년 동안이나 무대를 빼앗겼으나 무대 뒤에서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재주가 있어서 음향관계나 녹음과 같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또한 매씨 일가가 살고 있는 베이징 시내의 사합원에 홍위병들이 밀어 닥쳐 죽은 매란방을 비판하면서 그가 남긴 유물이나 기물을 훔친 것은 물론, 미망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는 수난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매란방을 높이 평가했던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가 항상 신경을 써 주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피해가 적었다.[7]
이렇게 되어 문혁이 끝난 1976년부터 80년대까지도 겨우 복귀한 기존 단 배우들을 제외한 새로 들어오는 남단 배우들의 수는 대폭 감소하게 된다. 원로 배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이 별세했고, 수가 적어졌지만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소수의 배우들이 남아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공연들은 대체로 찾아보기 힘든 편이며 수도 적다.[8]
즉, 문축(文丑)들이 겸업하기도 하는 채단(彩旦)을 제외하면 현재 경극 공연에 출현하는 단(旦) 배우들의 열의 아홉은 여성들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남자들의 여성 연기를 보고 싶다면 CCTV의 전통극 코너인 공중극장(空中剧院)에서 매년 춘절 때 마다 방영하는 '''연극광가족(戏迷家庭)'''의 반전(反串) 공연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며, 유투브나 비리비리 등의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9]
2. 역사
원나라 때의 잡극(雜劇: 元曲)의 뒤를 이어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걸친 300년 동안은 쑤저우 곤산에서 일어난 곤곡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왕후, 귀족의 위안물이 되고 형식에 치우쳐 쇠퇴하게 되자 18세기 중엽에는 많은 지방극이 앞을 다투어 나타났다. 그 무렵 안후이성, 후베이성 등 양쯔강 연안지방에 남곡(南曲)의 익양강(弋陽腔) 계통을 이은 이황조(二黃調)가 성행하여, 안후이성의 여자역 남자배우 고낭정(高朗亭)의 일단과 함께 베이징에 들어왔다. 이때가 1790년 청나라 고종(高宗: 乾隆帝)의 80세 생일 축하 잔치가 벌어진 해이다. '휘반(徽班)'이라는 안후이성 극단이 당시 난해하고 장황한 저음인 곤곡에 비하여, 명랑하고 쉽고 동작이 많은 이황조를 상연하자 곧 대중의 호평을 받아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신흥극종(新興劇種)인 데다가 형식상의 융통성도 있던 당시의 이황조는 곤곡을 비롯한 많은 선행 극종의 기술과 형식을 최대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1830년경 청나라 말의 북곡계(北曲系)인 진강(秦腔)의 흐름을 이은 서피라는 곡조와 합쳐 피황희(皮黃戱), 즉 경극으로 발전하여 곤곡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초창기에는 정장경(程長庚), 그 후 담흠배(譚鑫培) 등의 명배우가 배출되어 부단히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여 격조를 높였으며, 근세에 와서는 여자역 남자배우 매란방(梅蘭芳)이 한층 빛을 내었다. 해외에도 '베이징 오페라'로 알려져 그 독특한 예술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독일의 브레히트가 서사연극론(敍事演劇論)을 창안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에는 새로 설립된 중국희곡연구원, 중국경극단 등을 중심으로 '백화제방(百花齊放)', '추진출신(推陳出新)'의 기치에 따라 극 내용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봉건적인 내용을 추방하고 국민의 창조에 의한 것을 발굴한다는 각도에서 고전상연목록의 정리개편이 적극 행해졌으나, 경극무대에서 현대인과 현대인의 생활을 표현하는 일은 극도로 세련된 격조 높은 형식으로 보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958년경 소위 대약진운동 때 현대화의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론과 신중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4년 베이징에서 열린 현대경극 경연대회를 계기로 현대경극은 중국의 문화계를 석권하여 예술의 새로운 선구자가 되었다. 인민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내용과 등장인물의 현대화에 따라 상징적인 스타일이 줄어드는 대신 연기는 사실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가사에는 고전적인 격조가 남아 있으나 대화는 알기 쉬운 현대 표준구어(標準口語)로 진행되었다.
이때까지는 전통경극과 현대경극이 공존했지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현대경극을 제외한 전통 경극은 봉건시대의 잔재로 낙인이 찍힌채 공연이 금지당하고, 남녀노소 배우들, 명배우들 중 공산당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던 이들조차도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아 조리돌림 당하거나 심하면 구타를 당해 죽음에 이르곤 했다.
반강제된 현대경극의 유행과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얼굴에 그리는 선이나 여자역의 남자배우가 적어졌다. 이전부터 썼던 탁자와 의자 등의 소도구 이외에도 무대장치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대개 2∼3시간의 장편이며 극적 요소가 강하여 자연히 대화부분도 많아졌으나 노래나 무용적인 동작, 화려한 액션은 변함이 없다. 이렇듯 경극의 변질은 전통을 상실하게 하였다.[10]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 이후 핍박당했던 기존 경극 배우들이 복귀하면서 그 고유형태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시도되었고 어느정도 복원이 되었으나, 이와는 반대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경극을 즐기는 전통은 단절되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관심없는 박제화된 예술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 정부가 선양하는 중국 문명의 결정체로 나름 보호를 받고 있기는 하다.
3. 내용 형식
상연되는 각본은 모두 피황조에 의거한 구성·문체·시형이며, 현존하는 1,000여 종은 대부분이 작자미상이다. 대개는 사전(史傳) 소설과 전설에서 소재를 따거나 원곡과 전기(傳奇)를 개작한 것으로, 수호지, 삼국지연의 등의 부분각색이 적지 않다. 매란방이 창시밑 주연했었던 매파(梅派)의 작품들, 특히 청나라 때 전해져오던 기존의 작품을 근현대 시기에 편곡/각색한 극들이 유명한데, 대표작으로 패왕별희(覇王別姬), 귀비취주(貴妃醉酒), 추강(秋江), 팔선과해(八仙過海), 요천궁(鬧天宫), 타어살가(打魚殺家), 사진사(四進士), 우주봉(宇宙峰), 백사전(白蛇傳), 장상화(將相和), 양문여장(楊門女將), 삼차구(三岔口), 안탕산(雁蕩山) 등이 있다.
그나마 한국에서도 유명한 건 패왕별희와 귀비취주인데 이 마저도 동명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모두 2~3시간 내외의 긴 가무극으로 연출과 연기 모두 지극히 서사적인 표현양식을 쓰고, 장치도 없이 상징적인 연기형식에 의하여 상황이나 행동을 나타낸다. 의상은 이전의 명나라 복식을 청나라 풍으로 어레인지한 것이며, 색과 형태에 따라 인물의 신분과 직업 등을 알 수 있다. 노래, 대사, 춤, 액션 등 어느 것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배역에 따라 결정되며, 배우는 어릴 때부터 소질에 따라 전문적 배역을 익힌다. 이를 위한 양성소를 '과반(科班)'이라 하며 매란방 등이 연기를 익힌 부연성(富連成) 등이 유명하다.
여담으로 패왕별희와 백사전 등의 유명 고전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제외하면, 경극 대본밑 가사와 줄거리가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 제대로 알려진게 없기 때문에 즐겨보고 싶어도 즐길 수가 없다는게 단점이다. 기본 대사는 한국어로 따지면 '''현대어 + 가벼운 사극말투'''지만, 공연전 자막으로 띄워주는 줄거리나 노래 같은 경우에는 '''고전 한문체''' 내지는 백화문으로 되어있어 해석이 어려운 점도 있다(...)
4. 관련작품
초기 중국과 홍콩 영화들의 대부분은 세트장을 세워놓고 그안에서 경극을 그대로 촬영하거나 경극 배우들을 고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최초의 중국 영화는 경극 정군산(定軍山)을 1905년에 촬영한 것으로[11] , 정군산 이후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13년작 <장자시처(莊子試妻)>라는 무성영화였다. 유성영화의 도입 이후에도 여러 고전 경극들이 영화화되었다.
경극과 관련해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1993년에 개봉한 천카이거의 영화 패왕별희가 있다. 199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2006년 28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후 2009년에 경극의 대가들 중 한명인 매란방(梅蘭芳)의 전기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고[12] , 2014~15년에 패왕별희(霸王别姬), 진향련(秦香蓮), 장원매(狀元媒)와 용봉정상(龍鳳呈祥)이 3D로 제작, 중영자막판으로 개봉 밑 공개되었다.
경극학교의 고된 수련과정을 보려면 패왕별희나 홍금보가 주연한 칠소복을 보기 바란다.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지는 않지만 한국 영화인 왕의 남자에서도 광대들이 연산군 앞에서 경극 혹은 곤곡 비슷한 연극을 하는 장면이 내용상으로 아주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대신들이 연산군의 광기를 두려워하여 중종반정을 계획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엄연한 고증 오류로, 당시 조선에 곤곡이 존재할리 없기 때문이거니와 비슷한 연극이 존재하였더라도 높은 공연 난이도 등의 이유로 조선의 광대들이 이를 공연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1] 현대의 전대물처럼 작품마다 옷을 바꿀수 없으므로 가부키와 비슷하게 배역의 성격에 따라 정해진 분장을 하는것이 일반적이다. 연개소문의 저 분장은 항우나 동탁 등 경극에서 일반적인 무장의 의상으로 자주 돌려쓰는 이미지다. 가령 패왕별희를 보면 작중 샬로가 하는 항우 경극 분장이 위 연개소문과 거의 같은 걸 볼 수 있다.[2] 간혹 대만에서는 평극(平劇)이라고도 한다. 북경이 중화민국 시대에는 북평(北平)이었기 때문[3] 이 정단이 화단을 겸하면 청의(青衣)라고 칭한다. 하지만 정단은 사실상 사어 수준으로 잘 쓰이지 않는다.[4] 기존의 단이 그랬듯 남자들이 담당했던 것의 영향으로 노생과 같은 호방한 창법이 특징이다. 현대에는 주로 여자들이 담당하며, 아주 가끔씩 남자들이 담당하기도 한다. 노단으로 출연하는 대부분의 여성배우들의 나이가 많아봤자 중년 정도에 속하는 것도 있고, 노메이크업에 가까운 분장으로 인해 외적 괴리감이 조금있는 편이다. [5] 채단들 중 미형 캐릭터들의 경우, 청의 및 화단과 비슷하게 얼굴에 붉은 색이 들어가고 아이라인을 그리는 대신에 이마나 미간, 볼에 점을 찍는다.[6] 여축은 채단과 동일시되며, 여전히 대부분은 남자배우들이 담당한다.[7] # 참고 밑 출저[8] 그외에도 전문배우는 아니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일반인 남성들이 남단으로서 지원,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9] 여기서 반전은 말그대로 화단(花旦)이 소생(小生)을, 소생이나 노생이 청의(青衣), 문축(文丑)이 노생(老生)을 맡는 등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10] 당시 마오쩌둥을 비롯한 권력층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른바 혁명적인 내용을 소재로 한 《沙家浜》(사가병) 등의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경극의 변질을 가속화했을 뿐이었다.[11] 조조와 유비의 한중 공방전을 소재로 한 경극을 영화하했으나, 불행히도 상영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감독, 출연자 등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최초의 중국 영화가 아니라는 설도 팽배했다.[12] 패왕별희에서 장국영 배역의 아역을 맡았던 배우가 이 영화에도 출연했다. 다만 주인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