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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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徹
1923년 ~ 2002년
1. 개요
홍콩의 영화감독. 호금전 감독과 더불어 홍콩 무협 영화의 시대를 만든 감독이다.
2. 이름
현재의 외래어 표기법은 현지음을 따르므로 장저라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지만, 한자를 그냥 그대로 읽던 시대에 알려졌기 때문에 장철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3. 상세
본명은 장이양(張易揚). 중국 상하이 출생. 대만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다시 홍콩으로 건너가 쇼 브라더스에서 감독 생활을 한다. 그리고 쇼 브라더스에서 1967년, 《독비도(獨臂刀)》(한국 제목은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를 만들어 대박을 터뜨리면서, 무협영화사만이 아니라 홍콩 영화사에 두고두고 남는 한 획을 긋는다.
하지만 여러 걸작을 남긴 한편으로, 범작이나 망작도 많이 남겼으며, 작품들에 자기복제도 많고, 그 때문에 이래저래 이름값이 많이 깎인 감독이기도 하다. 이는 장철이 자기의 세계를 관철시키려 하는 감독이 아니라, 제작사의 요구에 따라 그때그때 속도 있게 작품을 생산해낸 감독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1]
장철은 이렇게 제작사를 위해 작품을 생산하면서, 안정된 생산과 소비를 위해 한번 배우를 발굴하면 그 배우들을 두고두고 써먹으며 스타 시스템을 써먹었다. 이러한 스타 시스템은 배우와 감독이 안정적인 고정 팬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장철의 영화들이 자기복제로 비판받는 요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4. 장철 영화의 변천
장철은 시대의 흥행 성향에 따라 작품 성향을 바꾸어 왔고, 그래서 영화 인생 속에서 몇 번이나 작품 성향이 변해 갔다.
장철의 첫 시대는 《독비도》로 그 문을 열었으며, 왕우가 주연인 칼부림 무협 영화들을 만들어낸 시기이다. 《독비도》, 《금연자》, 《독비도왕(獨臂刀王)》 같은 장철의 걸작들이 만들어진 시기인데, 장철은 저런 걸작 사이에도 태작에 망작급 영화들을 생산했다. 사실 이 흐름의 시작은 쇼브라더스에서 호금전이 만든 《대취협》이었으나, 예술가연하던 호금전은 쇼브라더스의 상업주의에 이를 갈면서 쫓겨나다시피 튀어나갔고, 쇼브라더스가 호금전을 대신하는 역할로 선택한 것이 장철. 그래서 이 시기 장철의 영화는 호금전, 더 정확하게는 《대취협》의 영향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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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의 두 번째 시대는 적룡, 강대위와 함께 한 시기로, 장철은 《복수(報仇, 1970)》를 시작으로 해서 근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주먹질''' 액션 영화를 만들었다. 이 시기 이소룡의 등장과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감독한 정창화 감독, 그리고 장철은 훗날 홍콩 영화사에서 '''쿵후 영화'''혹은 권격 영화라 불리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때도 기존의 사극 스타일이나 칼부림 무협 영화도 만들곤 했는데, 매번 적룡과 강대위를 형제 아니면 친구로 설정하거나 하여 여러 차례 우려먹었다.
장철의 세 번째 시대는 부성[2] 과 진관태[3] 와 함께 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황비홍이나 홍희관 같은 인물들을 소재로 한 권격 무협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다.
장철의 네 번째 시대는 이른바 《오독》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영화들을 만든 시기다. 나망[4] , 강생, 녹봉, 손건, 곽추, 이 다섯 배우들을 이거 저거 배역 바꾸어 활용하면서 저예산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이들의 특징은 무술을 넘어서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고도의 아크로바틱 액션이다. 다만 배우들의 외모는 기대하지 말자. 절로 뭥미 소리가 나온다. 이들 다섯 배우는 서양 팬들에게 북미와 유럽 쪽에서 컬트적 인기를 끌었는데, 흔히 '베놈스(venoms)'라 불린다. 곽추는 유럽이나 할리우드 등에서 여러 차례 무술감독으로 초빙되기도 했었다.
그밖에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 같은 김용 원작을 영화로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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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섯 배우들을 활용한 오독 시대가 끝난 후에도 계속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성룡으로 시작한 코믹 액션 영화가 홍콩 영화계의 주류가 되고, 그 뒤를 이어 홍콩 느와르의 시대가 오면서, 60년대부터 끈질기게 영화를 만들면서 버텨온 장철도 결국엔 일선에 남지 못하고 만다.
5. 특징
영화 속 시대 배경도 액션의 소재도 계속 바뀌어 간 장철이지만, 그의 영화들을 보면, 그 바탕에는 남자들의 의리 혹은 자존심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기법 면에서 장철을 상징하는 건 슬로우 모션의 활용이다. 재미있고도 특징적인 것은 장철은 맨몸 액션을 강조하는 감독인데, 그 액션 시퀀스에서는 슬로우 모션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세계최초로 8프레임 샷을 개발했다'고 자부할 정도로 속도감을 중시한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액션 장면에서 갑자기 속도가 느려진다면, 주역 가운데 하나가 죽을 때가 된 것이다.
죽음 혹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의 표정을 순간 클로즈업으로 부각시키는 수법도 장철의 특징으로,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일그러지는 얼굴로 남자들이 쓰러지는 장면도 장철을 상징하는 요소들 중 하나다. 피칠갑을 한 몸을 부각시키기 위해 장철이 애용한 게 하얀 옷인데, 장철의 영화에서 하얀 옷을 입고 나온 등장인물은, 난도질 당해 온몸에서 뿜어낸 피로 하얀 옷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죽는다. 물론 하얀 옷을 입고 있지 않더라도 죽는 사람이 많은데, 이 경우엔 잘 단련된 상체를 드러낸 채 처절하게 싸우다가, 피칠을 한 상체 근육을 화면 가득 채우며 죽는다. 이런 식으로 남자의 상체가 강조되는 장면들 때문에 장철은 게이 이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와는 별개로 폭력을 당하는 자들의 고통이 강조되는 연출 때문에 새디스트 성향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거다 하고 딱 정형(定型)화시키기엔 무리가 좀 있지만, 장철의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의리 때문에 싸우다 슬로우 모션으로 비틀댄 후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죽는다, 라고 할 수 있을지도.
오우삼은 장철의 조감독 출신으로, 장철의 영향을 여러 모로 받았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가장 좋아하는 홍콩영화 감독으로, 그의 저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읽어보면, 정말 그 애정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수가 있다.
6. 작품
- 《아리산풍운》(1949)
- 《야화》(1958)
- 《호접배》(1963)
- 《호협섬구》(1964)
- 《3인의 협객》(1966)
- 《단장의 검》(1967)
- 《대자객》(1967)
- 《독비도 시리즈》
보통 외팔이 시리즈로 알려져 있는 작품. 장철은 왕우를 주연으로 해서 《독비도》와 《독비도왕》을 만들었고, 나중에 강대위와 적룡을 주연으로 해서 《신독비도》를 만들었다.
《독비도》(1967)는 《신조협려》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로, 홍콩 개봉 당시 홍콩 역대 관객 동원 1위 자리를 차지한 영화이다. 이 영화로 왕우는 홍콩 최고의 흥행 배우가 되었으며, 왕우는 장철과 결별한 뒤, 자기가 감독이 되어 자신이 주연인 외팔이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독비도왕》(1968)은 《독비도》의 속편으로, 전편에 비해 등장인물이 많아졌고 액션도 많아졌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적으로 나오는 '8대도왕'은 여러 미디어에 영향을 미쳤다.
《신독비도》(1971)는 앞선 영화들과는 완전 별개인 내용이다. 일종의 리부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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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미모의 아내를 노리던 자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경극 배우의 동생이 형을 죽게 한 자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는 내용.
적룡과 강대위와 함께 한 시대의 장철의 대표작. 피와 죽음이 가득하다.
왕우의 《용호투》(1970), 그리고 이소룡의 영화와 더불어, 홍콩 영화계의 주류가 칼부림 무협 영화에서 근현대 배경 권격 영화로 바뀌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 영화이다.
- 《유협아》(1970)
- 《소살성》(1970)
- 《무명영웅》(1971)
- 《쌍협》(1971)
- 《권격》(1971)
- 《수호전》(1972)
- 《군영회》(1972)
- 《악객》(1972)
- 《구연환》(1972)
- 《연경인》(1972)
- 《마영정》(1972)
- 《쾌활림》(1972)
- 《사기사》(1972): 1958년, 한국군에서 복무한 홍콩인들이 제대하고 범죄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괴랄한 내용. 한국군이 영화제작을 지원했으나, 결말 때문에 한국에는 공개되지 못했다.
- 《대결투》(1973)
- 《대해도》(1973)
- 《대도왕오》(1973)
- 《분노청년》(1973)
- 《경찰》(1973)
- 《반역》(1973)
- 《대해도》(1973)
- 《자마》(1973)
- 《방세옥과 홍희관》(1974)
- 《붕우》(1974)
- 《소림오조》(1974)
- 《나타》(1974)
- 《오호장》(1974)
- 《소림자제》(1974)
- 《팔국연군》(1975)
- 《탕구지》(1975)
- 《홍권소자》(1975)
- 《홍해아》(1975)
- 《마가파라》(1975)
- 《홍권과 영춘》(1975)
- 《채리불소자》(1976)
- 《방세옥과 호혜건》(1976)
- 《소림사》(1976)
- 《팔도루자》(1976)
- 《해군돌격대》(1977)
- 《강호한자》(1977)
- 《당인가소자》(1977)
- 《사조영웅전》(1977)
- 《오독》(1978)
- 《남소림북소림》(1978)
- 《사조영웅전속집》(1978)
- 《잔결》(1978)
- 《소림여무당》(少林與武當, 1978): 소림과 무당(武當)의 대립을 내용으로 해서 만든 오독 시대의 영화들 중 하나인데, 아시아 쪽보다 미국 쪽에서 작지만 광적인 인기를 끈 영화이다.
Chemical Brothers "Get Yourself High" from Joseph Kahn on Vimeo.
이 뮤직비디오의 영상이 《소림여무당》을 가지고 만든 것.- 《가시영웅》(1979)
- 《잡기망명대》(1979)
- 《생사문》(1979)
- 《매명소자》(1979)
- 《광동십호여우오호》(1979)
- 《금비동》(1979)
- 《대살사방》(1980)
- 《비호외전》(1980)
- 《철기문》(1980)
- 《벽혈검》(1981)
- 《사조영웅전제삼집》(1981)
- 《차수》(1981) 베놈스 후기 작품 중 손꼽힐만한 명작이다. 검술, 도술, 창술 등등 화려한 무기술이 등장하여 볼거리가 매우 풍성한 작품. 홋날 강시선생으로 유명해지는 젊은 시절의 전소호가 출연하였다.
- 《충소루》(1981)
- 《오둔인술》(1982)
- 《신조협려》(1982)
- 《협객행》(1982)
- 《신통술여소패왕》(1983)
- 《당귀》(1983)
- 《상해탄십삼태보》(1984)
- 《뇌태》(1984)
- 《구자천마》(1984)
- 《벽력정》(1985)
- 《대상해1937》(1986)
- 《과강》(1988)
- 《서안살육》(1990)
- 《강호기병》(1990)
- 《대화서유:서행평요》(1991)
- 《신통》(1993)
[1] 그러나 당시 흑사회와 쇼 브라더스가 꽉 잡고 있던 홍콩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화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는 의견도 있다. 한 예로 6~70년대, 홍콩영화계에서 천황거성(天皇巨星)이라는 숭배를 받으며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던 왕우(王羽)도, 쇼 브라더스와의 대립으로 인해 대만으로 쫓겨 가다시피 가야 했을 정도였다.[2] 부성은 교통사고로 29세에 요절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듣보잡 배우지만, 당시 홍콩에서 대스타였다. 액션연기 뿐만 아니라 서구형 외모에 개구쟁이 + 훈남 인상이라, 만약 계속 활동했더라면 80년대 성룡의 위상은 지금 같지 않았으리라 평가받을 정도다.[3] 인상이 강해서 원톱 주연으로는 조금 부족함이 있으나, 배우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무관(武館), 즉 무술도장을 실제로 운영하던 등 진짜 무술가 출신 배우라서, 워낙 액션이 출중하기 때문에 크게 인기를 끌었다. 비교적 근래의 작품에서는 견자단, 사정봉 등이 주연한 《용호문(龍虎門)》에서 볼 수 있다.[4] 근래 영화에서는 《엽문 2》에서 견자단이 홍금보와 대결하기 전에 먼저 대결한 사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