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

 



'''로마 62대 황제
Justinianus 大帝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
[image]
'''이탈리아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
'''제호'''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Augustus)
(Φλάβιος Πέτρος Σαββάτιος Ἰουστινιανός
Flávios Pétros Sabbátios Ioustinianós)
''''''
플라비우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Flavius Petrus Sabbatius Justinianus)
'''생몰 년도'''
482년 5월 11일 ~ 565년 11월 14일
'''재위 기간'''
527년 8월 1일 ~ 565년 11월 14일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치세
2.2.2. 이베리아 전쟁 (vs 사산 제국)
2.2.2.1. 다라 전투와 평화 조약
2.2.3. 니카의 난 진압과 전제 군주화
2.2.4. 고토 회복 원정 (533 ~ 554년)
2.2.4.1.2. 트리카마룸 전투 (533년)
2.2.4.2. 1차 고트 전쟁: 벨리사리우스
2.2.4.2.2. 승승장구 (535년 - 536년)
2.2.4.2.3. 로마 공방전 (537년 - 538년)
2.2.4.2.4. 두 사령관 간의 대립
2.2.4.2.5. 라벤나 입성 (540년)
2.2.4.3. 사산 왕조의 배신과 역병
2.2.4.4. 동고트 왕국의 반격: 토틸라
2.2.4.4.1. 벨리사리우스의 귀환
2.2.4.4.2. 로마 포위전 (546년)
2.2.4.4.3. 토틸라의 승리 (~ 550년)
2.2.4.5.2. 대 프랑크 왕국 전쟁 (554년)
2.2.6. 라지카 전쟁 (548 ~ 557년)
2.2.7. 말년의 황제와 자연재해
2.2.7.1. 불가르족의 습격과 연공 납부
2.2.7.2. 죽음
3. 평가
3.1. 재정복 사업: 과연 무모한 확장이었나?
4. 그 외
5. 관련 문서
6. 참고자료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긴 우리의 제국을 하느님의 성스러운 권위로써 다스리면서 전쟁의 승리를 알고, 평화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제국의 기틀을 유지한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지해 주시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사기는 크게 올라간다.

우리는 우리의 무기도 믿지 않고, 우리 병사들의 무기도 믿지 않으며, 우리의 지휘관들도 믿지 않고, 우리가 지닌 재주도 믿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가장 숭고한 삼위일체의 섭리에 있다. 바로 거기서 전 우주의 요소들이 생겨나 세계 전체에 배열된다.

ㅡ 유스티니아누스, <학설휘찬>의 서문에서.


고결한 영혼을 지닌 황제는 자연스럽게 제국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1]

프로코피우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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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1세 재위기 최대 판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마 제국의 62대 황제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조로는 외숙부 유스티누스 1세에 이은 2대이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의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는 4대 황제이다.
마케도니아 빈농 가정 출신으로써, 군인 출신 황제 유스티누스 1세를 돕다 공동 황제로 임명되고, 양자가 되어 최종적으로는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로마법 대전 편찬, 사산 왕조와의 화평, 니카의 반란 진압을 통한 전제 군주제 확립, 벨리사리우스나르세스 등의 명장 등용 및 고토 수복, 하기아 소피아 재건 등이 있다. 이러한 업적들과 교회에 대한 헌신 등이 높이 평가 받아 정교회로부터 시성되어 성(聖) 유스티니아누스로도 불리며, 대제(Megas[μέγας]) 칭호도 받았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도 불린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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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

2.1. 즉위 이전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에서 동남쪽 20여 km 떨어진 지방 도시 타우레시움(Tauresium) 출신의 일리리아/트라키아계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간 삼촌 유스티누스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근위대장이 되었으나, 자식이 없다하여 양자로 보내진다. 수도로 간 유스티니아누스는 역사, 법학, 철학 등을 배우며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근위대장인 유스티누스가 황제로 옹립된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는 학식이 부족한 삼촌을 보좌해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가 이룬 업적으로는 아카키우스 대립 종식, 귀천상혼 금지법 폐지 등이 있다. 그 공으로 521년 집정관겸 군사령관으로 재직해 공식 직책상으로도 2인자가 된다. 그리고 525년, 앞서 폐지된 귀천상혼 금지법 폐지 덕에 서커스 단원 출신 테오도라와 혼인한다. 그리고 2년 후 유스티누스 1세가 사망하자 단독 황제로 즉위한다.

2.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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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초기의 솔리두스 금화

2.2.1. 로마법 대전 편찬


법학에 관심이 많던 유스티니아누스는 한세기 이전에 편찬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대신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1200년 분량의 판례를 집대성한 법전을 편찬한다. 이 작업의 책임자로는 트리보니아누스(Tribonianus)란 사람이 임명된다. 법전의 초안은 529년 4월 7일에 공개되었고, 고토 회복 전쟁이 한창이던 534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편찬된 로마법 대전[2]은 7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이 사산 제국과 이슬람 제국 및 슬라브족, 불가르족 침공 등의 혼란을 겪으며 후대의 실정에 맞게 에클로가 등의 법령집이 발간되기도 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이 중흥기에 들어선 9세기에는 바실리카 법전이 편찬되었지만 여전히 그 핵심은 변하지 않아 유럽, 더 나아가 세계의 법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더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고 바람.

2.2.2. 이베리아 전쟁 (vs 사산 제국)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였던 524/525년경, 사산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인 이베리아[3]의 주민들에게 조로아스터교로 강제 개종을 명하였다. 이에 동로마 측은 같은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묵인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로마 측을 자극하기 싫었던 사산 왕조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동로마 측에 한 세기 전의 선례[4]를 들어 자신의 아들 호스로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찬성 의사를 보였으나, 대신이었던 프로쿨루스가 반대하는 등 여론이 나쁘게 흐르자 거부 의사를 나타내어 결국은 양국 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다만, 유스티누스 1세가 재위하는 527년까지는 양 제국 간의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다.
당시 중근동 세계를 주름잡던 두 제국 간의 격돌은 530년 이전까지는 대리전의 성격으로 치러졌다. 525년, 동로마 제국의 홍해 함대는 에티오피아의 친로마 동맹국인 악숨 왕국의 군대를 바브 알 만다브 해협의 건너편 아라비아로 이동시켰다. 악숨 군대는 현재 예멘 일대에 있던 사산 제국의 동맹국인 히미야르 왕국을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반격으로, 525/526년에 친이란 부족국가인 라흠 왕국[5]군이 동로마 제국의 국경 일대[6]를 습격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 직후인 527년까지 이베리아 인들의 반 이란 봉기는 진압되었고, 반란을 이끌던 이베리아의 전임 군주 고르제누스는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에 동로마 군대는 페르시아 측의 니시비스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당하였다. 게다가 시리아 동부의 요새인 탄누리스에 파견된 로마 측의 지원군마저 차단되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의 경호원으로 두각을 드러내었던 벨리사리우스를 동방 군단의 사령관[7]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528년, 이란군이 이베리아를 넘어 라지카 해안까지 공격해 오자, 벨리사리우스는 가산 왕국군과 연합하여 탄누리스로 출정, 그곳을 요새화하는 일꾼들을 보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의 대군은 동로마 측의 방어선을 돌파해냈고, 요새는 폐허가 되었다. 그 결과 로마 측 지휘관 2명이 전사, 3명이 페르시아 측에 포로가 되었고, 가산 왕국의 군주였던 자발라흐 4세[8]도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거대 요새인 다라로 후퇴하였는데, 행군 중에 수백여 명이 기갈로 죽었다고 한다. 한편, 승리한 페르시아 측도 많은 병력을 잃어서 후퇴하였는데, 전사자 중에는 근위대인 임모탈 5백여 명도 포함되어 사령관 크세르크세스는 샤한샤 카바드 1세에게 문책을 들었다고 한다.(탄누리스 전투, 페르시아 측의 피로스의 승리.)
529년, 사산 제국의 속국인 라흠 왕국이 시리아 동부를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들의 라이벌인 가산 왕국의 중앙 집권화를 돕는 한편, 동방 군단을 재편성하여 아르메니아 방면으로는 시타스,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는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였다. 그 사이에 동로마 수뇌부는 페르시아 측에 평화 협상을 제안하며 재정비된 군대가 전선으로 이동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2.2.2.1. 다라 전투와 평화 조약

530년, 다라 요새에 집결한 벨리사리우스의 병력 2만 5천은 참호를 파고 5만의 이란 군대와 대치하였다. 수적 우세와 벨리사리우스의 기만 전술에 속은 이란 군은 동로마 측 매복조의 역습에 흔들렸다. 그리고 이미 깊숙히 들어온 이란 군대는 로마 궁병대의 화살 세례를 받았고, 결국 기병대와 보병대를 분리하여 각개격파하는 벨리사리우스의 전술에 말려들어 사령관 중 한 명인 바레스마나스를 포함한 8천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다라 전투)
같은 시기, 현재 조지아 일대를 점령한 이란 군대는 로마령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점령하고 로마의 군단 기지였던 사탈라를 포위하였다. 그곳의 사령관 시타스는 군대 대부분을 성 안에 두고 자신은 성 밖 언덕에 주둔하였는데, 먼지를 피워 대군으로 위장하였다. 이에 페르시아의 대군이 언덕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후방을 성 안에 있던 동로마 군대가 공격하여 그들을 포위하였다. 그러한 역경에도 이란 군대는 잘 버텨내었으나 플로렌티우스라는 로마 장교가 분견대를 이끌고 돌진하여 페르시아의 대장기를 뺏었다. 비록 그는 곧 전사하였지만, 군기를 상실한 이란 군대는 퇴각하였고, 압도적인 적군에게 승리를 거둔 동로마 측도 추격하지 않았다.(사탈라 전투)
이 전투로 사산 제국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였고, 오히려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의 몇몇 부락은 동로마 측에 붙어 국경이 동로마에 더 유리하게 바뀌게 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다라 전투에 못지 않은 쾌거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고 시타스 본인의 인지도가 떨어져서 묻히는 경향이 있다. 한편, 사탈라 전투 이후로 양국 간의 휴전 협상이 논의되었는데, 이어진 칼리니쿰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이 승리하며 무산되었다.
다라 전투의 패배에도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포기하지 않고 2만여의 군대를 안티오키아 방면으로 보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들 앞에 나타났고, 그러자 페르시아 군대는 철수하였다. 동로마 군대는 이를 추격했는데, 현재 시리아의 라카인 칼리니쿰에서 따라잡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원래 페르시아 군대를 국경 밖으로만 쫓아내려 하였으나, 다라 전투를 기억하는 병사들은 전투를 요구하였고, 통제에 실패한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전투를 하게 되었다.[9] 531년 4월, 양 진영 간 팽팽한 전투가 벌어지던 중, 페르시아 측의 사령관 아자레테스는 벨리사리우스의 눈에 띄지 않게 중앙의 병력 중 다수를 몰래 좌익으로 이동시켰고, 라흠 왕국 출신 아랍 기병대의 돌격과 함께 진격하여 동맹국 군대로 구성되어 있던 로마 측의 우익을 무너뜨렸다.[10] 좌익이 견디며 시간을 버는 동안 동로마 군대 대부분은 퇴각에 철수하였지만, 우익과 중앙의 사령관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선박으로 잔존 병력을 후퇴시켰다. 다만 페르시아 측의 피해도 상당한 편이어서, 그들 역시 시리아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11]
칼리니쿰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사령관 직에서 해임당했으나, 군대 운용 능력을 눈여겨 본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에게 재정복 원정을 맡기게 된다. 531년 9월에 카바드 1세가 죽었고, 고토 회복 원정을 준비하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새로 샤한샤로 즉위한 호스로 1세와의 협상을 지속하여 결국 532년 9월에 '영원한 평화 조약(ἀπέραντος εἰρήνη)'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의 내용은 페르시아 측이 라지카에서 철수 하는 등 국경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고, 동로마 측은 일시불로 110 센테나리아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로마 측으로 피신온 이베리아 인들의 거취는 그들 자율에 맡기며(로마에 남든지 페르시아령 이베리아로 돌아오든지), 로마로 귀순한 아르메니아의 부족들도 거취를 자율에 맡긴다.
다라 전투에서 나타난 벨리사리우스의 전략과 무용담의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2.2.3. 니카의 난 진압과 전제 군주화


사산 제국과의 평화 협상이 한창이던 532년의 새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삼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전차 경기가 열리던 동로마 제국의 히포드롬은 고대 로마의 포룸이나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내세울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장소를 장악한 청색당, 녹색당의 두 당파는 현대와 비교하면 정당과도 같은 존재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전자인 청색당은칼케돈 파, 즉 정통론을 따르며 대토지를 소유하였던 고위 귀족들의 비호를 받던 보수 세력[12]이었고 후자인 녹색당은 단성론을 따르며 상공업계와 궁정관료들의 지지를 받던 세력[13]이었다.
보통의 경우, 양 당 중 한 당이 정부의 비호를 받고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 당은 반정부적인 기류를 형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당이 공동 전선을 펴는 경우도 있었는데, 중앙권력의 전제적인 지배가 나타나려 할 때 양 당은 손을 잡고 정부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도 했다. 양 당은 모두 자유시민의 전통을 이어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가 재위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지지를 받던 녹색당 대신 청색당을 비호하던 인물이었고, 청색당은 그런 황제에게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르게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와 함께 양 당 모두를 강력하게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양 당은 강력한 형사적 처벌 조치와 탄압을 받았고, 이는 양 당의 불만을 동시에 촉발시키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으로 대표되는 대사업은 필연적으로 제국의 주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콘스탄티노플 전역에서 황제에 대한 반발심이 들끓고 있었다. 양 당은 서로 연대하여 황제의 절대권력에 대항할 것을 선포했다. 여기에는 전제적이고 귀족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던 황제를 싫어하는 유력 원로원 의원들의 책동도 있었다.
532년 1월, 양 당은 자신들의 근거지이자 정치적 의사를 전통적으로 표출해 온 히포드롬에 집결했고, 거대한 외침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 자비로운 녹색당과 청색당이여, 부디 영속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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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기세는 뜨거웠다. 제국의 수도는 화염에 휩싸였고, 양 당은 유스티니아누스의 폐위와 새 황제의 즉위를 선포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인 히파티우스[14]가 새 황제로 선포되는 지경에 이르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떠나 도망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로막은 것이 황후 테오도라였다. 그녀는 이때 '보라색 옷은 가장 좋은 수의'라고 말하며, 제위를 지키기 위한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다. 테오도라의 단호한 만류에 정신을 다잡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란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주어진 두 칼이 있었다. 바로 제국 제일의 명장 자리를 놓고 겨룰 수 있던 장수들, 벨리사리우스나르세스가 있었던 것이다.
우선 나르세스가 노회한 책략가다운 면모를 확실히 발휘했다. 나르세스는 반란 세력의 연대를 해체하는 게 선결과제라고 보았고, 청색당의 지도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의 공동통치기에 청색당에 베풀어진 은혜를 상기시킨 나르세스는 청색당의 지도부와 담판을 짓는 데 성공했고, 강력한 연대를 이루고 있던 두 당은 결국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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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시점에 제국 최고의 용장이자 전술가라고 할 수 있을 벨리사리우스가 나섰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던 병력들을 지휘하여 반란의 진원지였던 히포드롬으로 진격했다. 공격은 신속하고 기습적이었다. 허를 찔린 봉기자들은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감당하지 못했고, 수천여 명이 이 공격에서 학살당했다. 배후의 원로원 의원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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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유시민의 전통을 확실히 꺾고,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반란의 와중에 불타오른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손에 의해 재건되었고,[15] 그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 '''솔로몬이여, 짐은 그대를 능가했도다!'''라 했다고 전해진다. 절대적인 황제로 자리매김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2.2.4. '''고토 회복 원정 (533 ~ 5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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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복의 주연인 유스티니아누스,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의 모자이크.(이탈리아 라벤나)
39년에 이르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20년간 지속된 대사업이다. 재정복 외에도 유명한 업적인 로마법 대전 편찬, 하기아 소피아 건설도 동시에 진행되었고, 따라서 치세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청년 시절부터 유구한 로마 역사를 공부하며 고토 회복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황제 즉위 직후부터 그 뜻을 알렸다. 시민들의 시큰둥한 반응과 증세에 대한 불만은 니카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으나, 반란 진압 이후에는 원정을 강행할 수 있었다. 서로 승패를 주고 받으며 대등하게 싸웠던 사산 제국에게 황금을 바치면서까지 동방을 안정시키고 대군을 편성하여 서방의 고토 회복에 나선 것도 그 이유.[16][17]

2.2.4.1. '''북아프리카''' 재정복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속주는 로마 제국의 곡창 역할과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5백여 년간 원로원 속주(Senatorial province)로 지정될 정도로 안정된, 풍요로운 곳이었다. 따라서 동로마 수뇌부는 재정복의 첫 순서로 북아프리카를 선정하였다. 가이세리크가 반달족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지 한 세기가 다되어가던 시점이었고[18] 바실리스쿠스의 원정군이 468년에 카르타고 인근에서 대패를 당한 지 65년이 되는 해였다.

2.2.4.1.1. 반달 왕국의 쇠퇴

군주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겔리메르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455년에 로마를 약탈하고 461년에는 카르타헤나의 서로마 해군을 격파하며 해상권을 장악하여 전성기를 누린 반달 왕국은 477년에 창건자 가이세리크가 죽은 이후부터 쇠퇴하였다. 아리우스파였던 반달족은 니케아 파였던 로마인들을 박해하여 민심을 잃었고, 오도아케르에게 시칠리아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19] 사막의 베르베르 인들의 습격에 시달렸다.
가이세리크 사후 후네리크, 군타문드, 트라사문드의 왕을 거치며 피지배층과 지배층 간의 간극은 더욱 벌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523년에 가이세리크의 손자인 힐데리크가 반달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모친[20]의 영향으로 니케아 파로 개종하였다. 이후 그는 삼위일체파 정통론자들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폈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한 세기 만에 카르타고 주교구가 회복되어 잠깐이나마 카르타고 시민들은 반달 왕국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힐데리크는 베르베르 인의 약탈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정규군이 대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반달족 중에서도 니케아 파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자, 위기감을 느낀 반달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감금하고 사촌이자 강경한 아리우스파인 겔리메르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겔리메르는 정통파로 개종한 반달 귀족들을 숙청하며 이미 쇠퇴해 가던 왕국을 더욱 분열시켰다. 이에 힐데리크를 지원하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미 준비하던 이탈리아의 동고트 원정에 앞서 반달족 원정을 결심하게 되었다.[21] 이른바 반달 전쟁이라 불리는 이 원정은 현재의 리비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튀니지, 알제리 등지에서 치러지게 된다.

2.2.4.1.2. 트리카마룸 전투 (5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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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년 봄, 황제가 북아프리카에 대한 회복의 의지를 밝히자 반달 왕국령이었던 사르데냐의 총독 고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은 사실 유스티니아누스가 사주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반달 왕국의 군주 겔리메르는 자신의 동생이 이끄는 5천의 정예병과 120척의 전함을 보내어 칼리가리에 상륙, 도시를 함락하고 고다스를 처형하였다. 그 사이에 왕국의 동부 트리폴리타니아[22]에서 반달족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키레나이카[23]의 동로마 군대가 출동하여 그 지역을 접수하였다. 반달 왕국의 핵심 전력인 대함대[24]가 사르데냐에 투입된 것을 포착한[25] 벨리사리우스는, 그해 6월 21일에 500여 척의 전함에 1만 8천여 명의 군대[26]를 승선시킨 후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서고트 왕국의 왕 테우디우스(재위 531 ~ 548년)에게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확답을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베르베르인들은 여전히 육상 국경을 위협하였고, 이전 군주인 힐데리크를 그리워하는 반달 귀족들도 여전히 있어 단합이 되기가 힘들었다. 반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동고트 왕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시칠리아시라쿠사에 제국 함대가 정박하며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었다.[27] 최대한 신속히 항해하길 원했던 유스티니아누스의 바람과는 달리 제국 함대는 천천히 아프리카를 향하였다.[28] 에게 해를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최남단인 메도네에서 마지막 지원군을 승선시킨 후, 식중독[29]에 시달리면서도 9월 초에 시칠리아에 도착, 군량을 보충하며 결전을 준비하였다.
시칠리아의 항구 도시인 카타니아에 머물던 벨리사리우스는 프로코피우스에게 정보 수집을 맡겼고, 반달 왕국 수뇌부의 안일한 준비 상태[30]를 보고 받은 벨리사리우스는 곧바로 출항을 결정하였다. 제국 함대는 533년 9월 4일에 현재 튀니지 동해안의, 카르타고에서 남쪽으로 240여 km 떨어진 카푸트바다 곶에 상륙하였다. 상륙 직전에 열린 함상 회의에서, 대부분의 장군들은 당장 카르타고로 진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근거인 즉슨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도시들의 성벽은 파괴된 상태였고, 반달 왕국의 유일한 요새화된 성곽 도시가 수도인 카르타고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 의견을 따르되 공성전 대신에 우선 겔리메르를 야전에서 격파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민[31]의 지지를 사기 위하여 해방자로 칭하였고, 몇몇 병사들이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치자 가중 처벌하였다. 이후의 연설에서는 병사들에게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으로서 자중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반달 귀족들에게는 부당하게 폐위당한 국왕 힐데리크를 복위시키러 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겔리메르는 감금되어 있던 힐데리크를 처형하였다
겔리메르는 튀니스 인근의 아드 데키뭄에서 동생 암마타스가 정면, 사촌 길타문드가 측면, 자신은 후방을 맡아 동로마 군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때 로마 군대의 동쪽 측면은 호수(석호)였다. 그리고 벨리사리우스는 대담히도 그곳으로 진군하였다. 전략 자체만 본다면 반달 왕국 측의 대승이 될 듯하였으나, 군대의 숙련도가 이러한 고도의 작전에 맞지 않았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주력군은 사르데냐에 있었고, 따라서 아드 데키뭄 전투에 동원된 반달 군대는 대부분 전투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이었다.
먼저 도착한 암마타스의 군대는 홀로 로마 군에 대적하였다가 암마타스가 전사하며, 뒤이어 도착한 길타문드의 군대는 매복하고 있던 훈족 용병대에게 각개격파 당하였다. 전장에 도착한 겔리메르는, 일단의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였지만, 동생의 시신을 보고 경악하였다. 왕이 동생을 매장하는 동안 반달 군대는 훈족 용병대와 벨리사리우스의 본대가 합류하는 것을 방치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군대를 재정비한 벨리사리우스는 총공격을 하여 반달 군대를 격파하였고 겔리메르는 서쪽의 누미디아로 피신하였다.
다음 날, 벨리사리우스와 원정대는 성문이 열린 카르타고에 시민들의 환호와 함께 무혈입성 하였다. 로마 측의 승전 소식을 들은 베르베르 부족장들은 카르타고로 와서 충성을 맹세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이런 때를 대비하여 준비해 간 은관을 수여하였다. 한편, 겔리메르는 현재 튀니지 서북부에 위치한 불라 레기아에서 군세를 재정비하였고, 사르데냐에 있던 동생 트자존의 주력군도 불러들였다.[32] 동시에 벨리사리우스의 카르타고 입성 소식을 모르는 트자존의 사절이 카르타고 항구에 들어왔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결전이 임박하였음을 깨달은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 성벽 보수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겔리메르는 서고트 왕국에 사절을 보내 다시 동맹 제안을 하였으나 아드 데키뭄 전투의 결과가 이미 도달한 터여서 다시 거절당했다.[33]
군세를 정비한 겔리메르와 트자존의 대군은 불라 레기아를 떠나 카르타고로 진군하였다. 그 여정동안 시민들을 동요시키기위해 카르타고로 이어지는 수도교를 끊었는데, 이는 이후 도시의 쇠퇴로 이어지게 되었다. 시민들이 동요하자 벨리사리우스는 반달 왕국 측과 내통한 시민들을 신체관통형으로 모조리 처형한 후, 훈족 용병대마저 불온한 낌새가 보이자 성밖으로 나가 회전으로 대군끼리 맞붙기로 결심하였다. 533년 12월 15일,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 군은 카르타고로부터 서쪽으로 50km 떨어진, 반달 왕국의 요새화된 야영지인 트리카마룸에 도달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장한 어조로 짧게 연설하였고, 곧바로 로마 기병대, 보병대 연이어 맹렬히 세 차례에 걸쳐 돌격하였다. 겔리메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르메니아의 요한이 지휘한 로마 기병대의 돌격으로 그의 동생 트자존이 전사하자, 겔리메르는 절망하였다. 반달 군대는 급속히 무너져내렸고, 겔리메르는 8백 명의 기병대만을 이끌고 다시금 누미디아로 도주하였다.[34](트리카마룸 전투)
벨리사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의 요한을 필두로 한 겔리메르 추격조를 편성하였다. 그들은 5일간 밤낮으로 겔리메르를 추격, 거의 따라잡는데에 성공하였으나 요한이 낙마로 사망하였다. 로마 기병대가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안 겔리메르는 히포 레기우스[35]를 거쳐 그의 무어인 동맹이 있는 파푸아 산중의 메데우스로 피신하였다. 히포에 무혈입성한 벨리사리우스는 그곳에 있던 반달 군대를 포로로 잡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박에서 반달 왕실의 보물을 발견하였다.[36] 벨리사리우스는 파라우스에게 4백의 군사를 주어 겔리메르의 산중 요새의 입구를 차단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키릴, 요한, 아폴리나리우스 등의 부장들을 각각 사르데냐, (이 경우 트자존의 머리가 동로마 측의 승리에 대한 증거이자 반달 왕국의 잔당이 항복해야 할 근거로 제시되었다.) 코르시카,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37], 지브롤터 해협 일대[38] 그리고 발레아레스 제도 일대로 파견하여 반달 왕국의 옛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편입시켰다. 전쟁 동안 베르베르 인의 침공을 받던 트리폴타니아에도 지원군이 보내져서 안정을 회복하였으며, 동고트 왕국과의 협상으로 시칠리아 서부의 반달 왕국의 항구였던 릴리바이움을 제국령으로 편입시켰다. 오도아케르가 반달 왕국의 시칠리아를 공격, 대부분 점령하였으나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릴리바이움은 반달 왕국령으로 남아있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북아프리카 원정 중에 동고트 왕국이 점령한 것을 외교를 통해 얻어낸 것이므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한편, 파푸아 산을 포위하던 파라우스는 기다리다 지쳐 메데우스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겔리메르 추종자들의 반격으로 백 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 이후 파라우스는 현명하게도 계속 포위한 채로 겔리메르 측이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리기로 하였다. 급히 도망가느라 식량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겔리메르는 메데우스 성채에 비축된 많지 않은 식량에 의존해야만 했다.
해가 바뀌었고, 결국 식량이 바닥난 겔리메르[39]는 534년 3월에 항복하여 카르타고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반달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며 벨리사리우스의 북아프리카 원정이 완료되었다. 그에게는 수도에서의 개선식 대신에 또다른 원정, 이탈리아 전선으로의 출정을 명하는 황제의 칙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재정복의 경비로는 1천 센타나리아, 즉 45.4톤의 황금이 소모되었다. 신설된 동로마 제국령 북아프리카 속주는 여러 반란과 무어 인의 침공이 일단락 된 548년에야 안정을 찾게 된다.[40]

2.2.4.2. 1차 고트 전쟁: 벨리사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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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사리우스의 모자이크
유스티니아누스의 숙원 사업인 이탈리아로 제국의 창 끝이 향하게 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2.2.4.2.1. 동고트 왕국의 내분

476년, 서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노에게 형식상으로 충성하며 17년간 이탈리아의 왕으로 군림하였는데, 구 로마 원로원과 현지 로마인들을 존중하여 협치를 통해 지지를 얻으며 세력을 점점 키워갔다. 왕국 내부가 안정되자 오도아케르는 477년에 시칠리아의 반달족을 몇개의 거점을 제외하고는 일소하였고, 480년에 율리우스 네포스가 암살되자 달마티아를 접수하였다. 당시 발칸 반도의 서부 판노니아 지방을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며 지배하던 동고트족도[41] 테오도리크의 지휘하에 세력이 확고해졌다. 제노는 이 두 세력을 일석이조와 이이제이로 제국의 위협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으니, 바로 동고트가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와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즉, 아드리아 해 동안의 골칫덩이인 고트족을 아드리아 서쪽의 골칫덩이와 싸우게 하는 것이었고,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488년 가을, 테오도리크의 동고트군은 출정하였고, 489년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하였다. 그해 8월의 이산초 강 전투, 베로나 전투는 모두 테오도리크의 승리였다. 오도아케르는 본거지인 라벤나에서 농성하였고, 테오도리크는 티키눔(파비아), 크레모나, 밀라노 등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테오도리크에게 항복하였던 오도아케르의 부장 투파가 다시 오도아케르의 편에 서자 용기를 얻은 그는 반격을 개시, 밀라노와 크레모나를 회복하고 동고트 족의 거점이 된 파비아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테오도리크가 요청한 서고트 족의 지원군이 제때에 도착하며 오도아케르는 포위를 풀었고, 곧이어 벌어진 490년 8월의 아두아 강 전투에서도 오도아케르가 패배하며 테오도리크는 포 강 이북을 제패하였고, 로마 원로원도 테오도리크를 지배자로 인정하였다.
동로마 황제로부터 원정을 승인받고 동족인 서고트 측에게 지원까지 받은 테오도리크는 결국 오도아케르를 죽이고[42]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493년) 그는 오도아케르가 했던대로 현지 로마인들과 협치하여 팍스 바르바리카를 이어나갔다. 그 예시로, 로마인이었지만 테오도리크에게 중용되어 행정을 맡았던 카시오도루스가 있다. 또한,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서고트 왕국의 군주 알라리크 2세가 프랑크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며 아키텐을 상실하자 테오도리크 대왕이 서고트 왕의 섭정이 되어 양대 고트족 왕국을 모두 통치하며 기세를 떨쳤다.(511 ~ 526년)
하지만 로마인과 고트족의 공존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 이후 동로마 제국이 재차 힘을 회복하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인 519년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주도로 484년에 시작된 아카키우스 분열이 종식되며 동서 교회가 서로 화해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525년, 로마 원로원 의원 알비누스가 콘스탄티노플 측과 밀서를 주고받았다가 파비아의 탑에 유폐되었고, 그를 변호하던 보에티우스도 그곳에 감금되되었다가 이듬해에 처형되었다.[43] 어린 시절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낸 경험이 있는 테오도리크는 오도아케르 때보다 더욱 동로마 제국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편,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과의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44] 그 일환으로 치러진 혼인 동맹에서, 500년에 반달 왕국의 군주 트라사문드와 결혼한 그의 누이 아말라프리다가 다음 왕인 힐데리크에 의해 감금되고 그녀의 고트족 호위병이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523년 / 524년경) 테오도리크는 북아프리카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526년에 병사하며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임을 자처하던 테오도리크가 친 정통파 정책으로 동로마 제국의 지지를 받던 힐데리크를 공격할 가능성은 적긴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테오도리크 항목 참고.
테오도리크가 526년에 죽고, 이어서 그의 어린 외손자인 아탈라리크(Athalaric)가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527년에 동로마 제국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였다. 동고트 왕국의 섭정직을 맡은 모후이자 테오도리크의 딸 아말라순타(Amalasuntha)는 아탈라리크에게 로마식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고트족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아탈라리크는 과음으로 534년에 요절하였고, 아말라순타의 사촌이자 테오도리크의 조카인 테오다하드(Theodahad)가 고트 귀족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귀족 세력에 위협을 느낀 아말라순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밀서를 주고받았는데, 이것이 들통나 535년에 유배되었고 이후 살해되었다. 테오다하드는 동로마 측에 이 사건을 해명하기 위하여 순화된 사건 경위를 서술한 서신을 작성하였고, 테오도리크 대왕의 시절부터 동고트 왕국의 충신이었던 리베리우스[45]와 베난티우스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블로나[46]에 도착하여 동로마 제국의 중신인 페트로스를 만나 전달하라는 서류는 내팽개치고 아말라순타의 비극적인 죽음을 사실대로 전하는 한편, 더 나아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동로마 측에 귀순해버렸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것을 빌미로 이탈리아 정벌과 동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다하드에 대한 처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2.2.4.2.2. 승승장구 (535년 - 5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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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년 여름,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상륙하였고, 동시에 문두스가 이끈 군대는 육로를 통해 동고트령 달마티아의 중심 도시인 살로나(솔린)로 진군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저항하던 팔레르모마저 12월에 점령하여 시칠리아를 제압하였고, 이탈리아 반도 상륙을 준비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테오다하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시칠리아를 양도할 것과 유스티니아누스의 종주권에 대한 인정을 맹세하였는데, 이후에 보낸 사절은 이탈리아 전부를 동로마에 양도할 것을 약속할 정도였다. 이는 동고트 왕국의 위기를 틈타서 테오도리크가 편입시켰던 프로방스와 부르군트 왕국 지역을 침공한 프랑크 왕국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 536년 3월에 이탈리아 전쟁의 후방이자 보급 기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카르타고에서 군단의 반란이 일어나 벨리사리우스는 그곳으로 떠나야 했고, 4월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야 시칠리아로 복귀하였다.
같은 시기인 536년 3월에 달마티아를 회복하고자 동고트 군대가 문두스의 군대를 공격하였는데, 문두스는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본인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47]하며 살로나를 제외한 달마티아는 다시 동고트 왕국령이 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테오다하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사절을 감금하였다. 더이상의 평화 협상은 없다고 여긴 유스티니아누스는 그해 6월에 신임 일리리쿰 사령관 콘스탄티아누스를 파견하였고 벨리사리우스에게는 이탈리아에 상륙할 것을 지시하였다. 한편, 동고트 장군 그리파스는 달마티아의 주도 살로나를 결국 점령했는데, 콘스탄티아누스의 군대가 다가오고 이탈리아에 벨리사리우스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자 후퇴하였다. 따라서 콘스탄티아누스는 손쉽게 달마티아를 회복하였고 살로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다.
같은 시기, 군대를 재정비한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를 떠나 6월에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였고 레기움을 점령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10월경에 나폴리에 도달하였고 20여 일의 포위 끝에 수도교를 통해 병사를 잠입시키는 계락을 써서 나폴리에 입성하였다. 그 후, 테오다하드의 나약함과 안일한 대처에 분노한 고트족 귀족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군에서 인기가 많았던 아말라순타의 사위인 비티게스를 옹립하였다.[48] 벨리사리우스와의 직접 대결이 시기상조라고 여긴 비티게스는 북부 이탈리아의 동고트군을 소집하기 위하여 로마시에 4천 명의 수비대만을 남기고 라벤나로 철수하였다. 나폴리 함락 이후의 약탈 소식을 듣은 로마시의 시민들은 교황 실베리오의 주도로 벨리사리우스에게 시민 대표단을 보내어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 로마시의 여론이 동로마 제국에 호의적인 것을 파악한 동고트 수비대 4천은 라벤나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그해 12월 9일, 수비대가 플리미니우스 문을 통해 로마시를 떠나는 것과 동시에 벨리사리우스는 아시나리아 문을 통하여 로마시에 무혈입성하였다.

2.2.4.2.3. 로마 공방전 (537년 - 538년)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5천 군대로 라벤나에 집결한 5만의 동고트 군대를 대적하기 어렵다고 여겨 진격을 멈추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대한 보강에 치중하였다. 해자가 조성되었고, 하드리아누스 영묘(산타젤로 성)가 요새화 되었으며, 테베레 강에는 쇠사슬이 설치되었다. 537년 3월, 동고트 군대가 남하하였고, 로마시 서북쪽의 살라리아누스 다리를 지키던 동로마 분견대는 요새화된 다리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친위대를 이끌고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큰 손실을 입고 성 안으로 퇴각하였다. 동고트 수뇌부는 5만의 대군으로도 로마시를 완전히 포위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 주요 문을 견제할 수 있는 7개의 진지를 세워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 진지 6개는 테베레 강 동쪽의 시내 주요부에 설치되었고 남은 1개는 서안의 바티칸 인근에 세워졌다. 즉, 비티게스는 통행로를 통제하여 로마시의 시민과 군대를 말려죽일 셈이었다.
포위로 인해 로마시 시민들이 동요하는 것을 파악한 비티게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동로마 군대의 무사 귀환을 약속할 테니 항복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로마시의 진정한 주인인 로마 제국이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도시를 너희 찬탈자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답장하며 거절하였다. 이로써 포위 18일째가 되는 날부터 고트족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고트족은 공성탑을 앞세워 북쪽의 성벽을 공격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들을 비웃으며 화살을 3번 당겼고, 세 명의 고트 병사들이 연이어 쓰러졌다. 이를 승리의 표식으로 여긴 동로마 수비대는 분발하여 사기를 높혔다. 공성탑을 끄는 소들이 노출된 것을 눈치챈 벨리사리우스는 궁수들에게 소들을 겨냥할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공성탑의 동력이 사라지자, 고트 군대는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해본 채로 공성탑을 버리고 퇴각하였다. 이에 비티게스는 서쪽의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공격하며 동시에 방비가 허술한 동남쪽을 집중 공격하였다. 수비대는 대리석 석상을 네모나게 부수어 던지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방어해 내었고 결국 그들을 격퇴해 내었다. 서쪽 성벽에서는 고트족이 성벽을 뚫고 들어왔는데, 절묘한 시기에 벨리사리우스가 친위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그들을 다시 성 밖으로 밀어내었다.
비록 승리하였지만 큰 손실을 입은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지원군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었다.[49] 한편, 포위의 장기화로 로마시 내부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벨리사리우스는 교황 실베리오가 고트족과 내통하였다는 정황을 이유로 그를 폐위시키고 비질리오를 교황으로 옹립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성문의 자물쇠와 열쇠는 15일마다 교체되었고, 수문장도 돌아가며 맡게 하였으며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한 순찰대도 조성되었다. 한편, 패배에 분노한 비티게스는 라벤나에 인질로 잡아놓았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처형을 명하였으며, 로마시와 외항인 오스티아 사이의 도로와 다리를 장악하여 로마시의 식량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50] 그때까지도 15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로마시의 식량 상태가 악화되자 벨리사리우스는 비전투원인 노인과 여자, 어린이, 노예들을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았던 남쪽 성문들을 통해 피신시켰다. 아피아 가도와 라티나 가도 등의 도로는 로마시 근교나 나폴리 일대로 피신하는 행렬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원정군의 상당수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1600여 명의 슬라브 / 훈족 기병대로 구성된 지원군이 몰래 포위된 지 20일째인 로마에 입성하였다.(537년 4월) 기병전력이 동로마 군에 합류하게 되면서,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고트족은 많은 희생자를 남겨야 했다. 일련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동로마 군대와 로마시 시민들은 성 밖으로의 진격을 주장하였다. 병력 차이를 인지하며 반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못이기는척 출정하였다. 벨리사리우스의 주력군은 북쪽 성문들을 통해 출정하였고, 발렌티누스의 소규모 기병대와 로마시 시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는 가장 큰 고트족 기지가 있는 서쪽으로 츨정하여 그들이 주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교란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서쪽의 네로 들판에서 발렌티누스 군대는 동고트 군대에 화살을 퍼부어 큰 피해를 입혔고, 고트족은 뒤의 언덕으로 철수하였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민병대가 발렌티누스와 장교들의 제지에도 동고트 기지를 약탈하였고, 그 사이에 동고트 군대는 군세를 재정비하여 반격하였다. 많은 민병대가 희생되었고, 발렌티누스 본인도 겨우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훈련도가 미비한 민병대의 투입을 반대한 이유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의 주력군은 고트족의 요새화된 기지를 공격하였는데, 의외로 강한 저항에 직면하였고, 동쪽의 고트족 기지에서 파견된 지원군이 동로마 군의 측면을 치자 벨리사리우스도 철수하였다.
비록 승리하였지만 고트족 진영도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고생하였으며, 따라서 휴전 협상에 나섰다. 비티게스는 동로마 측이 이미 장악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양도할 테니 동로마 군이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전체를 정복하는 것이 황제의 뜻이라며 거절하였다. 다만 의견의 대립에도 양측의 사정이 어려운 것은 피차일반이어서 3달간의 휴전이 합의되었다. 그동안 고트족 사절단은 협상을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었고, 11월에는 3천 명의 이사우리아인과 2천 명의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동로마 지원군이 대규모 식량과 함께 로마시에 입성하여 장기 농성에 대비하였다. 동고트 측은 사정이 악화되어 로마 - 오스티아 간 통행 통제권을 다시 동로마 측에 넘겨주어야했고, 537년 12월경에 이르면 오히려 동고트 측의 보급로가 로마 측에게 위협받을 지경이 되었다. 동고트 측은 이에 항의하였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요한네스에게 2천 명의 분견대를 주어 그들의 후방을 유린케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그리고 동고트 족이 밤을 틈타 수도교를 통해 시내로 잠입하려 한 것이 들통나자, 벨리사리우스는 조약 위반임을 들어 휴전이 끝났음을 선언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파괴된 수도교를 통해 적이 잠입할 것을 우려하여 콘크리트로 구멍을 막아버렸다.[51] 이후 고트족이 베드로 성문을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또한, 동고트 측이 동로마 군인 중 두 명을 매수하려 하였으나 그중 한 명이 벨리사리우스에게 털어놓으며 실패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요한네스는 538년 봄에 반도 중부의 아펜니노 산맥 일대를 평정한 후 아드리아 해의 항구 도시인 안코나와 아르미니움(리미니)를 점령하였다. 리미니는 라벤나로부터 행군으로 하루 거리였고, 따라서 비티게스는 회군을 결심하였다.(538년 3월) 벨리사리우스는 그들을 천천히 추격하였고, 동고트 군이 밀비오(밀비우스) 다리를 절반 가량 건너자[52] 후미를 공격하였다. 고트족은 곧바로 돌아서 맞섰으나, 동로마 군이 밀어붙이자 다리의 한정된 공간에서 뒤엉켜 강으로 떨어져 죽는 등 크나큰 손실을 입었다.[53]

2.2.4.2.4. 두 사령관 간의 대립

538년 3월, 포위가 끝날 무렵에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문딜라스의 1천 군대는 해상으로 제노바에 상륙하였고, 리구리아 일대를 평정하며 메디올라눔(밀라노)에 입성하였다. 그에 위협을 느낀 동고트 왕국 측은 북쪽의 프랑크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탈리아의 부를 탐낸 부르군디[54]은 빠르게 남하하였고, 동고트 군대와 합세하여 밀라노를 포위하였다.(538년 4월) 한편,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동해안의 아르미니움를 점령한 요한네스의 2천 기병대는 벨리사리우스의 회군 명령에 불복하였고 기세를 몰아 안코나까지 점령, 라벤나까지 넘보려하였다. 로마시에서 철수한 비티게스는 538년 3월 ~ 4월 동안 아르미니움(리미니)를 포위 공격하였다. 또 다른 동고트 군대는 안코나로 진군, 동로마 군을 야전에서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하였으나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537년 3월 ~ 538년 3월까지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시를 지켜내는 동안,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지원군은 지중해를 건넜다. 그 대열의 마지막인 나르세스의 지휘를 받는 2천의 동로마 군대가 안코나 인근 항구인 피케움에 538년 4월에 상륙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만나서 회의를 하였는데, 아르미니움 구원에 대한 의견이 엇걸렸다. 자신의 의견에 불복한 요한네스를 구원하는 것에 벨리사리우스가 내켜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요한네스의 서신이 도착하자 그들은 의견을 모아 출정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군대를 3개로 나누어 1로군은 해상으로, 2로군은 부장 마르티누스가 포위망 남쪽으로, 벨리사리우스의 본대는 북서쪽에서 접근하였다. 역포위 당할 것을 깨달은 비티게스는 재빨리 포위를 풀고 라벤나로 철수하였다.
이 승리로 제장들은 기존에 환관이라 무시하던 나르세스를 다시 보게 되었고, 특히 요한네스는 완전히 그에게 복종하였다. 여기서부터 두 명장 간의 대립이 시작되는데, 안코나와 라벤나를 공격하는 등 명령에 불복하였을 뿐더러 후에도 말썽만 부리게 되는 요한네스를 구출한 이득이 없었던 것이였다. 또한 나르세스의 의견대로 벨리사리우스가 요한네스를 구출하였지만, 정작 이를 실행한 벨리사리우스는 칭송을 못받고, 비교적 한 일이 적은 나르세스가 공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이후의 진로에서도 나르세스와 벨리사리우스는 의견이 엇갈렸는데, 안코나 인근의 강력한 동고트 거점인 아욱시뭄(오시모)에 대한 공격을 주장한 벨리사리우스와 달리 나르세스는 더 쉬운 상대인 아에밀리아를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군의 분열을 원치 안았던 벨리사리우스는 중재안으로 우르비눔 공격을 제안하였고, 나르세스도 함께 진군하였으나 그래 여름 동안 따로 진영을 차리며 거리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도시의 보급 사정이 좋은 것을 파악한 나르세스는 아르미니움으로 회군하였고, 요한네스가 이끄는 분견대를 파악하여 결국은 아에밀리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에게 천운이 따랐는지 우르비눔의 유일한 우물이 말라버렸고, 538년 말에 동로마 측에 항복하였다.
한편, 538년 4월부터 고트 - 부르군디 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메디올라눔(밀라노)은 고립이 길어지며 함락이 임박하게 되었다. 문딜라스와 수백 명의 군대, 그리고 시민들은 합심하여 공성에 버텨내었지만, 로마시와 달리 수운으로 식량을 보급받지 못하여[55] 시민들이 아사 직전까지 몰렸다. 이에 동고트 장군 우라이아스는 항복하면 그와 병사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문딜라스는 시민들의 안위를 보장하지 않은 점을 들어 거절하였다. 539년 초에 벨리사리우스는 구원병을 파견하였지만 포위군의 규모에 겁을 먹은 장군 마르티누스와 울리아리스는 당시 아에밀리아에 주둔하던 요한네스와 유스티누스 등 나르세스 진영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르세스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출정하지 않겠다고 하였고, 때마침 요한네스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합동 작전은 완전히 흐지부지 되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포위된 도시의 식량은 바닥이 났고, 병사들의 강요에 의하여 문딜리스는 결국 동고트 - 프랑크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약속대로 동로마 군은 포로가 되었지만, 밀라노는 게르만 인들에게 말그대로 폐허가 되었고[56] 시민들 대부분이 학살당하고 말았다.(539년 3월) 이후로 메디올라눔은 한동안 사료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게 된다.

2.2.4.2.5. 라벤나 입성 (540년)

이러한 참변 소식에 벨리사리우스는 나르세스를 비난하였고[57] 밀라노가 말그대로 폐허가 되었다는 것을 보고받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역시 분노하여 나르세스를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이탈리아 군대의 지휘 계통이 다시 단일화 된 것이다. 이에 두려움을 느깐 동고트의 왕 비티게스는 사산 제국의 샤한샤 호스로 1세에게 사절을 보내어 벨리사리우스가 서방에 묶여있는 틈을 타서 제국의 동방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58] 하지만 벨리사리우스의 반격은 사산 제국의 침공 준비보다 빨랐다.
동방의 사정을 잘 알고있던 벨리사리우스는 속전속결로 라벤나를 함락하여 서방 전선에 몰려있는 군대를 적절히 재배치하려 하였다. 다시 벨리사리우스에게 충성하게 된 부장 요한네스와 마르티누스가 포 강 이북에 주둔하고 있는 울라리스가 이끄는 고트족의 도하를 막는 동안, 벨리사리우스는 반도 중북부에 남아있는 동고트 거점들을 일소하여 북진 시에 후방을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부장 유스티누스가 파에술라이(피에솔레)를, 벨리사리우스 본인은 보다 더 강력한 거점인 아욱시뭄(오시모)을 포위 공격하였다.
포위가 한창이던 539년 여름, 강력한 변수가 생겼으니, 프랑크 왕국의 동부인 아우스트리아의 왕인 테우데베르트 1세[59]가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포 강에 도달, 강의 양안에 진영을 세운 것이다. 538년의 경우처럼 자신들을 지원하러 왔다고 생각한 동고트 측은 오히려 공격을 당해 패퇴하였고, 동로마 군대도 싸움을 걸었다가 패하고 토스카나로 후퇴하였다. 기세 등등해진 테우데베르트 1세는 볼로냐에서 로마 황제처럼 자신의 얼굴을 새긴 금화를 주조, 발행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벨리사리우스에게 닥친 위기였고,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었으나 프랑크 진영에 전염병이 덮쳐 그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고 후퇴하였다. 시름을 던 벨리사리우스는 두 도시에 대한 포위에 치중하였고,[60] 539년 가을에 식량 부족으로 둘 다 항복을 택하며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은 평정되었다.
배후를 안정시킨 벨리사리우스는 달마티아에서 파견된 지원군과 아드리아 해의 해군과 합세하여 비티게스가 피신해 있는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포위하였다. 늪지대로 보호받는 천혜의 요새였지만 해상권을 상실한 라벤나는 보급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벨리사리우스는 아욱시움에서 선보인 물에 독풀기와 더불어 특공대를 잠입시켜 식량 창고에 불을 붙이는 등 철저히 라벤나를 괴롭혔다. 한편, 프랑크 사절이 비티게스를 접견하여 동맹을 제안하였으나, 저번 침략을 기억하던 비티게스는 이를 불신, 거부하였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사절이 당도하였는데, 바로 이탈리아 분할에 관한 제안이었다. 임박한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군대를 동방에 집중시키고 싶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포 강을 경계로 북쪽은 그대로 동고트 족의 지배를 인정하며 전쟁을 일단락 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포위되어 물자가 떨어져가던 비티게스와 고트족 측은 대환영하였고 오랜 전쟁에 지친 동로마 측의 장병들과 장군들도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반대 의사를 표하였다. 라벤나 포위를 위한 지난 몇달 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벨리사리우스의 강경한 태도에 절망한 동고트 측은,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바로 적장인 벨리사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추대하겠다는 것이다.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역을 꾀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라벤나 접수를 위하여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540년 5월, 동로마 군대는 고트족의 수도인 라벤나에 입성하였다. 그 후 벨리사리우스는 태세를 전환하여 비티게스와 동고트 수뇌부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이송하였다. 다만 민심 안정을 위해 고트족이건 현지 로마인이건 거주민에 대한 약탈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2.2.4.3. 사산 왕조의 배신과 역병

540년 ~ 542년간의 기간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에 있어 가장 바쁘고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사산 제국이 조약을 깨며 시리아를 침공, 안티오키아를 유린하였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제국 전역에 큰 타격을 입히고 황제 본인까지 사경을 헤메야 했으며, 벨리사리우스가 시리아를 방어하러 이탈리아를 떠나있는 동안 동고트 왕국은 토틸라의 지휘로 부흥에 성공하였다. 게다가 속국이던 라지카 왕국이 이란 진영에 가담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지금까지 쌓아온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하였다.
사산 제국의 샤한샤 호스로 1세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된 계기는 확실치 않지만 크게 두 계기가 있었다. 우선 539년에 동고트 국왕 비티게스가 이란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전 세계를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두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하였고, 서방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벨리사리우스와 대군을 동방으로 파견, 이란을 정복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호스로 1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동로마 제국의 아랍 속국인 가산 왕국의 군주 자발라흐 5세가 이란의 아랍 속국 라흠 왕국을 침공, 약탈하였는데, 그 행위를 유스티니아누스가 묵인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군제 개혁을 마친 호스로 1세가 라지카와 아르메니아 등의 지역을 노리고 있던 정황도 보인다. 그리하여 8년 만에 두 제국 간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540년, 호스로 1세는 벨리사리우스의 서방 원정을 틈타 협정을 깨며 시리아를 침공, 요새인 수라를 함락하였다. 이란 군대는 시리아 중부 일대를 대대적으로 약탈한 후 전쟁 준비가 미흡하였던 안티오키아를 함락, 시민 30만을 포로로 잡아갔다.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측의 반격이 있기 전에 약탈품과 함께 회군하였고, 그 여정에서도 시리아의 도시들로부터 몸값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호스로 1세에게 호재가 찾아왔으니, 바로 선조들의 숙원이자 콘스탄티노플 공략의 실마리인 흑해 진출의 균형추를 쥐고 있는 라지카 왕국의 군주가 보낸 반로마 항쟁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밀서가 크테시폰에 도달한 것이다. 541년 말에 이란 군대는 라지카를 점령하였고 이는 동로마 측에 큰 손실이 되었다. 다만 이란 역시 라지카를 직접 지배하며 종교적 탄압을 가하였고, 548년에 동로마의 도움을 받은 반페르시아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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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542년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나일 삼각주 동쪽의 항구인 펠루시움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수도의 식량 공급원인 이집트의 곡물이 선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운송되면서 보균자인 쥐가 퍼져나갔다. 따라서 역병은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지중해의 항구들을 중심으로 이란까지 퍼져 추정으로 '''2천만 이상'''이 사망하였다. 당시 세계 인구의 10%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프로코피우스의 저술에 의하면 역병이 극에 달할 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매일 수천 명씩 죽어나갔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 등 상류층도 많이 죽어서, 가문이 통째로 날아간 귀족 가문도 제법 있었다. 이 혼란상을 틈타서, 꾀가 많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남은 원로원 의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역병은 제국의 산업 기반인 농민과 상인의 수와 납세자의 수를 현저히 감소시켰고, 따라서 제국은 재정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특별세를 부과하며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면서 군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노린 것이 이란, 그리고 동고트 왕국이었다.
한편, 시리아 일대가 사산 제국에게 점령당하자 541년 말에 동부 전선에 복귀한 벨리사리우스는 나바데스가 이끈 이란 군대를 격파하고 니시비스를 포위하였으나 수비대의 저항과 요새화된 높은 성벽에 막혀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시사우라논이라는 작은 요새를 점령하는 데에 만족하였고, 1200명의 별동대를 파견하여 메소포타미아 중북부의 아시리아 일대를 약탈하게 하였다. 그들은 많은 약탈품과 함께 복귀하였다.(542년) 한편, 벨리사리우스는 협상을 위해 동로마 진영을 방문한 이란인 아바다네스 앞에 다민족 병사들(트라키아, 일리리아, 고트, 반달, 아랍, 헤룰리, 훈족 등)이 무기를 든 채로 여유로운 모습으로 있게 하여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바나데스는 호스로 1세에게 돌어가서 최대한 빨리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자신이 만난 장군은 남자답고,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우며, 그가 거느린 병사들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ㅡ 프로코피우스의 묘사

사신의 보고에 호스로 1세는 시리아의 이란 군대에 회군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벨리사리우스는 오리엔트 일대에서 구원자로 칭송받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소리높여 벨리사리우스를 찬양했다. 그는 일찍이 겔리메르나 비티게스를 사로잡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왔을 때보다도 이번 일에 더 큰 자부심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모함을 받아 542년 말에 관직을 박탈당하였고 따라서 사산 제국군은 평화로이 퇴각할 수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544년 봄이 되어서야 총사령관(Comes Sacri Stabuli)이 되어 복귀하고 이탈리아로 파견된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마르티누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반이란 봉기를 도왔으나 페르시아 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한동안 아르메니아 일대를 재정비하며 시간을 소비한 호스로 1세는 544년에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하자 대장군 주라크[61]에게 군대를 주어 안티오키아의 쇠퇴 이후 시리아 일대의 중심도시가 된 에데사를 포위하였다. 에데사의 수비대는 수성에 성공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5 센테나리아의 금을 바치며 포위에서 풀렸다. 545년에 동로마 측이 연공을 바친다는 조건하에 5년 기한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62]

2.2.4.4. 동고트 왕국의 반격: 토틸라

라벤나 함락과 비티게스의 체포 이후에도 티키움(파도바)과 베로나는 동고트 족의 수중에 남아있었고, 장군 우라이아스의 제안으로 일디바드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난 이후 동로마 주둔군의 지휘 계통은 분산되어 있었는데, 이는 동고트 족에게 소생의 기회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창궐로 인해 동로마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군인들의 급료가 밀리자, 이탈리아의 주둔군은 토착민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일디바드의 동고트 군대는 손쉽게 리구리아와 베네치아 일대를 회복하였고, 베네치아 인근의 트레비소에서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며 순식간에 포 강 이북의 대부분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일디바드는 충성스러운 장군 울라리스를 그의 부인이 왕비와 다투었다는 사소한 이유로 처형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일디바드의 지지도는 급락하였고, 그 역시 541년 5월에 암살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국에 복속되었던 오도아케르의 잔존 세력인 루기아 족이 내세운 에라리크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고트족 귀족들을 설득하여 동로마 제국과 협상을 주장하였는데, 실상은 그에 항복하려는 것이었다. 541년 가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의 밀서가 폭로되자, 고트 귀족들은 전 왕인 일디바드의 조카 토틸라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에라리크는 곧 살해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토틸라 역시 동로마 측과 협상을 지지하던 '주화론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즉위 후에는 호전적인 모습으로 돌변하였고, 대반격의 선봉장이 되었다.
에라리크에 호의적이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토틸라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였고 541년 말, 콘스탄티누스와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군대를 북상시켜 베로나를 포위하게 하였다. 동로마 군대의 특공대 백 명은 성안 내통자 마르키아누스의 도움으로 밤중에 성문 중 하나를 점령하였으나 성 밖의 두 장군은 약탈품의 분배를 놓고 밤새 실랑이를 벌이며 입성을 지연하였다. 다툼이 지속되는 동안 고트족 수비대는 성문을 회복한 후 반격하였고, 동로마 군은 패배하여 무질서하게 후퇴하였다. 성문에 있던 특공대는 지면으로 뛰어내렸는데, 그러다 추락사 하기도 하였다.
토틸라는 동로마 군대의 기강을 보고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과감히 추격에 나섰다. 동고트 군대는 포 강을 넘어 라벤나 인근의 파벤티아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수적으로 불리하였음에도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였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양측이 대치하던 상황에서 동고트 진영의 거인 용사 발라라스가 일대일의 일기토를 신청하였는데, 동로마 장병들은 겁을 먹고 떨고만 있었다. 그때, 베로나에서의 백인 특공대의 리더였던 장교 아르메니아인 '아르타바제스'가 나섰는데, 혈투 끝에 상대를 죽였지만 본인도 치명상을 입었고 3일 후에 사망하였다.
승리 이후 토틸라는 토스카나로 진격, 피렌체를 포위하였고 공성전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장군 유스티누스는 다른 장군들(요한네스, 베사스, 키프리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세 장군은 군대를 합쳐 피렌체로 진군하였는데, 수적 열세를 본 토탈라는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로마 군대는 요한네스 군을 선두로 하여 추격하였는데, 토틸라는 언덕 위에 이르자마자 말머리를 돌려 추격해온 동로마 군을 맞받아쳤다. 요한네스의 군대는 비교적 침착히 버텨내었으나 진중에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기를 잃고 흩어져 버렸다. 선두의 군대가 패배한 것을 본 베사스와 키프리아누스의 군대 역시 뿔뿔이 흩어져 버리며 토틸라는 동로마 주력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무켈리움 전투, 542년)
패배 이후 세 장군은 분산하여 요한네스는 로마시, 베사스는 스폴레토, 키프리아누스는 페루자에 틀어박혀 농성하게 되었다. 유스티누스 역시 추격에 참가하였다가 패배 이후 다시 피렌체로 복귀하여 545년까지 주둔하였다. 한편, 토틸라는 단 한번의 패배로도 괴멸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동로마 군대가 모여있는 중부 지방을 지나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남부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로마시를 유유히 지나친 동고트 군대는 손쉽게 베네벤툼을 점령하였고 루카니아,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등지를 복속시켰다. 남부 대부분을 평정한 토틸라는 중남부의 동로마 거점인 나폴리를 포위하였다. 포위된 나폴리를 구원하라는 특명을 받은 시칠리아의 신임 군사령관 데메트리오스는 대함대를 이끌고 출항하였으나 동고트 함대에게 대패하여 후퇴하였다. 데메트리오스는 그에 굴하지 않고 다시 구원 함대를 파견하였으나 폭풍을 만나 배가 좌초하였고 동고트 군대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 결국 후퇴하였다. 포위가 지속되자 성 내부의 식량 사정과 민심이 바닥을 쳤다. 이를 눈치챈 토틸라는 수비대장 칼론에게 항복한다면 수비대 전원의 안위 보장을 약속한다는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543년 봄, 칼론이 이를 받아들이며 1천의 동로마 수비대는 항복하였고, 성벽은 허물어졌다. 적은 군대를 지녔던 토틸라는 자신이 점령한 도시가 다시 반기를 들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시벽을 허물었다. 다만 로마시의 경우 성벽을 1/3정도 군데군데 끊어 성벽의 기능을 못하게 하는 데에 그쳤다.
토틸라는 점령지와 포로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고, 몇몇의 포로들은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기도 할 정도였다. 나폴리 입성 이후에 그는 굶주린 시민들을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제공하였고, 동로마 포로들 중 부상자를 치료해 주었으며, 포로들의 향후 행선지도 그들 자유에 맡기며 간섭하지 않았다. 이후 역사가들은 토틸라의 상당한 '인간성'에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543년 3월 21일, 몬테 카시노성 베네딕투스가 토틸라를 만나 이탈리아의 평화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2.2.4.4.1. 벨리사리우스의 귀환

544년부터 트라키아와 일리리아에서 신병 4천여 명을 모집한 벨리사리우스는 545년 초엽에 사산 제국과의 휴전이 성립되자 급히 2백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라벤나에 상륙하며 4년만에 돌아온 이탈리아는 중북부 일대와 해안 지역만이 동로마 령으로 남은, 동고트 왕국이 재건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폴리 함락 이후 휴식을 취한 토틸라는 544년에 남진하여, 아풀리아에 잔존한 동로마 측 도시인 히드룬툼 (오트란토) 등에 입성한 상태다. 남부 지방을 정리한 토틸라는 그해 말엽에 로마시 포위를 염두에 두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진하였다. 한편, 벨리사리우스는 로마시 구원에 앞서 배후의 곡창 지대인 남부 지방에 대한 탈환에 나섰다. 그는 오트란토에 입성하며 칼라브리아 일대를 탈환하고 북진하여 중부의 아욱시뭄(오시모)을 회복하였으며, 페사로[63]를 공격해 온 동고트 군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급조된 신병 집단을 이끌고 벨리사리우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현재의 상태로는 로마시를 구원하기에 역부족이라 판단한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지원을 호소하는 표문을 올렸다.

지고하시고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을 받으신 폐하, 저희는 전쟁에 필요한 그 무엇도, 병력도, 무기도, 금전도 없이 이탈리아에 도착했습니다. 전쟁을 수행할 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입니다. 저는 트라키아와 일리리아를 지나며 4천의 병사를 모았지만 그들은 무장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훈련도 전혀 받지 않아 무기 사용법조차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아군 병사들도 군량의 부족과 급료 지연으로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지난 4년간의 패배로 자신감을 잃고 공포에 떨고 있어, 고트족이란 말만 들어도 무기와 말을 내버리고 달아나는 지경입니다.

이탈리아 주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해도, 과세가 가능한 지역은 이제 야만족 치하에 들어가버려 그마저도 불가해진 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병사들에게 급료도 지급하지 못하면, 장군들은 그들을 질책하고 명령에 복종시킬 권리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폐하의 군대 상당수가 이미 고트족 진영으로 투항하였습니다. 이 벨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로 보낸 것에 만족하신다면 폐하의 소원은 이뤄진 것입니다. 신은 이미 이탈리아에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죽는 것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 벨리사리우스로 하여금 이탈리아를 정복하려고 하신다면 이 이상의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제 부켈라리이들과 고참병들을 보내주십시오. 훈족 병사들을 비롯한 야만족 병사들을 많이 보내주십시오.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보내주십시오.'''

ㅡ 벨리사리우스가 유스티니아누스에게[64]

하지만 편지를 들고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된 장군 요한네스가 결혼을 빌미로 무려 두달 걸릴 여정을 7개월 간 소요하고 만다. 그동안 벨리사리우스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디라키움에서 지원군을 기다렸는데, 536년으로 해가 바뀐 뒤에야 요한네스와 함께 도착한 지원병력은 기다린 시간에 비해 소수였다. 어찌 되었든 벨리사리우스는 디라키움에서 해상으로, 테베레 강 하구를 통해 로마를 구원하기로 하였다.

2.2.4.4.2. 로마 포위전 (546년)

벨리사리우스가 디라키움에 묶여있는 동안, 토틸라는 북진하여 로마시 인근의 티볼리에 사령부를 차리고 포위를 시작하였다.(545년 겨울) 그리고 토틸라는 로마시 측에 사절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시민들은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아리우스파 사제들을 추방하였다. 전투 없이 도시에 입성하고 싶었던 토틸라는 식량 공급을 끊은 채로 3천의 수비대와 시민들의 항전 의지를 말그대로 말려 죽일 의도였다. 당시 수비대 사령관 베사스[65]군용 식량을 시민들에게 터무니없는 고가로 팔아넘기는 데에만 치중한 탐욕스러운 사령관이었고 따라서 모두들 벨리사리우스의 구원 부대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해가 546년으로 바뀌었고, 봄이 되자 벨리사리우스는 디라키움에서 함대를 이끌고 출항하였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의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토틸라는 테베레 강 하류에 쇠사슬 등 각종 장애물과 강을 가로지르는 목재 다리를 세웠으며, 다리의 양끝에는 정예병 2백과 투석기 등이 배치된 탑을 세웠다. 546년 5월, 벨리사리우스는 테베레 강 하구에 도착하여 포르투스에 보급 기지를 꾸렸고 베사스와 연락을 취하여 성 안밖에서 동고트 군대를 공격하자는 작전을 세웠다. 로마시의 상황이 심각한 것을 파악한 그는 부장 이사키오스에게 보급기지의 군량과 자신의 아내 안토니나를 부탁하고 자신은 2백여 척의 선박에 공성병기와 유황, 역청 등 을 지니고 소를 동원하여 배를 끌게하는 등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강의 양안에 배치한 기병대와 함께 진군하며 토틸라가 설치해 놓은 요새들을 하나 하나씩 격파, 마지막 관문인 탑이 설치된 목재 교각에 도달하였는데 충격적인 소식 두 개를 접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치고 나오기로 약속한 베사스가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분노하였으나 눈앞의 적군에 집중, 두 탑 중 하나를 무너뜨리고 반대편의 탑을 공략하려하였다. 그 찰나, 두 번째 소식이 그를 강타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패배하였다 !" 라는 외침과 함께, 보급 기지를 지키던 이사키오스가 선불리 움직였다가 동고트 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도달한 것이다. 보급 없이 적진에서 고립될 것과 아내 안토니나의 안전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힌 벨리사리우스는 후퇴를 명하였다. 하지만 포르투스로 돌아와보니 보급 기지는 안전하였고, 안토니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상은 이사키오스와 소수의 병사들만 사로잡힌 것이었다. 한편, 기세를 얻은 동고트 측에 비하여 동로마 측은 사기를 잃었고 벨리사리우스는 병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로마시를 버리고 철수하였다.
546년 여름부터는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포위가 더욱 강화되어 로마시의 식량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에 포위 직전에 시라쿠사로 피신한 교황 비질리오가 구원을 위해 곡물을 가득 실은 선박을 보내었지만 테베레 강 하류에서 고트족 함대에 나포되어 되려 도시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후 546년이 지나도록 포위가 지속되며 포위가 지속되어 로마 시민들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의 저술에 의하면, 군대로부터 식량을 사먹을 정도로 부유하지 못했던 대다수는 건초, 쐐기풀, 개와 쥐까지 먹으며 목숨을 이어갔는데 그중 많은 이들이 아사하였다고 한다.

토틸라에게 완벽히 포위된 로마 시내에서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식량 문제가 가장 심각하였고,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사람들은 평소에 먹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까지 찾아다니게 되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장군들은 병사들 몫으로 저장되어 있던 밀을 시민들에게 비싸게 파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1 모디우스[66]

의 밀을 사려면 금화 일곱 닢이 필요할 만큼 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 대다수는 신전이나 목욕장, 공회당이 허물어진 자리에 나던 쐐기풀을 캐먹을 수밖에 없었다. 로마 시내에 유일하게 풍족했던 식물이기 때문이 었다. 다만 잔가시가 있어 그대로 먹으면 입 안과 목구멍에 상처가 난다. 따라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데쳐야 했다. 하지만 쐐기풀만 먹으면 기력이 떨어진다. '''사람들은 포위가 길어질수록 비쩍 야위여갔고, 안색도 납빛으로 변하여 망령들이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영혼이 남아 있다고 보기 힘든 사람들은 쐐기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걷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죽었다. 시내에는 매장지도 없었기에 주검은 길가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것을 보다 못한 베사스는 시민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었는데,[67] 예상과는 달리 토틸라는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상당수가 기력이 쇠해 쓰러져 죽거나 고트족 병사들에 살해되었다. 당시 로마시의 인구는 오랜 전란에도 불구하고 10만에 육박하였다고 하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546년의 이 포위로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두 장수는 마침내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 각자 원하는 곳으로 피난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로마에 잔류하기를 선택한 이들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떠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열린 성문 밖으로 나온 이들은 길을 걷는 동안 차례로 쓰러졌다. 오랜 굶주림으로 체력이 바닥난 그들에게 걷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길가에서, 혹은 근처를 흐르는 시냇가에서 차례로 죽음을 맞았다. 가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던 고트족 병사들을 만났다. 고트족 병정들은 싸울 필요조차 없었다. 저항할 기력도 없는 피난민들은 그들의 창에 찔려 죽었다.

'''이것이 과거에는 전 세계 사람들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빛나는 로마 시민의 현재 모습이었다.'''

로마시는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다가 546년 12월에 한 이사우리아인 병사의 배신으로 동고트 병사들이 밤중에 성벽 일부를 허물고 잠입하면서 성문이 열려 함락되었다. 토틸라는 12월 17일에 아시나리아 문을 통해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 동시에 대부분의 수비대는 도주하였고, 5백 명만이 남았다고 한다. 도시는 410년과 455년에 이어 대대적으로 약탈이 자행되었고,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시민들과 병사들은 교회에 숨었으나 26명의 병사들과 60명의 시민들이 고트족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본래 토틸라는 '''로마를 목초지'''로 바꾸려 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시 기능을 못하게 하여 동로마 측과 계속되던 로마시 쟁탈전을 끝내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벨리사리우스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철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토틸라가 시내에 잔류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을 인질로 잡고,[68]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1/3가량 파괴하여 성곽 구실을 못하게 한 것은 막지 못하였다. 아리우스파였지만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토틸라는 입성 직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참배하였다.

2.2.4.4.3. 토틸라의 승리 (~ 550년)

새해를 로마시에서 지낸 토틸라는 아풀리아[69]의 동로마 군대마저 일소하기 위해 그 길목의 나폴리로 향하였는데, 벨리사리우스는 틈을 타 로마시로 진격하였고 547년 2월, 1천 명의 기병과 함께 로마를 습격하여 탈환하였다. 토틸라는 25일 만에 회군하여 재포위를 시도하게 되는데, 벨리사리우스는 3주라는 짧은 시간 내에 성벽의 파괴된 부분을 대충 고쳐 놓았다.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성벽의 잔해를 '순서에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쌓아 올렸다고 전해지며, 그 외에 벨리사리우스는 성문마다 장창병을 배치하였고, 성 밖에는 곳곳에 마름쇠를 뿌려 대비하였다.
547년 3월, 토틸라는 재차 공격하였으나 짧은 기간내에 상당한 준비를 해놓은 수비군에게 격퇴되었다. 비록 동로마군이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뿌려놓은 마름쇠 때문에 바로 추격을 못하였고 토틸라는 동로마 측의 주요 거점이었던 페루자를 함락하였다. 이후, 폐허가 된 로마시를 보고 받은 충격을 잊을 새도 없이 유스티니아누스의 칙령을 받은 벨리사리우스는 루카니아[70]로 이동, 크로토나에 주둔하였는데 토틸라에게 급습을 당했다. 근처의 구릉을 지키던 병사들은 고트족을 보고 도주해 버렸고, 벨리사리우스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까지 퇴각하였다.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루카니아 회복에 나서 로시노를 두차례 공격하였지만, 첫 번째 시도는 폭풍으로, 두 번째 시도는 토틸라가 파견한 지원군에 의해 실패하였다. 지원이 절실하다고 느낀 벨리사리우스는 황후 테오도라와 친분이 있는 자신의 아내 안토니나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어 지원을 호소하게 하였는데, 그녀는 별 소득없이 돌아왔다. 그 이유는 즉슨, 테오도라가 암으로 사망하였던 것이다.(548년) 실의에 빠진 황제는 그 누구도 접견하기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안토니나는 남편 벨리사리우스의 수도 귀환을 요구하는 탄원서만 남긴 채 시칠리아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원정이 설사 실패로 귀결된다 하여도 남편 잘못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시칠리아의 벨리사리우스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다가 549년 가을에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당하여 은퇴를 선고받았다.[71]
그렇게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나자, 이를 기회라 여긴 토틸라는 세 번째로 로마시를 포위 공격하였다. 동고트 군대의 격한 공격에도 도시의 3천 수비대가 버텨내자, 토틸라는 병사들을 아끼기 위해 또 다시 로마를 말려 죽이려 하였다. 사령관 디오게네스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하여 미리 라티움 지역의 밀을 수확, 식량을 비축해 놓았다. 하지만, 포위가 길어지며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일부 병사들이 고트 진영과 내통하였고 푸짐한 보상에 눈이 멀어 밤중에 성문을 열어버렸다. 토틸라의 군대는 들이닥쳐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던 동로마군을 살육하였고, 남아있던 대부분의 귀족층 시민들과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로마시는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남자들은 학살되었는데, 엄명으로 아녀자에 대한 살육은 금지되었다. 토틸라는 기병대를 보내어 도로변에 매복을 시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가도를 따라 도주하던 병사, 시민들의 대부분이 생포되었고 장군 디오게네스와 소수의 병사들만이 달아나는 데에 성공하였다.(550년 1월 16일)
토틸라는 원래 로마시를 파괴하여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 하였으나, 이후 마음을 바꾸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야욕으로부터 보호하기로 하였다. 잡혀온 사람들과 동고트 인들이 로마에 재정착 되었고, 일부 건물들이 재건되었다. 이후에는 다시 전차 경기가 열리는 등, 로마시는 토틸라의 치하에서 잠시나마 평화를 찾았다.
토틸라가 로마를 재접수하자, 이탈리아 원정이 실패로 귀결될까 위협을 느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에 이어 이탈리아 사령관으로 낙점한 자신의 조카 게르마누스에게 세르디카에서 장병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키게 하였다.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게르마누스의 명성에 로마인들 뿐만 아니라 야만족들도 징병장에 몰려들었고, 같은 해에 테살로니카를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던 슬라브 인들도 그의 임관 소식을 듣고 달마티아 방면으로 진로를 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게르마누스는 동고트 족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호의와 명분을 얻기 위해 테오도리크의 손녀이자 비티게스[72]의 과부인 마타순타와 결혼하였다.[73] 이에 일부 고트 귀족들과 고트 진영으로 넘어간 현지 로마인들이 그에게 사절을 보내어 그가 이탈리아에 온다면 동로마 진영에 가담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550년 9월, 출정 이틀 전에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고, 그대로 급사하여 원정은 취소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오랜 고심 끝에 이탈리아 출신의 문관 리베리우스[74]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동고트 측에게 포위된 시라쿠사로 파견하였는데, 전쟁 경험이 전무한 고령의 문관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의 군대는 시라쿠사 구원에 실패하였고, 리베리우스는 팔레르모로 간 후 수도로 복귀하였다.(551년)
550년 말, 리베리우스의 실패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아르메니아 인 아르타바네스 지휘하의 군대를 파견하려 하였으나 이오니아 해의 폭풍으로 지연되었다. 551년, 시칠리아에 도달한 그는 리베리우스의 후임으로서 지휘권을 인수하였고 토틸라가 시라쿠사에 남긴 동고트 수비대를 항복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고,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고트족에 포위된 아풀리아의 도시 크로토네의 시민들의 구원 요청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시칠리아에만 머물던 아르타바네스는 553년에 나르세스가 호출한 후에야 이탈리아 본토로 움직였다.

2.2.4.5. 이탈리아 완전 정복: 나르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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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년, 이탈리아의 상황은 제국의 입장에서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전의 동고트 왕국과는 달리 동원 가능한 병사 수가 동로마 측의 투항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적었으며, 그마저도 토틸라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였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은 아드리아해 연안의 안코나와 크로토네 등 위태로운 한줌의 도시들이었고, 크로토네는 포위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동로마 측의 보급 기지이자 로마 제국의 건설 이후 평온을 유지하던 시칠리아 마저 토틸라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토틸라는 남은 해안 도시들의 정복과 동로마 군대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4백여 척의 함대를 건조하였고, 그들을 파견하여 사르데냐코르시카를 점령하고 시칠리아를 약탈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동로마 측이 반격을 시도하자, 동고트 함대가 그리스에까지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기까지 하였다. 뒤에 제시된 에피로스 습격과 같은 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지지부진한 고트 전쟁을 마무리 짖기 위하여 일리리아에서 이민족 (불가르, 헤룰리, 랑고바르드족)까지 끌어모아 2만 5천의 대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달마티아의 살로나에 조금씩 집결하였고, 지휘관으로는 나이가 지긋하여 반란을 꾀할 가능성이 전무한 환관 나르세스를 선정하였다.(551년 여름)
이 소식을 접한 토틸라는 동로마 측의 병력 집결이 완료되기 전에 상륙거점으로 예상되던 안코나를 함락하여 교두보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551년 늦여름, 토틸라는 시칠리아를 떠나 북상하였고, 그의 군대는 안코나에 도달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고트 전함 47척이 해상 봉쇄에 가담하였다. 남은 3백여 척의 고트족 함대는 동로마 측의 의지를 꺾고 경고를 하고자 에피로스 지방과 이오니아 제도[75] 일대를 습격하도록 파견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결심만 더욱 굳히는 역효과를 낳았다. 한편, 라벤나의 사령관 발레리아누스는 천혜의 항구인 안코나의 함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달마티아의 살로나에서 나르세스의 본대 도착을 기다리던 베테랑 장군 요한네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위급함을 알리는 서신을 받자마자 요한네스는 휘하의 경험 많고 숙련된 군인들이 배치된 38척의 구원 함대를 파견하였다. 발레리아누스도 라벤나에 배치된 12척의 함대를 직접 이끌고 합세, 동고트 측과 호각을 이루었다.
551년 가을, 50여 척의 연합 함대는 안코나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항구인 세나 갈리카에 정박하였다. 동고트 함대의 사령관 인둘프[76]와 기발[77]은 비슷한 규모의 적을 보고선 바로 응전을 결심, 함대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애석하게도 해전 자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멸실되었다. 다만 중세의 전함은 고대 그리스의 그것과는 달리 충각이 없었고 따라서 투석/화살 공격과 백병전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형태였는데, 선원의 숙련도와 진형 유지가 매우 중요하였다. 여기서 요한네스의 베테랑 수병들이 실력 발휘를 한듯하다. 프로코피우스는 이 전투를 '화살이 교환되고 근거리에서 창검이 번뜩이는', 해전이 아닌 육지전투에 가까웠다고 표현하였다. 한편, 급조된 동고트 함대의 선원들은 아직 조종에 서툴렀고, 결국 서로 배를 부딪히며 일부는 따로 격리되었고 나머지는 엉켜버렸다. 이로써 전투 결과가 정해진 듯하다. 동고트 측은 47척 중 38척이 침몰하는 대패를 겪었고, 두 장군 중 하나인 기발이 생포되었다. 인둘프는 나머지 배들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안코나를 향하여 도주하였고 도착한 뒤에는 전함을 불태우고 수병들을 육지의 포위군에 합류시켰다.
세나 갈리카 해전은 6세기에 지중해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으로, 이러한 규모의 격돌은 654년에 벌어진 마스트 (돛대) 해전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전투로 동로마 측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으며, '재역전'이라 표현되는 이탈리아 평정의 신호탄으로 작용하였다. 역사가 아치볼드 루이스는 이 승리로 동로마 측이 제해권을 회복하게 되자 나르세스의 이탈리아 평정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안코나 포위군도 해전의 패배 소식을 듣고 동요하다가 얼마 못가서 포위를 풀고 내륙의 아욱시뭄(오시모)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전쟁의 추가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기운, 큰 전환점이었다. 안코나와 라벤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나르세스는 살로나에 도착하였고,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진입할 것을 선포하였다. 동고트 해군이 참패를 겪었다고 하지만 아직 3백여 척이 남아 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실패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 터이기에 병력 보존을 위하여 별다른 변수가 적고 안정적인 육로를 선택한 듯하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전쟁의 완전한 종결을 바랬기에 나르세스에게 전권을 부여하였다. 그중에는 황실 금고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권도 있었는데, 재정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나르세스는 병사들의 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리는 등 장병들의 사기 진작에 힘썼다. 따라서 이탈리아 원정군은 오랜 전란에 지친 토틸라의 군대에 비하여 체력적, 정신적으로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코피우스의 표현에 따르면 3만 3천에 달하던 그 군대는 제국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 원정군의 대다수는 로마인이 아닌 '야만족' 출신이었지만, 나르세스의 풍족한 대우에 감격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551년 가을부터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행군을 시작한 원정군은 무리하지 많고 천천히 나아갔다. 보급선도 해안을 따라 나아갔는데, 동고트 함대에게 종종 시달렸으나 세나 갈리카 해전 이후 제국 해군이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회복하자 별 문제가 없었다. 여느때 처럼 바다를 건너올 것으로 예상하였던 토틸라는 의표를 찔렸고, 뒤늦게 그들을 방해할 분견대를 파견하였지만 모두 손쉽게 격파되었다. 토틸라는 동로마 제국의 동맹 부족이자 보조군이 랑고바르드 족인 점을 포착, 그들의 적인 프랑크 족에게 동맹을 제의하였지만 그들은 토틸라가 패사하고 동고트 왕국이 실질적으로 멸망한 후에야 이탈리아에 도달한다. 그동안 요한네스의 조언을 받으며 천천히 모든 저항을 분쇄하며 진군한 나르세스는 12년 만에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552년 6월 6일) 그 달에는 원정군 전부가 라벤나에 집결할 수 있었다.

2.2.4.5.1. 타기나이 전투 (552년)

원정군은 남진하며 리미니(아르미니움)에서 처음으로 소규모 동고트 수비군의 제대로 된 저항에 부딪혔으나, 538년에 리미니에서 비티게스의 포위에 견뎌낸 전력이 있던 요한네스의 계책으로 함락되었다. 이후 나르세스는 로마시를 목표로, 플리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진하였고, 이에 토틸라는 군대와 함께 북진하였다.
이때 토틸라는 자신이 지키기로 마음먹었고, 방어 시설이 만신창이가 된 로마시에서의 공성전보다 평원에서의 회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552년 6월 말, 타기나이 평원에서 조우하였다. 병력이 그야말로 열세였는데, 동고트는 13,000여 명인 데 반해 동로마는 28,400명이었음으로 그것을 파악한 토틸라는 나르세스에게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척하며 선제 공격을 감행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나르세스가 거절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출정 시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항복이나 정복만이 있을뿐, 협상은 없다고 못밖아 두어서 애초에 성사가 불가능하긴 했다. 나르세스는 토틸라에게 항복을 하든가 아니면 전투 개시 날짜를 제안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토틸라는 8일 후라고 답했으나 나르세스는 이를 믿지 않고 군대의 방어 태세를 미리 갖추어 놓았다.
이 운명적인 대결에서 나르세스는 병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군대 배치를 선택하였다. 게르만(주로 롬바르드족이었다.) 용병대가 중앙에 섞여[78] 배치되었고 양옆에 전진된 위치에 동로마 기병대가, 양익에는 궁병 4천이 배치되었다. 전투 개시전, 토틸라는 배후를 치기 위하여 꼭 필요한 동로마 진영의 왼쪽에 위치한 언덕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미리 언덕에 정예병을 배치해 놓았고, 결국 언덕 차지를 위해 파견된 동고트 기병대는 연이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장창과 큰 방패를 갖춘 로마 보병대에게 저지되었다. 이후 테이아가 2천의 지원군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접한 토틸라는 전투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협상을 요구하고 거짓으로 항복을 요구하다가 결투를 요청하였다. 이전에 동로마 귀순자 출신이자 고트족 사이에서 잔혹하고 강력한 거인 싸움꾼으로 이름난 코카스가 자원하였는데, 동로마 측에서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안잘라스가 출정하였다. 코카스는 말을 탄 채로 돌진하였는데, 안잘라스는 그의 말을 강하게 내리쳐서 코카스가 비틀거리는 찰나에 측면을 단검으로 찔러죽였다. 고트족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토틸라는 떨어진 사기를 진작하고 테이아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위해 지연작전을 펼쳤다. 그는 황금으로 빛나는 자주색 갑주를 걸친 채, 호위병 하나 대동하지 않고 양군이 대치한 진영 사이에 말을 몰고 나타났다. 그의 말은 한바퀴를 돌고, 뒷발로 서기도 하였고, 더 나아가 한발로 서서 발레까지 하는등 묘기를 선사하였다. 토틸라는 본인이 던진 창을 스스로 말을 몰아 잡아내는 묘기도 선보인 후 고트 진영에 복귀하였다. 이를 양측 군대가 넋을 놓고 보던 사이에 토틸라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테이아가 이끈 2천의 지원병력이 도달하였다. 따라서 동로마 측의 2만 8천 군대 (2만 로마군 + 5천 롬바르드 + 3천 헤룰리 + 4백 게피다이 용병)와 1만 5천의 동고트 군이 대치하게 되었다.(552년 7월 초)
이후 토틸라는 점심을 먹으러 전열을 이탈하는 등 여유를 보였는데, 나르세스는 계략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병사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휴식을 취할 것을 허가하였다. 나르세스의 의심대로, 토틸라는 곧바로 돌격을 명령하였다. 동로마 역사가들은 그의 이런 비열한 태도에 가차없이 비판하였다. 토틸라는 자신의 기병대가 동로마의 궁수들의 사격을 덜받기 위해 그런 작전을 핀 것이었으나, 나르세스는 이미 궁수들에게는 계속 준비하고 있을 것을 명령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돌진해 오던 동고트 측의 양익에 배치된 기병대는 사격을 얻어맞게 되었고, 결국 후퇴하며 대형은 엎어진 반달의 형상이 되었다. 선두가 돌출된 동고트 군대는 로마 진영의 중앙부에 배치된 게르만 용병대와 부딪혔으나, 돌격해 오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로 대오마저 완전히 흐트러졌다. 그들과 격돌한 롬바르드 병사들은 아직 싸움에 미숙하였지만 끝까지 위치를 고수하였고, 동고트 보병대는 로마 기병대의 역습을 두려워하며 전진을 포기하고 양쪽으로 흩어졌다. 한편, 후퇴해 오던 고트족 기병대와 옆으로 밀려난 보병대가 겹치며 동고트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나르세스는 측면에 숨겨 두었던 로마 기병대를 진격시켜 동고트 군대를 감싸안듯이 포위하였고, 이후부터는 승기를 잡은 동로마 군대가 고트족을 일방적으로 쓰러뜨리기 시작하였다. 단, 이 전투 후반부터 토틸라의 죽음까지의 기록은 역사가들마다 다르고 그나마 신뢰가 가는 프로코피우스의 저술은 이부분이 멸실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정오 즈음에 개시된 전투는 밤중까지 이어졌고, 초저녘 즈음에 나르세스는 모든 병력에게 도주하는 동고트 군대를 향해 전진, 그들을 추격/섬멸할 것을 명령하였다. 전투 막바지에 토틸라는 후일을 기약하며 다섯 기의 호위대와 현장을 벗어나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추격대가 간격을 점점 좁혀오자 토틸라는 말머리를 돌려 돌진하였고, 로마측 게피다이 용병의 우두머리인 아스바두스의 창에 찔려 전사하였다. 그의 주검은 재빨리 근처의 카프라에 빌라에 조촐히 매장되었다. 다만 프로코피우스가 제시한 또다른 설에 의하면 토틸라는 동로마 궁수의 눈먼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은 후 곧 사망하였다고도 하는데 학자들은 고트족 여인이 증언한 것으로 여겨지는 전자의 설을 더 신뢰한다. 그 여인이 매장 장소를 증언하였고, 나르세스는 무덤을 발굴한 후 피장자가 토틸라인 것을 확인한 후 양지바른 곳에 다시 묻어주었다고 한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즉위하여 열세의 군대로 다수의 동로마 군을 수차례 격파하며 동고트 왕국을 부활시키는 듯 했던 토틸라는 12년간의 파란만장한 재위 기간을 마감하였다.(552년 7월, 부스타 갈로움 전투)
이후 나르세스는 그대로 남진하여 로마시에 접근하였고, 소수의 동고트 수비대가 있었지만 양동작전을 구사해 점령했다. 그렇게 2년 만에 로마시는 최종적으로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동고트 장군들은 토틸라의 후계자로 그의 친척인 테이아를 방패 위에 올려[79] 왕으로 추대하였다.(7월 말) 테이아는 나르세스가 북쪽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어 어쩔수 없이 남쪽으로 향했는데,[80] 가는 길에 토틸라의 부장들인 스키푸아르, 인둘프, 기발, 라그나리스 등과 합세하였다.
552년 10월,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에 얼마 안남은 동고트 거점이자, 토틸라의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알려진, 캄파니아지방의 쿠마이[81]를 포위하였다. 이에 테이아가 구원을 위해 남은 군대를 끌어모아 접근하였고 동로마 군대와 두 달 가까이 대치하였다. 양측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으나 무승부였고, 급히 오느라 군량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테이아는 후퇴를 결심하였다. 나르세스는 척후병을 파견하여 그들의 후퇴로를 알아내었고, 베수비오 화산 인근의 락타리우스 산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동로마 측이 먼저 고트 진영의 측면을 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불의의 기습을 당한 동고트 군대는 결국 락타리우스 산에서 농성하게 되었고 나르세스는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식량이 부족한 채로 포위당한 동고트 족은 말까지 잡아먹으며 버티다가 결국 최후의 저항에 나섰다.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동고트 정규군의 마지막 저항인만큼 처절한 저항으로 얼룩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틀간 지속된 전투에서 동고트의 마지막 군주 테이아가 전사하며 동고트 왕국은 테오도리크가 이탈리아에 진입한지 64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553년 초, 누체리아 /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
한편 소문으로나마 이 전투를 전해들은 프로코피우스는 고트족의 마지막 군주 테이아의 용기와 무용을 칭찬하며 전설 속의 영웅들에 못지 않았다고 극찬하였고, 특기할 만한 전투였다고 저술하였다. 단편적으로 제시된 전투의 상황을 재구성 해보자면, 굶주림에 지친 동고트 군대가 밀집 대형을 이루어 하산, 로마 군대를 공격하였고 테이아가 직접 선두에서 돌격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방패가 화살에 수두룩히 박혀 무용지물이 되면 호위대로부터 새로운 방패를 받아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한 창병의 일격이 그의 방패를 꿰뚫었고, 테이아는 새로운 방패를 지급받았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후였고 결국 그 병사에게 목이 베였다. 로마군은 테이아의 수급을 장대에 끼워 고트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전의를 꺾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동고트 족들은 오히려 절치부심하여 더욱 거세게 저항하였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따로 전술도 없는 백병전이 지속되던 중, 테이아의 동생 알리그렌은 남은 병력과 함께 나르세스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다. 나르세스는 협상에 뜻이 없었으나 아군의 출혈도 컸고, 부장 요한네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표단을 만났다.
고트 족들은 나르세스에게 "신의 손길이 자신들을 외면하였다'라고 말한 후, 그가 자신들이 이탈리아를 평화롭게 떠나는 것을 보장해 준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하였고, 나르세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들은 전장을 떠나 선조들의 땅인 오스트리아 일대에 재정착 하였다. 15년이 지난후, 동고트족은 롬바르드 족에게 흡수된 채로 568년 이후부터 그들의 안내자가 되어 이탈리아로 남하한 듯하다. 하지만 프로코피우스는 고트족은 이후 동로마의 통치 하에서 평화롭게 지냈다고 서술하였다. 어찌 되었든 동고트 왕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서유럽의 패권은 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참패에도 불구하고 동고트 장수인 인둘프와 라그나리스는 현장에서 살아남아 도주하였는데, 라그나리스는 나르세스가 파견한 자객에게 치명상을 입은 후 곧 사망하였다. 한편, 인둘프는 나르세스가 제시한 관대한 조건의 항복을 거부한 후, 소수의 고트족 무리를 이끌고 동로마 측의 포위망을 빠져나와 초기부터 동고트 왕국의 중요 거점이었던 이탈리아 북부의 티키움 (파도바)에 입성, 저항을 이어나갔다. 그는 프로코피우스가 저술한 전쟁기에 언급된 마지막 동고트 장수이다. 동고트 족의 귀족 비딘이 프랑크족의 도움을 받아 알프스 산간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마저도 561~2년에 진압되며 동고트 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2.4.5.2. 대 프랑크 왕국 전쟁 (554년)

553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동고트 왕국의 테이아는 비티게스의 선례를 따라 프랑크 왕국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시 아우스트리아[82]의 군주였던 테우데발트는 정규군 파병을 반대[83]하였다. 하지만 선왕 테우데베르트 1세가 중용하였던 알레마니 부족[84]의 족장인 레우타리스(Leutharis)와 부틸리누스(Butilinus) 형제가 출정을 강력히 주장하자 테우데발트는 결국 지원을 허가하였다. 그동안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테이아가 전사, 그들이 돕고자 하였던 동고트 왕국은 멸망하였지만 파병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당시 리구리아 지방은 프랑크 왕국의 영토이자 알레만 족이 관리하였는데, 프랑크측은 이탈리아가 단일 세력 하에 통합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티키움(파도바), 베로나, 브레시아 등 북 이탈리아의 포 강 중류 일대는 아직 동고트 잔당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도와 나르세스의 동로마 군의 독주를 저지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나르세스는 캄파니아 일대의 고트족 거점들을 정리해 나가던 중이었다.
역사가 아가티우스에 의하면 알레마니 족이 주축이 된 7만 5천 명의 게르만 대군이 553년 초엽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나르세스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의 피로가 가실 틈도 없이 새로운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하였다. 그는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던 아르타바네스의 군대를 소환하여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에 주둔시켰다. 한편, 침공군은 북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이었던 파르마[85]를 함락하였다. 그곳의 로마군은 헤룰리 용병이 대다수였는데, 지휘관 풀카리스는 패배 이후 파벤티아(파엔차)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겁을 먹은 아르타바네스도 역시 파벤티아로 철수하였다. 이후 나르세스의 독촉을 받아 다시 파르마로 북상하였고, 피사우룸에서 훈족 용병대와 게르만 부대의 퇴로 차단을 맡았다. 7만 대군의 기세를 회전으로 막기 불가능 하다는 것을 느낀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중남부 일대의 도시들에 수비대를 분산 배치하였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모아 이듬해 봄까지 로마시에 주둔하였다.
554년 초엽, 게르만 대군은 이탈리아 중부 일대를 약탈하였고 삼니움(중남부 베네벤토 일대)까지 남하하였다.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양갈래로 나뉜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레우타리스는 아풀리아, 부틸리누스는 칼라브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격하기로 하였는데,[86] 레우타리스는 약탈할 것이 적었는지 먼저 갈리아로 돌아갔다. 나르세스는 그들을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고, 아르타바내스의 군대를 피사룸[87] 인근에 매복시켰다. 동로마 군대와 훈족 용병은 파눔 전투에서 알레마니 군의 선발대를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고, 그 틈을 타서 많은 로마인 포로들이 자유를 얻었다. 알레마니족은 대부분의 약탈물을 버린 채로 맨몸으로 도주하였다. 다만 아르타바네스는 2만이 넘는 알레만 본대와 직접 정면 대결을 하진 않고 나르세스의 본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레우타리스의 패잔병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여정에서 전염병의 습격을 받았고 레우타리스 본인을 포함한 많은 희생자를 낸 채로 돌아가야 했다.
한편, 부틸리누스의 군대는 고트족들과 합세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약탈하였는데, 전염병에 걸려 3만의 군대가 2만명으로 축소되어버렸다. 그러자 부틸리누스는 554년 늦여름 경에 캄파니아로 회군, 마차를 둥글게 모아 숙영지를 세웠고 볼투르누스 강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큰 탑까지 지었다. 그해 9월에 척후병을 통해 게르만 진지의 위치를 파악한 나르세스는 1만 8천의 동로마 군대를 이끌고 로마시에서 남하, 캄파니아로 향하였다. 이후 나르세스는 '아르메니아인' 카라난제스 휘하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보급선을 교란시키게 하였다. 특공대는 운전병과 보초병들을 제거하고 몇개의 마차를 사로잡았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중 하나에 불을 붙여 근처의 탑에 돌진시켰다. 탑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방비로 노출되자, 위기감을 느낀 게르만 군대는 다리를 건너 동로마 군대를 향해 나아가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동로마 진영에 악재가 발생하였다. 헤룰리 용병[88]의 족장이 하인을 죽였고, 나르세스 앞에 소환되었는데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였다. 건방진 태도에 분노한 나르세스는 그를 처형하였는데, 그러자 헤룰리 부족 전체가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나르세스는 그에 동요하지 않고 단단하고 빽빽한 대형을 갖춘 프랑크 측에 맞서 타기나이 전투와 비슷하게 진형을 짰다. 일련의 전투 이후 충성심이 확인된 롬바르드족을 중심으로 용병대가 중앙부에 흐트러지지 않은 밀집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그 뒤에 궁병대, 측면에 기병대가 자리하였다. 나르세스 본인은 우익의 기병대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발렐아누스가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였는데 그들의 일부는 아르타바네스의 지휘 하에 인근의 작은 숲에 매복하였다. 한편, 전투 직전에 헤룰리 족의 장군 신두알이 부족을 다시 설득해 보겠다고 청원하여 나르세스는 보병대 중앙부에 틈을 벌려 놓았다.
554년 10월 초, 나르세스는 캄파니아의 카푸아 인근 하천인 볼투르누스 강가에서 알레마니족의 3만 대군과 대치하였다. 나르세스와 대치하던 게르만 군대에 대하여 역사가 아가티우스는 '매우 거칠고 무례하며 기병대 없이 보병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검은 왼쪽 다리에 묶여 있었고 주요 무기는 던지는 도끼와 갈고리가 달린 투창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전투 직전에 헤룰리 족의 병사 두명이 프랑크 측으로 전향하여 헤룰리 용병이 참전하지 않은 지금이 승리할 절호의 기회라고 부틸리누스를 설득하였다. 이에 알레마니 - 프랑크 군대는 쐐기 모양이 되어 동로마 진영 중앙부의 틈으로 돌진하였고, 로마군은 밀리는듯 하였다.
이에 나르세스는 급히 자신이 지휘하던 기병대를 이끌고 기동하여 프랑크 인들의 후미를 습격하였고, 궁기병대로 하여금 제대로 갑옷을 갖추지 않은 게르만 인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게 하였다. 반나체의 병사가 대부분이었던 프랑크 인들의 대오가 흐트러졌고, 앞뒤로 동로마 군대에 포위되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적들이 혼란스러워하자 갈등하던 헤룰리 족마저 그들을 덥쳤고, 이것이 치명타가 되며 프랑크 인들은 전멸되었다. 사령관 부틸리누스마저 혼전 중에 난도질되며 전사하였다.(카실리눔 전투, 554년) 레아가티우스에 의하면 동로마 측은 오직 80명의 전사자가 생긴 반면 고트 - 프랑크 진영은 오직 5명의 고트인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사실 관계야 어떻든 간에 나르세스의 대승이었다는 점은 확실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평정을 확고히 한 전투이다. 프랑크 - 알레마니 인들이 패퇴하며 538년부터 프랑크 왕국이 지배하던 리구리아 일대도 동로마 령으로 편입, 19세기 이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전 지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나르세스는 그해 11월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로마 장군으로서는 마지막 개선식을 치렀다. 7천명의 고트족이 저항을 이어가던 캄파니아의 도시 캄프사도 555년 봄에 함락되었다. 포강 이북의 마지막 동고트 도시였던 베로나와 브레시아도 562년 11월에 항복하며 이탈리아 전부가 한 세기만에 로마 제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후 나르세스는 1만 5천에 달하는 롬바르드 / 헤룰리 / 아바르 용병들에게 후한 포상을 주고 계약을 해지, 알프스 이북으로 돌려보내었다. 이탈리아에는 1만 6천의 동로마 군대가 배치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의지로 실행된 20여년간의 고트 전쟁과 이탈리아 반도의 수복에는 30만 파운드 (13만 6천 kg = 136톤)의 금이 소모되었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라벤나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나르세스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동로마 제국은 엄청난 전비를 소모하여 국가 경제에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지경이었고, 결국 본국의 경제 위기를 해소하고 전비를 회수하기 위해 기존의 동고트 족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된다. 불가피한 결정이었으나 민심 이반을 부른 건 부정할 수 없었고, 나르세스는 12년간 총독을 지낸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망 2년 후인 567년에 죽었다. 나르세스 사후 568년에 롬바르드 족이 남하하여 라벤나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중남부까지 장악하게 된다.

2.2.4.6. 안달루시아 재정복

410년의 로마 약탈과 알라리크의 죽음 이후 서고트 족은 서로마 제국의 초청으로 416 ~ 418년에 비옥한 가론 강 유역의 아키텐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프랑스 남부(셉티마니아, 나르보넨시스)를 평정한 후 429년에 반달 족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자 이베리아 반도로의 진출을 꾀하게 되었다. 5세기 중반, 반달족의 공백 이후 반도는 서북부의 갈리치아를 중심으로 한 수에비 족이 패권을 쥐고 있었다. 서고트 족은 468년에 알란족과 수에비 족을 격파하고 이베리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89] 이후 에우릭 왕은 로마 측을 협박하여 475년에 툴루즈를 수도로 한 독립 국가의 지위를 얻어내었다. 하지만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에게 패배, 알라리크 2세까지 전사하며 프랑스 서부 일대를 상실하였다.[90] 이후 왕국의 수도는 바르셀로나를 거쳐 이베리아 중남부의 톨레도로 옮겨졌다.
549년, 아길라 1세 때에 아나타길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양측 모두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552년, 리베리우스[91]가 이끈 2000명의 군대가 파견, 카르타헤나에 상륙하여 곧바로 도시를 함락하였다. 554년, 아나타길드가 내전을 매듭지은 후 동로마 제국의 점령지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몇개의 도시를 회복하였으나 그뿐이었다. 안달루시아 일대는 반달 왕국 정복 이후 얻어낸 세우타, 발레아레스 제도와 함께 스파냐(Spagna) 속주로 개편되어 100여 년 만에 로마 제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고트 왕국의 반격으로 565년 세비아를 뺏겼고, 566년에 세비아, 이듬해(567)에 코르도바에서 친 로마 봉기가 일어났지만 572년에 레오비길드 왕에게 진압되었고 그해에 메디나, 시도니아도 함락되었다. 570년 - 571년에 카디스 등 지브롤터 해협 서쪽의 영토를 상실하였고, 내륙 일대는 577년 ~ 586년까지의 서고트족의 공격으로 상실하였다. 588년엔 동북쪽의 데니아를 상실하였지만 말라가, 카르타헤나 등 반도 동남부의 해안은 동로마 제국이 사산 제국과 사생 결단의 전쟁을 치르던 624년까지 버텨내었다. 최종적으로는 707년 발레아레스 제도를 우마이야 왕조에 빼앗기며 스파냐 속주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2.2.5.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해당 문서 참고.

2.2.6. 라지카 전쟁 (548 ~ 557년)


536년에 동로마 제국은 라지카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령관을 파견하였고, 그는 국왕 구바제 2세의 왕권을 제한하며 라지카의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던 무역 역시 자신의 허가 하에 두었다. 이에 라지카 인들은 분노하였고, 결국 541년에 안티오키아가 함락되자 반로마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실권을 잃은 구바제 2세는 호스로 1세에게 밀사를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란군이 출정하였고, 이로써 라지카 전쟁 (541 ~ 562년)이 발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토착민의 지지에 힘입어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였고, 주요 거점인 페트라마저 함락하며 라지카를 사산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후 호스로 1세는 태도를 바꾸어 이란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는 등 라지카에 대한 직접 지배를 하려 하였고, 열정적인 조로아스터교 포교 활동은 20여 년간 기독교를 믿어왔던 라지카 인들의 분노를 유발하였다. 게다가 국왕 구바제 2세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일어나자, 라지카 인들은 이번에는 반페르시아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구바제 2세는 동로마 제국과 알란인, 그리고 사비르인 등 북방 유목민에게도 구원을 요청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장군 다기스테우스 휘하의 7천의 로마군과 1천의 콜키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548년 말, 다기스테우스는 우선 주요 항구 도시인 페트라를 포위하였는데, 호스로 1세도 이에 질세라 미흐로에 장군 휘하의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미흐로에는 라지카 동부 산악지대의 고갯길을 지키던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고 페트라에 입성, 3천의 정예병을 뽑아 성을 지키게 하였고 5천의 군대로 반란을 일으킨 라지카 지역을 유린하게 지시한 후,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였다. 라지카 일대를 약탈하던 5천의 이란 군대는 549년, 파시스 강 전투에서 다기스테우스의 동로마 군대에 괴멸되었고 호리아네스가 이끈 이란 군대도 히피스 강 전투에서 호리아네스 본인이 전사하며 괴멸되었다. 550년 경에 콜키스의 동로마 주둔군 사령관은 이탈리아에서도 활약한바 있는 베사스로 교체되었는데, 그가 이끄는 동로마 군대는 압하지아의 부족인 아바스기 부족이 일으킨 친 페르시아 봉기를 진압하였고 페트라를 다시 포위하였다. 551년 봄, 6천의 사비르 족 동맹군의 도움을 얻은 로마군은 페트라를 함락시켰다. 소수의 이란 군대가 요새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베사스는 그곳에 불을 질러버렸다. 페트라의 상실에 충격을 받은 미흐로에가 아르메니아에서 복귀하여 라지카의 수도인 아르카에오폴리스 앞에서 동로마 군대와 회전을 치렀으나 대패하였고, 라지카 대부분은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551년)
다만 이란 군대는 여전히 라지카 동북부의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수도인 아르카에오폴리스를 굽어볼 수 있었다. 또한, 승리에 자만한 베사스는 군사 활동을 중지하였고 아예 폰투스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한편, 시간을 번 미흐로에는 그동안 군세를 재정비 하였고, 552년에 호스로 1세는 라지카에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미흐로에는 폰투스와 콜키스를 잇는 주요 도로의 요충지 몇 곳을 장악하여 동로마 군대의 교통을 방해하였다. 폰투스에서 편안한 은퇴 생활을 하던 베사스는 554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마르티누스, 유스티누스 등의 장군과 악화된 라지카 전선에 복귀하였다. 복수의 칼날을 갈던 미흐로에는 555년, 텔레피스 전투에서 라지카 - 동로마 연합군을 대패시키며 그들을 남부의 네소스로 몰아내는 쾌거를 올렸고 아르카에오폴리스 서편에 있는 위성 도시인 오노구리스도 함락하였으나 아르카에오폴리스 자체의 함락은 실패하였다.
한편, 페르시아의 명장 미흐로에는 그 해에 병사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나코라간이 부임하였다. 555년 봄, 나코라간은 6만 대군을 이끌고 흑해안의 파시스를 포위하였고, 이에 동로마 - 라지카 연합군은 수비 병력이 줄어들은 오노구리스 탈환에 나섰는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전황을 지켜보던 라지카의 군주 구바제 2세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어 장군들의 무능함을 고발했는데, 이에 베사스는 직위해제 됨과 동시에 재산이 몰수되어 압하지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일개 속국의 왕이 제국의 사령관을 해직시켜 버린 것에 두려움과 분노를 느낀 장군 마르티누스와 루스티쿠스는 구바제 2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황제에게 구바제가 이란 진영과 내통하였다고 모함하였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직접 심문하고자 필요하다면 무력 사용을 허가하며, 체포할 것을 명하였다. 명분을 얻은 두 장군은 555년 가을, 구바제에게 포위된 페르시아 측 요새에 대한 공성전을 함께 지휘하자며 그를 초청하였고, 순진하게도 초청에 응한 구바제 2세는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되었다. 그가 막사로 접근하자 루스티쿠스의 동생 요한이 왕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었고, 고통스러워 하며 낙마한 그를 대기하고 있던 루스티쿠스의 하인들이 숨통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황제에게는 그가 체포에 반발하였다고 보고한 것은 예상되었던 수순. 이에 로마의 동맹군으로 종군하던 라지카 인들은 종군을 거부하였고, 오노구리스 탈환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동로마 군대는 철수하였고, 이틈을 노린 나코라간의 이란 군대는 아르카에오폴리스에 입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라지카 인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탄원서를 보내어 구바제 2세 암살 사건과 반역 혐의에 대한 진상규명 및 콘스탄티노플에 볼모로 있던 그의 동생 차트흐를 왕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 중 평이 자자한 아타나시우스를 수사 담당관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구바제 2세의 무고함을 확인하였다.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루스티쿠스와 그의 동생 요한은 처형되었고, 마르티누스는 그간의 공로 덕에 직위해제에 그쳤다. 라지카의 신임 국왕 차트흐 2세는 다시금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확고히 하였고, 라지카 인들도 연합 작전에 다시 종군하였다. 사건이 어느 정도 재규명되고 마무리된 556년, 동로마 - 라지카 연합군은 아르카에오폴리스를 탈환하였고, 포위되어 있던 파시스 구원에 나섰다.
555년 봄부터 개시된 파시스 포위전은, 나코라간이 이끈 6만의 이란 군대와 마르티누스, 유스티누스[92]가 지휘한 2만이 되지 않는 동로마 군대 사이의 공성전으로 전개되었다. 파시스는 목조 성채로서 화공에 취약하였지만 서쪽은 흑해, 동쪽과 북쪽은 파시스 강으로 보호받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나마 공격에 용이한 남쪽은 깊은 해자로 방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란 군대는 수일간의 노력으로 해자를 메우는 데에 성공하였고, 강에도 다리와 배를 띄워 삼면으로 도시를 포위하였다. 계속된 공격들은 결국 격퇴당하였지만 수비대의 사기는 매우 낮아져 있었는데, 이에 사령관 마르티누스가 꾀를 내어 사기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하인을 황제의 칙사로 변장시킨 다음, 병사들을 모아 지원군이 오고 있으며, 황제는 그들 모두에게 큰 포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연설하게 하였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결사대를 모집, 밤중에 요새를 빠져나가 근처의 교회에 은신하였고 다음 날 페르시아 군대가 파시스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할 시에 그들의 배후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작전에 양 진영은 모두 동로마 측이 지원군을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고, 나코라간은 철수를 결심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데일럼 지역 출신의 동맹군을 시간을 끌어줄 방패막이로 성 앞에 놓아두고 후퇴하려 하였는데, 동로마 군대는 그들을 분쇄하고 노도와 같이 이란 군대를 공격, 그들의 좌익을 무너뜨렸다. 페르시아 인들은 반격을 하려 하였으나, 우익에 배치되었던 전투 코끼리 중 하나가 두려움에 등을 돌리면서 진영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란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패주하였다. 해가 지자, 하루 종일 이어진 전투에서 사산 제국은 1만명을 잃었고 로마군은 2백여 명의 희생만을 기록하였다. 한편, 로마인들은 이란 측의 공성 기계에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도시가 함락된 표식으로 오인한 페르시아의 운반병들이 밤중에 도시로 돌격하였다가 2천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가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556년 여름)
556년 가을, 동로마 군대는 동부 산악지대의 미시미아 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고 겨울까지 사산 제국군을 라지카 영내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한편, 겨울에 나코라간은 이베리아로 패주하였는데, 호스로 1세는 6만의 대군 중 반 이상을 상실한 그에 분노하여 책형을 내렸고, 그의 가죽은 경고의 뜻으로 전시되었다. 557년, 양대 제국 간의 협약이 체결되어 적대행위가 종결되었고, 이후 5년간 협상이 이어진 후, 562년에 다라에서 '50년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20여 년간 지속된 라지카 귀속 문제는 최종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사산 제국에게 연공으로 3만 노미스마타의 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처음 7년치는 일시불로 562년에 지급되었다. 그 대가로 동로마 제국의 라지카 영유가 확정되었고 라지카 북부 산간지방인 수아니아 지역에 대한 귀속 문제는 결정되지 못하였지만, 어찌되었건 이란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조로아스터 국교화 정책으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한 박해는 80여 년 후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서 오히려 풀리게 된다.
하지만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후 즉위한 유스티누스 2세가 재정 적자 문제와 자존심을 내세우며 연공을 중지하였고, 그리하여 벌어진 572 ~ 591년간의 전쟁에서 동로마 제국은 패배를 거듭하며 다라를 상실하게 된다.

2.2.7. 말년의 황제와 자연재해


540년에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멘 이후 황제의 기력이 쇠하였고 극도로 의심이 많아졌다. 거기에 심적으로 의존하였고, 또 정치적인 부담을 나누던 황후 테오도라가 죽은 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성당 건축, 영토 확장, 법전 편찬에도 시민들의 지지도는 낮았다. 불필요한 곳에 예산만 축낸 황제라는, 또 페르시아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황제라는 인식이 퍼져 그가 병에 시달리다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환호하였다.
그 외에도 551년의 레바논 대지진으로 베이루트에서만 3만여명이 희생되고 고대 도시 페트라가 버려지기도 하였다.

2.2.7.1. 불가르족의 습격과 연공 납부

549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국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고관들을 이끌고 칼케돈에 틀어박힌 교황 비질리오를 설득하러 간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대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은거한 영웅을 다시 전선에 복귀시킨 것은 바로 야만인의 콘스탄티노플 위협이었다.
라틴, 게르만 할 것 없이 전 유럽을 충격과 공포에 삐뜨렸던 훈족은 453년에 아틸라가 급사한 이후 와해되었다. 남은 훈족의 일부는 쿠트리구르와 우투르구르 족으로 나뉘어[93] 다뉴브 강 ~ 카스피해 북안까지 펼쳐진 스텝 지역에 잔존하였다.[94] 그들은 로마 측 사료에는 레오 1세 때부터 등장한다. 551년, 1만 2천의 쿠트리구르족은 아조프 해의 서쪽을 떠나 롬바르드 족과 싸우던 게피다이 족을 지원하였다. 이후 둘은 동로마 제국을 침공, 트라키아 일대를 약탈하였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뇌물과 외교를 통해 형제 부족이었던 쿠트리구르와 우투르구르를 이간질시켜 싸우게 하는 전통적인 이이제이 전략을 씀으로서 이 두 훈족의 후예들을 끊임없이 싸우게 만들었다. 산딜릭의 우투르구르 족은 쿠트리구르 족을 격파하고 그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이후 쿠트리구르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2천여명의 남녀가 족장 신니온[95]의 인솔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허가 하에 트라키아 지방에 정착하였다.(558년 초) 하지만 새로 칸에 등극한 자베르간이 쿠트리구르 훈족에 그 예하 부족까지 합친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 제국을 침공한 것이다.
558년 겨울, 훈 족의 후예이자 불가르 족의 전신인 쿠트리구르 족의 칸 자베르간이 이끄는 튀르크 - 슬라브 혼성부대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넜다. 원인은 아바르 족의 압박 혹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란 중 하나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전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키아의 동로마 방위선을 뚫고 병력을 삼분하여 진격하였다. 1로군은 테살리아를 약탈하며 테르모필레까지 진출하였고 2로군은 칼리오폴리스 일대를 약탈하였다. 그리고 559년 봄, 7천의 기병으로 구성된 자베르간의 본대는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넘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서쪽 30km 부근까지 도달하며 황제와 신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출정을 꺼리는 가운데 황제는 노장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호출하였다. 10년의 은퇴 생활 후 다시 지휘봉을 잡게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수도에는 불과 수백의 근위대 만이 있었다. 7천의 훈족 기병을 상대하게 된 벨리사리우스는 3백 명의 겁에 질린 군대를 이끌고 출전해야 했다. 쿠트리구르 족은 멜렌티오스에 기지를 차렸고 벨리사리우스는 그보다 북쪽으로 수 km 떨어진, 콘스탄티노플 성벽으로부터 30km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자베르간은 숙영지에 2천을 남기고 동로마 군을 기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계획을 파악한 벨리사리우스는 매복을 통해 쿠트리구르 족의 선봉 4백여 명을 전사시켰고,[96] 자베르간은 적장이 벨리사리우스라는 사실을 알자 곧 후퇴하였다. 이것이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마지막 활약이었다. (멜란티아스 전투, 559년)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쿠트리구르를 추격하려 하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를 저지하였다. 그들은 도나우 강 너머로 가기 전에 트라키아 일대를 다시 약탈하였다. 노황제는 벨리사리우스를 무시한 채 자신이 개선식을 거행하였고 쿠트리구르에게 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늙고 병든 황제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은 영토나 인구상으로나 당대 세계의 최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과 쿠트리구르족에게 연공을 납부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사산 왕조와 쿠트리구르 등 이민족들을 매수하여 평화를 샀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이후의 유스티누스 2세 치세인 572년에 연공 납부를 거절하자 이란과 다시 전쟁이 발발,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던 선택으로 이기도했다.
여담으로, 이후의 쿠트리구르 부족은 쇠퇴하고 신흥 유목 제국인 아바르 칸국에 의해 흡수되거나 추방당하게 된다. 568년, 아바르 칸국의 바얀 1세의 명령으로 남은 쿠트리구르 족 1만명은 사바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령 일리리아에 정착하였다. 남은 쿠트리구르도 튀르크 세력 (마자르/불가르 족)을 피해 아바르 측에 귀순하였다. (569년) 한편, 동쪽의 우투르구르는 스텝 지역에 잔존해 있다가 튀르크 족에 흡수되었다.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시리아인' 미카엘에 따르면 그들의 잔존 세력은 마우리키우스 황제(582 ~ 602년) 시절에 다키아로 귀순하였다고도 한다. 586년에 클로마론 요새에서 아바르 족에 대항해 싸운 동로마 장수 자베르간이 그와 동일 인물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2.2.7.2. 죽음

56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시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다만 세간에는 잠시나마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그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내뱉었으며 일부 귀족들은 제위 계승자인 유스티누스 2세 대신 벨리사리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 소식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귀에 들어갔고 대노한 황제는 모반자들을 체포, 고문하였는데 그들이 벨리사리우스도 모의를 알고 있어 연관이 있다고 실토, 결국 벨리사리우스를 체포하였다. 그는 이전까지의 공로를 감안하여 삭탈 관직과 불명예 제대되는 굴욕에 가까운 처벌을 받았다.
이 내용은 중세시대에 의심많은 황제가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눈을 뽑아버리고 추방하여 거지로 살다가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와전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비판론자들이 이것을 진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래 처럼 거지몰골이 된 벨리사리우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8개월 후, 벨리사리우스의 무혐의가 밝혀져 빼앗겼던 명예와 관직도 모두 복권되었지만, 이미 그는 지쳐버렸다. 은둔의 세월이 흐른 후 565년 3월, 명장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8개월이 흐른 11월 14일, 로마 제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향년 만 83세로, 40대에 즉위했는데도 38년이나 재위했으며, 또한 매우 장수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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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년의 동로마 제국
비록 제국의 법령을 정비하고, 영토를 크게 늘렸으며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identity)을 정립한 공이 크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전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축적해 놓은 황실 예산의 대부분을 재정복 전쟁, 페르시아와의 평화 조약,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 등에 투입하여 국고를 탕진하였다는 비판이 크다.
약간 특이한 경우였지만 동서 로마 제국 간에 자주 논란을 유발시킨 일리리쿰 속주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 이후로는 계속 동로마가 강력한 입김을 행사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전에도 동서 로마 황제들 중 선임 황제였던 측은 대부분 일리리쿰 속주와 그 군대를 장악했던 황제들이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양아버지이자 외삼촌인 유스티누스 황제도 유스티니아누스처럼 라틴어밖에 모르는 일리리쿰 속주민이었다.[97] 어쨌든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틴어에 더 익숙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래서였는지 로마 역사와 과거의 로마 풍습에 상당한 애착을 보여서 유명무실화된 고대의 여러 관직이나 풍습을 살리기도 했다. 이런 점과 라틴어를 쓴다는 점 때문에 때때로 '최후의 로마 황제'로도 불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적 수사. 유스티니아누스 이후로도 라틴어를 쓰고 일부러 공화정기 로마식 관직을 장교명으로 하는 황제들이 더 등장한다. 이걸 진지한 규정으로 오해하진 말도록 하자.
그러나 이런 고대 애호가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또한 기독교를 매우 선호하는 성향을 보여 유대인들을 가끔씩 괴롭히거나 이교도 사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 아테네의 리케이온과 아카데미아를 문닫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로마적인 생활과 얼마나 융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고대 제국의 위엄을 그리워하면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사는 것이 전혀 대치되지 않았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문닫게 한 조치는 일반인들을 위한 역사교양서에서 까임의 대상으로 나오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이걸 가지고 지적했으면, 수도에도 대학교를 새로 세웠는데 이런 학교를 계속 존치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답했을게 분명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폐지 이유로 내세웠듯이,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이교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98] 사산조 페르시아로 망명한 철학자들도 생각보다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일자무식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삼촌을 도우면서 습득한 교양으로 동시대 최고의 교양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군주였다. 선대의 황제들이 쌓아올린 제국 재건책을 바탕으로 고토 수복에 나서 효율적으로 병력을 축차 투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명한 황제였다.

3.1. 재정복 사업: 과연 무모한 확장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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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를 비판하는 의견이 대세를 탔지만, W. 트레드골드, J. 할던, 조지프 테인터 등 1980년대 이후로는 재평가받는 게 현재의 추세.
일단 조지프 테인터에 따르면 반달족 치하의 카르타고 경제 지표가 오히려 로마 제국 시대를 상회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훗날의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밀고 들어오자 카르타고로의 천도를 시도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자기 본거지였다곤 해도[99] 그렇게 사막화가 진행되어 피폐해진 지역으로 천도하려고 했을까? 이탈리아도 고트족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통치를 했다. 일단 무조건 약탈만 한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통치 체제에 따라 통치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경제 지표도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을 수복한 동로마 제국이 갑자기 증세를 하는 바람에 해당 지역의 경제가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워렌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계획을 망쳐놓은 건, 541-542년 2년간 걸쳐서 동로마 제국을 파괴한 유스티아누스 전염병이라고 한다. 중세 극초기판 흑사병인 이 전염병은 카르타고와 이탈리아의 경제력을 회복시켜 수익을 뽑아내기 전에 갑자기 몰아친 대규모 전염병 때문에 국고가 격감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자신도 사경을 헤매는 등 전체적인 사업 추진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는 5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원로원 계층, 즉 귀족층의 전횡을 최대한 차단하는데 초점을 둔 행정 개혁을 시도했다. 매관매직과 수탈이 성행하던 행정체계를 바로잡은 덕분에 당대의 귀족층에게 질시를 당했지만, 이런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후 유스티니아누스가 바로 착수한 것이 제국 동방에서 이루어진 식의 행정 개혁이었다. 게다가 서방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동로마 제국이다 보니 사산 왕조에 비해 전염병에 의한 피해도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또한 반달족을 정복할 때도 아리우스파인 겔리메르가 왕위를 찬탈하자 뒤에서 돈을 뿌리고 종교갈등을 일으켜 반달족 내의 반란을 조작한 사람도 유스티니아누스였고, 그 시점에서 적당히 조공만 받고 끝내려는 수준의 원정 계획을 끌어올려 반달족 완전 정복을 계획한 것도 유스티니아누스였다. 벨리사리우스를 심하게 견제하긴 했지만 나중에 이탈리아를 수복한 사람은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의 확실한 지원을 받은 나르세스였다.
실제로 나르세스도 타기나에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하고 카실리눔 전투에서 프랑크족을 격파한 명장이다. 두 명장들이 다툴 때는 나르세스를 후방으로 빼버리기도 할 만큼, 기본적으로 사람을 쓰는 법은 알고 있었다. 비록 일관성 있게 장기간 중용하지는 못했지만 이건 왕권수호에 얽힌 보편적이고도 복잡한 문제인 군권과 실력과 인기를 가진 강력한 신하는 황제에게 그 자체로 위협이 된다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만의 특징이라고 보긴 어렵다.
결국 벨리사리우스 개인 능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업적을 전부 벨리사리우스의 역할로 보려고 하는 건 힘들다. 이걸 시오노 나나미의 폐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게 한동안 대세 학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모든 걸 다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무리다. 적어도 군사 이외의 수많은 문화적, 통치체계 정비 등의 업적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역할을 무시하기도 힘들고 실제 자신도 신학, 음악, 역사, 법학에서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판을 지나치게 키웠다는 비난도 있지만, 적어도 대역병이 창궐하기 전까지 서방에선 동로마의 약진이 두드려졌고, 동부 전선도 앞서 말한 통치체계 개선을 통한 세제 개혁 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조세를 이용해 사산 왕조를 비롯한 기타 세력들과 화평을 맺었으며, 그로인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즉 철저히 계산된 확장이었다는 소리.
또한 이탈리아는 동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들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이 등장하기 전까지 500년 동안 교황에게 압박을 가하고 서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익했다고 평가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남이탈리아는 서방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 지역이었고, 이 지역이 노르만족에게 넘어가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지워지자 이탈리아를 근거지로 한 여러 세력들이 그리스로 침공 했던 것을 보면 제국 수호에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제국에 창궐한 전염병 때문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으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그가 차지한 점령지 상당수를 잃고 만다. 허나 카르타고, 남이탈리아, 남부 이베리아 등 중요 지역은 이후로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임인 유스티누스 2세 때의 정치 혼란에 암군 포카스의 실정까지 겹치자 제국은 허약해진 국력으로 사방에서 압력을 받으며 사산 왕조와의 전면전을 치러야만했다. 비록 최후의 승자는 로마 제국이었지만,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결과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막지못하게 된다.

4.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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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단 단원의 딸이란 천한 신분 출신의 황후 테오도라를 극진히 생각했으며 실제로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인지 상당수의 기록이나 역사가들은 테오도라 황후가 정치적인 능력 면에서는 황제와 대등한 수준이거나 혹은 그를 능가하는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하는 듯.
하지만 상처한 이후 삶의 활력을 잃은 말년에는 종교 문제 외에는 제대로 손댄 일이 없다. 종교 문제에 손댄 일 자체가 '왜 그런 쓸데 없는 것에 집착하냐?'이라고 비판받는 경우가 있는데, 당대 로마인에게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민주주의의 올바른 구현방식을 놓고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으며, 신민들이 이 논쟁으로 분열하기도 했다. 황제는 이러한 논쟁을 적절하게 조율하여 제국 신민들을 하나로 묶을 필요성이 있었다. 당시 정통파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 있던 이집트와 시리아 단성론파 간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으나, 그 방법으로 내세운 새 교리가 정통파와 단성론자들 모두에게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였다.
재정은 유스티니아누스가 대단히 정력적으로 관리했으나, 말년의 장기 와병한 결과 재정 상황이 악화되면서 후대에 낭비 황제로 낙인 찍히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에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지만, 만년의 이 행태는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설에는 후임인 유스티누스 2세가 자신이 물려받은 금고에는 현금은 없고 차용증서만 있었다는 투의 말을 했다고도 한다.
그리스어권인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라틴어권인 일리리쿰계였기에 라틴어가 모국어였다. 그래서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리스어를 못한다고 까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무덤은 로마 제국의 황릉 역할을 한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었는데, 4차 십자군 때 십자군에게 약탈당하면서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뿐만 아니라 이전의 동로마 제국 초기의 황제들의 무덤들도 모조리 파괴되어서 무덤 양식이나 복식 등이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십자군)은 자신들에 내재 된 황금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황제의 도시를 약탈할 때 재화를 획득하는 새롭고, 타인의 이목에서 벗어나는 방법(도굴)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성스러운 사도 교회의 성역에 마련된 판토크라토르 묘역에 있는 황제들의 묘실을 열어젖혔다. 이들은 밤새 이 모든 것들을 약탈하였고 황금 장신구, 진주 목걸이, 반짝이고 귀중하며 순수한 보석들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불법적이라고 해도 이를 취하였다. 그들은 또한 오랜 세월 동안 피해를 입지 않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경의에 찬 눈으로 이를 바라보았으나 관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만사에 있어 총체적인 무관심과 불경심을 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역사> 중에서


5. 관련 문서



6.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1] 다만 이것은 프로코피우스가 황제에게 아첨하기 위해 지은 말이며, 비공개 책인 '비사'에서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포함하여 황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2] '로마법 대전'이라는 명칭은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붙인 것이 아니고, 후대의 법학자인 디오뉘시우스 고토프레두스(Dionysius Gothofredus)가 '교회법대전'(Corpus Iuris Canonici)의 명칭을 모방하여 붙인 것이다.[3] 흔히 알려진 스페인 일대가 아니라 캅카스에 위치한 국가인 조지아 동부 일대의 고대 지명이다. 현재 조지아 (그루지야)의 동부 일대. 서부 해안 일대는 콜키스(현재 압하지아 등지)라고 부른다.(라틴어 명은 라지카) 두 지역 모두 기독교를 믿었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의 일관된 보호령이었던 콜키스 (라지카)와는 달리 이베리아는 로마와 이란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오다가 결국 523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이란의 직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4] 408년경, 당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아르카디우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테오도시우스의 후견인으로 당시 사산 제국의 황제였던 야즈데게르드 1세를 지목하였다. 그 결정에 놀란 야즈데게르드는 그 약속을 지켜 자신의 치세 (399 ~ 421년) 동안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로마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게 호평을 받았다.[5] 이라크 서부에 위치했던 아랍계 기독교 국가.(300년경 ~ 633년) 이란의 속국이었다.[6] 현재 요르단, 시리아 동부 일대[7] 정확히 말하면 대규모 요새인 다라의 방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실상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정식으로는 530년에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8] 자블라흐 4세 이븐 알 하리스 (جبلة بن الحارث, 재위 ‎‎518 ~ 528년). 아부 샴마르 (أبو شمر), 가발라스 (Γαβαλᾶς)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9] 명장인데도 부하 통제를 잘 못했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정 시기의 명장 루쿨루스와 비교되기도 한다.[10] 마침 바람의 방향도 로마 진영을 향해 불어와 페르시아 측에 유리하였다.[11] 승장 아자레테스는 병력의 큰 손실 때문에 카바드 1세에 의해 해임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직위 해제 당하며 불명예 제대까지 당했다.[12] 고대 로마(제국 전체로는 서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의 정당이었다.[13] 오리엔트(시리아, 이집트) 일대에서 상업을 통해 세력을 키운 신흥 세력[14] 진압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를 살려두고자 했지만 테오도라 황후가 죽이라고 촉구해서 결국 죽였다고 한다.[15] 532년 2월 23일에 시작된 재건 공사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현 터키의 아이딘)의 안테미우스의 지휘로 537년 12월 27일에 축성식이 거행되며 완공되었다.[16] 교회에서도 아리우스파, 즉 이단을 믿는 국가였던 동고트와 반달 왕국에 대한 원정에 전적으로 지지를 보냈다.[17] 그리고 정통파 기독교인 니케아 파를 탄압하는 반달 왕국에 대해서는 더 적극적이었으며, 동고트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동방 교회가 서방의 로마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강해질 것을 기대하기도 하였다.[18] 반달족은 429년에 지브롤터를 건넜고, 435년까지 마우레타니아 (모로코)와 누미디아 (알제리)를 석권한 후, 439년에 카르타고를 함락하였다. 442년, 가이세리크는 로마 제국과의 결별을 선포하고 완전히 독립하였다.[19] 동로마 제국의 암묵적 동의 또는 부추김/권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0]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였다.[21] 유스티니아누스는 명분 확보를 위하여 겔리메르에게 힐데리크를 복위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힐데리크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무시당하였다.[22] 오늘날 리비아의 서부 일대. 지역의 중심 도시이자 리비아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한 트리폴리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23] 오늘날 리비아의 동부 일대. 벵가지, 토브룩 등의 도시가 있다.[24] 동로마 사령부에 있어서 북아프리카 재정복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이 바로 5세기 내내 로마 해군에 있어 우위를 보여왔던 반달 왕국의 강력한 해군이었다. 따라서 함대가 사르데냐에 묶여있었던 것은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었다.[25] 유스티니아누스는 시간을 더 벌기 위하여 4백 명의 특공대를 사르데냐에 몰래 파견하여 게릴라 전을 명하였다.[26] 프로코피우스의 서술에 의하면 1만 보병과 5천의 기병, 벨리사리우스의 사병 1천 5백과 6백 명의 훈족, 4백 명의 헤룰리 용병대, 그 외에 수백의 궁병대가 있었다고 한다.[27] 동고트 왕국의 공주였던 아말라프리다가 반달 왕국의 4대 왕인 트라사문드의 왕비였는데, 왕이 사망한 이후 반달 귀족들에게 (특히 겔리메르의 쿠데타 이후에는 더욱) '''거진 평민 취급을 받아 동고트 왕국이 반달 왕국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28]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르마라 해를 건너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에 항해 10일째인 7월 1일에야 도착하였다.[29] 당시 군량으로 지급된 쉽 비스킷의 공급 담당자였던 카파도키아의 요한이 두 번 구워야 하는 것을 한 번만 굽고 나머지 경비를 횡령하였다. 따라서 수분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아 비스킷이 벌레가 파먹고 썩어버렸는데, 그로 인하여 5백여 명의 병사들이 병사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신고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담당자를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의 반목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30] 프로코피우스는 평소 친분이 있던 상인을 만났는데, 그의 하수인은 막 카르타고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하수인은 놀라운 소식을 전했는데, 동로마 군대의 대규모 항해에 대해서 반달 수뇌부가 전혀 낌새를 눈치채고 있지 못하며, 국왕 겔리메르는 태평스럽게도 카르타고에서 멀리 떨어진 섬마을에서 사냥 중이라는 것이었다.[31] 여전히 그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정통파 기독교인 니케아파였다. 이렇게 서로마에서의 이탈 이후에도 북아프리카 지역민들이 여전히 로마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했다고 하는 논점을 다룬 책이 2012년작 Jonathan Conant의'Staying Roman'이다.[32] 아드 데키움 전투 이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부르지 않은 듯하다. 다만 패배를 대비하여 스페인 행 선박에 왕실의 보물을 가득 실어놓긴 하였다. 그 보물도 불라 레기아로 왔다.[33] 동시에 사르데냐로 파견된, 키릴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군대는 반달 왕국 세력이 건재한 것을 확인하고는 카르타고의 벨리사리우스 진영에 합류하였다.[34] 한편, 승리 이후 동로마 군대는 버려진 반달 군단기지를 약탈하는 등 규율이 무너진 모습을 보였고, 이를 기록한 프로코피우스는 정말 벨리사리우스가 아니었으면 원정의 결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며, 벨리사리우스 마저도 운이 함께 따랐다고 평가하였다.[35]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하였던 그 도시. 현재 알제리 동북쪽 끝에 위치한 유적이다.[36] 겔리메르의 비서 보니파키우스는 그 선박을 타고 이베리아 반도의 반달족(가이세리크를 따르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의 후예)에게 위탁하려 하였으나 역풍이 불어 출항하지 못하였고 겔리메르와의 연락도 끊기자, 자신의 안전 보장을 담보로 보물을 벨리사리우스에게 인도하였다.[37] 마우레타니아 자방의 동부로, 현재 알제리의 서북, 중북부 지방에 해당한다. 알제, 오랑 등의 도시가 있다.[38] 아프리카 쪽의 세우타, 스페인 쪽의 카디스에 파견되었다.[39] 동로마 측은 그에게 왕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설득과 어서 항복하여 동료들을 비참함에서 구하라는 설득을 병행하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식량이 바닥난 이후 겔리메르는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고 하산하였다.[40] 536년에 로마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의 사촌 게르마누스가 진압하였다. 544년에는 킬리움 전투에서 총독 솔로몬이 무어 인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548년, 유능한 장군 요한네스 트로글리타가 무어 인의 침략을 일망타진하며 혼란을 종식시키게 된다.[41] 4세기 후반 다키아 일대에 정착하였다가 이후 훈족에 속하였는데, 5세기 중반에 훈족이 붕괴하자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침투하였다. 454년, 마크리누스 황제는 그들을 판노니아(헝가리 남부)에 정착시켰다. 레오 1세의 치세인 460년에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일리리아를 약탈했고, 결국 461년에 평화 조약을 맺어 안정시켰다.[42] 라벤나를 포위한 동고트 족이 함대를 만들어 라벤나를 완전히 봉쇄하는 데에는 2년이 걸렸고, 결국 493년 2월, 라벤나 주교의 중재로 오도아케르는 테오도리크와 이탈리아를 분할 통치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3월 초의 연회에서 테오도리크가 오도아케르를 직접 죽이는 것을 신호로, 동고트 족은 오도아케르 세력을 학살하고 이탈리아의 유일한 실권자로 올라섰다.[43] 그는 테오도리크의 신임을 받던 현지 로마인 관료였는데, 처형당하기 전 감옥에서 명작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을 저술하였다.[44] 테오도리크 본인은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비스 1세의 딸인 오도플레다와 결혼하였고, 두 명의 딸은 서고트 왕국과 부르군트 왕국으로 시집보내었으며 누이 아말라프리다는 반달 왕국의 군주와 결혼하였다.[45] 서로마의 멸망 이전인 465년에 태어난 로마인으로서 510년부터 536년까지 동고트 령 프로방스의 총독을 장기간 맡았다. 테오도리크의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었으나, 아말라순타의 살해 이후 고트족에 대한 충성을 재고하거나 철회한 듯하다.[46] 현재 알바니아의 제2 항구인 블로러[47] 그의 아들 마우리키우스가 동고트족의 계략에 빠져 전사하자, 분노한 문두스는 동고트 군대를 패배시키고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추격 중에 부상을 입고 결국 그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지휘관을 잃은 로마군은 철수하였다.[48] 비티게스는 아말라순타의 딸이자 테오도리크 대왕의 외손녀인 마타순타와 결혼하였다. 폐주 테오다하드는 라벤나로 도주하다가 536년 말에 살해되었다.[49] 사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지원 함대를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악천후로 그리스 남부에서 지연되고 있었다.[50] 로마시의 식량은 이제 강을 통해 오지 못하고 남쪽에 있는 항구인 안티움(현재 아니조)에서 하역된 후 육상으로 이송되어야 했다.[51] 이로써 로마시의 목욕탕은 완전히 폐쇄되었으며, 로마시의 상수도 시스템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부활하게 된다. 학자들은 이러한 인프라의 파괴 때문에 로마시가 이후로 중소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52] 이백 수십 년 전인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막센티우스 간의 로마 내전 중 유명한 전투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참조.[53] 물론 칼에 맞아 전사한 이도 수두룩 하였다.[54] 부르군디 왕국은 411년에 세워졌고 532년에 오툉 전투에서 프랑크 족에게 대패한 후 534년에 프랑크 왕국에 합병되었다.[55] 당시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여서 식량이 많이 필요하였다.[56] 그래서 지금도 밀라노는 3세기 초부터 백여 년 동안 궁정이 세워지는 등 이탈리아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7세기 이전의 유적이 신 로렌저 석주를 제외하곤 전무하다. 대리석 파편 몇개만이 고대의 대성당 위치에 나뒹굴 뿐이다.[57]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지원 병력이 무기력 했던 것도 잘못이긴 했다. 일부 학자들은 벨리사리우스가 나르세스를 좌천시키기 위해 일부로 밀라노가 당하게 놔둔 거라 하기도 하는데 신빙성은 낮다.[58] 벨리사리우스를 동부 전선으로 돌리려는 책략이었고 결국 성공하여 동고트 왕국의 부흥으로 이끌었다. 다만 그것이 비티게스 대에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라벤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다.[59] 클로비스 1세의 장남인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이다. 티베르 1세로도 불린다.[60] 벨리사리우스 본인이 포위 도중에 죽을 위기를 넘겼던 아욱시움에 대해서는 시냇물에 시체, 독초, 심지어는 생석회까지 넣으며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61] 카바드 1세에 이어 호스로 1세를 섬겨온 노장. 일명 아자레테스(Azarethes)[62] 그러나 548년에 라지카에서 일어난 반이란 봉기에 동로마 측이 군대를 파병하며 깨지게 된다.[63] 안코나에서 북쪽으로 50여 km 떨어져 있는, 라벤나로 가는 길에 위치한 항구 도시[64] 로마제국 쇠망사 및 비잔티움 연대기 출처[65] 고트족 진영에서 로마 측으로 전향한 장군[66] 약 10리터[67] 입을 줄이고자 하였던 벨리사리우스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상 시민들을 무책임하게도 토틸라의 관용에 맡기고 유기한 것이었다.[68]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그들은 이후 토틸라를 따라다니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다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이때가 1300여 년간 권세를 자랑하며 이어오던 로마 원로원의 소멸이라고 주장한다. 603년에 로마 원로원이 포카스 황제 부부의 석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지막 언급이 있었다. 630년에 원로원 회당이 교황 호노리오 1세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며 최종적으로 소멸된 듯하다.[69] 이탈리아의 장화 굽에 해당하는 동남쪽의 좁은 반도 지역. 브린다시오트란토, 바리 등의 도시가 있다.[70] 현재 이탈리아의 타란토 일대. 타란토 만의 중앙부이다. 동쪽의 아풀리아와 서쪽의 칼라브리아 지방과 접한다.[71] 본인이 먼저 사직서를 냈다고도 한다. 분명 2차 이탈리아 출정은 앞서 그가 이룩한 명성과 영광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원정이었지만 그 의의는 컸다. 벨리사리우스였기에 그렇게나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 정도 할 수 있었고 결국 이것은 한줄기 희망의 씨앗을 남기게 되어 이후 나르세스가 이끄는 군대에게 토틸라는 패사하고 이탈리아는 제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벨리사리우스 개인에게도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은 자신의 전술, 전략적인 면모를 완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사적 자리에서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을 중용해 준 황제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고, 유스티니아누스는 금을 입힌 벨리사리우스의 조각상을 세워주었다. 동상 개막식을 참관한 벨리사리우스는 남다른 감회를 품은 채로 자신의 궁전에 들어갔다.[72] 라벤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귀족 작위를 받고 은퇴생활을 하던 중 540년 즈음에 사망하였다.[73] 이 결혼은 그의 삼촌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주관하에 치러졌으며 게르마누스는 동고트와 동로마 모두의 계승자로서 인식되었다.[74] 동로마 측으로의 귀순 이후 538 ~ 542년간 이집트 총독을 역임하며 단성론자를 억누르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였고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75] 코르푸 섬 + 케팔로니아 제도[76] 본래 고트족 출신으로, 벨리사리우스의 근위대에 속하였으나 549년에 주군이 떠난 후 동족인 코틸라의 설득으로 인해 이전부터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인둘프는 동고트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다. 토틸라는 그에게 함대와 병력을 주어 535/6년에 동로마 제국이 점령한 달마티아를 습격하게 하였다. 인둘프는 자신의 전향을 눈치채지 못한 모비쿠룸, 라우리아테라는 두 요새에 위조된 벨리사리우스의 명령서를 보여주어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수비대 전원은 끔살되었고 동고트 군대는 주변 마을을 철저히 약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달마티아의 사령관이 군대를 파견했지만 인둘프는 그들마저 격파한 후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로마로 향하던 동로마 측 보급선 몇척을 나포하는 공까지 세워 토틸라에게 눈도장을 찍혔다.[77] 원래 동로마 장군이었다가 고트 진영으로 전향한 인물[78] 나르세스는 그들이 (좋은 대우에도 불구하고) 동고트 족과 토틸라에 동질감을 느껴 배신할 것을 우려하여 같은 부족끼리 묶지 않고 롬바르드 - 헤룰리 - 게피데 족의 순서대로, 떨어뜨려(dismounted) 배치하였다.[79] 게르만 족의 전통적인 왕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 의식이다. 많은 게르만 출신 병사를 거느렸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도 그렇게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었다.[80] 전대 토틸라 시절부터 이탈리아 남부가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전 왕국의 중심이었던 북이탈리아에는 540년 이후부터 동로마 군대가 잔뜩 주둔한 라벤나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81]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잘 방비된 요새였고, 아가티우스는 굉장히 잘 방비된 도시라고 가록할 정도로 견고한 성채였다.[82] 프랑크 족의 분할 상속의 결과물로, 랭스 왕국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와 얼추 비슷하다.[83] 그의 왕비는 랑고바르드족 왕녀였는데, 롬바르드 군대의 상당수가 동로마 용병으로 참전한 상태라서 이탈리아 땅에 군침이 돌았지만 프랑크 정규군을 파병할 수 없었던 것이다.[84] 같은 게르만계로서 프랑크에 부용(附庸) 부족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유목 내지는 반농반목집단으로서 문화 및 혈통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구려 밑의 숙신 - 말갈, 원 밑의 거란, 후금 - 청 밑의 몽골, 오스만 밑의 크림 타타르 같은 경우이다.[85] 나르세스는 북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파르마를 동고트 잔당 일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았으나 프랑크 왕국의 침입으로 계획을 연기하여야 했다.[86] 누가 봐도 후자에게 유리한 결정이었다.(브린디시, 바리, 타란토, 오트란토 vs 나폴리, 카푸아, 쿠마이, 살레르노, 아말피, 크로토네, 메시나)[87] 현 페사로, 리미니 근처에 위치[88] 동로마 진영의 용병 부대 중 훈족과 함께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였다.[89] 581년, 바스크 지방과 칸타브리아 일대도 평정되었다. 수에비 족은 468년의 패배 이후로도 갈리치아, 레온, 타호 강 북부 일대에 585년까지 존속하다가 서고트 왕국의 명군 레오비길드에게 패배, 흡수되었다.[90] 아를 ~ 나르본의 남부 해안 지대 제외[91] 그는 곧이어 은퇴하였고, 제국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554년 8월 13일에 면책 특권을 가진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그 해에 사망하여 고향으로 추정되는 이탈리아의 아르미니움(리미니)에 묻혔다.[92]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촌이자 카르타고의 군단병 반란을 진압한 게르마누스의 아들.[93]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키메르 인의 부족장이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는데 두 아들이 세력을 양분하며 그들의 이름을 딴 두 부족이 형성된 것 이라고 한다. 우투르구르 족의 수장 산딜릭의 말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우리 형제의 부족(쿠트리구르)을 절멸시키는 것은 공정하지도, 옳지도 않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언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며 같은 의복과 생활방식을 갖춘다. 비록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활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친척이다.'[94] 크림 반도를 경계로 서쪽의 돈 강몰다비아 일대는 쿠트리구르, 동쪽 볼가 강 일대는 우투르구르 족의 영역. 여담으로 동로마 역사가들은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을 13개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그들 외에도 오노구르, 위구르, 사비르, 불가르, 에프탈, 백훈족 등이 있었다.[95] 대표적인 친로마 파였던 그는 반달 전쟁의 아드 데키움 전투 (533년)에서 600명의 마사게타이/훈족 궁기병대를 이끌고 동로마 군대에서 활약하였다.[96] 역사가 아가티우스에 의하면 벨리사리우스는 근처의 농민들에게 부탁하여 나무를 때려 숲에 먼지를 일으키게 하였다. 따라서 쿠트리구르 족에게 동로마 군대의 수를 부풀리게 하였다. 근처를 지나던 훈족이 먼지를 보고 동요하는 사이에 습격하여 4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97] 이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와는 달리 일자무식이었던지라 그리스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98] 여담으로 아카데미아와 콘스타티노폴리스의 국립대학은 공존하는 기간 동안 학자들 간의 상호 교류가 많았다고 사료된다.[99] 헤라클리우스는 즉위하기 직전 카르타고 총독이었고 그곳 병력을 토대로 포카스를 타도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