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낭

 


洪娘

생몰년도는 미상으로, 조선 선조대의 인물이며 직업은 기생이다.
조선시대 뛰어난 문예작품을 남긴 기녀로,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떠오르는 인물로, 특히 홍랑의 경우에는 기생으로서의 정조를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 3당 시인 중 하나였던 고죽 최경창이 1573년(선조 6년) 북도평사로 발령받아 임지로 갈 때, 함경도 봉원군수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고 이 때 봉원관기(官妓) 홍랑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하지만 관기였던 신분 탓에 최경창을 따라가지 못했고, 첫 만남은 짧게 끝나고 만다. 2년 후인 1575년 최경창은 함경도에서 돌아와 큰 병을 얻었는데[1],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관기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2] 밤낮으로 길을 걸어 7일만에 서울에 도착해 최경창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덕분에 최경창은 쾌차했으나 사사로이 관기를 불러들였다는 죄로 탄핵을 피할 순 없었다. 이후 홍랑은 다시 함경도 봉원으로 돌아갔고, 최경창은 그녀에게 작별선물로 <증별>이란 시 한 수를 건네주는데 이것이 이들의 살아생전 마지막이었다.
1583년 최경창이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홍랑은 시묘살이를 자처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용모를 훼손해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고 오로지 시묘만 했는데,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3년 후에도 그 근방에서 묘를 지켰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시를 챙겨''' 고향으로 피난, 그 후 난이 가라앉자 되돌아왔다. 홍랑 사후에는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묻혔다. 이건 정말 엄청난 건데, 그 고지식한 양반가에서 기생을 가문의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대우해줬다는 거다! 더군다나 관에 속한 기생의 경우에는 원래 빼돌리는 것 자체도 불법이었다.
홍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다음 시조는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묏버들가(歌)>, 묏버들 가려 꺾어로 불리는 이 시조는 원래 제목이 없었으나, 훗날 최경창이 제목을 붙여준 것이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묏버들 골라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자시난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님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밤비에 새잎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KBS에서 방영했던 역사 프로그램인 <한국사 전(傳)> 50회에서 최경창과 홍랑의 기막힌 사랑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다.

[1] 회은집에 '을해년(1575년)에 내(최경창)가 병들어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란 기록이 나온다.[2] 이해하기 쉽게 위수지역이라고 설명했는데, 실제로 당시 양계(평안도함경도) 지방민은 그 지역을 벗어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하물며 관에 매인 몸인 관기는 오죽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