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버들 가려 꺾어

 

1. 개요
2. 내용
3. 원문
4. 기타
5. 바깥고리


1. 개요


조선 선조시기 함경북도 홍원의 기생 홍랑(洪娘)이 조선 중기 8대 문장가로 꼽히는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과 이별하며 그 아픔을 지은 시조.

2. 내용


기생 홍랑(洪娘)이 당시 연인이었던 고죽(孤竹) 최경창(1539~1583)과 이별하며 지은 한글 시다.
홍랑은 홀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는데 어머니가 오랜 병석에 있어 걱정하던 중 80리 떨어진 곳에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열두 살 나이에 꼬박 사흘 밤낮을 걸어 찾아갔다.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나귀 등에 홍랑을 태워 왔으나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홍랑이 쓰러졌고 의원은 홍랑을 간호한 후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머니 장례를 치렀다. 홍랑은 그 후 석달 동안 무덤을 지켰다 한다.
천애고아가 된 홍랑을 불쌍히 여긴 의원이 데리고 와 수양딸처럼 키웠으나 홍랑이 어머니 무덤이라도 자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해 붙잡을 수 없었다. 이후 홍랑은 타인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기생이 되었고 곧 유명해졌다.
숱한 유혹들을 뿌리치다가 1573년 가을 고죽이 북평사(北平使)로 왔을 때 그에게서 얼굴도 모르는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며 품에 안겼다. 이날부터 고죽을 모시는 일에 전념했으나 이듬해 봄 고죽이 서울로 가게 되었다. 쌍성에서 작별하고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렀을 즈음 날도 저문데 비마저 뿌렸다. 그때 읊은 시로 전해진다.

3. 원문


묏버들갈ᄒᆡ것거보내노라님의손ᄃᆡ
擇折楊柳寄千里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자시ᄂᆞᆫ창밧귀심거두고보쇼서
人爲試向庭前種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예새닙곳나거든날인가도너기쇼서
須知一夜生新葉
밤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나인가 하고 여기소서
折楊柳寄與千里人
버들가지 꺾어서 천 리 먼 곳 임에게 보내니
爲我試向庭前種
나를 위해 시험 삼아 뜰 앞에 심어 두고 보세요
須知一夜新生葉
행여 하룻밤 지나 새잎 돋아나면 아세요
憔悴愁眉是妾身
초췌하고 수심 어린 눈썹은 첩의 몸인 줄을

4. 기타


이후 두 사람이 작별하고 1년 남짓 지나 고죽 최경창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홍랑이 7일 밤낮을 걸어 서울로 갔다. 그런데 그때 함경도·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는 '양계의 금'이 시행되고, 거기다 명종비 인순왕후의 승하로 국상마저 겹쳤다. 이를 구실로 이런 상황에서 함경도 기생과 만났다는 이유로 고죽은 관직이 삭탈되고 홍랑은 강제로 귀향해야 했다.
이 두번째 이별 때는 반대로 최경창이 홍랑에게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보내며 슬픔을 표현했다.
玉頰雙啼出鳳城
고운 뺨에 눈물지으며 한양을 떠날 때
曉鶯千爲離情
새벽 꾀꼬리 저렇게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羅衫寶馬河關外
비단옷에 명마 타고 하관 밖에서
草色送獨行
풀빛 아득한 가운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
相看脈脈贈幽蘭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 그대에게 드리네
此去天涯幾日還
아득히 먼 길 이제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 아득하겠지
최경창은 1582년 종성 부사로 함경도에 다시 파견됐으나 부임과 동시에 객관에서 객사하였고, 홍랑은 최경창의 유품을 전한 후 최경창 무덤 아래서 생을 마감했다. 해주최씨 문중은 기생인 그녀를 가문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홍랑의 시신을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양반 해주최씨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1969년에는 해주최씨 문중이 그녀의 묘 앞에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를 세웠다.

5. 바깥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