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황진이(黃眞伊·1506~1567)
1. 개요
조선 전기의 시인이자 예술가.
박연 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 삼절"로 불렸다.[1] 서경덕과의 일화, 백호 임제가 황진이의 묘를 보고 시조를 읊었다는[2] 등의 이야기로 보면 중종 시기의 인물인 듯하다.
2. 생애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꼽힌다.[5][6]
실존 인물 여부조차 불분명한 논개와 달리 황진이는 실존 인물일 가능성은 높은데 어디까지가 진짜 황진이의 모습이고 어디부터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체를 알 방법이 없다.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 많은데 이전 버전에서는 황진이가 이패 기생(은근짜)이었다고 나와 있으며 기생이 일패, 이패, 삼패로 분류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라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기생이라는 직업이 후대로 갈수록 변화했고[7] 화제 속 인물인 만큼 오늘날의 톱스타 연예인처럼 루머도 많았기 때문에 황진이의 남성 편력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가려내기가 어렵다. 어찌 보면 유명세가 오히려 독이 되어 남겨진 기록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출생, 동네 총각의 죽음 등의 얘기를 보면 황진이가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이다. 1506-1567이라는 생몰년도조차도 확실하지는 않다.
대체로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황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 한다. 하지만 기록을 계속 더듬어 올라가면 사실인 것인지 의심스럽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허균의 성소부부고(1613년)에서는 황진이를 맹인의 딸이라고 소개한다. 이후 10년~20년 뒤의 기록에서는 어머니 '현금'이 빨래를 하다가 지나가던 남자에게 물을 건네줬는데 다시 받아 마신 물이 술로 변해 있었으며 사랑에 빠져 황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00년이 지난 기록에서는 한 소년이 '진현금'을 희롱하자 태기가 있어 황진이를 낳았는데 사흘 동안 향내가 가시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어린 시절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시, 서예,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황진이의 기록들을 살펴볼 때 가장 유명한 황 진사 이야기는 19세기에 나오지만 황진이의 성씨가 황씨라고 나오는 최초의 기록은 18세기 중후반 이덕무의 청비록에 처음 송도 기생 황진으로 소개하면서부터인데 이덕무가 이름난 서적 수집가이자 독서광이었던만큼 당대 많은 서적들을 통해서 종합한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라 여기고 황진이의 성씨를 황씨라고 본다고 할 수 있다.
15살 때 어느 동네 총각이 황진이를 보고 한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렸고 중매를 넣었지만 황진이의 어머니가 거절하였다. 결국 동네 총각은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를 치르는 도중 상여를 옮기는데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자 황진이가 나와서 관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고 나서야 상여가 움직였다.[8] 사건 이후 황진이는 자신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기는 어렵다고 하며 기생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해 기생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황진이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고 종모법에 따라서 황진이도 기생의 길을 가야 했다.
그 뒤 '명월'이라는 이름으로 기생 생활을 시작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통한 초특급 기생으로 명성을 날리며 저명한 문인, 학자들과 교류했고 어느 정도 사회와 남자들에 대한 반항적인 사고가 있었던 듯하다. 10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하며 생불이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 선사를 유혹해 파계시켜 버리고 왕족 벽계수[9] 가 한양으로 돌아가려 하자 단장을 한 뒤 말을 타고 벽계수의 가는 길 앞에 나타나서 "청산리 벽계수야~"라고 시작되는 시조를 읊자 벽계수가 놀라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시인 소세양이 황진이와 30일 기간을 정해놓고 계약 연애를 요청했지만 30일 후 헤어질 때 소세양이 사랑 앞에 무너졌다는 야사도 있다.
벽계수와 지족 선사를 무너뜨린 뒤 송도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서경덕에게 찾아가 서경덕도 유혹하려 했지만 보통 내공이 아닌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도 덤덤했고 서경덕에게 감탄한 황진이는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황진이의 유혹에 겉으로는 덤덤했다지만 사실 서경덕도 황진이를 내심으로는 좋아했다는 설이 나도는데 황진이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는 시조가 서경덕 문집이 아니라 가집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후세 가객들의 희작일 가능성이 크다. 17세기 이전의 시조들은 사대부들의 문집이나 재가본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 시조가 구술 전승에서 벗어나 문헌에 본격적으로 수록된 시기는 김천택, 김수장의 활동 이후인 18세기 중엽이다. 야사이므로 애초에 둘은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
서경덕이 세상을 떠나자 기생 일을 접고 은둔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때는 풍악을 울릴 것이며 살아 생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남자들을 애태우게한 죄가 있으니 관을 쓰지 말고 송도 밖의 사천 모래밭에 그냥 던져서 까마귀밥이 되게 해 방탕한 여자들에게 경계로 삼으라고 했다는 유언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설"일 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설이든 실제든 황진이가 까마귀밥이 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송도 사람들이 시신을 고이 안장하여 현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 묘비명은 한글로 "명월 황진이의 묘"라고 되어 있고 북한에도 일반 유적으로 지정되어 묘역도 잘 정돈되어 있다. 야사에는 묘 앞에 조그마한 샘이 하나 생겨났는데 작은 바위 2개 사이로 물이 조금씩 솟아나왔다고 한다. 목이 마른 과객이 물을 마시려면 우선 무릎을 꿇어야 했을 것이고 과객이 물을 마시는 모습이 흡사 여인의 허벅지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것과 같았다는 이야기가 있다.[10]
3. 여담
선조 때의 문인 임제(1549년 ~ 1587년)는 황진이의 무덤이 초라하게 있던 걸 보고 안타까워하며 시를 썼는데 결국은 세월가면 아무리 먼치킨도 초라하게 남을 뿐이라는...허무한 시. 일설에 의하면 임제는 이 시를 짓고 말한 것 때문에 벼슬에서 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국문학자 김두봉은 과거에 개성에 갔을 때 황진이의 무덤에 헌화하고 술을 부은 뒤에 절을 했다고 한다. 국문학자로서 황진이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행동이었지만 후에 김두봉이 연안파로 몰려 숙청 당할 때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국의 부수상이라는 자가 기생 년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따르고 절까지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였다나?[11] 다만, 이것은 당시 북한의 상황을 볼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김두봉이 죽은 건 1961년이고 실제로 숙청된 건 1958년인데, 김두봉의 숙청은 그가 연안파였기 때문이다.[12]
뛰어난 시의 재능으로 여러 걸작 시와 시조들을 남겼는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라든지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같은 시조들이 유명해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있고 수능에도 출제된 바가 있다. 그 외에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같은 시들을 남겼다.
지금 있는 황진이의 묘는 1999년 김정일이 개성의 군부대를 시찰하다가 개성의 유명한 인물들의 묘를 단장하라는 명령을 내려 다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4. 대중매체
재능과 미모를 겸비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간지라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황진이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이 나왔고 사극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북한의 홍석중[13] , 남한의 전경린, 최인호, 김탁환이 황진이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쓴 대표적 남북한의 작가들이고 도금봉, 김지미, 장미희, 이미숙, 하지원, 송혜교 등의 내로라 하는 여배우들이 황진이 역을 한 바 있다.
무한도전 등지에서 박명수가 자주 우려먹는 개인기로 황진이댄스가 있다.
점프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나왔다.
TWICE의 Cheer Up 뮤직비디오에서 다현이 패러디하였다.
한국 소설 괴물에서는 자신의 전생이 황진이었다고 굳게 믿는 등장 인물이 나오며 실제로도 기생의 길을 걷는다. 그것도 현대 한국에서. 하지만 말이 기생이지 사실상 지역 부흥을 위해서 뛰는 천재 여걸로 묘사된다. 이외수 특유의 문학만능주의를 아주 잘 보여주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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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5에서 어째서인지 항해사로 등장. 아무래도 왕실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에서 제일 잘 알려진 여성이며 기녀라 한 집안에 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활용이 가능해서일 것이다.
와이파이 한국인의 세번째 인물로 생애가 다뤄진다. 성우는 김자연. 첫이별 후에 시를 짓는 것으로 각색되는데, 그 시는 "어져 내 일이야"이다. (본편 8화 기준.) 10화 기준 벽계수가 등장하며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하지 마라"에 대한 암시가 나왔다. 13화에서 마침내 황진이가 벽계수를 향해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하지 마라"를 창작하는 것으로 두번째 시가 각색된다. 창작곡으로 바뀐 브금이 나오는 건 덤. 단, 황진이가 읽지 않으며 해설이 대신 읽는다. 29화에서 '동짇날 기나긴 밤을'이 나온다.
5. 황진이 일화가 기록된 문서
중종 시대(1488년 ~ 1544년)의 인물이라고 하지만 최초의 기록은 1611년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부터 나타난다. 구전되다가 각색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황진이의 실존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활동상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많다.
- 허균의 《성소부부고》 〈성옹지소록〉 (1611년)
- 유몽인의 《어우야담》 (1621년)
- 이덕형의 《송도기이》 (1631년)
- 임방의 《수촌만록》 (1724?년)
- 김이재의 《중경지》 (1824년)
- 서유영의 《금계필담》 (1871년)
- 김택영의 《송도인물지》 (1896년)
6. 관련 문서
[1] 그런데 송도 삼절을 정한 사람이 황진이 본인이다. 스스로를 송도 삼절 중 하나로 정한 것이다.[2]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하는 시조. 이 시조를 읊은 것 때문에 임제는 조정에서 탄핵을 받을 정도였다.[3] 남겨진 작품은 동생인 허균이 기억을 모아 정리한 것인데 중국의 시가 많이 들어 있다.[4] 그 시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만큼 유명하다.[5]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넣어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황진이, 이매창 두 사람만큼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허난설헌, 김부용, 홍랑 등을 포함해서 3대 여류시인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김부용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허난설헌은 표절 논란이 조선 시대부터 제기되었다.[3] 홍랑은 전해지는 시가 묏버들가 1수 뿐이라 조금 애매하다. [4] 황진이는 실존하기는 했는데 실체가 불분명하다. 남아있는 기록상으로는 이매창이 가장 뚜렷하다.[6] 황진이에 대해서도 실체가 불확실한 기록들 때문에 신뢰도가 낮아지기는 하지만 일단 황진이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작품들로만 판단한다면 뛰어난 시인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7] 기생 관련 논문은 거의 대부분 조선 후기부터 일제 시대사이다. 조선 전기 기생은 제대로 된 사료가 부족해 상세하게 추적할 방법이 없다.[8] 다른 설에 따르면 속치마를 벗어서 상여를 덮어 주었다고 한다. [9] 이름은 종숙(終叔)으로 1508년에 태어났고 죽은 해는 알 수 없다. 세종대왕의 증손자이며 영해군 당(瑭)의 손자이자 길안정(吉安正) 의(義)의 아들이다. 나중에 벽계도정으로 승작(陞爵)되었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90번지에 그의 무덤이 있고 남계, 여계 후손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본 문서에서는 벽계수가 혼원渾源이라고 쓰였지만 그의 이름은 渾源이 아니라 混源이고 연산군에게 갑자사화로 살해되었는데 황진이의 출생년도를 생각하면 벽계수는 이혼원이 아니라 이종숙이다. 당시 이종숙은 정4품의 종친에게 주는 벼슬인 수(守)를 받고 봉호가 벽계라서 흔히들 벽계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진이의 시조에 나오는 벽계수(碧溪水)는 그걸 노리고 일종의 중의적 표현을 쓴 것.[10] 야사는 야사일 뿐이다. 실제 무덤이 있고 무덤 밑에는 2개의 바위니 샘이니 이런 거 없다. 하지만 지금 있는 황진이의 묘는 1999년 개성을 찾은 김정일의 명에 의해 재보수된 것이고 다른 곳에서 이장해 왔는지는 알 길이 없으니 남북통일이 된 후 발굴을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11] 사실 북한에서 '존경', '동경'은 오직 김씨일가에게만 할 수 있는 표현이다.[12] 북한에서는 1956년부터 김일성을 주축으로 한 만주파가,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등 제2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했다.[13] 소설가 홍명희의 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