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삼국지)
1. 서진의 인물 1
和嶠
(? ~ 292)
서진의 인물. 자는 장여(長輿). 화유의 아들, 화욱의 형이자 화흡의 손자.
여남군 서평현 사람으로 젊어서 풍채와 인격이 있고 스스로 깊이 자중해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조정과 민간에서 그가 능히 풍속을 정돈하고 인륜을 다스릴 것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유애가 화교에 대해 우뚝 서서 천 길의 소나무와 같으면서 비록 남다르게 굉이가 많으면서 큰 집을 짓는데 쓴다면 들보 노릇을 하겠다고 했으며, 여러 차례 벼슬이 옮겨져 중서령이 되면서 사마염이 그를 아꼈다.
그 전까지 중서감과 중서령이 나란히 함께 수레를 타고 조회에 오도록 되어 있었지만 중서감이 된 순욱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수레의 자리를 혼자 차지했으며, 이 일로 인해 중서감과 중서령이 따로 수레를 타고 오게 되었다.
왕융과 비슷한 시기에 모친상을 당해 곡읍을 하면서 예를 갖추었으며, 예법에 따라 죽을 가려 먹어 사마염이 그를 걱정했다고 하며, 초췌함이나 애통함은 왕융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마염이 순욱과 함께 동궁전으로 보내 태자 사마충의 언행을 살피게 했으며, 사마충의 수업이 끝나면 순욱과 함께 사마충과 점심을 먹었다. 사마충이 매우 우매해 순욱과 상의했지만 순욱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해 사마충이 학문에 상당한 진보를 이뤘다고 보고했는데, 화교는 침묵하고 있다가 어질고 후덕한 태자의 심성이 종전과 같다고 모호하게 대답했다.
죽서기년이 발견되자 순욱, 숙석 등과 함께 죽간을 정리했으며, 이후에 배해를 태보, 장화를 소부로 임명할 때 화교는 소보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산은 왕에게 버금갔지만 인색해서 사람들이 전벽이라 불렀다.
285년에 시중으로 있을 때 왕제를 사촌형인 왕우가 헐뜯으면서 사마염이 소원하게 여겼다가 파직했는데, 사마염이 왕제를 나무란 후에 관직을 주려고 할 것을 얘기하자 왕제는 준수하고 분명하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그 말대로였다.
이후 상서로 임명되었다가 290년 가을 8월 26일에는 소보로 임명되었고 292년에 사망했다.
가전체 문학작품인 공방전에 잠깐 언급되는데, 엽전으로 수많은 재산을 모아 노포에게 비난을 받는다.
2. 서진의 인물 2
華嶠
(? ~ 293)
자는 숙준(叔駿). 화표의 셋째 아들이자 화흠의 손자.
평원군 고당현 사람으로 재주와 학문은 깊고 넓으면서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똑똑했으며,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자 벽소되어 대장군연속이 되었다가 상서랑에 임명되었다. 거기장군의 종사중랑으로 옮겨졌다가 265년에 서진이 건국되자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고 태자중서자가 되었다가 안평태수로 임명되었지만 늙은 어머니가 있어 가지 않았으며, 산기상시, 중서저작, 국자박사, 시중 등을 역임했다.
289년에 사마염이 연회의 즐거움에 빠져 큰 질병에 대한 근심이 있었고 화교는 양생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라고 진언했지만 사마염은 병은 금방 나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사마염은 290년에 사망했으며, 291년에 화교는 선창정후에 봉해졌다가 이 해에 양준이 주살되자 낙향후로 고쳐 봉해졌고 상서로 옮겼다.
화교는 사물에 대해 널리 들은 것과 아는 것이 많았고 쓴 글은 사실에 충실했고 훌륭한 역사가의 뜻이 있어 화교는 비서감에 임명되면서 산기상시를 더했고 중서로 돌아갔다. 화교는 절에서 중서, 산기, 저작의 문서들을 모았고 법도, 음률, 천문, 산술 등에 대해 요점을 모아 문하의 사람들에게 편집해 모으도록 해 정리했다.
처음에 화교는 한기가 번잡하고 문체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낭의 일로 관제에 대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낙양에 보관된 문서를 모두 볼 수 있어 한기에 대한 개정을 할 수 있었고 순욱, 화교, 장화, 왕제 등은 모두 화교의 문장을 칭찬했다. 순박하면서 핵심을 파악하고 시종일관으로 사실에 입각하고 쓴 문체로 황실 도서관의 책으로 삼아야 한다고 평가받았다.
이후 태위에서 사마량, 위관 등이 동궁부로 갔고 사마량, 위관 등은 동궁에서 역사 강의를 했는데, 화교의 한후서를 황실 도서관에 들였고 화교가 저술한 논의, 난박, 시부 등이 수십만 마디가 있었다. 화교는 관제에 대해 상주해 황태자를 동궁으로 되돌아가게 하자고 제안하거나 비를 내리는 행사, 인재 등용, 치수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으며, 화교는 우가 물에 대한 관리를 따로 두는 등 여러 가지를 제안했고 화교가 제안한 것은 대부분 채용되었다.
293년에 사망했고 소부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간(簡)이다.
화교는 술을 즐기는 것을 항상 취해있었고 편집한 것 중에서는 십전은 완성하지 못했으며, 십전은 하초가 상주해 그의 아들들과 사관이 협력해 완성했으며, 화교가 쓴 저작들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당나라 때까지 50여권만 현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