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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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서진의 황족으로 자는 자익(子翼). 봉토는 여남군(汝南郡)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으로, 작위가 왕(王)이어서 모두 더해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이다.
사마의의 3남이자 사마주, 사마경, 사마준의 친형이며,[3] 생모는 복부인으로 사마사, 사마소의 이복동생, 사마간과는 이복 형, 서진 무제 사마염의 삼촌.
212년 ~ 226년 사이 출생인데, 226년생으로 따져도 66세에 죽은 게 된다. 그래서 보통 220년간 출생하여 나이로 봐서 이복형 사마소와는 나이차가 크고, 동복동생 사마주와는 터울이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좋은 근거로 어머니 복부인이 사마주부터 사마준까지 세 명의 동생을 227년부터 232년 초 사이에 낳았다는 점이 있으며, 또 사마량이 212년 ~ 219년 사이에 태어났다면 사망할 때의 나이가 칠순을 넘게 된다. 이복형 사마사는 47세, 사마소도 54세, 친동생 사마주도 56세, 또 다른 친동생 사마준도 54세에 죽었는데, 이 사람들이 장수한 건 아니지만 가장 장수한 사마간이나 아버지 사마의도 여든을 못 넘기고 사망한 상황에서 사마량만 독보적으로 칠순을 넘어서도 멀쩡히 살아있다가 끔살 당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런데 끝내 끔살당했다. 안습.
2. 생애
2.1. 무제 시절
위나라에서는 동중랑장을 지내다가 서진이 세워지면서 265년에 부풍왕이 되었다.
270년 6월에 호열이 선비족이 일으킨 독발수기능의 난을 토벌하다 전사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때 사마량은 장군 유기를 파견해 구원하려고 했지만 유기가 관망만 하면서 만곡퇴에서 후퇴하고 만다. 이 일로 호열이 전사하면서 장수 유기가 참형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유기를 통제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허물이 나온 것이니 그의 죽음을 면해달라고 해 유기는 죽음을 면하고, 그 대신 평서장군으로 강등될 뻔 했던 사마량은 아예 면직되었고 작위도 잃었다.
그 뒤 2품인 무군장군 자리를 받았고 몇 년 내 다시 시중(侍中) 직분을 갖게 되어 실권 있는 문관을 겸하게 된다. 서진 조의 제일 중요한 기구는 상서대[4] , 중서감[5] , 문하성이었는데, 문하성은 황제의 측근 고문 기구다. 당시 사마량은 대체로 온건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평가되었다. 사마량은 황실 내에서 명망이 있고 성품이 무던한 자로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의 중요한 정치적 명령과 군권에 관한 문제를 조언했다. 사마염은 이후 사치와 타락으로 끝을 보는 인물이지만 천하 통일 이전인 이때까지는 어머니인 문명왕후 왕원희의 눈치도 보고 황실 어른인 사마량의 말도 들었다. 이 시기 시중으로서는 꽤 잘해냈기에 황실에서는 사마량을 신임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진의 오나라 정벌이 한창이던 277년 8월 21일, 여남왕, 진남대장군, 도독예주제군사로 옮겨 봉해진다. 원래 여남은 태수 부임하던 임지였는데 봉국으로 하고 사마량을 왕으로 보내며 중원의 방어 및 역도 토벌을 담당하게 하였다. 본래 문관에 가까웠던 사람이지만 중원을 방어하기 위해 일단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주요 임지에 보낸 것인데, 곧 다시 시중과 무군대장군을 겸직하게 하여 오를 멸망시키는 과정 내내 후군장군을 겸하게 하였다.
282년에 태위, 녹상서사, 영태자태부가 되었다. 명예직으로서는 가장 높은 태위 자리에 올랐으며, 동시에 황태자의 스승이 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는 것은 상당한 대우였다. 또한 시중 역할 역시 옛날과 같이 했다.
따라서 계속 당대의 시중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마량은 통일 초대 황제인 사마염의 명과 암도 상당수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하성은 서진 시대 군사 조언을 많이 내놓았는데 사마량은 사마염이 강동 지역을 병탄한 일이나,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한 것, 양호와 두예를 기용한 일 등 좋은 결단에도 많이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마염이 갖은 사치로 한심한 개판을 벌일 때도 말리거나 독설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황제의 삼촌이자 심지어 신임까지 받고 있었던 사마량이 뭘 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사마염이 독설이나 직언을 하는 신하에게 그다지 혹독하지 않은 성품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이후, 구품관인법이 완전히 막장화 되면서 황제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모두 사치하게 되고, 황제의 측근이나 중정(中正)이 뇌물을 받는 일마저 점차로 늘어나자 도저히 참지 못해 284년에는 두예, 유위, 위관 같은 직언하는 문관들과 함께 구품관인법의 폐지를 건의하고 사회 풍조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러나 황제 사마염은 사치를 금지하겠다고 말로만 밝히고 처벌도 하는 척만 하였다. 사마염은 친족들에게 특히 온정적인 황제였는데 다른 문벌이나 사마씨들의 죄상에 대해서는 책임을 거의 묻지 않았다. 물론 그 덕에 사마량 또한 책임질 일이 있어도 금방 복직되곤 했으므로, 결국 사마량도 다른 위관들에 비해 그다지 강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사마량은 그 사람 좋다는 평가대로 좋은 말 할 땐 좋은 사람이지만 남이 듣기 싫은 말, 싫은 말을 못해서 망했단 평가도 있다.
2.2. 무제의 죽음
289년, 황제 사마염이 병이 들자 황실은 이듬해 혜제가 될 태자 사마충의 섭정을 찾고자 한다. 사마충은 태자이긴 하나 지적장애를 의심받는 모자란 인물이었고, 사마염의 아내인 황후 양지의 아버지 양준과 황실의 큰어른인 사마량 양쪽을 두고 사마염은 고민한다. 이 일로 양준은 사마량을 경계하게 된다. 양준은 이후 중앙에서 사마씨 쫓아내기에 착수하게 된다. 사마량은 이때 이미 노인이었는데, 11월 23일 시중 자리를 유지만 한 채, 대사마, 가황월, 대도독, 독예주제군사로 임명되어 허창으로 보내진다. 예주의 군사 지휘를 맡겨 파견한다는 것이었는데, 양준은 이런 저런 구실로 라이벌 세력을 죄다 조정에서 쫓아냈다. 다른 사마씨들도 제국의 다른 주요 도시로 파견되었다.
290년, 사마량이 임지로 출발하기 직전, 무제(사마염)는 잠시 차도가 있어 정신을 차린다. 양준은 사마염이 위중한 사이 황제의 가까운 신하 모두를 이미 자신의 심복으로 바꿔 놓았다. 사마염은 새로 채용된 양준의 심복들을 보고 무척 정색하며 어떻게 이렇게 마음대로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 화를 내고는, 중서감 사람들에게 급히 유서가 될지도 모를 새 조서를 만들게 했다. 사마염의 유언은 사마량을 여남왕으로 보내지 말고, 사마량으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고 양준은 그를 도우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준은 중서감에 있는 자기의 심복 화이에게 조서를 엿보게 시켰다. 내용을 확인한 양준은 유조를 내놓지 않고 버텼으며, 사마염이 의식이 없는 동안 양준의 딸이자 황후인 양지가 사마염에게 어찌저찌 형식적 동의를 얻어내 새 조서를 내리니 그 내용인즉 "사마량은 다시 떠나고 섭정은 양준 혼자 맡아라"였다. 결국 사마염은 "여남왕은 아직 안 왔는가?"라는 말만 남기고 사마량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혼수상태에 빠져 죽고 만다.
황제의 죽음 이후 사마량은 양준이 자신을 의심하는 걸 두려워하여 영구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저 병을 핑계대며 대사마문 밖에서 슬피 곡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마량은 성 밖에 군영을 만들어 놓고 표문을 올려 장례라도 가게 해달라고 양준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양준은 사마량이 대사마문 밖에 통곡하는 것을 오히려 의심했는데, 양준은 두려운 마음에 자신의 딸인 태후에게 말하여 혜제 사마충에게 토벌 조서를 내리게 하였다. 석감과 장소에게 조서를 내려 능묘를 만들던 병사까지 다 빼서 먼저 사마량을 토벌하라는 것이었다.
이 혼란에 정위 하욱 등 많은 사람들은 사마량에게 역으로 무리를 이끌고 가 양준을 폐하라고 권했다. 양준이 겁을 낸 것도 무리가 아닌 게, 양준은 빈전을 지킨다며 황국의 정전인 태극전에 들어앉아 황제와 다름없이 구는 중이었으므로 벼르는 사람이 많았다. 군사를 가진 사마량이 역으로 토벌한다면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마량은 끝내 직접 궁으로 쳐들어가지 못했다. 사마량은 사람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그저 본인이 밤중에 허창으로 피하였다.
2.3. 혜제 시절
그 뒤 양준은 1년간 국가대권을 쥐고 나라를 흔든다. 291년 그 유명한 혜제의 황후 가남풍의 계략에 휘말린 양준이 궁중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고 양씨 태후가 폐위되는 일이 생기자, 사마량은 다시 혜제 사마충의 태재(太宰), 즉 천자의 스승이자 녹상서사가 되어 불려온다. 여남왕 사마량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황후 가남풍과 초왕 사마위가 양준을 쳐서 어부지리로 양준도 사라지고, 복귀도 하게 된다.
사마량은 돌아오자마자 양준을 주살한 사람들의 공로를 논의하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한없이 관대하게 논의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사병집단의 하급 장수들 중 군후로 책봉된 사람이 1,081명이나 되었다. 사마량의 고질병인 관대함이 또 너무 심해져서 부함이 공로 없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면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사마량은 듣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의 공로를 논의한 일로 인망을 얻기는커녕 반대 효과를 거두었는데, 너무 개나소나 상을 줬더니 저렇게 다 주는데 왜 나는 빠졌느냐고 오히려 상 못 받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마량은 아직 21살 밖에 안 되는 사마위가 양준을 쳐낸 일로 너무 안하무인으로 굴고 괴팍하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일 때문에 고심한다. 사마위는 혜제 사마충의 동생인데, 가남풍이 양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일 때[6] 부름에 응해 시키는 대로 양준을 몰아낸 뒤 젊은 나이에 거리낄 게 없이 구는 중이었다. 위장군이 되었고 북군중후를 통솔해 금군도 통솔 중이었으니 군권을 독점한 셈이다.
사마량은 손주뻘인 사마위를 쫓아내고 배해를 북군중후 자리에 대신 앉히려 했다가 사마위의 거센 반발로 실패한다. 그러자 사마량은 태보 위관과 논의하여, 여러 친왕들을 봉국으로 떠나게 만든다. 여남왕이었던 자신의 사례를 들어 보내버리니 안 갈 수도 없었는데, 사마위는 몹시 분하게 생각해 사마량을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문제는 황후 가남풍 역시 사마량을 원망하고 있었단 것이다. 애초에 명망이 높은 사마량이 편치도 않았거니와, 사마량이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으로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마침 양준과 친했던 기성이 사마량과 위관을 참소하는 일이 일어난다. 사마위는 이때다 하고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자 가남풍을 부추긴다. 가남풍 역시 황제의 명을 빙자해 사마위로 하여금 사마량을 살해하게 시킨다. 결국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간 권력을 잡았던 그는 사마위의 군사들에게 잡혀 죽게 된다.
기막힌 것은 이때조차 사마량은 싸움을 거부했단 것이다. 장하독 이룡, 장사 유준 등이 끝까지 사마위와 싸우고자 했지만 사마량은 끝내 거부한다. 그러나 양준 때와 달리 사마량은 이번엔 목숨을 건지지 못한다. 사마량은 안온한 노년을 보내지 못하고, 적노장군 이조에게 붙잡혀 참수되는 것으로 생을 마친다.
진서에 따르면 참수 전 사마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에 오히려 병사들이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사마위의 병사들은 더위가 심해지자 사마량에게 부채를 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해가 중앙에 이르러도 감히 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자, 사마위는 친히 나와 명을 내렸다.나에겐 평생 충성 이외에 두 마음이 없었다, 누명으로 죽지만 허물은 없다.
결국 사마량은 어지러운 병사들 사이에서 끔찍한 꼴로 해를 입었고 북문 벽에 시체가 던져져 머리카락과 코와 귀가 남김없이 부서졌다고 한다.사마량을 베는 자에게는 상으로 베 사천 필을 주겠다!
그러나 가남풍은 사마량이 죽은 것과 바로 같은 달 토사구팽으로 사마위도 제거한다. "멋대로 사람을 죽인 죄"를 덮어씌워 자신은 발을 뺀 것이다. 가남풍은 사마위를 죽이며 사마량의 작위를 추후로 복위한다. 또 자신이 죽인 사마량에게 뻔뻔하게 베와 비단, 조복과 돈 삼백만 전을 내리고 후하게 장례를 치렀다.
사마량의 자손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강남으로 도망을 가는데, 그 떄문에 영가의 난 때 서진 황족들이 거의 도륙당할 떄 화를 면하여, 이후에도 남조 왕조들에 출사하였다. 사실상 사마의의 자손들 중 살아남은 건 그들의 자손 뿐이다.
3. 평가
종실의 웃어른이자 세조 무황제의 고명대신이었고 재능도 나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맑고 재능과 용기가 있다고 평가 받았으며,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남에게 차마 나쁜 일을 하지 못했다. 문관으로서도 재능이 있었고 무관으로서도 공을 세우는 편이었으며, 여남왕으로도 임지에서도 백성들에게 민심을 샀고 명망이 있었다. 좋은 어른이었고 좋은 대신이었다. 혜제 때쯤 가면 제대로 황실의 원로 노릇을 할 만한 사마의의 아들 중 사마사 사마소 바로 밑의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고, 혜제 때까지 살아남은 사마의의 아들 넷 중에서는 사마염이 믿고 맏기기에 제일 괜찮은 능력치와 덕망이 있었다.[7]
그러나 사마량은 사마염이 황제일 때는 사치와 문란을 말리지 못했고, 양준 같은 간신 권신이 날뛰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큰일이 터질 때마다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냥 본인이 숙이는 것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했다. 이런 우유부단한 성미는 많은 상황에서 본인의 선의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왔다. 사마량이 죽기 직전 마지막 싸움을 거부한 이유도 "나에게는 두 마음이 없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겠느냐"였다. 사마량은 심지어 순진하게도 정말 그런 조서가 내렸냐며 사마위 측 장수에게 조서를 좀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팔왕의 난에서 그의 행적을 간추리면 '''나서야 할 때 나서지 않고 몸을 사리다가 몸을 해치고 난을 막지 못하였다'''.[8] 그리고 '''난도 안 일으켰는데 팔왕에 든다'''.[9]
또한 위의 행적으로 보아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에다드 스타크와도 유사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청의 엑소시스트의 츠바키 카오루로 나온다.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에서 플레이 가능 군주로 등장한다. 토탈 워: 삼국/사마량 참고.
5. 둘러보기
[1] 고조할아버지랑 동명이인이다.[2] 이름이 '''제갈량'''의 이름과 같은 한자이다. 일각에서는 비록 적대하는 나라의 인물이었지만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일말의 경의이나 외경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이유이다.[3] 4남으로 본다는 말이 있는데, 사마량이 사마주의 형이면 3남일 수밖에 없다.[4] 중앙 및 지방 정무를 다루는 곳으로 핵심 관료들이 배치되었다.[5] 진조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기밀과 황제의 조령을 다루었고 실제 가진 젊은 최측근들이 여길 갔다.[6] 물론 양준은 원래 황실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긴 했다.[7] 나머지 셋은 평원왕 사마간, 양왕 사마융, 조왕 사마륜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사마간은 사람은 괜찮은데 인격의 차원이 아닌 '''의학적인 차원에서''' 정신이 가끔 오락가락 할 때가 있는 데다 사바세계에 정을 못 붙이는 스타일의 인물이었고, 사마융, 사마륜은 인격이나 능력이나 정신이 나갈 때의 사마간과 비교해도 사마간에게 커다란 실례일 정도의 찐찌버거들이라 도무지 뭘 믿고 맡길 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당장 저 두 놈이 학도원과 제만년의 난때 한 짓거리를 보면 뭐.... 사마륜은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 대형 사고를 더 쳤다.[8] 이런 면에서는 사마위에게 같이 죽은 위관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위관은 사람이 좀 계산기를 심하게 두드리다 보니 몸을 사린 면이 있다면 사마량의 경우는 사람이 좀 착해서 그런 면이 있었다고 해야....[9] 다만 회제 사마치를 사마량 대신 팔왕에 추가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