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제
1. 王弟
임금의 아우를 뜻하는 말.
2. 서진의 인물
王濟
생몰년도 미상
왕혼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종염이고, 여동생은 왕영숙이다. 사마염의 딸 상산공주와 결혼하면서 사마염의 사위이기도 하다. 자는 무자(武子).
태원 진양 사람으로 역, 장자, 노자 등에 밝으면서 청언을 잘했으며, 담론을 좋아하면서 청담에 능했고 화교, 배외 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처음에는 20세 때 중서랑으로 벼슬을 시작해 사마염의 딸인 상산공주와 결혼했다가 모친상으로 관직을 떠났으며, 효기장군, 시중 등을 역임하고 공순, 왕순, 양제 등과 동렬에 있게 되어 시대의 유망주라고 했으며, 사마염는 순순제제(恂恂済済)가 있다고 해서 자신은 안심이라고 농담을 했다.
무제를 알현할 때마다 왕제는 인물이나 나라의 득실을 건의했고 왕제의 말투는 깨끗하고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무제는 왕제를 총애했고 사람들은 왕제의 승진을 황제의 친척이 아니라 그가 재능이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왕제는 겉으로는 고아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남의 재주를 시기하거나 가혹하게 대해서 욕하는 것을 좋아해 친구가 적었으며, 아버지 왕혼과 함께 행동해서 오나라 정벌 때의 일로 왕준을 모함했기에 사람들은 왕제를 비판했다.
손호가 무제와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왕제는 손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오나라를 다스릴 때 사람의 얼굴 가족을 벗기고 다리를 잘랐다고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물었는데, 손호는 신하가 군주에게 예를 잃은 경우에 그 자에게는 즉시 그 형벌을 내렸다고 대답했으며, 이 때 바둑판을 놓았던 상 밑으로 왕제의 양다리가 무제가 앉아있는 부근까지 뻗어있었고 왕제는 손호의 이야기를 들은 즉시 양다리를 끌어당겼다.
왕제는 석숭, 왕개, 양수처럼 엄청난 부자라 이에 대한 일화가 많은데, 왕제가 시중으로 있을 때 육기와 육운이 오자 양의 젖으로 만든 양락을 가리키면서 오나라의 음식 중에서는 어떤 것이 맞설 만 하냐고 묻자 천리호의 순채국과 말하의 콩자반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 낙양은 땅값이 대단히 비쌌고 말을 특별히 좋아해 땅을 사서 말사육장을 만들자 돈을 깔아놓은 것 같다고 해 금마장이라고 했으며, 어느날에는 말을 타고 가던 도중에 길을 가로막는 진흙이 있으면서 또 그 앞에는 강이 있었다. 왕제는 말이 진흙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싫어해 끝내 강을 건너지 못했으며, 두예는 그가 말의 성질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말에 도가 튼 사람이라고 했다.
사마염이 왕개의 집에 오자 주연을 베풀어 상에 올려진 여러 음식 중 특히 돼지고기가 맛이 있어 사마염이 요리하는 것에 무슨 비결이 있는지 묻자 그 돼지고기는 '''사람의 젖'''으로 키웠다고 대답했고, 사마염은 불쾌해서 식사를 끝내지도 않고 일어났다. 이 일화는 문헌에 따라 왕개의 일화로 나오기도 한다.[1]
279년에 유연에게 동남의 일을 맡겨야 한다고 했지만 양요, 공순 등이 반대했으며, 282년에 사마유를 봉지인 산동으로 돌려보내라 청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처인 상산공주와 진덕의 처인 장광공주를 시켜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사마유를 머물게 해달라고 했지만 쫓겨나서 국자좨주가 되었다. 285년에는 시중이 되어 아버지 왕혼이 주관해 처리한 일이 마땅하지 않자 법대로 밝혀서 왕혼을 얽어매었으며, 사촌형 왕우가 아버지가 한 일 조차 용납하지 못할 만큼 각박하다고 헐뜯자 사마염이 소원하게 대했다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면직되었다.
사마염이 자신을 불러 나무라고 하자 척포, 두속이라는 가요를 얘기해서 사마염이 동생 사마유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비유했는데, 친한 사람을 아버지에 비유해 친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해 이러한 일로 폐하를 부끄럽게 할 뿐이라고 해 사마염은 잠자코 있었다고 한다. 태복에 임명되고 46세에 죽었고 사후에는 표기장군에 추증되었으며, 처음에 왕제는 상산공주를 애지중지했고 상산공주가 두 눈을 실명하고 질투가 심하자 왕제는 아이를 만들지 않았다.
그의 저서로는 의(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