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전(가전체)
1. 개요
고려 무신정권기 임춘이 쓴 가전체 문학 작품. 국순전과 함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가전체 작품이다. 돈을 의인화시켜 중상주의를 비판했다.
돈(엽전)을 의인화한 '공방'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공방'을 부정적인 인물로 내세워[2] 사리사욕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다 결국 탄핵되어 실각 당하는 공방의 모습을 통해 재물만을 탐하는 세상의 세태에 대해 비판하는 태도를 우의적으로 드러낸다.
2. 줄거리
수양산에 은거하던 공방(孔方)은 황제(黃帝)때 조정에 채용된다. 성질이 굳세서 처음에는 쓰이지 못했으나 관상쟁이의 "때를 긁어내고 빛을 낸다면 본바탕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공방은 정계에 진출한 뒤 자기 이익만을 챙기고 백성들이 상업에 빠지게 한다.[3] 오왕(吳王) 비(濞)[4] 에게 붙어 정경유착을 하고 백성들을 도박에 빠지게 하는 등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공우[5] 의 상소로 공방은 조정에서 쫓겨나 재야에서 사람을 사귀었다. 후에 당나라에서 공방을 찾았지만 이미 죽었고, 공방의 무리들을 불러 사용한다. 남송 때 공방의 무리들은 정직한 사람들을 모함하는 등 다시 혼란이 찾아온다. 이를 기록한 사관(사신史臣)은 공우의 말을 듣고 공방의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고 억제하기만 해 후세에 폐단을 남긴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자는 미덥지 못하다고 평했다.
3. 내용에 관한 사실들
임춘의 가전체 작품은 다른 작가의 작품보다 역사적 사실을 많이 포함한다. 다음은 고증에 맞는 부분들이다.
천(泉)은 왕망이 주조한 동전으로 오나라에서도 쓰였다.
유비는 실제로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구리 광산 개발로 동전을 주조해 풍족을 누렸다. 그 정도가 대단해서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거두지 않았을 정도[6]당시 오왕 비가 교만하고 분수에 넘는 짓을 잘해 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 방은 여기에 붙어서 많은 이익을 보았다.
한무제는 잦은 토목공사와 대외 원정으로 나라의 경제를 폭망으로 만들었다. 무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소금(鹽)과 철(鐵)을 나라에서 잔뜩 사들이는 방법을 사용했고, 많은 백성들은 무제를 원망했다. 엽전인 공방(孔方)은 다른 이름으로 공방형(孔方兄)이라고도 불렀다.무제 때에는 경제가 극심하게 어려워 국고가 온통 바닥이 났다. ... 그(공방)의 무리인 염철승(鹽鐵承) 근(僅)과 함께 조정에 있게 했다. 이 때 근은 방에게 항상 형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넷 다 실존인물. 노포는 '전신론'이라는 글을 써 돈을 비판했다.진나라에 화교(和嶠)란 사람이 ... 공방과 사귀어 수만 냥의 재산을 모았다. 이를 본 노포(魯褒)는 글을 써서 화교를 비난하고 ... 화교의 무리 중에는 오직 완적만이 성품이 밝아 ... 왕이보는 한 번도 입으로 방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유안은 당나라의 정치가로 실존인물이다. 개원과 천보는 당현종때의 연호.
신종조 때에는 왕안석이 ... 여혜경도 불러 ... 청묘법을 처음 시행했는데, 그 폐단으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이에 소식이 그들을 혹독하게 배척했으나 ... 자신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 사마광이 정승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그 법을 폐지 ... 소식을 천거하여 높은 자리에 불러다 썼다. 이로부터 방의 무리는 차츰 세력이 꺾이더니 ...청묘법이란 왕안석이 시행하려는 개혁의 하나였다. 청묘법은 봄에 관청에서 돈을 빌려주면 추수 후에 이자와 함께 갚게 하던 구휼책으로 서민층과 농민, 중소상인들에게는 유리한 정책이었다. 여기에서 작가인 임춘이 어떤 지위의 사람인지를 재확인할 수 있다. "폐단으로 나라가 시끌시끌했다"는 것은 왕안석의 개혁을 부정적인 시선에서 보는 것으로 작가는 당시 송나라의 기득권 세력의 의견에 동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마광이 왕안석의 개혁을 폐지한 것은 '돈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귀족들의 기득권을 건드린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 수 있다.[8]
4. 기타
이 소설은 고려 원간섭기에 쓰였다. 사실 원나라도 '교초'라는 화폐를 사용한다. 후반부의 공방의 세력이 꺾였다는 서술과는 다르게 화폐는 계속 대를 이어나가 현대 화폐 경제까지 도달했다.
[1] 가전의 대상인 공방은 황제 이전부터 서진까지 산 것으로 추측된다. 상나라부터 나이를 센다고 해도 2000살 이상을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2] '겉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방의 성질이 욕심 많고 더러워 염치가 없었는데' 등의 문장으로 공방을 겉과 속이 다르고 염치없는 인물로 표현한다.[3] 사농공상이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 유교에서는 상공업따위보다 농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4] 오왕 비(妃), 즉 오왕의 왕비라는 판본도 있는데, 가전체의 특징이 현실의 사건을 반영한다는 것이고, 작품의 배경상으로도 오왕 유비가 맞다.[5] 실존인물, 한나라 원제#s-2.1때의 인물로 청렴하고 정직했다.[6] 단 한나라때는 토지서, 즉 전조의 비중보다는 인두세의 비중이 더 높았다.[7] 뒤에 나오는 인물들은 남송이 아닌 북송때의 인물들이다.[8] 다만 청묘법이 폐단이 많은건 사실이었다. 청묘법의 취지는 분명 좋았지만 환곡처럼 비슷하게 흘러갔으며 이자율마저도 민간 사금융보다도 높아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오죽하면 청묘법이 시범 시행된 하북지방에서는 백성들이 청묘법에 의한 피해를 견디지 못한 채 당시 존경받던 명신, 한기를 찾아가 청묘법 때문에 못살겠으니 제발 없애달라고 할 지경이었고 한기도 이에 따라 청묘법의 폐지를 주장해 왕안석을 신뢰해 신법을 추진했던 송 신종도 청묘법을 폐지했다. 심지어 이 청묘법은 당시 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가 청묘법 때문에 왕안석과 견해가 달라졌을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