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
還鄕女
1. 개요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던 단어.''' 병자호란 이후 당대에 환향녀라는 단어가 사용된 '''증거는 전혀 없다.''' 화냥년이라는 단어에 맞춰서 뒤에 억지로 가져다 붙여 만든 단어인게 분명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된 단어인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아예 사용되지 않고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에 만들어진 단어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당대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돈을 주고 데려온다는 뜻으로 속환(贖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속환이라는 개념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춘원 이광수가 1948년에 쓴 글인 나의 고백[1] 에 홍제원에서 목욕한다는 전설에 대해 쓰고 있지만 환향녀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만약 이광수가 환향녀가 화냥년의 어원이라는 이야기를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다면 이 글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에 환향녀라는 단어는 이광수가 저 글을 쓸 시점에도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화냥년의 어원 중 하나로 추측되는 설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폐기되었다. 화냥년의 어원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해당 항목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호로자식이란 말이 있다. 어원에 대한 여러가지 설 중 하나가 병자호란때 끌려간 여인들이 강간당해 낳은 사생아를 말한다지만 역시 사실이 아니다. 호로(胡虜)는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니 호로자식은 그냥 오랑캐에 빗대어 욕하는 것일 뿐이다.
일단 잘못된 어원이긴 하나 이 문서에선 '청에게 끌려갔다 속환되어 돌아온 조선 여성들'에 대한 서술을 한다.
2. 역사적 배경
전근대 사회에서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전쟁 포로는 노예로 간주되어 일단 포획자의 소유물이 되었다. 이는 만주족뿐만 아니라 서양-중동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주족은 생산가능한 인구가 매우 적었고 더구나 명나라와 전쟁중이었던 만주족 남성은 전원 군인이었으므로, 포로로 잡은 한족이나 조선인들을 붙잡아 자국의 노동력으로 이용했는데, 청은 병력이 매우 부족했기에 심지어는 포로들을 청군에 편입시키는 일도 매우 흔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노동력 착취를 당할 뿐만 아니라, 남주인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노예는 물건취급을 받았으므로, 몸값을 내면 양도의 개념으로 노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경로로 만주에서 노예로 살던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문제는 남성들은 환영을 받았으나 여성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여인들은 몇 년의 수치 끝에 간신히 고국에 돌아오는 데 성공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라는 모욕 뿐이었다.
3. 조선사회의 반응
잇따른 국란으로 다같이 피폐해져 가는 마당에 서로 보듬어 안을 생각은 없고 오히려 이러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오죽하면 인조와 상당수의 양반들조차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깠을 정도다. 일부 야사로는 청군이 여자들을 끌고 갈때는 그래도 연약하다고 말을 내주기도 하고 그걸 남자 조선포로들이 끌게 했는데 남자 포로들이 지금 오랑캐들에게 잡혀가는데 '정절을 지켜라!'라고 여자들을 말에서 끌어내려 죽이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다.
다만 당시의 조선은 국민들을 지켜줄 생각도 않으면서 도망쳐온 사람들을 멸시하기만 하는 나쁜 집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조선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전통사회, 유교사회를 찬양하는 시각과 비하하는 시각의 양극단의 주장이 많아서,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주의를 요한다. 임진왜란 이후 인구가 급감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굶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멍청한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던 조선 정부는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 꽤 노력했고, 안되면 국가 재정으로 포로의 몸값을 지불해서 데려오기도 했다. 도망쳐 온 사람들도 겉으로만 송환하겠다고 했을 뿐 실제로는 숨겨주는 일이 흔했다. 또한 여인들이 홍제원의 물에 목욕을 하면 깨끗해진 것으로 간주하고, 난리에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하거나 여성을 내치는 것을 금했다. 즉 해볼 건 다 해봤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언일 뿐, 끌려갔다는 이유 대신에 품행이 좋지 못하다는 등의 다른 핑계를 들어 내칠 수도 있었다. 다만 조선법에 삼불거라고 해서 의절이 아닌 한 이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첫째, 시부모를 위해 삼년상을 치른 경우. 둘째, 혼인 당시 가난하고 천한 지위에 있었으나 후에 부귀를 얻은 경우. 셋째, 이혼한 뒤에 돌아갈 만한 친정이 없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구실이야 찾으면 되는 것이므로 어떻게든 집요하게 내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홍제원의 물에 목욕을 하면 깨끗해진 걸로 간주한다고 해도 '''누가 인정하겠나.''' 당장에 당시 영의정조차 며느리가 정조 잃었다면서 이혼을 허가해달라고 징징거렸을 정도였다. 또한 반대로 사위가 자신의 딸을 버리고 새장가를 들려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중기인 이때까지만 해도 사대부와 달리 평민들은 이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이혼한 여자도 꽤 많았다. 조선시대에 특히 과부들이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이 집단거주하는 동네나 상부상조하는 모임도 많았다. 그러므로 정신적 고통이야 당연히 심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의외로 이들이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는 고질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사서를 보면 아내가 몰래 염색 같은 수공업이나 임노동,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것을 발견하고 불같이 노해 이를 나무라는 관리를 청렴하고 안분자족함을 실천한다며 칭송하고, 반대로 누구누구 안사람은 부업한다고 까는 경우가 왕왕 보이는데, 관리들의 안사람들이 쉽게 경제활동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바로 만성적 노동력 부족이라는 저간의 사정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신풍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전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예관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4. 조선시대 속환해 온 여인들에 대한 언급
이렇게 속환해온 여인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과 박해에 그녀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깨어있던 관료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자가 최명길이었다. 의외로, 전쟁의 원흉 중 하나이자 암군으로 평가받는 인조도 최명길의 주장에 매우 동감하며 부녀자들을 내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연이은 전쟁의 패배로 인해 정말이지 병신 인증 하나는 제대로 했던 그의 말을 신하들이 제대로 들을 턱이 없었다.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 사족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이겸의 딸에 관한 일은 별도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 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에 관사에 있을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 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환되었더라면 반드시 자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한이겸이 상언하여 진달한 것도 또한 어찌 특별히 원통한 정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는 합하는 자가 없었다.'''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中
헌데 이 역시도 당시 사대부들이 얼마나 머리가 굳은 주제에 철면피였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조가 패전의 중요한 원흉임은 분명하지만, 그 인조에 동조하며 척화론과 재조지은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전쟁 수행과 뒷처리에 있어서 무능만 보여준 대다수 조선의 사대부들도 할 말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 역시도 인조의 공범이자 패전의 책임자였다.
참고로 이런 최명길의 말에 대한 사관의 평은 이렇다.
역사를 기록하며 공정한 기록물을 남겨야할 책임이 있었던 사관도 당대의 지배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나마 선조 때는 상황이 나아서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여자들 문제로 잡음이 덜했고 이원익 등의 중신들이 이혼 문제에 대해 강하게 극딜을 하면서 문제가 없었지만 이 시기는...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中
그나마 여성들의 몸값을 주고 조선으로 데려오는 작업 자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후대에는 최명길을 비판하는 시각이 주류를 차지했는데, 이는 성리학의 교조화가 이뤄졌다는 것이 대중적인 시각이나 좀더 연구하고 논의해볼만한 문제이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저렇게 이혼을 하든 소박을 놓든 저 여인들은 모두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의 돈을 주고 데려온 여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는 저렇게 가족을 속환해오기 위한 재물 마련을 위해 고심했던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2]
5. 기타
2008년 리메이크된 전설의 고향 최종부에서 환향녀에 대해 다뤘는데 고향의 박대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환향녀들이 원귀가 되어 남자들을 홀려 죽이고 제삿나무에 교수해놓는데 자신의 처였던 환향녀를 구하기 위해[3] 저 세상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지만 결국 죽어서 만나지 못한 채 서로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성불하는 결말로 일단 막을 내리지만 전부 수습된 뒤에도 여행객을 다른 환향녀가 홀리는 모습이 나오면서 찝찝하게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