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황만영은 1875년 6월 20일 강원도 평해군 원북면 상사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상사동마을)에서 황수(黃洙)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숙부 황원(黃洹)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줄곧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어 팔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평해군에 주둔하고 있던 성익현 의진에 군자금 8백 냥을 지원하면서 의병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가 창립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고향인 원북면 상사동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경술국치 후인 1912년 3월 간도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 등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4] 에 설립된 신흥학교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이듬해인 1913년에는 연해주 연추현(煙秋縣) 안산동(安山洞)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에 참가하였던 그는 1919년 9월부터 10월까지 2달여간 주진수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자금 3백만불 차관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1924년 부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1925년 정의부(正義府) 독판 이상룡이 상해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吉林)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왔으며, 1927년 신간회가 성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1939년 4월 25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